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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1:23

근초고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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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치의 안정3. 마한 정복 - 온조왕의 모델?4. 남방의 평정 - 신공황후의 모델?5. 고구려와의 전쟁6. 일본 규슈 진출설7. 중국 산동 진출설8. 요서경략설9. 말년의 기록

1. 개요

백제 근초고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내치의 안정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과정 한국사 교과서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전 백제는 북쪽으로 완충 지대 역할을 하던 낙랑군대방군이 314년 부로 전부 미천왕의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면서 고구려와 처음으로 국경선이 맞닿았고, 고구려의 위협이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온 중차대한 위기 상황이었다. 게다가 백제는 분서왕 때 기록을 보아 대방군과 친하여 혼인 동맹도 맺는 반면 고구려와는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고구려가 백제 북쪽을 전부 차지하게 되면서 상황이 난처해졌고 결국 두 국가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내정도 어지럽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바로 백제의 왕통이 초고왕에서 이어지는 초고왕계고이왕에서 이어지는 고이왕계 둘로 분열되어 매우 불안정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서로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이는 고이왕비류왕의 경우 기록에서 주장하는 그대로 나이를 추산하면 100살이 훌쩍 넘는 엄청난 수명을 자랑한다.
재위 기간초고왕계고이왕계
166년 ~ 214년초고왕
개루왕의 아들
214년 ~ 234년구수왕
선왕의 첫째 아들
234년사반왕
선왕의 첫째 아들
234년 ~ 286년-고이왕
개루왕의 둘째 아들.[1]
286년 ~ 298년-책계왕
선왕의 아들. 전투 중 사망
298년 ~ 304년-분서왕
선왕의 첫째 아들. 암살당함
304년 ~ 344년비류왕
구수왕의 둘째 아들.[2] 민간인
-
344년 ~ 346년-계왕
분서왕의 장자
346년 ~ 375년근초고왕
비류왕의 둘째 아들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둘째 아들(二子)'로 기록된 왕들[3]은 정변 등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왕이 되었음을 시사하며, 같은 왕계의 선대 왕의 둘째 아들로 조작하느라 수명이 비정상적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

어찌 되었든 근초고왕 바로 이전의 계왕이 고작 2년 동안 즉위하다가 왕위를 넘겨줬을 정도로, 당시 백제의 왕통이 제대로 개판이었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근초고왕 이후에는 근구수왕 - 침류왕 - (진사왕) - 아신왕 - 전지왕 - 구이신왕 - 비유왕 - 개로왕근초고왕의 직계 후손으로 선명히 가닥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개 민간인에 불과하던 선대의 비류왕이 근 40년의 기나긴 치세 동안 안정적인 선정과 반란 진압으로 기반을 튼실히 닦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근초고왕이 재위 중반에 이르기까지 근 20년 동안의 세월을 자신의 왕권과 정치적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데 치중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때 근초고왕 이하 초고왕계 부여씨 왕실의 정치적 파트너는 진씨(眞氏) 가문이었는데, 이 진씨 가문은 비류왕 때 진의(眞義)가 내신좌평이 된 이래 근초고왕 때 진정(眞淨)이 왕후의 친척으로 조정 좌평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는 진고도(眞高道)가 왕의 장인으로 내신 좌평이 되는 과정을 거쳐서, 공히 백제 최고의 외척이자 엘리트 귀족 가문이 되었다.
拜真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性狠戾不仁, 臨事苛細. 恃勢自用, 國人疾之.
진정(眞淨)을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정(淨)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였으며, 일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까다로웠다.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년(347) 1월
이처럼 근초고왕과 혼인으로 연결된 진씨 가문은 비류왕 계열의 근초고왕이 고이왕 계열의 계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을 데에도 크게 공헌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러한 진씨 가문의 독주는 곧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한 듯하고, 이후 《일본서기》 등 근초고왕의 재위 후반부 활동에는 진씨를 대신해 사씨(沙氏)와 목씨(木氏)가 대대적으로 등장하여 왕의 대외 활동에 공헌하게 된다.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대체로 이 《서기》를 역사책으로 생각하지만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자를 그대로 해석해 단순히 명령과 문서의 성문화를 뜻하는 것으로 볼 때도 있다. 역사서로 보는 쪽의 주요 연구가는 이기백이병도, 신형식 그리고 김두진이고, 그 외에 공식적인 문자 기록의 제도화(천관우)나 문자 기록의 시초(고병익) 등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역사서라는 견해가 주류고, 교과서에도 정설로 기재되고 있다.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서기》에서 처음으로 기록을 시작했다고 한다.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사 기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라 본다면 위에서 적은 것처럼 초기 왕실 계보가 부정확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3. 마한 정복 - 온조왕의 모델?

마한 정복은 근초고왕의 업적 중 가장 불분명한 부분이다.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 따라 근초고왕이 마한을 친 것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지만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불분명하다. 2000년대까지도 학계의 정설은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히 정복하여 백제가 지금의 전라남도 해안까지 진출했다는 것이었다. 문헌적 근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이병도, 노중국과 같은 한국사학계의 거장들이 그렇게 주장했기에 별다른 반론 제기도 없이 수용되었으며, 교과서에도 오랫동안 실려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활발한 고고학적 성과에 의해 기존의 설은 부정되는 편이고, 2020년대 학계의 정설은 근초고왕대의 남방 한계선은 잘해야 군산, 익산, 전주, 부안, 김제, 정읍 정도까지며[4], 전라남도 지역인 영산강 유역 세력은 직접 지배 세력으로는 넣지 못하고, 다만 그 중심 소국을 완전 타멸하여 더 이상의 성장은 못하게 억제했다는 설이다.[5][6][7][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26년
마한 정복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으며, 위에서 보듯 원문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온조왕 본기〉에 있다. 우선 사학자들의 의심하는 것은 온조왕 대의 강역 문제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13년
'패하', '웅천', '큰 바다', '주양'이라는 영역은 대개 예성강, 금강(공주), 서해, 춘천 혹은 철원으로 비정된다. 문제는 경기도~충청도 영역을 완전히 장악할 정도나 되어서야 가능한 이 영역과 달리, 《삼국지》 〈위지〉 '동이전'으로 증명되는 3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남서부는 54개의 마한 소국이 꽉 들어찬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기록이 아닌 고고학적으로도 백제가 광범위한 영역 국가를 온조왕 대에 이미 만들었다고 보기가 영 힘들다. 지명을 다른 곳에 비정해서 저 영역 해석을 다르게 해보려 해도 뚜렷한 경계가 되는 강 이름이 패하, 대하, 한수, 웅천 등 몇 개씩이나 등장하기 때문에 옮길 수 있는 위치는 한정되어 있다.

백제의 이 영역을 인정하고, 마한의 소국을 비정할 경우 배치할 곳도 마땅치 않을 뿐더러, 먼 훗날 고려 시대에 옛기록을 모아서 쓴 《삼국사기》와 다르게 3세기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작성한 중국 사서상에는 이렇게 넓은 영역을 차지한 국가가 왜 등장하지 않는지도 해명하기 힘들다. 다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기년에 의문을 가지는 학자들도 마한 정복이 이루어진 시기가 기리영 전투가 이루어진 3세기 중엽의 고이왕 대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일단 《진서》에서 3세기 후반 등장하는 '마한'은 현재로서는 백제로 보는 학설이 우세하다. 여기서 자주 오해되는 게 백제와 마한이 국가 대 국가로서 대결하면서 마한이 영토를 차례차례 잃어간다는 이상한 관념인데, 그런 일은 벌어진 바 없다. 마한이란 연맹체 안에서 본래는 그 수장국에게 영역과 세력 모두 미치지 못하는 군소 세력이었던 백제국이 갑자기 3세기 중반 경부터 부쩍부쩍 힘을 키워, 불과 반 세기도 안 되는 사이에 오늘날의 경기도 전체를 아우르는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그 시기는 다름아닌 고이왕-책계왕 때이다. 바로 그 시기에 맞춰 목지국의 쇠락이 시작하는 건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3세기 후반경 목지국을 쓰러뜨린 후부터 백제국이 마한의 새로운 수장국이 되었다는 얘긴, 적어도 그 시점까진 백제국만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했다.

바로 그랬기에 그 시점까진 백제국과 함께 목지국을 명목상 상전으로 받들던 침미다례가 서진한테는 마한 신미라는 이름으로 따로 조공사를 보냈던 것이었고, 이것을 백제국에 대한 견제 시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백제가 중국에게 '마한'이란 이름으로 조공사를 보냈던 것은 물론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목지국도 '마한'이란 이름으로 잘도 수백 년 동안 조공했었기 때문. 한편 고고학적으로 보면, 목지국으로 비정되는 천안 청당동 일대의 독자적 문화가 극적으로 크게 쇠락하는 것은 이미 3세기 후반경이며, 쇠락 자체의 시작은 3세기 중반까지로도 거슬러 올라가는 판국이다.

목지국으로 해석되는 천안 청당동 세력이 완전히 의미가 없다 싶을 정도로 해체되어 힘을 잃는 건 근초고왕이 재위하기도 전인 비류왕 재위기인 4세기 중반이므로, 근초고왕의 목지국 정복설은 적어도 현재로선 다수설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백제국의 마한 영도국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는 침미다례는 백제가 어떤 식으로든 손봐줘야 했으며, 이 과업은 근초고왕이 달성하여 그 후로는 마한 연맹의 영역 내에서 감히 백제의 영도국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은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근초고왕이 마한 영역을 정복했다는 언급도 그닥 틀린 얘기는 아니게 된다.

이는 애초에 고대 국가의 특성상 행정망과 통제 정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 왕조에 비해 극도로 느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앙 조정에 의해 강력하게 관철되고 통제되는 직접 지배가 아니었을 뿐.

이렇게 근초고왕의 목지국 정복설 자체가 의문시되는 현재 상황에선, 목지국에 처음으로 유의미한 타격을 주어 수장국으로서의 위신을 박탈한 때가 근초고왕이란 학설은 거의 완전히 설득력을 잃은 상황이다. 온조왕 때의 일로 소급된 해당 사건은 실제로는 고이왕-책계왕 당시 벌어진 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 여하튼 백제국목지국에 대해 대놓고 하극상을 시전하는 사건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대보다 상당히 후대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박순발의 《한성백제의 탄생》에 따르면 원삼국시대 유적인 하남 미사리 방형환호는 그 규모로 보아 수장층의 주거지가 일반민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마찬가지로 풍납동의 3중환호도 유적이 일부분만 확인되어 구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환호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들로 보아 하남 미사리 유적의 환호와 동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참조 가능한 상황.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들로 유추해보면, 서기 2세기 말까지는 각 소국들이 서로간에 뚜렷한 우열을 보이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백제가 서기 1세기에 마한을 타멸시키거나 복속시켰다는 주장은 아귀가 맞지 않다.

4. 남방의 평정 - 신공황후의 모델?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服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9]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진구황후 49년 3월
聖明王曰, 昔我 先祖 速古王, 貴首王之世, 安羅加羅卓淳旱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冀可恆隆.
성명왕(聖明王)이 말하였다. "옛 나의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의 치세에 안라(安羅), 가라(加羅), 탁순(卓淳) 한기(旱岐) 등에게 처음 사신을 보내 통하였다.[10] 두텁게 연결되어 친목을 다지니 (그들이) 자제(子弟)[11]가 되어 서로 융성하길 바랬다."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기록. 근초고왕의 남방 정책을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은 사실 《일본서기》에서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쓰여 있는 것으로, 특히 '5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그동안 줄곧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근래 천관우를 시작으로 이도학, 이희진, 김현구 등 한국 측 사학자의 분석에 의해 이 정벌의 주도권자를 근초고왕으로 보는 '주체교체론'이 크게 대두되어 신빙성을 얻었다. 즉 근초고왕의 업적이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바꿔치기 되었다는 것. 예를 들면 야마토보다 북쪽에 있는 침미다례가 '남만(南蠻)', 즉 남쪽의 오랑캐라고 적혀 있다.

364년, 근초고왕은 구저, 미주류, 막고 세 사람을 가야 지방의 작은 나라 탁순국에 보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여기서 탁순국 왕에게 일본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가 완곡하게 거절당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수집하여 한반도 남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가야 지방의 각 소국과 교섭을 시도하는 등 사전 정지 작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366년, 시마노 스쿠네[12]라는 야마토 왕권[13] 측 인사가 탁순국 왕과 만나 이상과 같은 백제의 움직임을 접하게 되었다. 시마는 내친김에 종자 이하이와 탁순 사람 과고 두 사람을 백제로 보냈는데, 근초고왕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며 오색 비단과 각궁 화살 및 철정 40매를 이하이에게 주었다. 또 보물 창고를 열어서 여러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367년, 이번에는 근초고왕이 보낸 구저, 미주류, 막고가 신라의 사신과 함께 야마토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서 구저가 야마토로 오는 길에 있었던 신라의 횡포를 까발리는데, 간단히 말해 신라가 구저 일행에게서 을 뜯었다는 것.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사비 신라[14]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석 달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때 구저 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서기》 진구황후 47년
당시 신라는 가야와 야마토 사이에서 교역하며 이익을 취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한반도나 중국에서 물자와 문물의 수입이 절실하던 일본 세력은 걸핏하면 신라로 쳐들어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런 마당에 신라에서 야마토로 가는 백제의 사신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귀한 물건을 가만히 놔두었을 리 만무,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안 그래도 신라에 시달리고 있던 야마토는 이 사건을 통해 제대로 플래그가 서게 되었고, 진구황후는 함께 온 신라의 사신을 책망하는 데 이어서 '다케우치노 스쿠네와 의논하고 지쿠마노 나가히코[15]를 사자로 보내라'는 신탁을 받는다.

369년, 근초고왕은 드디어 행동에 나선다. 사백, 개로가 백제 측 대표가 되어 탁순국에 이르고, 여기에 장군 목라근자·사사노궤가 군사를 이끌고 따라갔다. 《일본서기》의 과장된 표현에 따르면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더불어 가야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7개국을 모아 실질적으로 백제 중심의 패권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양직공도》에도 가야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이 있다. # 훗날 성왕은 이를 두고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 일본 측 대표로는 아라타노 와케와 가가노 와케가 참석했다고 한다.

이어서 서쪽(전라도)으로 군대를 돌려 고해진에 이르러서 남만 침미다례를 격파하고, 지금의 전북 평야 지대에 해당하는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항복을 받았다. 과거 고해진을 강진, 침미다례를 해남으로 보고 이때 백제의 세력이 전남 땅끝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유물에 따른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이후에도 전남에는 독자적인 세력이 셋 있었고 직접 지배 형태로의 전환은 나중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나아가 고사산과 벽지산에서 일본 측 대표로 온 지쿠마노 나가히코와 연이어 국교를 맹세한다.

침미다례는 흔히 《진서》 〈장화전〉의 '신미제국(新彌諸國)', 즉 20여 개국과 함께 나타난 '신미국'과 동일시되는데, 혹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의 '분신리아불례(濆臣離兒不例)'로 보기도 한다.[16] 이 지역은 3세기 기리영 전투로 인한 목지국의 쇠락 이후 독자적으로 성장해 서진에 조공한 바 있는데, 아마도 전남 중에서도 서부, 즉 황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점으로서 항로가 꺾이는 지역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교역의 이익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침미다례에 대해서는 제주도설도 존재하지만, '탐라'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별도의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설의 확장은 어려워 보인다.

침미다례의 문제는 특히 이 원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유난히 침미다례에 대해서만 '남만'이라고 하여 경멸적인 표현을 쓰고 있고 침미다례를 '도륙(屠)'했다고 해 아예 갈아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주변의 5읍이 항복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근초고왕은 막 성장하던 영산강 유역 세력을 완전히 박살내버렸고, 백제국의 수장 자격 찬탈 이후 백제의 마한 대표성을 여전히 의문시하던 세력에게 백제의 힘과 마한 계승성을 확인시켜준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자주 등장하는 오해가 침미다례 자체를 전남과 동일시하는 것인데, 이는 틀린 관념이다. 그 당시 전남에는 별도의 고고학적 세력이 세 가지 있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남 내륙 중동부, 훗날 가야에게 잠깐 포섭되기도 하는 전남 동쪽 해안 일대, 그리고 위에서 침미다례로 비정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이다. 이 중에서 영산강 유역 세력이 그나마 세력이 커서 백제국에게 대놓고 개겨보다가 근초고왕 때 참교육 당했던 거라고 보면 된다.[17]

침미다례는 이후에도 한성백제가 개로왕 피살이란 초유의 환란을 당했을 때 또 다시 독자적인 행보를 걸으려 하지만, 근초고왕 시절보다 훨씬 어려운 시절의 백제가 굳이 무력을 동원할 것 없이 회유만으로 일단락했던 것을 보면 근초고왕이 이 당시 침미다례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주고 체계적으로 관리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남방 전쟁과 대(對) 고구려 전쟁은 같은 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실성에 다소 논란이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라근자목만치의 연대 문제도 이 시기에 얽혀 있으며, 후술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일본에 백제계 문화가 전혀 침투하지 못한 것이 확인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로 기록의 연대를 2갑자 차이(이주갑인상)에서 한 갑자 더 낮춰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5. 고구려와의 전쟁

왕이 태자와 더불어 정병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쳐들어가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힘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조[18]
파일: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충돌 지역.png
치양평양성의 위치. 출처-동북아역사넷

근초고왕이 남방 경략의 위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있을 즈음인 369년 9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갑작스레 2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진군해 치양에 주둔하며 민가를 약탈해[19] 근초고왕이 태자인 부여구수를 시켜 이를 격퇴했다. 〈근구수왕 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죄를 짓고 도망간 사기라는 인물이 백제로 돌아와 '정예군은 고국원왕 근처의 군대 뿐이므로 그들만 박살내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밀고한 것을 따라 공격해 승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 부여구수는 수곡성 서북까지 진군했으나 막고해가 도가의 말을 인용해, 너무 깊게 들어왔으니 그만둘 것을 주청했고 이에 정벌을 마쳤다고 한다.(치양 전투)

369년 11월, 근초고왕이 한강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황색 깃발을 사용했는데, 황색은 중앙을 뜻해 중국에서는 황제의 색으로 사용했으니, 이는 고구려에게 승리한 백제가 황제국임을 과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원래부터 백제의 상징 색상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군이 적색(赤色) 깃발을 사용했기 때문에[20] 오행 순환 논리에 따라 백제군이 황색(黃色) 깃발을 사용했다고 한다. 오행 사상에서는 나라마다 오행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나무(木)-불(火)-흙(土)-쇠(金)-물(水)의 순서로 왕조가 교체된다고 보는데 앞서 치양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불의 속성을 의미하는 적색 깃발을 사용했기에 백제가 고구려보다 우월하다고 나타내기 위해 흙의 속성을 의미하는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다.(나용재, 2022)[21]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분쟁은 격화되어, 2년 뒤에는 재차 치고 내려오는 고구려 군대를 패수 위에서 역관광보낸 뒤 북진해 평양성을 포위하여 고구려 왕인 고국원왕전사시킨다.(평양성 전투)

이 일로 고구려백제의 관계는 훗날 신라진흥왕 대에 성장해서 고구려와 싸울 일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수백 년 동안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버렸다.[22]

진서》에 따르면 고국원왕을 죽인 이듬해인 372년에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라는 작호를 받아 평양 일대의 지배를 확인받았다. 이는 백제왕이 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한 기록이다.

6. 일본 규슈 진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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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야마토 왕권을 용병으로 써서 남방을 평정한 이후 백제에서는 구저를, 야마토에서는 지쿠마노 나가히코를 보내 양국 사이에 사신 왕래가 이어지다가 372년에 이르러서는 칠지도와 '칠자경(七子鏡)'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사기》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아직기왕인이 야마토로 건너와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다고 한다.[23]

《일본서기》에서는 자국중심주의 기록 특성상 이 당시 백제가 왜를 섬긴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24], 근대에 발견된 칠지도에 적힌 문장을 보면 반대로 백제 왕이 천황을 아랫 사람 취급하고 있다. 때문에 가상 인물인 진구황후가 근초고왕의 업적을 낚아챈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것처럼, 실제로는 《일본서기》 내용과 반대로 근초고왕이 야마토에 우위를 과시한 것 아니냐는 학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칠지도 문서 참조.

다만 백제와 왜의 관계를 떠나서, 1990년대부터 근초고왕의 남방 원정 기사 자체가 6세기의 정치 질서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서 후대에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이미 제시되었고(연민수 등), 2009년 홍성화와 2010년 조경철 등에 의해 칠지도의 연대가 근초고왕 사망 이후인 408년 아니냐는 설도 제시되는 등 모든게 추정의 영역이라 정설이라 할만한 것이 없다. 애초에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와 그 전후 기사들의 신뢰도부터가 많이 의심을 받기 때문에 더 그렇다. 즉, 규슈 진출설 역시 정설로 취급하기엔 근거가 많이 약한 가설의 영역이며, 다만 4세기 후반에 백제계 호(壺)가 출토되는 등 북부 규슈의 일부 호족과 백제가 교섭한 흔적은 있어 교류 정도로 보기도 한다.# 물론 이런 외교적 경로를 만들어낸 것 또한 사실이라면 절대 작진 않은 업적이다.

장팔현 박사는 백제의 규슈 진출설을 이렇게 보기도 했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보면, 왜국의 규슈 지역에 '이백지국(已百支國)'이란 소국이 보이는바, 아무래도 왜국에 세워진 백제 이주민 계열의 나라가 아닐까 한다. 이백지국의 ‘이(已)’는 ‘예전’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백지국이란 예전에 백지국(백제국) 출신들이 만든 나라라는 뜻이 아닐까 한다. 결론적으로 제(濟)도 지(支)로 고대에는 통하는 자였다.

그러나 고대 한국어에서 '지'(支)는 간지(干支)-한기(旱岐)가 서로 통하는 데서 알 수 있듯 'ki'로 읽혔으며, '제'(濟)와는 음이 통하는 사례가 없다. 한자의 해석에 대해서도 '이'(已)는 뜻으로,[25] '백지'(百支)는 음으로 풀이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26] 또한 이백지국은 〈위지〉 왜인전에 등장하는 여왕국 북쪽에서 사마국(斯馬國) 다음에 있는 국가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여왕국=야마타이국 자체가 규슈에 있다고 하는 설이 1970년대 이후로는 거의 퇴조하여 1980년대 이후에는 긴키 지방에 야마타이국이 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27] 그러한 입장에서 사마국(斯馬國)은 현재의 긴키 남부, 와카야마 현에 있던 시마국(志摩國)에 비정되며, 그보다 더 북쪽에 있다는 이백지국은 규슈에 있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현재로서는 저런 주장의 입론 자체가 잘못되었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에서 발굴되는 한국계 유물은 백제보단 가야 계통의 것이며, 야마토 정권의 수도가 위치한 긴키 지역에서 백제 계통의 문물은 5세기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근초고왕은 일본에 실질적으로 문물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유혈 사태로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과 일원적인 패권을 확립하고, 이로서 국제적인 외교 분쟁이 해결되어 왜에 가야의 문물이 안정적으로 유입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과거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에 기술되었던 백제의 규슈 지방 진출은 한국 사학계 일부에서 칠지도 명문과 《일본서기》의 내용을 일본의 임나일본부마냥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한 학설로, 지금도 국내외적으로 확정된 학설은 아니다. 때문에 요즘 교과서에서는 규슈 진출이 아니라 규슈와의 교류 정도로 수정되어 나오고 있다.

7. 중국 산동 진출설

근초고왕의 산둥 진출설은 근초고왕의 업적 중 가장 근거가 부족한 학설로, 20세기 한때 국정 교과서 시절에는 무려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내용이었으나, 현재는 많은 교과서에서 해당 내용이 삭제되고 있는 추세다.[28]

백제의 산둥 진출 주장은 신채호정인보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인보와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사관을 갖고 역사 연구에 임했으나, 중국 기록의 단장취의와 잘못된 확대 해석 등으로 수많은 사서에 기록된 한사군의 존재를 부정하는 등 현대에는 설득력이 없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정인보는 후술할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긍정하면서 백제가 요서에 진출하기엔 지리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에, 백제가 먼저 산동에 진출한 뒤 요서로 세력을 확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산둥 진출에 대한 근거로 먼저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 강병이 100만으로 남으로는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습니다.
《삼국사기》 46권 〈최치원 열전〉

제·노 지방은 중국의 산둥 반도 지역을 뜻한다. 유·연 지방은 요서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다'를 수식하기 위한 과장된 문식으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 한창 환빠가 기승을 부리던 때에는 저 기록만 보고 '고구려와 백제가 100만 병사를 부렸다 →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까지 나왔으나 현재에는 비웃음거리 이상이 되지 않는다.

또한 원나라 때 간행된 산둥 지방의 지리서 《제승(齊乘)》에서 "황현(黃縣)의 서남 25리 고자성(古嵫城)에 ‘백지래왕(百支萊王)’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정인보는 이에 근거하여 '백지래왕'을 '백제래왕'으로 해석했다. 고작 사당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백제가 산동 지방을 정복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서기 2년부터 자료가 수집된 《한서》 〈지리지〉에 백지래왕사(百支萊王祠)가 진작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정인보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신채호도 정인보처럼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백제가 산둥 지방에 진출했다고 적어놓았다. 판보싱(潘博星) 박사는 《남제서》의 백제 동성왕이 산동의 성양태수를 제수한 기록과 《북제서》의 중국이 백제 위덕왕을 '동청주(산동)자사'로 봉한 기록을 백제의 산동 진출 근거로 들었다.#

8. 요서경략설

근초고왕 말년에 중국 요서 지방을 점령했다는 설로, 현 국사 교과서에서도 지도상에 백제의 진출 경로 중 하나로 그리고 있지만 백제의 요서경략설이 진실인지 오류인지도 불분명하고 그 시기도 확실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중국 남조에는 요서 경략 기록이 있는데, 정작 그 요서와 붙어있는 중국 북조에는 그 기록이 없다. 따라서 백제의 영토였다는 주장부터 영토가 아니라 백제 이주민 집단 등의 영향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거나 아예 허구라는 이야기까지 여러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요서경략설 항목을 참고할 것.

김상기, 김철준 등의 역사학자들은 백제의 요서 경략을 근초고왕 말년의 일로 추측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게다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근거로 내세우는 중국의 사서 역시 남조(유송, 남제, 등) 역사서에만 나오고 정작 남북조시대에 요서, 산동 지방을 지배했던 북조(북위, 동위, 서위, 북주, 북제 등)의 사서에는 백제의 요서 경략 관련 기사가 나오지 않아 교차검증이 어려워 더더욱 알 수 없는 상황.

일각에서는 중국의 지명을 통해 백제가 대륙으로 진출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광시좡족자치구에 있는 백제허 등의 백제와 관련된 곳들이 나와 있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광시좡족자치구는 하북 지방도 아닌 남중국 지역이고 백제허는 백제와 연관없이 생겨난 지명이다. # 또한 고고학적으로 요서 지역에서 백제인들의 유적이나 고분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기에 지명만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당시 백제의 일식 관측 기록이 요서 지방에서 관측했어야 나오는 수치로 된 것도 있다는데, 사실 오차도 많아 무조건 믿기는 곤란하고, 상술했듯 신라방 비스무리한 백제 이주민 세력이 진출해서 일정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삼국사기》의 초기 일식 기록 자체가 단순히 중국 사서에서 인용한 것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 #

워낙 국내 학계에서도 논쟁이 뜨거운 설인지라 국사 교과서에서도 중립적으로 이런 설이 있다는 정도로만 서술하거나 진출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애매하게 설명해놓는 경우가 많다. 학설이 갈리는 등 애매한 것들은 시험에 출제하지 않는 역사과목시험[30] 특성상 시험에 나오지도 않고, 이 논란을 잠재울 만한 기록과 고고학 유적이 나오지 않는 이상 나오지도 않을 예정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요서경략설을 긍정할 경우에도, 환빠들을 비롯한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륙백제가 있었다는 건 아니다. 《환단고기》나 대륙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근초고왕의 백제가 당시 지구권 인류 전체를 통틀어 최강이었다는 식의 주장은 헛소리.

9. 말년의 기록

근초고왕의 말년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31] 예를 들어 고구려에 힘쓰는 사이 신라가 서서히 강성해지며 내물 마립간이 근초고왕을 말빨로 한방 먹이기도 했는데,
백제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니,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내물 마립간 본기〉 18년
이렇게 373년 신라 〈내물 마립간 본기〉의 독산성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백제의 독산성 성주가 300여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는데, 이에 근초고왕이 돌려주기를 요청했으나 내물 마립간에게 한 소리 듣곤 아무 말도 못했다. 물론 지들이 오고 싶어서 왔다는데 어쩌겠냐는 말에 근초고왕이 수긍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독산성 성주가 신라에 망명한 정확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여러 추측을 남긴다. 예를 들어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었거나[32]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문책이 두려워 제3국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보는 설 등이 있다.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375년에는 고구려에게 수곡성을 빼앗겼지만, 흉년이 들어 보복하지 못했다. 물론 이 일화는 달리 보면 근초고왕이 마냥 정복전에만 미친 군주는 아니었다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다만.

그리고 같은 해인 375년 11월 근초고왕은 승하했다.[33]


[1] 아버지 개루왕이 죽은 지 68년 뒤에 고이왕이 즉위하였고, 그 뒤로도 52년을 더 살았다. 극단적으로 고이왕이 개루왕의 유복자라고 가정해도, 기록대로라면 120살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이 아니라 방계 왕족 혹은 시조를 달리하는 전혀 다른 지파로서 초고왕계와 다투다가 왕통을 빼앗아 왔다는 시각이 유력하다.[2] 고이왕과 동일한 모순이 있다. 아버지 구수왕이 죽은 지 70년 뒤에 비류왕이 즉위하였고, 그 뒤로도 40년을 더 살았다. 비류왕이 구수왕의 유복자라 하더라도 기록대로라면 110살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에 학계에서는 비류왕이 구수왕의 차남이라는 기록은 믿지 않고 대신 초고왕계에 속하는 방계 왕족이라고 본다.출처[3] 고이왕, 비류왕, 근초고왕.[4] 《일본서기》 기록에 근초고왕 시기 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고사산-백제 고사부리성)과 김제시 성산면 (피지산-백제 피성) 일대가 백제국의 영내(영토 내부)였다고 적고 있으며, 2017년 이후 전라북도 만경강 이남 지역도 5세기 후반까지 마한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들 역시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 이후에도 백제 영토가 아니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나주 일대 소국 세력과 정읍-광주 축선의 전남 중동부 내륙 세력, 남해안 일대 세력은 각기 계통과 세력권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두고 전남 전체와 전북 일대에 마치 독자적이고 단일한 마한 세력이 백제와는 별도로 존재한 걸로 오해하는 의견이 있는데, 문헌사학은 물론이고 고고학적으로도 지지받을 수 없다. 일단 《백제삼서》에 노령산맥 이북은 백제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으로 나오기 때문이다.[5] 단, 고고학적 변화가 정치적 복속 시점보다 다소 늦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고구려만 보더라도 옥저나 한사군 지역에 대한 사서상의 복속 시점보다 실제 그 일대의 고고학적 변화 양상이 분명히 늦게 나타난다. 하지만 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옥저, 한사군 병합 시점이 왜곡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 정치체에 의한 직접 복속 시점은 마한 전범위에서 백제계 양상이 드러나는 동성왕~무령왕 대보다도 분명히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흔히 전남은 백제 멸망 직전 혹은 그 시점까지 백제의 영역이 아니었다거나 반독립 지역이었다는 인터넷발 낭설은 말그대로 궤변이다. 물론 고고학적 결과를 정치체의 변화로 보는 가장 보수적인 설에 따라도 이미 무령왕 이후 140~150년 이상 백제의 직접 지배 범위였기에 아무리 보수적으로 보려 해도 무슨 의자왕 시기까지 전남 지역의 마한 세력이 중앙 조정을 안 도와서 망했다거나 그 일대는 백제와 무관했다는 주장이 개소리인건 마찬가지이다.[6] 사실 이렇게 길게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 36년을 거쳤지만 해방되고 나서 보니 일본 문화는 말 그대로 '잔재' 정도였고, 밥 해 먹고 무덤 쓰는 생활 문화에 일본 문화가 그렇게까지 깊게 침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길어야 3년이었던 미군정 이후 미국 문화가 더 널리 퍼졌다.[7] 백제멸망의 결정타를 날린 것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한지 9일만에 웅진성의 성주 예식진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의자왕을 체포해서 나당연합군한테 갖다 바친 것이 원인이었다. 즉 전남의 마한계통 호족들이 뭔가 해보기도 전에 백제의 중앙정부는 이미 무너졌다. 거기다 백제를 멸망시킨 예식진은 형 예군의 묘지명에 의하면 조상부터 영가의 난때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백제의 웅진성으로 이주해온 중국계 이주민이라 전남의 마한호족들과는 무관한 사이였다. 그리고 동성왕과 무령왕의 왕위쟁탈전에서 무령왕편을 들었고 기존의 웅진성을 지배한 백씨 세력을 몰아내고 웅진성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었다.[8] 오히려 영산강 유역의 호족들은 일본 큐슈의 호족들하고 우호적인 관계였으며, 그 증거가 바로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전방후원분에 있다. 일본 큐슈에도 영산강 유역의 호족들의 무덤인 주구묘와 옹관고분이 발견되고있어서 두지역간의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번외로 백강전투에 왜군 4만명이 백제부흥군들을 돕기위해 참전했는데 이또한 영산강 유역의 호족들의 역할도 일정부분 있었다고 볼 수 있다.[9]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4읍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삼국지》에서 마한 54국을 열거할 때 '벽비리국 - 불미국 - 지반국 - 구소국'의 순서를 따랐음을 고려한다면 읍이 5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한편 일각에서는 고사읍(古四邑) 부분을 지명이 아닌 "옛 4개의 읍"으로 풀이하여 비리, 벽중, 포미, 지반의 4읍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에 고사주(古四州)라는 지명이 기록되었음을 고려하면 고사읍 역시 지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10] 한기는 가야에서 임금의 칭호이다. 즉 나열한 세 나라의 왕에게 사신을 보낸 것.[11] 백제가 아버지이자 형님, 가야 제국이 아들이자 아우.[12] 노 이하는 존칭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이렇게 존칭을 마구잡이로 써놓은 탓에 조금 난감한 면이 없지 않다.[13] 이 대상이 구체적으로 야마토가 확실한지는 해석의 여지가 좀 있다. 《일본서기》가 이주갑인상 등 연대 인상을 진행하면서 중간 연대의 역사가 모조리 소급당하거나 사라져, 실질적으로 3세기 중후반의 중국 조공과 366년 백제 - 일본 관계 기록 사이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왜인 침략 기사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 그러나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이 즈음 야마토가 일본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14] 경남 양산시라는 주장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 연구 중. 일단 신라 영역인 건 확실하다.[15] 백제 기록에 '직마나 나가비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16] 다만 이것은 같은 기록의 '신분활국'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17] 즉 마한 연합 내부에서 백제국이 이미 고이왕-책계왕 시절에 종주권은 진작에 잡았지만,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소 비협조적이었던 세력이 침미다례였던 것이다.[18] 백제본기에는 몇 월에 있던 사건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고구려본기〉에서는 10월에 있었던 사건이라 명기하고 있다.[19] 이는 고구려 쪽으로 잠깐 시선을 돌려보면 요동의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이 너무 강해져 고구려는 서쪽 공략을 포기해야 했고, 그 대신 한반도 중남부의 패자로 성장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더불어 근초고왕이 남방 경략에 매진하는 사이 혹은 남방 경략을 완수한 직후 북방에 생긴 군사적 맹점을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20]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赤旗)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21] 이와 같은 사례는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나라는 적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했는데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황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했고, 역시 한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한 황건적도 황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했다.[22] 이 둘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장수왕 대에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백제를 경멸하는 단어인 백잔(百殘), 즉 백제 떨거지라는 단어를 쓸 정도였다. 그리고 동시대에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은 외교서신에 고구려를 이리와 승냥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사이가 매우 안좋아진다. 그나마 관계를 회복했을 때는 두 나라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때이고 이마저도 나제동맹, 나당동맹과 같은 동맹수준이라기보단 같은 목표를 가진 국가 정도의 관계였다.[23]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아직기와 왕인의 도일을 이보다 한참 뒤인 404년이라 하여 기록이 서로 다르다.[24]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무조건 인질이라고 쓰는 식이다.[25] '이'(已)는 '이미'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글자이며, 기본적인 품사가 어조사로 '예전'이라는 명사형의 뜻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구(舊), 고(古), 전(前) 등의 글자를 놓아두고 이 글자를 과거의 것이라는 뜻으로 쓸 이유가 없다.[26] 일본어에서는 일관적으로 음으로 읽어 '이하키(いはき)'로 읽을 수 있으며, 이는 '이와(いわ, 石/磐)', '키(き, 木/城)' 등 일본의 흔한 일본 명사와도 통한다.[27] 1980년대 이후, 일본 열도의 전방후원분에 대한 발굴 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위계 구조에 대한 해석이 정립되면서 '전방후원분 체제'를 주창한 츠데 히로시 등에 의해 3세기 중반에 이미 긴키 지방에 일본 열도의 정치적 중심지가 있다는 설이 주류가 되었다. 국내에도 많이 늦었지만 2010년대에는 그나마 관련 번역서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28] 최태성 강사는 근초고왕의 산둥 진출에 관해 과거 한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지만 요즘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는 내용이니 주의하라고 설명하기도 했다.[29] 광개토대왕 시대에도 고구려가 요동 점령을 했는데 그때는 백제가 하도 고구려에 얻어터져서 힘을 못 쓸 터라 해외 진출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개토대왕 시대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30] 대표적으로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등등.[31] 사실 백제 왕 치고 말년이 좋은 왕이 잘 없다. 대표적으로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성왕관산성 전투에서 진흥왕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또한 삼국시대의 유명한 정복군주 중에선 근초고왕만 말년이 안 좋다. 물론 광개토대왕의 경우 30대, 진흥왕도 40대에 나름 단명해 근초고왕만큼 장수하진 못했지만.[32] 이전 아달라 이사금 시절에는 신라의 길선이란 자가 같은 이유로 백제에 망명한 적도 있었다.[33] 여담으로 공교롭게도 근초고왕이 승하하기 1년 전인 374년 고구려에서는 이후 고구려사 최대의 정복군주가 될 광개토대왕이 태어난다. 그리고 백제는 그 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때까지 5세기 내내 고구려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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