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新羅坊통일신라 때 당나라 동해안(동중국해) 연안 각지에 설치된 신라인들의 거주지. 한 마디로 코리아타운과 비슷한 것이다.[1] 당나라의 신라방들은 주로 산동 반도 혹은 지금의 장쑤성 등에 있었다.
주로 교역하던 상인들이 많았으나, 견당사라고 불리는 사신단, 학문을 익히러 간 숙위학생(유학생), 불법(佛法)을 배우러 간 구법승, 그리고 경제적 난민과 정치적 망명객도 상당수 머무른 것으로 알려진다.
2. 위치
입당구법순례행기 등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당나라의 신라인 사회는 회하 하류와 대운하 일대, 그리고 그리고 산둥반도 남쪽 해안 일대에 집중돼 있었다. 전자는 초주(楚州)[2]가 중심지였고 후자는 적산촌(赤山村)[3]이 중심지였다. 대운하의 요충지 초주와 인근 연수현(漣水縣)에 신라방이 설치돼 있었으며, 적산촌 주변에는 많은 신라촌이 형성돼 있었다.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나오는 신라선 기착 항포만 20여 개에 달하는데 양주, 소주, 명주, 초주, 연수현, 동해현 숙성촌, 전만포, 대주산 교마포, 낭야대, 소산포, 유산포, 장회포, 모평현 노산, 승가장, 도촌, 등주 봉래현, 성산포, 상도 등이다.개방적인 당나라 사회상에 힘입어 중국 광주, 천주, 양주에 진출해 있던 페르시아, 아랍 상인들 역시 무역거점 번방(蕃坊)을 이루고 있었으며, 신라 상인들과 자연스레 상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8~9세기 신라에는 이들 서방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특산물들이 유통되고 있는 기록을 삼국사기 잡지나 일본 기록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유명한 사례로 흥덕왕이 골품별로 사치품 사용을 금지한 기록이 있는데, 이 때 흥덕왕의 교서 내용을 보면 역으로 이 금지령 이전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사치품 사용이 만연해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독 이들 페르시아 상인들은 양주를 기점으로 서쪽, 남쪽 해안에서 활동했으며 더 북쪽, 동쪽으로 무역거점을 넓힌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거의 신라 상인의 권역과 일치하기 때문에, 드넓은 당나라 해안선에서 양주를 두 상인집단 세력권의 경계선으로 보기도 한다.
3. 구조
본래 중국에서 방이란 성 안에 구획된 거주지역을 일컫는 용어이다. 중국의 성은 여러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4], 각 방에는 방정이라는 책임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방이란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방을 가리킨다. 즉 신라인만의 마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대도시의 일부분 구역이 신라방인 경우가 많았다. 신라방의 방정은 신라인이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방의 책임자가 총관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자치행정기관이자 신라인을 위한 숙박시설인 신라소도 있었다. 신라원이라는 사찰(절)도 많았는데, 장보고가 세운 절로 엔닌 대사가 방문한 적산원赤山院(적산법화원)이 유명하다. 전통시대에는 대형 사찰은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는 숙박시설을 겸했기 때문에[5] 신라인 사찰들은 신라인 여행자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더불어 적산법화원이 상당한 자치권이 있었다는 건 일본 승려 엔닌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데, 귀국명령을 받고도 신라방에 숨어서 이를 피했고,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신라소에서 보증함으로써 체류가 허가되기도 했다. 그리고 장보고가 산둥 반도에 세운 법화원(法華院)이 있다. 법화원은 신라·일본에서 온 유학승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신라의 풍습에 따라 음력 8월 15일마다 3일간 축제를 열었으며, 매년마다 여름에는 금관명경, 겨울에는 법화경 등의 경전을 정기적으로 강의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라방은 산동성 등주 등 주로 바다 근처 도시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은 주로 상업과 해운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업과 선박수리업 등이 발달했으며, 당나라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통 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주는 역어와 통사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관리가 된 신라인도 다수 확인된다. 최치원이나 장보고는 좋은 예. 특히 장보고는 적산원등 신라방과 자주 엮인다. 무역에 종사한 신라인으로 이름이 남은 사람들로는 장보고를 비롯해 장영(張詠), 왕청(王請), 이소정(李小貞), 장공정(張公靖), 김진(金珍), 김자백(金子白), 흠량휘(欽良暉), 왕초(王超) 등이 있었다.
9세기 헤이안 시대 일본의 승려 엔닌의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도 신라방에 거주하는 신라인에 관해서 비교적 자세히 쓰여 있는데, 양쯔강 하류와 대운하가 연결되는 회하 하류 지역에 신라 상인들이 많이 활동했다고 한다.
4. 신라 시대 이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나라와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신라방 사회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1072년 송나라에 넘어간 일본인 승려 죠진(成尋)의 기행문인 '삼천대오대산기'에 따르면 당시 고려인(신라인)들이 초주 일대에서 운송업에 종사하며 일본인 승려의 통역과 여행에 관한 일들을 주선해 줬고[1] 중국뿐만 아니라 삼대실록 등 일본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에도 신라와 가까운 규슈 북부에 신라인 거주지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남은 신라인의 이름으로 일청(一淸), 청한파(淸漢巴), 윤청(潤清) 등이 있다. 일본에 체류하던 신라인들은 869년의 대규모 신라구 사태 이후 일본 조정에 의해 신라와 반대편인 무츠(도호쿠)로 강제이주당했다.[2] 지금의 장쑤성 화이안시 화이안구[3] 지금의 산둥성 웨이하이시 룽청시[4] '방장제'라고 한다. 원래 북위의 수도에서 피정복민들과 포로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안한 제도인데 수도의 각 구역을 직시각형 모양의 방으로 구분해서 각각 성곽을 두르고 2개 또는 4개의 출입문을 만들어서 일정 시간마다 출입을 통제하는 방식이다.각 방장 사이로는 바둑판 모양으로 대로가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소요 발생에 대비한 것이었다. 특정 민족, 특정 계층의 소요가 수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게 막고 진압을 위한 군사들이 자유롭고 신속하게 통행할 수 있게한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다양한 출신의 민족들이 거주하는 대도시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방장제는 송대 이후로는 쇠퇴하였다.[5] 조선시대에도 왕이 지방에 나가면 사찰에서 숙박하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