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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의 주요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1996년 | |
이름 | 김진규 | |
분야 | 영화 | |
보관문화훈장(3등급) |
역대 | ||||
남우주연상 | ||||
제1회 (1963년) | → | 제2회 (1964년) | → | 제3회 (1965년) |
김승호 (혈맥) | → | 김진규 (잉여인간) | → | 최무룡 (남과 북) |
역대 | ||||
우수국산영화상 남우주연상 | ||||
1958년 | → | 1959년 | → | 1960년 |
김승호 | → | 김진규 (나 혼자 만이) | → | 황해남 (10대의 반항) |
남우주연상 | ||||
제4회 (1965년) | → | 제5회 (1966년) | → | 제6회 (1967년) |
신영균 (달기) | → | 김진규 (태양은 다시 뜬다) | → | 박노식 (고발) |
제15회 (1976년) | → | 제16회 (1977년) | → | 제17회 (1978년) |
신일룡 (아라비아의 열풍) | → | 김진규 (난중일기) | → | 하명중 (족보) |
연극 및 영화 부문 대상 | ||||
- | → | 제1회 (1965년) | → | 제2회 (1966년) |
신설 | → | 김진규 (벙어리 삼룡) | → | 천사여 고향을 보아라 (연극) |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 ||||
- | → | 제1회 (1965년) | → | 제2회 (1966년) |
신설 | → | 김진규 (벙어리 삼룡) | → | 신영균 (갯마을) |
제2회 (1966년) | → | 제3회 (1967년) | → | 제4회 (1968년) |
신영균 (갯마을) | → | 김진규 (태양은 다시 뜬다) | → | 최남현 (싸리꼴의 신화) |
제10회 (1974년) | → | 제11회 (1975년) | → | 제12회 (1976년) |
하명중 (나와나) | → | 김진규 (광화사) 백일섭 (망나니) | → | 김희라 (마지막 포옹) |
김진규 金振圭|Kim Jin Kyu | |
<colbgcolor=#807968><colcolor=white> 출생 | 1923년 4월 12일[1] |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관포리[2] | |
사망 | 1998년 6월 18일 (향년 75세) |
서울특별시 | |
본관 | 김녕 김씨 |
배우자 | 박기자(이혼) 이민자(이혼) 김보애(재결합)[3] |
가족 | 장남 김진철 차남 김진수[4] 차녀 김진아 3남 김진근 (슬하 3남 3녀) 아랫동서 이덕화 사돈 이예춘 처이질녀 이지현 처이질서 최병서 |
학력 | 서천보통학교 (수료) 신흥보통학교 (졸업) 대전중학교 (졸업) 오이타 우사 농업전문학교 (중퇴) 우에노 음악학교 (중퇴)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마르티노) |
데뷔 | 1955년 《피아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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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2. 배우 활동
1960년대 최고 인기 스타로 당대의 슈퍼스타 신성일, 최무룡, 신영균보다 선배이며 우위에 있던 배우.[5] 1950년대 중반 주연으로 올라선 그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지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통해 여성 관객들의 인기를 얻었다. 지금 배우와 비교하자면 한석규나 박해일과 비슷한 스타일. 특히 대한민국 영화 사상 손가락 안에 드는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범선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1961년작 영화 오발탄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오발탄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를 뽑고 피를 흘리며 택시를 타고 뇌까리는 '가자'는 1960년대 영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찍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사랑방 손님 역할로도 유명하다.1964년에는 벙어리 삼룡의 주연을 맡으며 최고 전성기를 보냈다. 1960년대에 받은 남우주연상만 9개다.(부일 5개, 청룡 2개, 대종상 1개, 백상 1개)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 '성웅 이순신'의 실패[6] 이후 이혼 등의 가정사로 곤욕을 겪었고 이만희 감독의[7] 마지막 작품인 1975년 삼포 가는 길이 사실상 마지막 히트작이 되었다.
말년인 1993년에 잡지 "호텔앤레스토랑"에 실린 인터뷰 사진 |
1987년 '하녀의 방'을 마지막으로 영화배우직을 은퇴한 후 1993년에는 제주도에 "비버리 힐스 호텔"을 열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1998년에 골수암으로 인해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3. 사생활 문제
신사적인 이미지와 달리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는 여자 관계가 무척 복잡했고, 술만 먹으면 개로 변해 폭력을 휘두른다고[8][9] 그의 2번째 부인인 배우 김보애가 쓴 자서전에 나온다.[10] 물론 이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은 일도 여럿 있었으며 또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는 김진규 영화를 보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김진규의 지저분한 사생활을 욕하는 코멘트가 종종 있다(...). 김진규의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빴다는 걸 보여 주는 사례.4. 주요 출연작
<rowcolor=white> 연도 | 작품명 | 배역 | 비고 |
1955년 | 피아골 | 철수 | 데뷔작 |
1958년 | 돈 | 영호 | |
이국정원 | 김수평 | ||
1959년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 이승만 | |
청춘극장 | |||
비극은 없다 | 서강욱 | ||
1960년 | 하녀 | 동식 | |
돌아온 사나이 | 박남호 | ||
로맨스 빠빠 | 전우택 | ||
박서방 | 박용범 | ||
표류도 | 이상현 | ||
1961년 | 성춘향 | 이몽룡 | |
서울의 지붕 밑 | 최두열 | ||
오발탄 | 철호 | ||
장희빈 | 숙종대왕 |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손님 | ||
현해탄은 알고 있다 | 나카무라 | ||
언니는 말괄량이 | 남편 | ||
1962년 |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 제나라 진승 장군 | |
골목 안 풍경 | 황호성 | ||
연산군 | 박원종 | ||
하늘과 땅사이에 | 변인규 | ||
1963년 | 고려장 | 구령 | |
1964년 | 벙어리 삼룡 | 삼룡 | |
잉여인간 | 서만기 | ||
마의 계단 | 현광호 | ||
1965년 | 순교자 | 신목사 |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조중구 | ||
태양은 다시 뜬다 | 황춘보(낭주골 농부) | ||
1966년 | 유정 | 최석 | |
대폭군 | 명쟁 | ||
1967년 | 다정불심 | 공민왕 | |
귀로 | 최동우 | ||
어느 여배우의 고백 | 김진규 | ||
팔도강산 | 청주 첫째 사위 | ||
1968년 | 카인의 후예 | 박훈 | |
1969년 | 떠나도 마음만은 | 강신호 | |
자유부인 | 장교수 | ||
황진이의 첫사랑 | 이필재 | ||
렌의 애가 | 시몬 | ||
1971년 | 성웅 이순신 | 이순신 | |
1972년 | 의사 안중근 | 안중근 | |
1973년 | 증언 | 연대장(특별출연) | |
1975년 | 삼포 가는 길 | 정씨 | |
불꽃 | 고 노인 | ||
1978년 | 난중일기 | 이순신 | |
1981년 | 사랑하는 사람아 | 강회장 |
5. 여담
- 배우 이덕화의 손윗동서다. 김보애는 이덕화의 처형이다.
- 장녀 김진아도 배우였으며[11] 삼남[12] 김진근도 배우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김진규 본인과 자녀들간 이름에 '진'자가 들어가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을 텐데, 사실 김진규는 김녕 김씨 26세 '규(圭)' 자 돌림이고, 자녀들은 27세 '진(鎭)' 자 돌림이다. 고로 자녀들간 이름에 '진'자가 들어갔다고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참고로 딸 김진아는 2014년 8월 20일, 암으로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김보애도 딸 사후 3년 뒤인 2017년 10월 14일, 하와이에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임진왜란과 인연이 깊은 배우인데 이순신 역은 물론이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둘 다 맡아 본 유일한 배우이다. 특히 이순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특수효과를 사용하여 이순신 영화의 주연과 제작을 겸했으나[13] 크게 실패하여 경제적으로 파산했을 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커리어도 타격을 받게 된다. 이후 김한민의 이순신 영화 시리즈가 나오기 이전까지 이순신 영화는 영화계에서 금기시 될 정도였다.
[1] 다만 호적상으로는 1923년 4월 12일생으로 되어있으며 《내 운명의 별 김진규》(2009년, 21세기북스)라는 도서에는 1922년 4월 16일 생으로 기록되어 있다.[2] 참조[3] 1939년 3월 15일 일본령 조선 경기도 김포군 출생, 2017년 사망(78세). 이덕화의 처형.[4] 1950년 생으로, 1974년 '김진'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신설'로 데뷔하여 90년대까지 배우로 활동하였다.[5] 다만 1967년 감독을 맡은 영화 '종자돈'의 실패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신성일이나 최무룡이 최고의 자리를 유지한 반면 김진규는 하락세를 탔고 197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거의 스크린에서 보기 힘들어졌다.[6] 이순신을 상당히 좋아했는지 1971년에 '성웅 이순신'을 찍고 말아먹은 뒤 1978년 '난중일기'를 또 찍기도 했다.[7] 배우 이혜영(1962년생)의 아버지.[8] 부인과 아들, 그에게 연기를 배우러 찾아온 제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들의 과외 선생 까지 상습적으로 구타했다고 한다.[9] 전무송의 회고에 의하면 김진규가 그를 좋게 보고 자신의 집에서 2년이나 숙식을 해결해주고 연극공부를 하게 해줬다고 한다. 그외의 다른일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10] 김진규의 첫 부인은 배우 이민자인데, 생활고와 김진규의 가정폭력으로 인해 이혼했다고 한다. 김보애의 자서전에서도 이민자가 재혼을 뜯어말렸다는 얘기가 나온다.[11] 김진규가 유독 편애하고 아꼈다고 한다.[12] 김진규는 전처 이민자와의 사이에서도 아들 둘을 낳았다.[13] 단 2편인 난중일기(영화)는 한갑진이 제작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