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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0:31:17

하위지

死六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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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충렬공(忠烈公)
하위지
河緯地
출생 1412년
조선 경상도 선산군
사망 1456년 (향년 44세)
조선 한성부
묘소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고방실마을
시호 충렬(忠烈)
본관 진주 하씨[1]
천장(天章) · 중장(仲章)
단계(丹溪) · 적촌(赤村)
부모 부친 - 하담(河澹, ? ~ 1456)
모친 - 유면(兪勉)의 딸
형제자매 형 -하강지(河綱地, ? ~ 1456),
남동생 - 하기지(河紀地, ? ~ 1456)
하소지(河紹地, ? ~ 1456)
부인 귀금(貴今)
자녀 슬하 2남 1녀
장남 - 하호(河琥, ? ~ 1456)
차남 - 하박(河珀, ? ~ 1456)
장녀 - 하목금(河木今)
양자 - 하원(河源)[2]

1. 개요2. 생애3. 가족4. 기타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육신 중의 한 사람.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2. 생애

하위지는 하윤(河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하지백(河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하담(河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경상도 선산군에서 태어난 하위지는 어릴 적부터 형 하강지(河綱地)와 함께 남들이 두 형제의 얼굴을 모를 정도로 공부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1435년 생원시 합격 후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가게 된다. 정창손, 최만리와 함께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을 비판하다가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 집현전에서는 '오례의주'의 검토 작업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하강지가 모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 문종 즉위 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고 이후 대사간이 되었다가 문종이 사망하자 일시적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단종 즉위 후 집현전으로 복귀하여 '역대병요' 등 병서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수양대군이 이 작업에 참여한 집현전 학사들의 품계를 올리려고 하자 올릴 이유가 없고,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할 이유도 없다면서 반대했다. 이후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했다가 회복된 뒤 다시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했다.

1454년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이후 육조직계제에 강하게 반발하다가 끌어내라는 세조의 명에 의해 상투가 잡혀 의금부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단종복위운동 때 참여하여 국문을 받고 거열형을 당하였다. 『육신전』에 따르면 국문을 가하면서 관련 사항들을 세조가 취조하자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반역죄라면 그 죄가 응당 죽음일 것인데 네놈이 물어볼 것이 뭐가 있다고 묻는 것이냐!"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3. 가족

외조부인 유면, 아버지인 하담, 형인 하강지와 동생 하기지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였으며 특히 본인은 장원 급제하여 마을 이름이 장원방이 되기도 했다. 막내 동생인 하소지 또한 생원시까지는 합격했다. 그러나 형제 모두 단종 복위 운동에 휘말려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아들인 하호, 하박도 함께 참형을 당하였고 아내 귀금과 딸 목금 모두 지병조사 권언(權躽)의 노비가 되었다. 하소지의 아들인 하원은 미성년자로 살아남아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되어 훗날 무관직에 오른다.

4. 기타

하위지의 본관이 단계(丹溪)라는 주장이 있다. 현재 하위지의 조상이 진주에서 분파했음이 밝혀져 있다. 하위지의 로 여겨지는 단계(丹溪)과 적촌(赤村)이 둘 다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을 가리키는 옛 지명인 데다가,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하위지의 본향에 대해 박팽년의 후손 박해철(朴海哲)이 하위지의 본향이 단계(丹溪)라고 주장했으며, 그 논거는 다음과 같다.

*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이 그 조상과 함께 화를 입었기에 함께 제사를 드리는데, 하위지의 지방(紙牓)과 축문의 격식은 다만 ‘단계(丹溪) 하선생(河先生)’이라고 본관만을 썼다.

*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하위지 등 27명이 각각 관향을 썼는데 하위지는 ‘단계’라고 하였다는 사실이 명나라의 《요해편(遼海編)》과 조선의 《황화집(皇華集)》에 실려 있다.


[1] 본관이 단계(丹溪)라는 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기타를 참고하면 된다.[2] 아명은 하귀동(河龜童)으로 하위지의 동생 하소지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