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八殿조선 왕조가 지난 한민족 왕조의 임금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8곳의 제전(祭殿)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우리나라 팔전'으로 불린다. 8개의 제전은 모두 숭(崇) 자 돌림이고, 일반 사(祠), 묘(廟)보다 높은 전(殿) 호를 사액 받았다.
2. 상세
전 왕조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주고 능침을 관리해주는 사례는 이전부터 있었는데, 이를 삼각의 예를 따른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은 가야 멸망 이후 소홀해진 금관가야 수로왕의 제사를 신라 종묘에 합쳐 지낼 것을 명했고[1] 고려 현종은 1017년에 옛 삼국 왕의 능묘를 보수하고 예의를 차릴 것을 명했다. 조선 왕조는 이 전례를 성리학 제례 방식에 맞추어 따랐다. 8전은 특정 왕 대에 한번에 정해져 지어진 건 아니다. 문종이 숭의전을 처음 사액한 이후 광해군, 경종, 영조, 정조, 고종 대에 전 호를 내렸다. 그 전엔 사 혹 묘로만 불렸다.- 숭의전: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조의 임금을 모실 사당을 만들라고 명했고, 정종 대에 태조 아래로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7왕을 모시게 했지만 1425년(세종 7년) 세종 대에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 모시게 했다[2]. 문종 대에 신숭겸 등 공신 16명을 배향하고 '숭의전' 호를 내렸다.
- 숭인전: 태종이 기자사를 지어 단군 신위를 동쪽을 바라보게 배향했으나, 세종이 단군을 떼내어 기자만 홀로 모셨다. 광해군이 숭인전 호를 내렸다.
- 숭덕전: 1429년(세종 11년) 7월, 세종이 경주에 '신라시조 혁거세왕사'를 지었고[3], 경종이 숭덕전 호를 내렸다.
- 숭령전: 1429년(세종 11년), 세종이 단군, 동명왕을 합사한 사당을 지었다[4]. 조선이 성리학 국가였고 괴력난신을 싫어했었기 때문인지, 원조 단군 사당인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에선 환인, 환웅, 단군을 함께 모셨지만, 세종은 고조선의 단군과 고구려의 동명성왕을 함께 모셨다.[5] 영조 원년에 숭령전 전호를 받았다.
본디 고려에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동명왕묘[6]와 동명성제사[7]에서 모셔졌는데, 조선 세종 대에 동명성제사가 없어지고 단군과 합사됐다. 이는 고려 대에서부터 이미 단군=해모수[8]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견해의 반영일 가능성이 높다. 같은 계통의 군주들은 예외없이 같은 사당에 모셔졌기 때문.
- 숭렬전: 1429년(세종 11년) 7월, 세종이 충청도 직산에 '백제시조 온조왕묘'를 지었다[9]. 그런데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이어갈 때 성이 온조 왕의 옛 수도라는 점을 들어 온조 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후 남한산성에다 온조왕묘를 짓고 성을 보수한 완풍부원군 이서를 배향했고, 정조 대에 남한산성 온조왕묘에 숭렬전 호를 내렸다. 이로인해 온조왕묘는 충청도 직산에서 경기도 남한산성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 숭선전: 고종 15년에 수로왕릉의 묘호를 정해 숭선전이라 했다.
- 숭신전: 과거 고려~조선 초까진 경주 토함산 정상에 석탈해사가 있어 동악대왕으로 추앙됐다[13]. 조선 말기 석씨 가문이 경주 월성 안에 세운 석탈해 사당에 사액을 요청하자 고종 43년에 숭신전 호를 내렸다.
2.1. 위만조선과 발해
찬탈자인 위만은 조선 왕조 당시에 제사도 지내지 않을 만큼 평가가 박했기 때문에[14] 배향한 사당이 없다.조선은 발해 계승의식이 없었기 때문에[15] 대조영을 배향한 사당이 없다. 그리고 시조라고 해서 무조건 사당을 세운 것이 아니라 당대의 국력이나 한국사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사당을 지었다. 비교적 한반도 본토에 대한 영향이 적었던 발해 왕가를 모신 사당이 생겼을 가능성은 낮다. 당장 훨씬 옛날부터 한국사의 일부로 취급되었던 주요 국가들이자 왕계가 어느 정도 전해진 부여나 마한의 경우에도 사당이 생기지 않았다.
2.2. 부족한 인지도
조선왕조에서 건립한, 한반도 역대 왕조들의 사당을 모두 일컫는 용어이니 '팔전'이라는 용어가 자주 쓰일 법도 하지만, 사실 '팔전'이라는 표현은 물론이고, 개별 사당들의 인지도 자체가 현저히 낮은 편이다. 그 이유는 8곳 사당의 건축물들이 문화재적 가치가 크게 높지 않기 때문. 유적 자체는 대부분 사적지로 지정되었으나, 국보나 보물 유적들이 전무하고 건축적 가치도 그리 높지는 않다. 단, 평양의 숭인전은 고려 말기 건축으로 많은 보수공사를 거쳤지만 평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남아있다.다만 예전보단 '팔전' 사당들의 인지도가 조금 높아지고 있다. 숭의전은 남한의 몇 안되는 고려 왕조 관련 유적으로서 매년 '고려문화제'가 열리는 등 고려사 콘텐츠를 살리며 이름을 알리고 있다. 또 수로왕릉 영역에 위치한 숭선전은 수로왕릉이 김해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이자 관광지인 관계로 다른 사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편이었다.
3. 위치와 봉사손
현재 팔전 중 2개는 북한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머지 6개는 모두 대한민국 내에 존재한다. 신라의 경우 박씨, 석씨, 김씨로 3개 성씨가 왕위를 번갈아 차지하였으므로 성씨별로 각각 만들었다.명칭 | 위치 | 신위 | 배위(配位) | 봉사손 성씨 |
숭령전 | 평양시 | 고조선 단군, 고구려 동명성왕 | - | 선우[16] |
숭인전 | 평양시 | 고조선 기자 | | |
숭렬전 | 경기도 광주시[18] | 백제 온조왕 | 이서[19] | -[20] |
숭덕전 | 경상북도 경주시 | 신라 혁거세 거서간 | - | 박 |
숭신전 | 경상북도 경주시 | 신라 탈해 이사금 | - | 석 |
숭혜전 | 경상북도 경주시 | 신라 미추 이사금, 문무왕, 경순왕 | - | 김 |
숭선전 | 경상남도 김해시 | 가야 수로왕 | - | 김·허 |
숭의전 | 경기도 연천군 | 고려 태조, | 공신 16명[22] | 왕 |
4. 기타
- 영조 때 탐라국 지배층의 후손들이 팔전과 삼성사의 사례를 근거로 자신들의 사당 '삼성사(三姓祠)'를 사액해달라고 청했었다. 이 사당에는 탐라국의 시조 세 을나를 모시고 성주 고후, 왕자 고청, 도내 고계, 성주 고봉례, 왕자 문충세 등이 배향됐다. 그러나 영조는 탐라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경우와는 다르다면서 거부했다. 즉 위에서 누락된 국가들처럼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여긴 것. 『춘관통고』에 따르면 영조 계미년(1763) 창건된 삼성사는 다음 왕인 정조 을사년(1785)에 결국 사액되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23] 그럼에도 전(殿)급으로 오르지는 못하고 사(祠)에 머물렀다. 대신 탐라국왕들도 국왕이었으므로 제주목사를 제관으로 지정하여 국왕의 예로 제사를 지내게 해줬으며 삼성사가 삼성전으로 높여진 것은 훗날, 의친왕이 개인 자격으로 편액을 해줌으로 성사되었다.
- 1994년 북한에서는 평양의 단군릉ㆍ동명왕릉ㆍ왕건릉을 동시에 개건 및 복원하여 평양 중심의 민족사적 정통(?)을 주장하는데,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지난 왕조의 왕들을 기린다는 점에서 팔전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 충청남도 부여군에 온조왕과 사비백제 6대왕[24]을 추모하고 제사를 올리는 숭목전이 2018년 착공에 들어갔다. 이름이나 형식은 '팔전'과 여러모로 유사하지만, 건축 양식은 하앙식 형태의 고대건축 양식이라고 한다.
[1] 여기에는 외가가 김유신 집안, 곧 김해 김씨였던 것도 작용했다.[2] 그래서 세종실록지리지엔 '고려 4위사'로 나온다.[3] 세종실록지리지 기록.[4] 동명왕 신위가 동쪽, 단군 신위가 서쪽에 있었고 둘 다 남쪽을 바라보게 했다[5] 구월산의 삼성사를 두고 "단군은 모셔야 하지만, 설화적 존재인 환인과 환웅은 빼야 맞는다."라며 성리학자들의 반발이 매우 거셌다. 영조 때는 삼성사 훼철 논란까지 일어났을 정도다.[6] 중화현 용산에 위치했다. 대한제국 때 동명왕릉으로 개칭됐다.[7] 평양부 인리방에 위치했다.[8] 《삼국유사》에서도 해부루가 단군의 장남, 동명성왕이 차남인 이복형제로 여겨졌다.[9] 세종실록지리지 기록.[10] 신라 역사에서 첫 김씨 왕이다.[11] 신라 역사에서 마지막 김씨 왕이다.[12] 삼한일통을 이룬 김씨 왕이다.[13] 경주 선도산 선도성모는 서악대왕으로 대비됐다.[14] 유교 왕조에서 왕위를 찬탈한 신하를 좋게 평가할 수 없다. 특히 조선은 고조선을 이었다고 해서 국호도 그대로 했는데 위만은 그 조선을 찬탈한 신하였다.[15] 고려 때 발해를 계승 혹은 발해와 고려를 동일 시 하는 관념은 고려 후기까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잊혀지다 발해를 본격적으로 한국사의 일부로 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실학이 연구되면서부터였다. 국왕들 중에서는 그나마 개혁군주였던 정조(조선)가 관심을 보였던 기록이 있다. 물론 아예 남으로 본 건 아니고 태조(고려) 왕건의 경우처럼 친척 국가로 여겼던 정도의 인식은 있어왔지만 그렇다고 계승의식은 없었다. 한국에서 정식으로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기 시작한 건 20세기부터다.[16] 기자의 후손으로 정해진 성씨. 숭령전과 숭인전 참봉 네 자리 중 한 자리를 차지했다.[17] 태종 대에 배향됐다가 새종 대에 따로 사당을 세웠다.[18] 세종 대에는 충청도 직산에 있었다.[19] 생전 작위는 완풍 부원군, 사후 시호는 충정공이다. 인조 시기 남한산성 개축 책임자로, 인조 대에 사망해 남한산성 온조왕묘에 배향 됐다.[20] 지역 수령이 제사 지냈다.[21] 세종 이후엔 태조, 현종, 문종, 원종만 모셨다.[22]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3권에 따르면 공신 16명은 복지겸, 홍유, 신숭겸, 배훤경, 유금필,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다.[23] 三姓祠, 在濟州。英祖癸未, 創建, 正祖乙巳, 賜額。幷享高乙那·夫乙那·良乙那。[24] 성왕ㆍ위덕왕ㆍ혜왕ㆍ법왕ㆍ무왕ㆍ의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