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5부 | |||||
<colbgcolor=#f0ef75> 삼국지 위지동이전 | 계루부 | 연노부[1] | 절노부 | 관노부 | 순노부 |
후한서 (주석[2]) | 계루부 | 소노부 | 절노부 | 관노부 | 순노부 |
(중부·내부·황부) | (서부·우부·백부) | (북부·후부·흑부) | (동부·좌부·청부) | (남부·전부·적부) | |
삼국사기 | 계루부 | 비류나부 | 연나부 (제나부[3]) | 관나부 | 환나부 |
[1] 소노부의 오기로 추정한다.[2] 이것은 당나라 장회태자가 남긴 주석에 근거한 것이다. 다만 현대의 학자들은 이것이 고구려 초기의 '5나부'와 후기의 '5방위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일어난 착오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3] 연나부의 오기로 추정한다.
消奴部
1. 개요
고구려 초기, 나라를 이끈 5부(五部)[1] 중 하나로, 연노부(涓奴部)[2], 비류부(沸流部), 비류국(沸流國),[3] 비류나부(沸流那部)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9대 고국천왕이 지방 행정적인 방위명 부로 바꾼 뒤엔 서부(西部), 우부(右部), 백부(白部)로 불렸다. [4]2. 상세
소노부는 '고추가'(古鄒加)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꽤나 큰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입증할 만한 정황 근거로 소노부는 독자적인 종묘를 썼다는 점이 있다. 그러다 국가 체제가 정비된 제17대 소수림왕~제19대 광개토대왕 때 이 특권이 사라지긴 했다.여기서 더 나가면 《삼국지》 〈동이전〉 기록[5] 등에 의거해 소노부 출신인 제5대 모본왕이 시해되고, 계루부 출신인 제6대 태조대왕이 등극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것은 해씨 고구려설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해씨를 쓰는 제2대 유리명왕부터 제5대 모본왕까진 해씨이고, 그후의 왕인 제6대 태조대왕은 고씨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비정상적으로 긴 태조대왕의 생몰연도나 태조라는 명칭부터가 묘하긴 하다. 허나 왕계는 건국 시기부터 계루부가 가지고 있었으며, 해씨와 고씨의 차이는 그저 표기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 여러 데이터를 고려하는 학계에선 더 우세한 설이긴 하다.
제9대 고국천왕 사후 제10대 산상왕이 즉위하자 셋째 형인 고발기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소노부가 그를 지원했다. 발기가 패배하자, 소노부 소속의 30,000명은 아예 공손씨의 동연으로 가버렸다. 이것은 왕을 배출하는 계루부와 왕비를 배출하는 절노부 사이의 산상왕 즉위 작당에서 소외된 고발기와 소노부가 힘을 합쳤던 것으로 본다.
2.1. 비류국 합병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이 스스로 투항하여 나라를 바쳤으며, 이 지역을 다물도(多勿都) 라고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영주로 임명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삼국지 위서동이전, 후한서 등에서도 고구려의 통치에 관해 연노부, 혹은 소노부가 왕정을 하고 있었으나 점차 쇠퇴하고, 계루부로 합병 교체됐다는 취지의 기록이 남아있다.이병도는 이러한 기록을 통틀어서 비류국이 소노부로 변한 것이라고 봤으며, 송양 이라는 이름이 소노부의 명칭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놨다. 이 주장대로 보면 삼국사기가 '비류부' 혹은 '비류나부'로 기록한 것과 소노부의 명칭이 다른 것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또한 초창기 고구려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비류국이 계루부에 투항하게 되면서, 주도권이 주몽의 계루부에 완전히 넘어간 것이라고 봤다.
반면 계루부 중심의 고구려 왕조가 이후에는 소노부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견해도 있다. 유리명왕 시기부터 모본왕까지 시기를 소노부의 집권기로 보고 있으며, 이 무렵의 약 200년 간 왕위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늘려져 있다는 점. 그리고 왕위 승계가 평범하지 않고 계속해서 정권 찬탈 방식으로 이뤄진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이 견해대로 보면 주몽과 유리명왕이 서로 다른 세력이거나, 모본왕과 태조대왕 역시 서로 다른 세력이며, 이어지는 차대왕, 신대왕까지 나타나는 기록의 모순과 계속해서 왕권 교체를 벌였던 것과도 어느 정도는 연결이 된다. 다만 여기서 확대하여 해씨 고구려설을 주장하기는 성급하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