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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석(1921)

노무현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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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오석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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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석
權五石[1]으로 등재되어 있다.][2]
출생 1921년 12월 21일[3]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4]
사망 1971년 1월 8일[5] (향년 49세)
경상남도
학력 밀양공립농잠학교 (졸업)
경력 경남 창원군 로동당 부위원장
반동 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사원
본관 안동 권씨[6]
가족 아버지 권영찬, 어머니 허달이, 여동생
배우자 박덕남[7]
장남 권기문[8], 장녀 권창좌[9]
차녀 권양숙, 사위 노무현
외손자 노건호, 외손자며느리 배정민
진외증손녀 노서은, 노영진, 진외증손자 노하진
3녀 권진애[10]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공산주의자, 비전향 장기수이자 노무현의 장인. 본관은 안동(安東).

2. 생애

1921년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서 아버지 권영찬(權寧贊, 1900 ~ 1971. 6. 1)과 어머니 김해 허씨(1901 ~ 1964. 11. 1) 허달이#[11][12] 사이에서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밀양공립농잠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에 창원군 진전면[13] 서기로 근무한 바 있다.

8.15 광복남조선로동당에 가입했다. 막걸리의 도수를 높이려고 메탄올을 넣어 친구와 마시다가 친구는 사망했으며 본인은 실명하였다. 6.25 전쟁 시기에는 경남 창원군 로동당 부위원장, 반동 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사원을 하였는데 이때 양민학살에 가담하여 적어도 11명의 무고한 양민을 죽이는 데 가담하였다. 당시 권오석은 반동분자, 즉 즉결처분할 대상을 골라내는 임무를 맡았는데 눈이 먼 권오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을 모아서 손을 만져 보고 처형 대상을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살 현장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신동아 보도 기사

이로 인해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폐결핵 등 질병이 도져 1956년 집행정지가 내려져 5년 동안 풀려났지만 1961년 다시 수감되어 10년 동안 마산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71년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사망할 때까지 전향하지 않았으므로 비전향 장기수다.

그의 시신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고성터널 근처에 안장되었으며 참여정부 시절에 확장 묘역이 조성되고 컨테이너 초소가 설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피해자 유가족들의 항의가 있었다. 가족으로 배우자 밀양 박씨 박희진(朴熙進)의 딸 박덕남(2017년 2월 사망)과의 사이에서 딸 권창좌, 권양숙, 권진애, 아들 권기문을 두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장인어른이 되는 사람이기도 해서 2002년 대선 새천년민주당 인천 지역 경선에서 이인제 측에게 빨갱이의 사위라는 공격을 받았지만 당시 노무현은 연설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고 대답하면서[14] 오히려 좋은 이미지가 확대되고 동정론이 나오는 등 제대로 반격에 성공하였고 결국 경선-본선에서도 승리했다.[15] 사실 위의 생몰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권오석은 노무현과 권양숙이 결혼하기 전에 이미 사망했으므로 노무현 쪽에선 억울한 면이 없잖아 있는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장인 때문에 판사임명이 안될까봐 집안에서 반대했는데도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다.


[1] 안동권씨대동세보 16권 723쪽에는 權[2] 새서울고속 공동대표와는 동명이인이다.[3] 안동권씨대동세보 16권 723쪽에는 1922년생이라고 기재되어 있다.[4]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권영대·권영조·권오규·권태용과 노무현 대통령의 영부인인 권양숙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5] 음력 1970년 12월 12일.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권오석 족보2.png
[6] 복야공파 응경(應慶)계 35세 오(五) 항렬.(족보)[7] 朴德南. 1920년 ~ 2017년 2월 24일(향년 97세). 밀양 박씨 박희진(朴熙進)의 딸이다.[8] 權奇文. 1954년 11월 13일 ~ ([age(1954-11-13)]세)[9] 權昌左. 1945년 5월 13일 ~ ([age(1945-05-13)]세)[10] 權珍愛. 1951년 9월 11일 ~ ([age(1951-09-11)]세)[11] 허순구(許錞九)의 딸이다.[12]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권영찬 족보.png
[13] 마산시 합포구 진전면을 거쳐 현재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14] 정확히는 다음과 같다. "제 장인은 좌익 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 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겁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서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15] 노무현의 인천 경선 연설은 지금까지도 노무현의 레전드 연설로 장안에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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