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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4 02:30:46

권영대(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권영진(權寧震)
성뢰(聖雷)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85년 8월 26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2]
사망 1946년 7월 21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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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영대는 1885년 8월 16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 아버지 권승용(權升容)[3]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응구(金應九)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변상태(卞相泰)·권태용·변상섭(卞相攝) 등 10명의 동지와 함께 서울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창원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후 그들은 거사일을 진전면 오서리 장날인 3월 28일로 약정하고, 이를 위해 태극기를 만들고 선전격문을 목판에 새겨 찍어 내었고 독립선언서 1000매도 작성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오후 1시경 많은 장꾼들이 모여들자, 권영대는 장터 복판에 만들어 놓은 임시단(臨時壇)에 올라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때 장터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동지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장보러 나온 주민 600여 명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그는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변상태, 권상용 등과 함께 은신하다가 4월 3일에 진전면, 진북면, 진동면 등의 연합 시위를 단행했다.

그는 고현 장날의 의거에서 재기를 기도하고 종적을 감춘 동지들을 비롯하여 비밀리에 새로운 동지와 민주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만들어 농민에게 배부하는 등 미리부터 거사 준비를 해왔으므로 거사 당일 회집장소인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는 오전 9시도 되기 전에 이미 수천명이 모여들었다. 이곳에는 큰 태극기가 세워졌고 변상섭의 선창과 함께 독립만세의 함성은 메아리쳐갔고 우선 고현 장날의 의거에서 검거된 주동 동지들이 잡혀있는 진동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후 체포된 그는 재판관할권 문제로 오랜 구금기간을 거친 끝에 1921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창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6년 7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권영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복야공파 응경(應慶)계 34세 영(寧) 항렬.[2]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3] 초명 권정형(權正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