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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탈환작전[1] 平壤奪還作戰 Battle of Pyongyang | ||
시기 | 1950년 10월 18일 ~ 10월 20일 | |
장소 | 평양시 | |
교전국 | 대한민국 유엔군사령부 미국 영국 | 북한 |
지휘관 | 프랭크 W. 밀번 백선엽 | 최인 최용건 |
병력 | 28,250 명 | 제 19사단, 27사단 제 43사단, 239사단 |
결과 | 한국군과 유엔군 승리, 평양 탈환 성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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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 1군단 배속 한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한국군 2군단 소속 제7보병사단이 1950년 10월 18일부터 10월 20일까지 평양시를 탈환[2]하기 위해 치른 전투다.2. 전투 전 상황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은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전면적인 철수 명령을 내렸다. 10월 1일과 10월 2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잇따라 삼팔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하였다.이에 평양을 사수하던 조선로동당은 북한군과 함께 평양을 떠나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직접 지원을 거절했지만 중국은 회의 끝에 개입을 결정한다.
10월 9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탈환하기 위해 연천군 고랑포를 출발, 황해도와 평양 주변의 북한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백선엽 한국군 1사단장은 자신들의 목표가 평양이 아닌 해주시~남포시임을 알게 되어 밀번 1군단장을 찾아가 우리가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요청했고, 이에 미 전차중대 하나를 배속받아 본디 평양으로 진격하려던 미 24사단과 임무교대한다. 그리고는 10월 14일 신계를 거쳐 16일에 수안까지 도달한다.
10월 17일 미 1군단의 양익을 맡은 미 1기병사단과 한국군 1사단은 북한군의 외곽방어선이 있는 황주~율리선까지 진출하였고, 미 1군단은 10월 18일을 기해 평양 포위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
한편 한국군 1사단 15연대는 별도로 강동 쪽으로 우회해 대동강 북쪽 모란봉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한국군 2군단 소속 6, 7, 8사단은 평양 동쪽에서 계속 북진 중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 미 1기병사단이 평양으로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우리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라고 지시했고,[3][4] 이에 정일권은 한국군 2군단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달함으로써 한국군 7사단과 8사단이 평양 방면으로 방향을 튼다.[5]
3. 전투의 경과
영국의 British Pathe가 촬영한 기록영화 <한국 평양의 폐허> |
인천 상륙작전 이후 10월 19일 평양 탈환작전에서 선봉에 섰던 미1군단에 소속된 부대 중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보병사단, 1보병사단 간에 평양 선봉 입성을 위한 경쟁이 붙었다. 7사단은 이승만 대통령의 밀명에 따라 18일 오후 평양에 입성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평양 점령이라기 보다는 평양 강행정찰에 가까운 성격이다.
10월 18일 미 1기병사단과 한국군 1사단이 평양 포위를 전개하며 선교리 일대에서 진격하는 와중 대동강 상류 쪽에선 한국군 1사단 15연대와 한국군 2군단 7사단 8연대가 도하를 준비중이었고, 특히 8연대는 이날 아침 평양 동남쪽 40㎞ 지점의 율리에서 유재흥 2군단장과 신상철 7사단장이 평양을 먼저 점령하라는 작명서와 함께 트럭 20여대를 지원받아 차량화보병 상태로 달려온 상태라 팔팔했고, 이 덕분에 오후 5시 8연대 9중대가 먼저 평양에 입성해 김일성종합대학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후 8연대의 본대가 1사단 작전지 내로 침범해 들어왔고,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은 오후 9시경 백선엽 1사단장으로부터 "당신, 여기 왜 왔냐"라는 의문 섞인 추궁을 받았으나 이에 잔적들을 추격해 왔다며 둘러댔다. 이 와중 8연대의 대대들은 대동강변에 도착 후 근처에 버려진 배 3척으로 밤새 도하했는데, 이후 병력 수를 확인해보니 뜬금없이 1개 대대가 하나 더 있길레 확인해보니 1사단 소속이라길레[6] 이들을 임시 배속받는다. 이후 4개 대대로 김일성 대학을 거쳐 모란봉으로 향해 그곳을 점령하고 교전을 산발적으로 이어갔다. 이후 10시간 뒤 7사단 3연대도 8연대의 진격로를 따라 후속 진입했다.
10월 19일 일출 무렵까지 북한군과 교전하던 7사단 8연대는 갑자기 1사단 11연대로부터 57mm 대전차포로 공격당했고 소대 하나를 전령으로 보내는 와중에도 (지뢰 피해까지 겹쳐) 사상자 수십명이 나왔으며,[7] 당장 여기서 철수하라는 11연대장의 방송까지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 와중 한국군 1사단 12연대는 도하장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도하해 오전 11시 대동교 동쪽 100m 지점에 있는 동평양의 선교리로 진출했다. 뒤이어 오후 2시 쯤, 11연대가 동평양 북쪽 미림비행장을 점령함으로서 선봉 입성의 영광을 얻는다. 이후 야간에 15연대가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들을 제치고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을 점령했다.
이 와중에 모란봉을 거쳐 평양 북서쪽으로 진출, 화신백화점 평양점을 점령한 뒤 그곳에 CP를 차리고, 일대를 탈환해 나가던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은 오전 11시경 1사단장 백선엽과 대면당해 "전장 문란죄가 뭔지 아느냐" 며 추궁당했고, 이에 (유재흥) 군단장과 (신상철) 사단장께서 까라면 까라 어쩔수 없이 왔다며 쩔쩔맸다. 또한 1사단 장병들 역시 7사단에 대해 '전공 욕심에 눈이 멀었다'는 편견으로 7사단 장병들에게 또 알짱대면 진짜 쏘겠다며 위협했고, 이에 7사단 장병들도 '평양이 니네들 꺼냐, 위에서 까래서 온 거지' 라며 대치했으나 이후 "어쨌든 미군보다 한국군이 먼저 평양에 들어왔으니 됐지 않느냐"며 대치를 풀었다.#
10월 20일 한국군 1사단은 오전 10시 평양시를 완전 장악하였고, 제1사단에 이어 미 1기병사단도 대동강을 도하하였다. 또한 평양 선봉 입성의 체면을 살린 이승만은 1사단에게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전진이라는 부대 명칭을 하사하고 사단 장병 전원을 일계급 특진시켰으나, 정작 자신의 명령을 욕먹어가며 수행해온[8] 7사단은 쫓기듯 평양에서 물러나야 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탈환을 보도하는 당시의 라디오 방송. |
1950년 10월 30일, 평양시청 앞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을 환영하는 시민들. | 평양에 입성한 이승만 대통령과 그를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을 촬영한 현장 동영상. |
이승만 대통령 평양시청 연설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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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 위의 평양시청 앞 행사를 치르고 시청 베란다에서 그가 퇴장하려 할 때, 그의 신변을 우려한 측근자는 뒷문으로 빠져 나가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일축하면서 "나의 동포, 더구나 겨우 공산당의 공포 속에서 해방된 이 동포들과 내가 섞일 수 없다면 나는 대통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살고도 싶지 않다."고 말하며 정문으로 나와서 군중들이 열지어 있는 사이를 뚫고 동포들에게 악수를 하며 차로 이동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실제 찍힌 동영상에서도 군중 사이로 차를 몰고 평양을 나오는 장면이 찍혀있다.[11]
- 일단 대외적으로는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멋대로 침범해 중대 하나를 먼저 보낸 7사단보단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지키며 사단 전체가 평양으로 진주한 1사단을 평양선봉입성 부대로 인정하고 있으나 누가 먼저 입성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국군 1사단 소속 연대들, 7사단, 전사(戰史) 관계자 사이에서 입성 시간대, 점령 및 게양한 위치, 정통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 이견은 지금도 분분해 2010년 대한민국 국방부도 인정할 정도이며, 정일권 당시 참모총장은 1985년 이를 공동 입성이라고 증언했다.#[12]
- 한국군 7사단과 함께 평양 쪽으로 방향을 튼 8사단은 19일 성천을, 20일엔 강동을 점령했으나 이때는 이미 평양이 점령된 이후라 덕천 방향으로 향했다.
- 한국군 7사단 5연대는 이 당시 2군단 직속 예비대로 배속돼 8, 3연대를 따라 평양에 들어가지 않았다.
- 영연방 연합군이 사리원에 다다르자 그 근처에 있던 북한군이 영연방군을 소련군으로 착각한 적이 있었다.
-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하던 바로 그 날, 북한-중국 국경에서는 30만 명에 달하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었고,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처음으로 충돌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1] 대한민국정부(2010)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9) 등에서 표기하는 명칭. 이외에도 평양탈환전투, 평양 탈환, 평양 전투 등이 있다.[2] 해방 이후 평양은 북한 땅이었으나, 우리 헌법은 북쪽의 괴뢰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무력 점령한 상태로 보기에 되찾는다는 식의 표현을 쓴 것.[3] 여기에 집착한 이유는 개전 초기 탈취된 서울 선봉 입성을 미 해병대에게 빼앗긴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 게다가 이 당시 한국군 1사단은 미 1군단에 배속돼 그들의 명령을 듣는 상태였기에 (즉, 미군 소속인데다 그들이 멈추라면 멈출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에) 불안감을 키웠다.[4] 진짜 문제는 38선 이북 수복지구에 대한 한국 정부와 UN사 간의 다툼이었다. 한국 정부는 헌법에 따라 압록-두만강 이남 전 한반도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행정권과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UN사는 '대한민국'의 주권을 UN 결의에 따라 '38선' 이남으로 한정하며 그 이북지역에 대해서는 군정을 실시했다. 결국 문제의 시작은 한국군이 현실적으로 UN군의 지휘 하에 있다는 것이었으므로, 자존심 문제든 뭐든 일단 평양에 국군을 디밀어넣고 봐야 이후의 수복지구 주권 및 행정권에 대한 논쟁에서 뭐라도 말을 할 수가 있었다.[5] 이때 7사단 내에서도 유엔군 진격로를 이렇게 멋대로 바꿔도 되냐며 물었지만 유재흥 2군단장은 '평양을 먼저 따고 볼 것이다'라고 일축했다.[6] 정황상 15연대.[7] 다만 포탄이 아군을 향해 떨어졌다는 건 3, 8연대장도 공통 증언했으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건 검증된 정보없이 당시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의 주장이니 유의. 또한 국군간의 팀킬과 그 원인이 워낙 부끄러운지라 대다수에선 이를 생략하거나 위협 포격, 심지어 축포(!) 등으로 서술하고 있다.[8] 상술했듯 대통령이 지켜보시는 중대 사항이라 이게 문제가 될 것임을 알아도 감히 항명할 수 없었다.[9] 이승만은 1911년 YMCA 학감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하령회를 진행할 때에 평양에 방문한 것이 마지막이었다.[10] 1950. 10. 31. 朝鮮日報/東亞日報 보도[11] 李元淳, 《人間 李承晩》, 1965, 新太陽社, p. 365[12] 이와 비슷한 사례로 원산최초 입성문제가 있는데,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3보병사단이 이를 두고 쌍방 신경전을 벌이자 김백일 1군단장이 이종찬 장군과 송요찬 장군을 불러 공동입성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군단장이 까라는데 별 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