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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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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 행정구역 변천사[1]
부평도호부 군내면, 동소정면, 마장면, 서면(富平都護府 郡內面, 同所井面, 馬場面, 西面, 1413)
부평군 군내면, 동소정면, 마장면, 서면(富平郡 郡內面, 同所井面, 馬場面, 西面, 1896)
부천군 부내면(富川郡 富內面, 1914)
인천부 편입 (仁川府, 1940)
제물포시(1945년 10월 10일 ~ 27일)
인천부(1945년 10월 27일 ~ 1949년 8월 15일)
인천시 부평출장소 (1949)
인천시 북구 (北區, 1968)
인천직할시 북구(北區, 1981)
인천광역시 부평구 (富平區, 1995)[2]
1940년 이전 부평 지역[3] 행정구역 변천사
주부토군 (主夫土郡, 470)
장제군 (長堤郡, 757)
수주 (樹州, 940)
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 1150)
계양도호부 (桂陽都護府, 1215)
길주목 (吉州牧, 1308)
부평부 (富平府, 1310)
부평도호부 (1413) / 부평현(1438년~1446년, 1505년~1506년, 1698년~1708년)
인천부 부평군 (1895)
부평군 (1896)
부천군 (1914)
1940년 이후 부평 지역 행정구역 변천사
인천부(1936, 1940) 부천군 계양면
인천시 부평출장소(1949) 부천군 계양면
인천시 북구(1968) 김포군 계양면(1973)[4]
인천직할시 북구(1981) 김포군 계양면
인천직할시 서구(1988) 인천직할시 북구 김포군 계양면
(경인고속도로 이남) (경인고속도로 이북)
인천직할시 서구 인천직할시 북구(1989)
인천광역시 서구(1995) 인천광역시 부평구(1995)[5][6] 인천광역시 계양구(1995)

1. 개요2. 원삼국시대 ~ 남북국시대3. 고려4. 조선
4.1. 구한말 당시 부평군 산하 행정구역4.2. 만일 부평이 조선의 새 수도로 낙점되었다면?
5. 일제강점기6. 인천 편입 이후 역사7. 관련 문서

1. 개요

이 문서는 현재의 부평구 지역을 위주로 작성되어있지만, 과거 부평 지역이었던 계양구부천시 전 지역, 서구 일부, 서울특별시 강서구 일부, 구로구 일부까지 아울러서 서술한다. 엄밀히 부평도호부를 계승한 지방자치단체는 현존하지 않는다. 과거 부천군은 부평군을 폐지한 후 인천부의 개항장 외 잔여지역과 통합하여 신설한 행정구역이고, 부평구라는 명칭도 1995년에 붙여진 것으로 부평도호부를 온전히 계승한 행정구역은 소멸된 셈이다. 다만, '부평'이란 명칭을 계승하고 북구 자체도 옛 부평 지역을 아우르는 데다 북구의 법적 후신은 부평구이며, 구한말 경인선이 개통한 이후 부평역을 중심으로 이 일대가 줄곧 부평 지역의 중심지로 존재했기 때문에 현재의 부평구가 가장 '부평'의 정통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조선시대 및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통적인 부평의 중심지는 지금의 계양구 계산동 일대였긴 하다.[7]

2. 원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위서 동이전 기록에 삼한의 78개 소국이 등재된 내용 중 마한 지배하에 우휴모탁국이라는 소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병도부천시 오정구 고강동으로 추정한다.

부평지역은 고구려 시기 장수왕의 한강 유역 점령으로, 주부토군(主夫土郡)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 때 장제군(長堤郡)'으로 불렸다. 주부토와 장제는 고대어인 '줄보뚝'을 한자로 각각 음차 및 훈차한 것으로, '줄보뚝'은 과거 한강이 범람하여 김포·부평평야 일대가 자주 침수되자 이를 막기 위해 긴 둑을 쌓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에 불렸던 지명인 '주부토'와 '장제'는 부평구 일대를 관통하는 길의 이름(주부토로, 장제로)으로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다.

3. 고려

태조 23년(940년) 고려는 지방제도를 고쳐 경주를 대도독부로 하고 전국의 지명을 주, 부, 군, 현으로 변경함에 따라 장제군을 수주(樹州. 지금의 인천 계양구, 부평구, 경기 부천시 일대)로 승격시켰다.

수주라는 이름은 개국공신 이희목이 수소나무 우거진 수소마을(선주지동)의 호족이므로 수주로 했고 이곳에 수주읍(행정구역 읍을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ruby(邑,ruby=읍)][ruby(治,ruby=치)], 즉 요즘 말로 하면 시·군청을 두었다는 말이다. 행정구역으로서의 읍은 일제가 만들어낸 것이다.)을 두었다가 후에 교통이 편리한 배곶이(선곶, 현 계양구 오류동.)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황어향(지금의 인천 계양구와 서구(검단제외)의 각 북부), 부원향(지금의 경기 고양시 덕양구 및 서울 마포구 각 일부), 석천향(지금의 경기 파주시 교하 지역), 금포현(경기 김포시내), 동성현(경기 김포시 하성면), 분진현(경기 김포시 통진읍, 월곶면), 수안현(경기 김포시 대곶면), 소성현(지금의 인천광역시 원인천 지역 및 경기 시흥시 북부. 지금의 인천광역시의 뿌리가 되는 그 원인천(미추홀) 맞다. 그만큼 부평은 역사적으로도 인천보다 고을이었다.), 공암현(지금의 서울 강서구, 양천구 일대), 금주현 (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경기 광명시 일대. 여기에는 조선시대 한성부로 넘어간 여의도도 포함된다.), 안산군(경기 안산시, 시흥시 남부 일대) 등 아주 넓은 지역을 속군현으로 두어 관할했다. 그 중 황어향은 예 수주에 병합되었고, 공암현은 나중에 양천현으로 분리되었다. 한강 이북 지역이 포함된 이유는 당시 육운이 잘 발달하지 않아 한강이 교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의종 때 1150년, 안남(安南)도호부', 이때에 온수골(지금의 계양구 계산동)로 청사를 이전한다. 안남도호부가 전주에서 옮겨와 수도인 개경 방비의 요충지로서 위상이 더 높아졌다. 당시 부평지역을 관할하던 안남도호부는 주현으로서, 6개의 속현을 거느렸는데, 그 속현 중에 금주현(조선 시대 금천/시흥현: 현 서울 영등포 권역 + 경기 광명시 일대), 공암현(조선 시대 양천현: 현 서울 양천구, 강서구 일대) 등이 있었다. 고려 고종 때(1215년) '계양도호부(桂陽道護府)'로 불렸으며 충렬왕 34년(1308년) 때 길주(吉州)목'이 되었다. 충렬왕은 평소 수렵을 좋아해서 길주에 국영으로 매 사육장을 설치했다고 한다. 죽을 때는 길주에 장사지내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고 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충선왕 때(1310년) 부평부가 되었다. 부평이라는 이름은 현재 상위 행정구역명인 인천보다도 100년이나 더 오래되었다.[8]

고종 6년(1219) 이규보가 좌사간 지제고의 높은 벼슬에서 계양부사로 좌천되어 부임하였다. 재임 1년 2개월에 가는 곳 마다 수많은 즉흥시를 읊어 이것이 훗날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그 시문의 내용으로 그 당시 고장의 실상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부평이란 이름이 황금벌판 곡창지대라서 생겼다고 하나 이는 잘못 생각한 것으로 부평이 비옥하게 된 것은 1925년 부평수리조합이 생겨 관배수와 수해방비를 한 이후부터의 일이고 그 이전까지는 굴포천은 한강의 지류로 조수물이 역류하여 드나들어 수해상습지로, 갈대 우거진 풀이 무성한 쓸모없는 벌판이었다.
지금부터 70여년 전까지 그랬던 것을 바탕으로 이를 추리해본다면 부평이란 부(富)의 뜻은 부자 부 외에 후(厚)와 같으며 대(大)와 뜻을 같이하고 평은(平)은 평야란 뜻이므로 큰 벌판(大野)을 의미하여 지은 땅이름일 것으로 본다.

'주부토', '장제', '안남', '길주' 같은 명칭은 부평에서 갈라진 부평구, 계양구, 부천시에 도로명과 학교명 등으로 남아 있다. 주부토로, 장제로, 인천안남중학교, 인천길주초등학교가 대표적 예.

계양구 선주지동 → 오류동 → 계산동 → 부평구 부평동 순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 지금은 거의 농촌인 선주지동, 오류동은 과거에는 아주 큰 읍락이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1872%2BBupyeong-gun%2Bmap.jpg
부평부 지도

1314년(충숙왕 원년)에 양광도에 편제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경기우도에 편제되었다.

4. 조선

본래 '부평부'였으나 조선 들어서 태종 때 '부평도호부'로 불렸다. 조선 건국 당시에 수도 후보지 중 하나였으나 수도로 지정되지는 못했다. 부평에 있는 '원통이고개'의 이름 유래도 이와 관련 있다는 설이 전해진다.

세종 때 온천발견(지금의 서울 구로구 온수동 일대)을 보고 하지 않았다며 다시 부평현으로 2단계 강등시켰다가 8년 후 다시 '부평도호부'로 복구된다. 자세한 내용은 온수역 항목 참조. 그 뒤 부평 지역은 대부분 도호부에 위치해 있었으나 조선조 때 사건사고에 휘말려 3번이나 격하와 승격의 과정을 거쳤다. 첫번째는 전술한 세종대 온천사건으로 강등, 두번째는 연산군에게 직언하다가 처형된 김순손(金舜孫)이란 내시의 고향이란 이유로 강등(중종반정 이후 복구), 세번째는 숙종 시기에 장릉 방화사건이 있었는데 그 범인이 부평 사람이어서 강등. 당시 부평도호부는 현 부평초등학교 자리(계양구 계산동)의 부평도호부 청사(현재는 도호부 청사의 일부만 남아있음)를 중심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구(인천도호부 지역이었던 십정동 제외), 계양구, 서구(1995년에 인천으로 편입된 검단 일대 제외), 부천시 전역(인천도호부 지역이었던 계수동, 옥길동 제외), 서울 구로구 안양천 서쪽 지역이라는 넓은 지역을 아울렀다. 조선 시대 당시 진관체계(일종의 군사편제 체제)는 부평을 중심으로 인천(!), 금포(현재 독음으로는 김포), 통진, 금천(시흥), 안산 등을 예하로 두었다. 다시 말해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초기까지 행정구역 서열상 부평이 인천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얘기다. 즉, 경기 서부권의 전통적인 웅부(雄府, 오늘날의 '대도시'와 비슷한 의미다.)가 부평이었던 셈.

하지만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부평도호부가 부평군으로 강등되었고 인천도호부도 동시에 인천군으로 강등되었지만 관찰부(도청)가 설치되어 원래의 인천도호부 지역인 인천군(지금의 원인천, 시흥시 북부)을 비롯하여 부평군, 시흥군(지금의 서울 영등포권(안양천 동안), 경기 광명시), 금포군, 통진군, 양천군(지금의 서울 강서구, 양천구), 과천군, 안산군(지금의 안산시, 시흥시 남부) 등을 거느리는 거대한 행정구역인 인천부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1년 후인 1896년 재개편때에는 부평군으로 남은 부평과 대조적으로 인천군이 아닌 인천부로 환원되었음과 동시에 계속 부평군으로 남게 되어 개항 이후로는 인천과 부평 간의 서열 관계가 뒤집혔다. 개항 이후 인천은 읍치(邑治, 관아 소재지)를 관교동에서 제물포(현 중구청)로 옮긴 후로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하게 되어 역으로 1940년 인천부 확장으로 부평을 잡아먹게 된다. 사실 부평만 억울할 일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수원유수부도 수원군으로 강등당하고 인천부 산하에 편입되어버렸기 때문에...

파일:attachment/부평구/역사/Example.jpg

여담으로, 무학대사한양 이전에 도읍으로 삼으려 했던 곳이기도 하며, 조선 왕조 시기 부평을 방문한 왕은 정조 뿐이다.

부평도호부의 진산(鎭山)은 계양산이었다.

4.1. 구한말 당시 부평군 산하 행정구역

4.2. 만일 부평이 조선의 새 수도로 낙점되었다면?

부평은 한양(서울 종로), 무악(지금의 서울 신촌 일대로 행정구역 상으로는 한양(남경)에 속했다.), 계룡(현 계룡대 지역)과 함께 조선의 새 수도 후보지 중 하나였다.

수도로 지정된 부평은 한양(현재 서울 강북)에 비해 풍수나 치수에 문제가 있었겠지만, 근대화 이후에는 드넓은 평지를 바탕으로 보다 체계적인 도시계획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수도 부평시의 행정구역도 인천(지금의 인천 중구, 동구, 미추홀구, 남동구, 연수구, 경기 시흥시 북부),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양천구), 시흥(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관악구, 동작구 일부, 경기 광명시, 안양시 만안구 일부) 지역을 병합하는 형태로 대폭 확장하는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권의 광역자치단체는 지금의 인천, 부천, 시흥 일부, 광명, 서울 강서, 영등포 지역을 차지한 수도 서울특별시(부평부 → 경성부 → 서울특별자유시 → 서울특별시의 과정을 거쳐 '부평'이라는 명칭은 지금의 '한양'처럼 서울의 옛 이름으로 남았을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또는 부평특별시)와 한양시(지금의 서울 강북)[9]을 중심으로 한 경기북도, 수원시를 중심으로 한 경기남도로 짜여졌을 것이다.

이 경우 오리알이 돼버릴 원인천 지역은 독자적인 도시로 존속하기 보다는 행정의 편의성 확충 + 생활권 + 수도의 자족기능 확대 등의 이유로 이미 오래 전에 부평에 흡수됐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에 따라 수도가 바로 바닷가에 접했다는 점을 살려서 산업 구조 역시 해양 산업 중심으로 형성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본의 에도 지금의 도쿄처럼 칸토평야에서 바닷가로 나아가듯이 부평평야에서 제물포지역의 해안가와 서곶간척지(인천 서구일대)로 나아간 형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현실 역사에서 인천이 인천직할시로 떨어져 나갔듯이 가상의 역사에서 한양이나 수원 중에 한양직할시 혹은 수원직할시라는 식으로 둘 중 하나가 떨어져나갔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5. 일제강점기

1914년 이후 인천광역시의 행정구역은 현재의 중구, 동구 정도만 인천이었고[10] 나머지 지역은 경기도 강화군, 황해도 해주군(연평도), 황해도 장연군(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경기도 부천군으로 편성돼있다가, 1930년대 부평에 일제의 조병창인 미쓰비시 공장이 들어서면서 부평이 1940년 인천에 편입된다.

부군면 통폐합 때의 초안은 부평과 양천, 부천? 인천과 안산의 통합으로 되어있었다. 아마도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현재의 김포국제공항은 명칭이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부천(부평)국제공항? 부평이 훨씬 큰 고을이었기 때문에 양천이 부평에 흡수되는 식이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양천이 부평의 일부였던 적이 있었기도 하고... 양천과 부평 사이는 사실상 평지와 동산들이 경계를 이루고 있어 현재까지도 동일한 행정구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처럼 서울특별시 산하가 되거나 혹은 경기도 부평시 양천구 등...

1914년부터 1940년까지의 역사는 부천시/역사, 그 이후는 인천광역시/역사 참조.

한때 일제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서구(검단 제외)/부평구/계양구, 경기도 부천시(계수동, 옥길동 제외),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구로구/금천구/관악구(남현동 제외)/영등포구(대림동)/동작구(신대방동), 경기도 광명시(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소하동 북부)에 상당하는 부평, 시흥, 양천 지역을 통째로 경성부로 편입할 계획도 있었다. 이는 1962년 서울 대확장 직후에 서울시가 추가 확장을 염두에 두고 일부 경기도 지역(광명시 북부, 고양시 덕양구 일부, 과천시)을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시킨 것과 비슷한 맥락. 하지만, 이 계획은 1940년 경성부 편입 대신 인천부 2차 확장이 단행됨에 따라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파일:attachment/부평구/역사/Examdple.jpg

6. 인천 편입 이후 역사

미쓰비시 공장 입주 및 1940년 인천 편입 이후 부평의 공업지대가 됐으며 징용을 피하고자 많은 사람이 부평의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11] 이와중에 조병창을 지하화한다고 조선인을 강제징용해 인근 함봉산에 땅굴을 팠고 정신대에 안가려는 여학생도 노동을 했다. [자료1] 해방 후 조병창을 접수한 주한미군이 캠프 마켓을 세웠고, 한편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침체에 들어가게 되고 노동자들과 일부 자본가들이 부평의 공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나 미군정의 소극적인 대처는 이를 실패로 돌아가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 한국전쟁마저 터지자 부평구의 산업은 최악의 상태가 돼버린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서울 강북이 군사적으로 전방에 있는 문제 때문에 기존의 사대문안 지역을 역사적 상징으로 남겨두고 아예 수도 서울을 부평, 부천, 시흥, 영등포 일대로 이전하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이 경제적으로 빈곤국이었던 한계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게 만일 감행되었더라면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때 무산된 부평의 서울 편입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블로그글서울특별시/역사의 해당 문단을 참조할 것.

전후 미군기지의 도움으로 인구도 늘어나고 서비스업도 늘어나긴 했지만, 인천시 내에서 가장 못 사는 동네라는 타이틀은 여전했다. 다만 주한미군/부대 캠프 마켓 주둔 미8군으로 인해 클럽이 많이 생기고 미8군 오디션에 세시봉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거쳐가 한국 대중음악에 영향을 줬다. [자료1]

이를 역전해 준 것이 바로 1970년대 부평산업단지 조성, 이는 부평의 공업을 급속도로 발전시켜준다. 이후 자동차 산업이 들어서게 되면서 부평의 경제는 더 큰 폭으로 발달한다.[14] 이후 공업의 발전으로 인해 상업 역시 발전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크고 아름다운 부평역 지하상가....

공장 하나 때문에 군 단위 하나가 없어지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공장은 지금의 부평역 뒤쪽 일대와 부평공원, 대우자동차 공장용지 전부가 들어가고, 현 부평구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공장 하나가 행정구역 하나만 한 크기가 되니 그냥 합쳐버린 것.

지금의 부평2동 일대를 삼릉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수도 있는데, 미쓰비시를 한자로 쓰면 三菱이고, 독음이 삼릉이다. 미쓰비시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집중 거주하던 곳이라 삼릉이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이 공장 용지의 일부분을 미군과 한국군이 보급기지로 사용하다, 2007년 마지막 남은 군부대가 이전하면서 부평공원으로 환원되었다. 참고로 인천 도시철도 1호선동수역이 하마터면 삼릉역으로 불릴 뻔한 흑역사가 있다.

파일:attachment/부평구/역사/Examplde.jpg

1968년 부평출장소와 서곶출장소를 통합하여 북구가 되었다. 1988년 1월 구의 서부지역을 서구로 분구시킨 뒤, 1989년 김포군 계양면(현재의 계양구 계양1·2·3동 지역. 1973년 이전에는 부천군 계양면이었다가,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김포군으로 넘어왔다.[15])을 편입해왔다.
"또한 북구는 부평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조성, 발전해온 지역이며 타 지역에서도 부평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알려져 있어 지역주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옛지명을 따서 부평구로 정함."
내무부 분구 문서

부평의 이름을 되살리는 차원에서 1995년 3월 북구에서 부평구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와 동시에 경인고속도로를 경계로 북부 지역을 계양구로 분구시킨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16]

IMF 외환위기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우자동차가 부도나자 그 인근 상권이 마비되다시피한 적이 있었다. 여전히 GM 한국사업장인천광역시 세수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7. 관련 문서



[1] 십정동은 인천도호부 관할이었고 행정구역 이동이 잦아 예외.[2] 정확히 말하자면 1995년 1월 1일부터 2월 28일까지는 인천광역시 북구라는 명칭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음날인 3월 1일부로 북구를 부평구로 개칭하고, 부평구에서 계양구가 분리되었다.[3] 지금의 서구(검단 제외), 부평구, 계양구, 부천시 일대 및 서울 구로구 중 안양천 서쪽 영역에 해당.[4] 부천군 소사읍이 1973년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처치 곤란해진 계양면을 인접한 김포군으로 이관하였다.[5] 바로 위의 내용에서 보듯 경인고속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남쪽을 부평구로, 북쪽을 계양구로 분구하였다.[6] 1995년 3월 1일을 기해 북구를 부평구로 개칭하고 계양구를 분구시키는 절차가 동시에 처리되었다. 직할시라는 명칭 자체는 그 해 1월 1일을 기해 광역시로 개칭되었다.[7] 그 흔적으로 부평향교나 인천부평초등학교 등이 모두 계양구 계산동에 남아있으며, 부평리도 본래 이 일대를 가르켰다. 참고로 현재의 부평동은 본래 대정리였다.[8] 인천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13년 때인 1413년에 탄생했다. 원래 인주였던 지명에서 주(州)를 천(川)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천시민의 날로 지내는 10월 15일은 인천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생겨난 1413년 10월 15일을 기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9] 경기도 or 경기북도 한양시가 경기 북부의 중심 도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에 지금의 의정부시, 남양주시, 동두천시는 양주에서 분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10] 조선시대에는 주안, 구월, 간석 등 부평이 아닌 현 인천 남부와 시흥 북부도 인천부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 소속이 되었다.[11] 당시 부평의 공장에서 일하면 징용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평사편찬위원회의 '부평사' 참조.[자료1] 14F 취재[자료1] [14] 대표적인 회사가 현재 GM 한국사업장이다.[15] 같은 시기에 오정면도 김포군으로 넘어갔으나, 2년 후인 1975년에 부천시로 재편입되었다.[16] 공교롭게도 남구 역시 2018년 7월미추홀구로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