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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7:11:25

십상시


십상시
공통
장양 조충 하운 곽승 단규
정사 연의
손장 · 필람 · 율숭 · 고망 · 장공 · 한리 · 송전 봉서 · 조절 · 후람 · 건석 · 정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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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常侍

1. 소개2. 구성원3. 등장 배경4. 황건적의 난5. 십상시의 난6. 기타 창작물7. 비유적 의미

1. 소개

후한(後漢) 말기에 어린 황제를 조종해 부패한 정치를 행한 환관 집단으로 영제하진 일파와 함께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던 후한 말기를 아예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어버린 인물들. 이들의 영향력은 나쁜 의미로 굉장해서 넓게 잡으면 400년 이상까지 중국이 난세를 겪도록 만들었다.[1]

간신이자 탐관오리로 《삼국지연의》 초반부부터 상당히 사악한 포스(?)를 뿜어댔지만 십상시의 난으로 순식간에 몰살당해서 허무함도 안겨주었으며 이런 이미지가 전해져 오늘날에도 간신, 사악한 환관의 대명사로 꼽히게 되었다.

2. 구성원

정사와 연의에서 구성원이 다르다. 《후한서》에서는 장균이 처음 십상시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12명이 나열되고, 《삼국지연의》에서는 구성원이 바뀌고 이름에 딱 맞추어서 10명이 되었다. 정사와 연의에서 구성원이 중복된 경우는 장양, 조충, 하운, 곽승, 단규의 5명뿐이다. 수장은 장양, 부수장은 조충.상술했듯 이들은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외척 세력인 하진 일파를 상대로도 꺾이지 않을 정도로 큰 세력을 일궜다. 그럼에도 유독 조조에겐 약한 면모를 보였는데, 이는 조조의 의조부인 조등이 이들을 키워준 스승이자 조등 현역 시절 이들 일파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십상시 입장에서 조조는 (현재는 은퇴했다해도) 자신들의 은사이자 수장이면서 후원자이자 어찌보면 아버지나 다름없는 엄청난 인물의 손자였던 것.

3. 등장 배경

후한은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일이 잦다보니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이 많았다. 황제가 어느 정도 자라면 전권을 휘두르는 외척을 숙청하려고 했는데, 황제는 곁에서 모시는 환관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이를 실현했다. 나름 환관들이 황제의 친위세력이 된 것이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환관들의 권력이 비대해져 환관은 환관 나름대로 황제의 눈과 귀를 틀어막아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황제가 요절하면 또 다시 어린 황제가 즉위해 외척들이 다시 반격을 가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 후한의 전통 아닌 전통이었다. 대체로 외척 세력은 황제가 교체되면 급격히 약화되기 마련이지만, 황제한테 엄마가 없는 게 아닌 이상, 없어질 수는 없었다.[2]

다만 후한 특유의 환관-외척 득세 현상을 덮어놓고 '막장과 악순환'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한나라는 당시의 시대적, 기술적 배경과 지배하는 강역의 넓이에 비해선 놀라울 정도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했다. 이처럼 군주(황제)가 권위와 실권을 가지는 중앙집권 지향체제를 유지하려면, 황제를 보호하고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며 황권을 지탱할 친위세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근현대와 같은 체계적으로 잘 정비된 관료조직을 기대하기 힘든 당시의 상황에서[3] 이런 친위세력은 황제가 신뢰할 수 있고 황제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들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친위세력은 어떤 세력을 기반으로 해야 할까? 전근대 기준으로 이런 친위세력은 보통 권력자(군주)의 친인척을 기반으로 탄생하지만…창업 직후도 아니고, 수백 년간 대를 이어 온 황실에서 황족들이란 곧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황제를 위협할 수도 있는 세력이므로 친위세력의 기반으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물론 황실 자체는 번성할수록 황제의 튼튼한 권위를 뒷받침할 기반이 되지만, 동시에 황족 인사들의 세력이 커질수록 재위 중인 황제 개인에게는 위협이 될 가능성도 상당했다. 필연적으로 황제의 친위세력은 황제와 가까우면서도 황제 개인을 배신할 수 없는, 즉 '지금 이 황제가 아니면 자신의 입지가 보장되지 않는' 집단을 기반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황족이 아니지만 황제 개인과 혈연이 있는 외척, 황제 개인의 신임과 총애를 입지와 권력의 기반으로 하기에 황제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환관 세력이 자연스럽게 친위세력의 주축으로 자리잡았다.

결국 후한의 외척과 환관은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을 사유화하여 전횡을 일삼는' 간신이라는 통념과 달리, 황제의 권위와 중앙집권체제의 유지에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기반으로 중앙정계를 주도하는 환관 및 외척에 비해, 각 지방의 명사들과 선비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호족 사대부 세력은 중앙정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자였다. 하지만 호족 사대부는 한나라 사회지도층 대부분을 포괄하는 엄청난 규모가 곧 저력이었고, 각 지방의 토호와 명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특성상 수도와 중앙정계를 벗어난 각 지방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이 있었다. 또 일단은 효렴 등을 비롯한 절차로 어느 정도 검증을 거쳐 등용된 이상 실질적으로 실무진의 주축을 차지하는 부류 역시 이들이었다. 따라서 외척과 환관들이라 해도 호족 출신 사대부들과 협력 없이는 제국을 경영할 수 없었다. 결국 후한의 정치체제는 이들 세 집단의 상호견제와 알력, 그리고 사안에 따른 협력이라는 균형 위에서 성립되어 수백 년에 걸쳐 제국을 지탱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어린 황제가 즉위한 직후에는 외척이 득세하였다가 장성한 뒤에는 외척을 쳐내고, 측근 환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친정 체제를 정비하는 것 자체는, 통상적인 국가 운영상의 권력 균형 이동으로 보면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권력 집단간의 상호 견제라는 순효과도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가 요절하기를 반복하면서 권력구도가 외척과 환관 사이에서만 이동하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제대로 국정을 장악할 만큼 유능한 황제가 장기간 나오지 않자, 실질적으로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외척 및 환관 세력에게만 권력이 쏠렸다. 호족 사대부 계층이 정치적으로 소외되면서 세력간 균형이 무너졌고, 환제 이후 외척까지 몰락하면서 환관 세력에게 모든 힘이 집중되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되어 극도로 부패하면서 정치적 균형이 깨져버렸다. '십상시'는 말하자면 이런 불균형에 의해 탄생한 일종의 정치적 괴물이라고 보아야 한다.특히 가장 강력한 외척 간신이었던 양기를 무찌르는 과정 이후, 환제 이후로는 환관 세력이 완전히 권력을 잡은 듯 보였다. 사실 환제 자체가 환관들의 우두머리격에 해당되는 인물인 조등에 의해 즉위된 황제였으니 이 시기의 환관들이 득세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외척 세력은 몇 차례나 환관 세력을 공격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환관 세력에게 숙청당했다. 환관이 권력을 잡은지 수십년이 지나자 그 부정부패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고, 그 결과 호족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반() 환관 세력인 청류파가 등장하는데 환관들은 당고의 금 사건으로 이들을 탄압하여 내쫓고 관직에 나설 기회를 영영 박탈해버렸다.

십상시는 《삼국지》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에도 이미 만악의 근원이었다. 그때는 대장군이자 두황후(두묘)의 아버지인 두무와 태위 진번이 십상시들의 전횡을 막아보려고 노력한 끝에 십상시와 맞섰으나 건석이 선수쳐서 두무와 진번을 사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환제 시절 그나마 십상시들과 대립했던 외척 두무와 진번을 살해하는 데에 성공하자 십상시들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어졌다.

십상시는 이 당고 사건이 일어난 영제 시대 때 권력을 잡았던 환관 10여 명을 일컫는다. 이때는 아예 각 관직마다 그에 따르는 정가가 붙고 공개적으로 매관매직이 이뤄질 정도로 정치가 막장이었는데, 돈을 주고 벼슬을 산 관리들은 본전을 뽑아내기 위해 임지에서 무제한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거기다 자연재해까지 겹쳐 기근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전형적인 국가멸망 테크를 타는 중이었다. 영제 유굉이 대놓고 매관매직을 하게 된 경위 역시 십상시였다. 이전까지는 십상시들이 매관매직을 했는데, 영제는 '어차피 근절시키지 못할 매관매직이라면, 십상시가 아닌 내가 돈을 먹기라도 하자'는 심산으로 매관매직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4. 황건적의 난

이 결과 일어난 대표적인 반란이 황건적의 난. 《후한서》에 따르면 장균이 십상시를 죽여 만천하에 사죄하면 반란이 저절로 진압될 것이라고 말했으나 영제는 이를 거절했다.

5. 십상시의 난

한편 기어이 대립 관계에 놓인 외척 하진까지 척살하는 위용을 보였으나... 하진을 척살한 건 오히려 패착으로 작용했다. 적절히 우유부단한[5] 하진이 휘하의 군웅들을 통제하고 있는 판국이었는데, 그가 죽으며 군웅들이 더 이상 눈치 볼 이유가 없어진 것. 당시 중국의 수많은 군웅 세력들은 하나의 수류탄이나 마찬가지였고 하진은 이 수류탄의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근데 그 안전핀을 제거해버렸으니 이후 벌어질 일이야 뻔했던 것.

그리고 "정치적 감각이 좋고 인격도 훌륭했지만 우유부단했다."는 하진에 대한 평가 자체에 조금 흥미로운 면이 있다. 하진이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충분히 십상시를 숙청할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숙청하지 않았고, 결국 그 십상시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인데 하진의 입장에서 합리적,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십상시들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여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환관들은 다 잡아죽여버리겠다고 벼르는 청류파 강경파들이 군사력까지 쥐고 있는 상황에서 강경 청류파의 폭발을 막고 있는 유일한 안전판이 하진 자신이었는데 왜 십상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대부분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저 놈이 자기 몸을 유일하게 지탱해주는 밧줄을 자기 손으로 자를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지는 않는 법이다.

물론 십상시를 숙청하지 않은 것 외에도 하진의 행보 자체가 원소의 헌책이나 하태후의 반대 및 기타 여러 입장들 사이에서 좀 왔다갔다 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단호한 과단성을 갖추었다고는 전혀 보기 힘든 인물이긴 하지만 당시 하진의 경우 딱 잘라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는 힘든 처지였다는 점도 감안해줘야 한다. 하진의 핵심 참모격이었던 원소 같은 경우야 명명백백한 청류파적 입장에서 십상시의 철저한 숙청을 주장했지만 하진의 경우 청류파의 지지를 얻고 있기는 하나 청류파라고 보기는 힘든 외척의 입장이었고, 선황제의 고명을 받았다는 것을 자기 권력의 정당성으로 삼은 처지에서 황실(= 하태후)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일단 십상시를 꺾어서 무력화해야 한다는 수준에서는 청류파와 협력하는 입장이었지만 환관 세력과 절대 타협할 수 없다는 청류파의 입장과는 달리, 환관 세력이 적절한 선에서 굴복하기만 한다면 환관 세력까지 포용한 안정적인 정국을 지향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수도 있었다.[6]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하진의 우유부단함 중에서도 일부분은 그가 정국의 안정을 지향하는 "조정자"의 입장에 있었어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협력자인 원소 등 강경 청류파가 보여준 극단주의적 과격성과 그가 상대해야 하는 십상시 등 환관 세력이 보여준 현실 파악 능력 전무의 멍청함을 통해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우유부단함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인 온건파 노선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변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진이 군웅들의 목줄을 잡고있는 상황에서 하진이 척살되자 그의 부하로 있었던 원소원술한테 단 몇 페이지 만에 전원 몰살당했다.[7] 단규와 우두머리인 장양은 그나마 좀 오래 살았다. 한 길어야 10페이지 정도? 근데 얘들도 당시에 소년이었던 소제진류왕 형제를 데리고 튀다 잡혀 끔살됐다는 정도만 추가되었을 뿐이다.

또한 하진 사후에 군권으로 휘어잡지 못하고 황명만을 믿고 있던 것도 패착이었다. 십상시의 패악질이 이미 도를 넘었고, 군권을 가지고 있던 원소나 조조들도 황명이 황명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 이렇게 군웅들이 황명을 무시하고 직접 행동에 나선 순간부터 이미 군웅할거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 십상시가 한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한 게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방 토호들을 중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원소 등이 십상시를 죽여버리자 서량 쪽 토호였던 동탁이 조정으로 들어오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 결과 동탁 마음대로 소제는 폐위되고 헌제가 옹립되기에 이르렀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조차도 십상시의 공적이라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십상시가 건재하던 시기에 지방 토호들이 중앙정부, 즉 낙양의 조정으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때까지는 조정의 권위와 위력이 어느정도 건재했기에 지방 토호들이 이를 위협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의 위세를 지탱한 것이 과연 십상시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리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기는 힘든 것이, 물론 십상시 역시 당시 한나라 조정의 주요한 구성원 중 하나라는 점은 인정해 줘야 하겠으나 이들의 절망적인 실무 능력[8]을 생각하면 당시 위기로 치닫던 한나라 조정을 지탱하는데 한해서만 특별히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기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어 보인다. 차라리 군권을 장악하고 정치적 균형 감각도 상당하던 하진과 그 파벌이 조정의 기둥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기대가 더 현실적이다.

오히려 십상시의 경우는 한나라 조정의 통치 명분과 정당성을 저해하는 심각한 도덕적 흠결, 즉 지방 토호들이 중앙정부의 권위를 무시할 때 내세울 수 있는 명분[9]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무엇보다도 한나라의 중앙권력이 완전히 붕괴 수순에 들어가는 첫 계기를 만든 것이 십상시들 자신이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원소 등이 십상시를 죽여버린 사태의 원인에는 십상시가 하진을 죽여버린 사태가 있다는 것. 즉, 동탁과 같은 군벌[10]이 중앙정부로 진입할 수 있던 것은 궁정 반란으로 조정이 사실상 붕괴해버렸기 때문인데, 이 궁정 반란을 먼저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십상시인 것이다. 물론 철저히 십상시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면 "어쨌건 십상시가 선수를 쳐서 하진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니, 원소등의 청류파는 한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여 순순히 모든 권력을 다 빼앗기고 고분고분 몰살당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십상시가 중앙정부를 접수할 뿐 그 권위 자체가 붕괴하는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편파적인 해석에 동의할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6. 기타 창작물

7. 비유적 의미

한국에서 국가원수대통령의 측근[12]으로서 국정을 농단하는 인물들을 비유적으로 십상시라고들 한다.

특히,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에서는, 청와대에서 "정윤회가 2013년 10월부터 월 2회씩 청와대 관계자 10여 명과 회동을 가져 왔다."라는 취지의 문건이 작성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 기사에 나온 청와대 관계자들을 십상시라고 불렀다. 소위 문고리 3인방이라고 하는 이재만(총무비서관), 정호성(제1부속비서관), 안봉근(제2부속비서관) 외에는 정확히 누구누구가 문건에 거론된 십상시인지는 끝내 알려지지 않았으나, 문제의 보도를 한 세계일보 관계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인사들이 예의 십상시일 것으로 추측되었고, 문고리 3인방 외의 고소인은 신동철(정무비서관), 조인근(연설기록비서관), 음종환(홍보수석실 행정관), 김춘식(국정기획수석실 행정관)으로 알려졌다. #

위 인물들 중 일부는 훗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다시 거론되기에 이른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탁현민문재인의 십상시라는 비난을 받은 바 있다. #

그로부터 다시 정권이 바뀐 윤석열 정부에 이르러 윤석열 대통령이 윤핵관을 중심으로만 정치를 하면서 십상시가 정치를 한다는 소리가 정치권과 언론 및 국민 여론을 중심으로 다시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
[1] 너무 과장된 표현이 아닌가 싶지만, (桓靈)으로 엮이는 선제인 환제상황상 불가피한 면이 컸기라도 했지 영제진짜 이딴게 황제가 맞냐 싶을 정도로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하진과 십상시의 세력이 과할 정도로 커진 것도 영제가 이들을 통제할 생각을 1도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황제의 지지덕분에 큰 이들은 자기들끼리 죽어라 정쟁을 벌여댔고 그 피해는 당연히 백성들까지 받았으며 이는 곧 황건적의 난으로 이어졌다. 그러고도 끝나지 않는 전쟁과 황건적의 난이 결국 동탁의 집권을 야기했고 이렇게 중앙정부가 사실상 무너진 덕분에 과거 전국시대처럼 수많은 군벌이 궐기했다. 그 과정에서 조위와 사마진이 차례대로 집권하고 무너지면서 중국 본토가 이렇게 내분으로 서로를 갉아먹는 동안 북방민족들이 힘을 키우게 되는 위진남북조 시대가 열렸다. 그나마 이 모두를 정리한 수나라조차 얼마 못가고 수양제의 삽질로 무너졌고 이런 혼란기는 당나라까지 가서야 겨우 수습되었다.[2] 이런 사태를 예방하려면 아예 킬방원처럼 차기나 차차기 왕의 엄마만 남기고 싹 정리하는 게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답이겠지만, 사돈을 날려버리는 짓거리는 킬방원이니까 가능한 것이니 논외. 무엇보다 이방원(조선 태종)은 한나라 시대보다 훨씬 고도화된 관료제와 정부조직을 활용하여 한나라보다 훨씬 작은 조선을 통치하는 입장이었고, 자기 자신이든 그 후계자인 세종이든 관료집단을 충분히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완전히 찍어누르거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릴만큼 압도적인 기량을 갖춘 인물이기도 하였다. 흔히 환관과 외척의 득세를 '군주의 친위세력 구축'으로 설명하지만 태종이나 세종은 굳이 친위세력을 따로 양성하지 않고서도 충분한 권위와 권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도리어 친위세력이 만들어지면 그 친위세력에게 나눠줘야 하는 권위와 권력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는 특이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 심지어 조선시대를 보더라도 '외척은 싹 정리하는 것이 정치적 정답'이라고 단언할수는 없는것이, 당장 세종의 손자인 단종의 사례를 보면 어린 왕을 보호해 줄 외척이 없었다는 점이 세조의 찬탈을 막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3] 사실상 당시의 관료란 건 호족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4] 이것은 염씨가 대놓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환관이 먼저 했을 뿐 환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것이다.[5] 무능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정사에선 정치적인 감각이 좋고 인격도 훌륭한 인물이었다. 다만 우유부단하다는 결점 하나가 결국 목숨을 빼앗았다.[6] 한나라의 체제 특성상 환관 세력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배제하기는 쉽지 않았고, 환관 세력이 완전히 무력화 될 경우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정국의 균형이 쉽게 무너질 위험도 있었다. 또한 단기적으로도 환관 세력을 일소해 버릴 경우 원소를 비롯한 청류파의 세력을 견제해 줄 안전 장치가 없어져 하진이 오히려 휘둘리게 될 수도 있었던 것.[7] 판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절정에 치솟으려는 순간에 끔살당한 건 대부분 같다.[8] 특히 위기 극복 능력.[9] 나쁘게 말하면 핑곗거리[10] 혹은 군사력을 가진 지방 토호 세력[11] 요코야마 미츠테루 초한지나 사기 등[12] 예컨대 대통령비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