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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사건사고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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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
1.1. 독립군 토벌 여부 논란
2. 윤봉길 의사가 처단한 일본군 대장과 동성동명으로 창씨개명 논란3. '셀프 영웅화' 논란
3.1. 반론
4. 6.25 전쟁 중 휘하 병력의 민간인 학살 논란5. 동생 백인엽선인학원 비리 사건6. 부동산 투기 논란7. 대한민국 국군 최초 원수 추대 논란8. 국립현충원 안장 논란9. 국방부의 백선엽 미화 뮤지컬 제작 논란10. 국방부의 과도한 특혜 및 차량 사적 운용 논란11. 사생아 자녀 논란

1.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

백선엽의 대표적인 흑역사는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이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영토에서 무장 항일 투쟁을 벌이던 팔로군, 동북항일연군공산당 계열 독립군들을 토벌하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1]된 부대이다. 1938년 12월 15일 1기생 200명을 모집한 것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7기에 걸쳐 690여 명을 충원하였으나 여러 이유로 퇴역하거나 전출된 대원들이 많아 실제로는 대대급에도 못 미치는 300명 정도의 규모였다. 대원 대부분은 간도 현지의 이주 한인 청년들로 이들 상당수는 독립투사들을 탄압하는게 아니라 민생 치안을 위협하는 공산 비적떼를 소탕한다는 생각으로 자원했다고 한다.[2] 백선엽은 1943년 간도특설대로 전입되어 기박련(기관총·박격포중대, 즉 중화기중대)[3] 예하 박격포소대 소대장에 보임되었다.

간도특설대가 악명을 떨친 것은 이들이 수행한 비정규전의 성격이 큰 영향을 끼쳤다. 간도특설대는 정규 야전 부대가 아니라 특수부대여서 일부 대원들이 먼저 일반 농민으로 변장하고 독립군 활동 지역에 잠입하여 적극적인 정탐 활동을 벌였다. 이를 통해 독립군 거점이 파악되면 무장 본대가 투입되어 은신처와 협력 촌락을 급습해 토벌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 협력자들을 잔인한 방식까지 동원해 색출 및 처단하면서 악명이 높아졌다. 1939년~1941년에 걸쳐 간도특설대가 가담한 이런 일련의 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 등 공산당 계열 항일 독립군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김일성한인 항일 독립군들은 연해주로 넘어가 사실상 간도성에서 소멸된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백선엽이 전입된 1943년에는 간도성 내 무장 독립세력에 의한 치안 위협은 더이상 문제가 안 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1944년에는 아예 간도성을 벗어나 팔로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열하성하북성에서 특수 작전을 이어간다. 이 곳에서는 주로 팔로군들을 색출하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가혹 행위를 펼쳐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 만주 지역 이주 한인들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졌다고 한다.[4]

이러한 점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간도특설대가 만주국 산하에 동원되어 중일전쟁을 돕고 독립운동을 탄압한 친일 무장 조직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1943년 이후만을 놓고 보면 간도성에서 거의 소멸된 한인 항일 무장 세력 대신 주로 열하성과 하북성의 중국공산당 팔로군 빨치산과 그 협력자들을 상대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한인 독립운동가들만 골라서 앞장서서 때려잡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또한 백선엽은 부대 내에서 토벌 작전시 화력 지원을 담당하는 박격포 소대장 보직이었으므로 직접 촌락에 투입되어 협력자를 색출하며 학살을 자행하는 임무와는 거리가 있었다. 백선엽 본인이 간도특설대 복무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적극적인 친일 행위는 아니었다고 강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친여 성향 인사들이 장악한 단체 등에서 '백선엽이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해 "독립군과 전투 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했다. 백 장군은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해 간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고 없을 때였다"고 했다.
……
백 장군은 1993년 일본어판 자서전에서 간도특설대 근무 시절 조선인 항일 독립군과의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기술한 데 대해선 "1930년대 간도특설대 초기의 피할 수 없었던 동족 간의 전투와 희생 사례에 대해 같은 조선인으로서의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6.25 전쟁 발발 69주년 인터뷰 〈백선엽 "軍 간부들 정신 바짝 차려야"

물론 1943년 이후만을 놓고 봐도 중국 공산당 휘하의 중국인 군대 역시 일본에 저항하여 싸우던 연합군의 일원이었기에, 간도특설대가 조선인 독립군이 아닌 중국 팔로군과 주로 싸웠다고 주장해도 연합군에 해가 되는 행위(=대한 독립을 방해하는 행위)를 한 것은 매한가지다.[5]

이외에도 백선엽이 마음을 달리 먹었다고 한들 쉽게 간도특설대에 대해 사죄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사정도 있었다. 광복 후 간도특설대 간부 중 적지 않은 수가 대한민국 육군의 주요 창군 멤버로서 활약했다. 그 중 가장 영향력과 인지도가 있던 백선엽이 반민족행위 범죄를 사죄하면 나머지 국군 간부들도 눈치가 보여서 줄줄이 사죄해야 했을텐데 그러면 국군의 정체성과 위상은 바닥을 쳤을 것이다.[6] 지금에야 역사를 배워 알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대다수 국민들이 저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고 저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면 화난 민중들[7]에 의해 정권이 붕괴됐을 터. 게다가 당시 간도특설대의 토벌 대상이었던 동북항일연군은 1945년 이전에는 독립군이었으나 남북 분단 이후에는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는 김일성의 소위 만주 빨치산 그룹[8]이 있어서 이들을 토벌했다고 사죄한다면 북한 핵심 지도부에게 사죄했다고 북한에게 좋은 선전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결론내자면 6.25 전쟁 이후 백선엽 이하 친일 경력이 있던 멤버들이 국가 주요 요직에 있게 되니 반민족 반역행위를 사과를 안하는게 이들의 신상에 나은 결정이었고 북한과 반공 체제 경쟁 중이었으니까 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들의 과거사를 일단 덮어두는게 어느정도 필요하게 된 거라고 추측된다.

이런 불가피한 일부 정상을 참작하더라도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특설대 활동을 백선엽이 100%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은 당연히 감안해야 하고, 간도특설대가 적어도 창설 초기에는 한인이 포함된 동북항일연군을 상대로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에 가담한 부대였으므로 생전에 전직 대원으로써 도의적으로나마 보다 적극적인 책임 인정과 사죄를 했어야 했다는 지적은 영원히 유효한다. 실제로 백선엽과 달리 노태우 정부를 도왔던 현승종 전 국무총리는 늦게나마 자신의 친일 장교 복무 행위를 참회하기도 했다. # 이 부분은 분명한 백선엽의 과오이자 한계[9]라 볼 수 있다. 그 문제는 본인도 6.25 참전 동지인 채명신 장군도 알고 있어서 평생을 깨름칙하게 따라다니는 주홍글씨였다.

이 때의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으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백선엽은 이 책에 등재되어 있는 친일인사들 중 고중덕 등과 마찬가지로 당시까지 생존해있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1.1. 독립군 토벌 여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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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백선엽의 '군과 나' 일본어판 중)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 자체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지만, 백선엽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단 백선엽 본인은 2009년 인터뷰에서 '독립군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며 독립군을 직접 토벌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백선엽의 '군과 나' 일어판 저서에는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10]라고 본인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서술을 한 적이 있는데[11] # 이에 대해 백선엽 본인은 "동족상잔의 사례를 같은 조선인으로서 가슴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토벌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재차 주장했다. #

2. 윤봉길 의사가 처단한 일본군 대장과 동성동명으로 창씨개명 논란

만주군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창씨개명을 하였을 것은 거의 확실하나 문서상으로 확인되는 정확한 이름이 알려진 바는 없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백선엽도 이를 굳이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창씨명은 나와있지 않지만 뒤늦게 2014년 출간된 『간도특설대』[12]를 통해 알려졌다. 만주군 옌지 헌병분단장 소네하라 미노루(曽根原実)[13]가 남긴 회고록에 백선엽의 일본식 이름이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라고 언급되어 있다고 인용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백선엽이 일본군 헌병 중위로 복무한 사실도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군인들을 일본 내지인과 조선인으로 구분하여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엔 백선엽을 白善燁(白川義則)으로 창씨개명한 이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할 때 백(白)씨 성을 가진 조선인은 주로 시라카와(白川)나 시로하라(白原)로 개명했듯이 백선엽도 일본식 성으로는 일반적인 '시라카와(白川)'를 선택했고,[14] 이름으로 '요시노리(義則)'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개명하였다.

이게 논란이 되는 이유는 동성동명인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폭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한 달 뒤 사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의거 당시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일본 제국 육군 현역 대장이었으며, 관동군 사령관, 육군대신[15], 군사참의관 등을 역임한 고위급 장군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은 당시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 제공한 인물이 바로 6.25 전쟁 초기 백선엽의 제1사단을 포함하여 서부전선에서 후퇴하는 병력들을 수습한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16] 장군이다. 윤봉길 의사가 일본군 대장을 처단할 때 폭탄을 전해준 인물과 그 일본군 대장과 동성동명으로 창씨개명하고 이이제이가 모토로 독립투사를 잡는 집단인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이가 6.25 전장에서 함께 싸웠던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백선엽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개명한 것이 맞다면, 당시에는 우선 한국 성과 비슷한 일본 성(이 경우는 시라카와)을 따고 그 성을 가진 일본의 유명한 인물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백선엽도 단순히 이런 패턴을 답습했을 것으로 본다. 혹은 소네하라 미노루의 회고 자체가 부정확할 가능성, 즉 실제 일본식 이름은 달랐으나 소네하라 미노루가 육군 내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혼동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의혹은 백선엽의 정확한 일본식 이름을 교차 검증할 만주군 복무 당시의 공식 문건들이 추가로 발굴되어야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하는 측에서는, 이야말로 백선엽이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흠모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을뿐 아니라, 윤봉길 의사가 처단한 일본 육군 대장의 이름까지 따라할 정도로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는 이야기이다.
둘의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이 일치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 순 없습니다.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무언가 깊은 곡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1920년에 태어나 평양사범학교를 나온 ‘영명한’ 백선엽이 당시 동아시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윤봉길의 의거와 그 희생자의 이름을 몰랐을 리 만무합니다.
길윤형, 백선엽 회고록,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이이제이였다", 《한겨레》

그리고 2019년 6월 10일 당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백선엽 장군을 예방하고, 존경을 표하자 안민석 의원은 페이스북에 "무엇보다 백선엽은 윤봉길 의사가 목숨 바쳐 폭사시킨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 일본군 대장의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했다. 황교안 대표는 일본군 대장을 흠모한 백천(白川) 시라카와의 친일행각을 알기나 할까? 윤봉길 의사가 분통해 한다"라고 게시했다. 광복회 김원웅 회장도 “윤봉길 의사가 처단한 일본군 대장의 이름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개명한 철저한 토착왜구로 한번도 일제 패망 전의 행위에 대해 참회한 바도 없다'라며 성명을 냈다. 백선엽의 창씨개명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은 이 기간에 집중되었고, 당시 언론에 30건 이상, 지상파 뉴스에서 다루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인 2019년 6월 21일 백선엽 장군은 조선일보와 6.25 발발 69주년 인터뷰를 가졌다. 백선엽 장군은 이 인터뷰에서 최근 황교안 대표의 예방으로 논란이 된 간도특설대 복무 주장에 대해 언급했지만, 창씨개명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다. 국회의원·광복회 회장 발언과 언론의 보도로 사실과 다른 내용이었다면 백선엽 장군에 우호적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함께 다루었을 것이고, 이후라도 해명은 가능했을 것이지만 침묵을 유지한 것은 사실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3. '셀프 영웅화' 논란

백선엽 장군이 예편 뒤 자청해 30여년 동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 위선자'라며 '백선엽은 조작된 전쟁영웅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라는 주장을 박경석 장군이 제기하였다.

그는 “백 장군이 예편 뒤 자청해 30여년 동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과 채병덕 총참모장 등 일본군 출신 군인들 중심으로 한국전쟁사를 미화했다”며 다부동 전투를 예로 들었다. 낙동강 전선은 240km로 월턴 워커 중장이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등 8개 사단을 지휘해 워커 라인으로 불렸다. 백선엽의 제1사단은 8개 사단 가운데 하나였는데 공적이 부풀려진 일부를 전체로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다부동 전투에서 유명한 백선엽이 진두지휘한 '사단장 돌격'에 대해서도 “백선엽은 후퇴를 참 잘하는 사단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내가 등을 보이면 총을 쏘라’며 진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미담 역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 군사고문단을 극진히 대접해서 맺은 인연을 배경으로 미국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주장한다.

박경석 장군은 개전 초기 전투 상황에 대해서도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는데 6월24일은 육군구락부(현 육군회관) 준공 기념 파티가 열린 날로, 춘천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친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을 포함해 전방 사단장은 모두 참석했다는 것이다.[17] "백선엽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임진강 남쪽에서 후퇴하던 사단에 합류했다. 그도 사단장으로서 당연히 이 파티에 참석했을 것"이라며 "부대를 비운 이유로 든 교육은 의무가 아니라 출석을 임의로 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사단장이 없는 동안 닥친 전쟁에서 1사단은 속수무책 후퇴했다. 임진강 남쪽의 일부 병사들이 고향 집으로 달아나버릴 정도로 부대는 엉망진창이 됐다. 백선엽에겐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유재홍 준장의 의정부 7사단도 무너졌다. 춘천 지구를 방어하던 김종오 대령의 6사단만 제대로 싸우며 3일을 버텼다. 김종오 대령은 (전쟁 발발 전부터) 위기의식을 느끼며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대대장 이상 계급에 대해 전부 외박을 금지해두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이틀을 주춤한 이유도 6사단의 공로로 "김홍일 장군이 한강 방어를 안 했거나 춘천에서 김종오 대령이 인민군을 막지 못했다면 나라가 무너지는 판국이었다. 두 사람의 작전이 맞아떨어지면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사흘을 얻은 것이다.'라며 '김홍일 장군과 김종오 대령의 공로는 백선엽의 초기 행각에 대비해보면 철저히 과소평가되었다. 이런 구체적인 전쟁사를 요즘 군인이나 군사 전문가들은 잘 모른다. 백선엽 영웅 만들기에 가려져버렸다."라고 기사에서 주장했다.[18] 그리고 그는 1983년[19]대한민국 국방부가 선정한 4대 6.25 전쟁 영웅에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이라고 밝혔다.

이후 박경석 장군에 이어 서상문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의 고백이 이어졌다. 그는 백선엽 장군이 자문위원장으로 있었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약 13년간 연구원으로 일했고, 소속 연구자들이 백선엽 장군의 이야기를 비판 없이 기록하는 과정을 지켜본 인물로 '셀프 영웅화'로 의심받는 '군사편찬연구소' 관련자가 비판에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서상문 박사는 "백선엽 장군은 사망 전까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이라는 자리를 활용해 자신을 영웅화했습니다. 공적인 자리를 이용해 교묘하게 과오를 감추고 공적을 미화한 것입니다."라고 비판하며 "자문위원장인 백 장군은 독립군을 탄압한 자신의 간도특설대 활동이나 전쟁 초기 1사단장으로서 실책은 전혀 말하지 않고, 공적인 다부동 전투와 평양 입성 전투만을 과장했다. 내막을 살펴보면 다부동 전투는 미 공군 공습과 2개 연대 병력 등의 전폭적인 지원이 방어 성공의 결정적 요소였고, 인근 영천 전투나 낙동강 서부지역의 마산 전투 등도 중요한 전투였는데 다부동 전투만 지나치게 미화됐다. 한국전쟁 때 백 장군 혼자서 대한민국을 구한 것처럼 기록하거나 떠받드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며 평양 입성 전투와 관련해서도 "사실상 북한군 주력 부대가 모두 빠져나간 뒤 무혈입성이라서 과대 포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고 했다.

개전 초기에 대해서도 과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는데, "개성, 문산, 파주 등지가 주요 방어 지역인 백선엽 1사단장이 한 일은 후방으로 후퇴하면서 패잔병을 모으는 일뿐이었다는 지적이 있고 육군본부 장교구락부 낙성 기념 축하 파티에 참석해 부대 복귀가 늦었다는 의혹과 전방이 속수무책으로 뚫려 서울이 조기에 점령당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3.1. 반론

그러나 박경석과 한설의 이러한 주장은 극단으로 치우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이 두 예비역 장군은 6.25 전쟁사 분야에서 대표적인 빠가 까를 만든다의 사례로 꼽힌다. 과거에 전황을 교차 검증할 공산권 자료와 미군의 기밀자료가 부족하고, 냉전시대 남북간 체제 경쟁을 위해 의도적인 미화와 책임 회피가 필요했던 시기에는 백선엽의 전공이 무비판적으로 미화된 바가 어느 정도 있었다. 또한 이들 비판자들은 군 내부에서 과거 극심했던 육군 내 파벌과 비리 문제를 몸소 겪으면서[20], 이를 방조한 백선엽, 정일권, 이형근 등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장군들에 몹시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이들이 대접받는 사이에 묵묵하고 강직한 참군인들이 충분히 인정을 못 받았다는 인식이 누적되면서, 백선엽로 경도된 것이다.[21]

반면 오늘날에는 훨씬 다양한 북한소련 측 자료[22]가 드러나고 전황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백선엽의 입김과도 무관한 연구들이 많이 진척되었다. 그러한 검증을 거쳤음에도 백선엽이 6.25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는 시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표적으로 박경석과 한설이 과장되었다고 비난하는 다부동 전투의 경우, 8월 초 ~ 중순에 북한군이 가장 강력한 주력부대를 집중시킨 주공점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한국군 제1사단에 대해 북한군은 김무정이 이끄는 제2군단 예하 3개 사단[23]이 다수의 포병과 전차를 동원해 맹공을 퍼부었다. 이런 우세한 적을 맞아 8월 1달간 1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사상자[24]를 내며 방어에 성공한 점은 영웅적 전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낙동강 전선의 다른 사단들도 선전한 것은 분명하나, 제1사단의 전공을 무색하게 할만큼은 못된다. 북한군 제2군단은 백선엽의 제1사단이 결사적으로 방어에 나서 정면 돌파가 어려워지자 8월 하순부터 영천시 일대로 일부 병력을 전환했고, 이에 따라 제6·8·수도·3사단 구역으로도 점점 전투가 격화된다. 이들 한국군 4개 사단이 북한군 제1·8·15·12·5사단의 5개 사단을 맞아 싸운 것을 생각하면, 단독으로 북한군 3개 사단급 병력의 연이은 공격을 상대해야 했던 8월 초 제1사단의 임무가 얼마나 어려웠던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6.25 전쟁 개전 초기의 패퇴에 관한 비판 중 일부는 적절한 측면이 있는데, 핵심은 후퇴 명령을 기다리느라 철수 적기를 놓쳤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비판은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먼저 백선엽의 방어 작전은 준수했다. 6월 14일 시흥 보병학교 고급지휘관 과정에 입교해서 부재중이었지만, 전쟁 발발 즉시 전선에 복귀하였고, 25일부터 27일까지 파주의 임진강을 중심으로 매우 안정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실제로 북한군 1사단의 파주방면 공격은 임진강-봉일천에서 국군 1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당시 1사단의 문산 방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는 당시 작전지도를 위해 방문했던 김홍일의 회고에서도 드러난다. 김홍일이 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시점에서 1사단은 봉일천 방면 고수는 물론 임진강선의 원진지 회복을 위한 역습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경청할 만한 부분은 철수 작전이 늦었다는 비판인데, 이 지적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27일 오후 북한군의 전차가 창경궁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당시 1사단 사령부에 있던 김홍일은 즉각적인 철수 작전을 권고했으나 백선엽은 이에 대해서 "철수 명령 없이 철수는 없다."고 발언하였고, 이러한 취지에서 김홍일에게 퇴각을 건의해 줄 것을 부탁하게 된다.[25] 이 부분은 명백히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군인은 명령을 따르는 존재이지만, 장성 또는 사단급 이상의 제대를 운용하는 지휘관은 상부 명령을 곧이 곧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 당시의 상황은 낙동강 전선처럼 절박하고 최후의 상황이 아니었으며, 후퇴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황에서는 후퇴하고 병력을 수습 또는 다시 방어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타당했다. 그 누구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명장이라고 칭송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시기 백선엽에게는 사단장이 지녀야 할 유연성이 부족하였고, 철수가 늦었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한 비판이다.

그러나 27일 오후 시점에서 후퇴를 결심하지 않아 1사단이 야포를 비롯한 중장비를 상실하고 부대 건제를 유지하지 못한 채 철수했다는 일부의 지적은 틀렸다. 애초에 한강 철교가 성급하게 폭파된 시점에서 한강 북안에 투입된 국군 병력에게는 중장비와 부대 건제를 유지한 채 철수할 방법 자체가 없었다. 북한군이 너무 빠르게 진군한 것이었다. 이는 동두천/포천-의정부 축선에 투입된 7사단, 2사단, 5사단이나 수경사(이후 수도사단) 병력이 모두 중장비는커녕 부대건제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분산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심지어 타격이 컸던 7사단과 2사단, 5사단은 시흥지구사의 부대 수습 과정에서 아예 사단이 해체되기까지 한다. 이에 비하면 이후 부대 수습에 성공한 1사단의 철수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게다가 김홍일이 백선엽에게 철수를 권고했던 27일 오후 시점에서 봉일천의 1사단이 중장비 및 부대 건제를 유지하고 철수하려면 즉각 단독으로 한강교를 통해 한강 남안으로 철수해야 한강교 폭파 시간에 맞을까 말까한 상황인데, 이렇게 되면 의정부-미아리 축선에서 어떻게든 북한군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아군 병력은 모조리 문산 축선의 측방위협에 노출된다. 철수 명령도 없는 상황에서 이 정도로 크게 후퇴하는 건 적전도주나 다름없다. 원래 철수를 권고한 김홍일조차도 봉일천의 현진지에서 보다 남쪽의 한강 동안으로 물러나자고 한 거지 한강 건너편까지 철수하라고 한 건 아니었다. 백선엽의 개전 초 작전이 진짜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한강교 폭파와 중장비 상실이 아니라, 김포반도 전투와 연관돼 있다. 1사단은 1950년 5월 수립된 작계에 따라 전쟁 발발 후 개성을 포기하고 임진강-봉일천 선으로 후퇴해 좁은 정면에서 지형장애물을 끼고 적의 남진을 방어했는데, 그 결과 적 1사단(+)의 공세는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북한군 6사단(-)의 개성-김포반도 도하 시도는 지연조차 불가능했다. 적 6사단이 김포에서 경인가도로 내달려 한국군 후방을 차단할 수 있었음을 고려하면 상당히 위험한 작전 계획이었다. 물론 이는 애초부터 1사단 정면이 과도하게 넓었고[26], 열세한 전투력에도 처절히 저항한 김포지구사의 분투 덕택에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결과론적이긴 해도) 정상참작이 가능한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비판은 부대 지휘 경험 차원에서도 가혹한 측면이 있다. 백선엽은 정규전을 경험한 적도, 사단급 병력을 지휘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철수지도를 한 김홍일의 경우 중일전쟁에서 오랜 경험이 쌓였으며, 실제로 작전을 지도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를 쉽게 파악하였지만, 백선엽은 이제 막 대부대 지휘관이 된 인물이었다. 당연히 경험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몰랐다. 물론 백선엽 스스로도 철수를 해야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명령없는 철수가 오히려 큰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 우려했던 것이다. 이는 백선엽이 아직 고급 지휘관 교육을 이수하기 전이었으며, 초급 지휘관의 경험만 있었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이후 백선엽의 부대 운용을 보면 상부의 명령을 무조건 기다리기 보다는 전황의 상황에 맞추어 행동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다부동 전투에서 상부에 지원 요청이나 기타 요청 또는 명령 없이 직접 적진에 돌입하기도 했다.

물론 백선엽의 철수 결심이 늦어 사단 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본인도 사단과 떨어져 남하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본인도 자서전에 장병들에게 살아서 남쪽에서 보자고 말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다른 사단과 달리 소규모 제대를 유지하여 철수하게 했고, 이는 김홍일이 1사단 병력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요약하자면, 1사단의 전쟁 초기 운용에서 약간 부족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경험 부족이 원인이었으며 6사단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사단에 비해 준수한 운용을 보여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시행 착오를 경험 삼아 발전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비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백선엽이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는 것은 이런 초반의 시행 착오를 딛고 낙동강 전선 구축 이후 가장 두드러지는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낙동강 전선 구축 단계에서 제8군 사령관이던 월튼 워커는 대구로 향하는 북한군 주력을 상대한 미군 제1기병사단 우익으로 신뢰할만한 한국군 사단을 요구했는데,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백선엽의 제1사단을 지정하자 월튼 워커도 만족하고 받아들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전쟁 초기부터 제1사단은 한국군을 무시하던 미군들도 그나마 사단장의 지휘력이 괜찮다고 인정하던 부대였다. 전쟁 초기 선전한 김종오도 나중에 현리 전투에서 제3사단장으로 참패한 흑역사가 있었던 것처럼, 6.25 전쟁에서 백전백승의 완전무결한 장군들은 없었다. 그 가운데 전쟁 개전부터 종전까지 통틀어 놓고 본다면 백선엽이 상대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양호한 지휘력을 발휘하며 미군 지휘관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줬다.[27] 백선엽이 미군과의 소통에 능해 실력 이상으로 인정받았다는 평가는 일부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으나, 어차피 당시에는 한국군의 능력이 매우 미흡하여 미군의 지휘 하에서 미군 부대들과 연합 작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론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동맹군과의 소통 능력은 지휘관 능력의 플러스 요소로 평가해줄 수밖에 없다.[28]

박경석이야기하는 6.25 전쟁 4대 영웅을 인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일단 1983년 혹은 1984년[29]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에서 선정했다는 '4대 영웅'을 언급하는 사람은 박경석 밖에 없다. 어떤 기준으로 누가 선정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바도 없고, 현재 6.25 전쟁 연구에 인용되거나 한국군에서 이를 교육하는 사례조차 없다. 그리고 설령 당시 그런 '4대 영웅'을 선정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들 4인만 영웅이고 나머지는 영웅이 아니라는 증거도 될 수 없다. Top 4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30]

그런 식이라면 2000년에 미국 정부에서 6.25 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아 선정한 4명의 전쟁 영웅은 더글라스 맥아더, 매튜 B. 리지웨이, 백선엽, 김동석[31]이다. 미국 정부가 공인한 4명의 전쟁 영웅에 포함되어 있는 점은 무시할 것인가? 당장 전쟁 중에 혁혁한 전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많은 군인들[32]은 '전쟁 영웅'이 아닌가? 박경석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4대 영웅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조작된 전쟁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다른 예로는 마산 전투가 6.25 전쟁사에 누락되어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백선엽이 다부동 전투의 전공을 강조하려고 다른 부대들의 활약을 축소했다는 음모론에 가까운 이야기도 나돈다. 하지만 마산 전투는 누락되기는커녕 1970년에 발간된 한국군의 공식 『한국전쟁사』에서도 상술되는 등 많은 자료에서 언급되었으며, 특히 대한민국 해병대는 진동리에서의 승전을 대대적으로 기념해왔다.[33]

백선엽의 전공이 과장되었다는 평가의 원인은 백선엽에 대한 인지도가 다른 장군들에 비해 너무 높다는 점에 있다. 김홍일의 경우에는 백선엽이 스스로 인정한 전공을 지닌 인물임에도 그 인지도는 매우 낮으며, 김석원은 한국전쟁 초기 서부전선 최초 승리, 포항철수작전 등의 신화를 만든 인물임에도 인지도가 낮다. 김종오의 경우 북한군 3개사단과 1개여단을 갈아버렸지만 인지도가 낮다. 이성가의 경우 전쟁초기 가장 견실한 부대운용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는 사람은 없다.[34]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전쟁에서 백선엽의 업적이 더 커보이는 부작용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가끔 이러한 인지도를 두고 백선엽의 셀프 영웅화의 증거라며 비판하는 경우가 있지만 타당하지 않다. 국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 기껏해야 80년대 중반이었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장군은 백선엽이 유일했기 때문이다.[35]

4. 6.25 전쟁 중 휘하 병력의 민간인 학살 논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이 반격 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상주 일대에서 백선엽 휘하의 제1사단 병력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는 주장제기되었다. 한국군 병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은 반공이 강조되던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침묵하고 있다가, 4.19 혁명 이후에야 국회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으며, 당시 제4대 국회의 진상조사 특별 위원회에서 집계한 바에 의하면 78명의 무고한 양민 희생자가 접수되었다.

5. 동생 백인엽선인학원 비리 사건

백인엽이 저지른 선인학원 비리와 관련하여 인천시민들에게 욕을 먹고 있다. 백선엽 본인은 선인학원 운영이나 비리 자체와는 무관했지만, 동생의 잘못을 덮어 주려 한 행동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선인학원은 백인엽이 설립한 학원 재단으로 산하에 여러 중고교와 인천대학교 등이 재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백인엽의 비리로 학원이 막장화되면서 인천 교육계의 골치거리가 되었다. 오랜 진통 끝에 1994년 국가에서 선인학원 산하 학교들을 모두 백인엽으로부터 몰수한 후 국공립 학교로 전환되었다.

선인학원 비리로 인해 결국 80년대 초 백인엽이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백선엽의 으로 10개월만에 풀려난 바 있다. 또 전두환 정권 당시 문교부 장관 이규호가 선인학원의 국·공립화를 추진했으나, 막판에 백선엽이 선인학원의 관선 이사가 되어 선인학원의 국·공립화가 무산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선인학원백인엽 항목 참고.

6. 부동산 투기 논란

백선엽은 평생 군인이었다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부동산으로 상당한 자산을 모으기도 했다. 백선엽의 대표적인 자산으로는 강남역 5번 출구 앞의 덕흥빌딩(현 363강남타워)[36]이 있으며, 시가 약 1000~1500억원 정도[37]로 추정된다. 이태원동에 위치한 백선엽 부부의 자택 또한 시가 5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선엽이 이만한 부를 축적한 것은, 고위 공직자로 재직하던 1970년대부터 부동산 요지에 계속 투자해왔기 때문이다. 백선엽은 1971년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이후에는 당시의 알짜 공기업이던 충주비료(1비) 사장을 맡았다. 이후에는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호남비료(2비) 사장을 겸직하며 1973년 이 두 회사가 한국종합화학공업으로 합병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이렇게 장관과 공기업 사장을 하며 상당한 개발정보와 여유자금을 얻게 되자, 1972년부터 평택시 팽성읍 일대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한다.[38] 이어 1977년에는 강남구 역삼동의 임야, 1979년에는 강남구 삼성동의 토지[39], 1987년에는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1채 등 강남 부동산을 적극적으로 매입했다. 이 과정에서 백선엽 부부는 부인 노인숙 씨와 장남 백남혁 씨(1953년생)로 명의를 분산해 부동산을 구입했다.

이렇게 투자한 강남과 평택의 부동산은 1980년대를 거치며 가치가 폭등하였다. 1986년에는 기존에 소유하던 역삼동 임야 464평을 서초동 땅 258평과 맞바꾸는데, 이 서초동 땅이 현재 덕흥빌딩 부지이다. 그러다가 당시 극심한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1990년부터 토지 초과이득세가 도입되자, 노인숙 씨는 세금 회피를 위해 이곳 강남역 땅을 1990년에 장남에게 명의 신탁을 해버리고 1992년에는 오늘날의 덕흥빌딩을 신축했다.[40] 재미 언론인 안치용이 추적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후 장남이 이 건물을 독식하려고 들자, 백선엽 부부는 부인(노인숙)과 다른 3명의 자녀(장녀 백남희, 차녀 백남순, 차남 백남흥) 명의로 장남에게 소송을 걸어 소유권 절반을 되찾아왔다. 장남은 그 후 이 지분 절반을 약 400억 원을 지불하고 다시 구입했다고 한다.[41] 말하자면, 백선엽 부부는 부동산 투기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거부를 일구었고, 차명 재산 분산 과정에서 스텝이 꼬여 자산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가족 내부의 골육상쟁 소송전까지 겪은 셈이다. 안치용은 이외에 장남 외 다른 3명의 자녀들도 모두 미국에 거주하며 상당히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음도 보도하였다.

이런 백선엽 부부의 축재 과정은 일견 운 좋은 부동산 투자로 보이기도 하나, 존경받던 군 원로의 부인이 복부인으로 활동하며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다는 비난도 상당하다. 특히 백선엽처럼 교통부 장관과 대형 공기업 사장을 역임했던 인사라면 상당한 개발 정보를 미리 획득했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당시에는 워낙 보편적이기는 했으나) 차명 거래와 명의 신탁을 통해 갖은 세금 회피를 시도하고, 나중에는 재산 다툼으로 부모자식 간의 볼썽사나운 모습까지 보였다는 점을 옹호하기는 힘들 것이다.

참고로 백선엽의 사촌 누나가 바로 명동 사채 시장의 큰손 '백 할머니'로 이름을 떨친 백희엽이기도 했다. 전설의 '백 할머니' 백희엽은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백선엽 부부의 남다른 축재에 백희엽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으나, 명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

헌데, 없다라 보기에도 뭐한 것이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된 한국경제에서 없었다는 것이 더 큰 자산임에도 이를 침묵하는 것도 중대 의심사유다.거기에 박현주가 처음 추진한 헤드헌팅한 펀드매니저들 중에는 축구계 유명 인사의 사위도 있는데, 그 유명 인사의 형이 은행계에 오래 있었기에 그런 인재를 알아보고, 조카 사위감이라며, 동생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그런 점은 은언중에 감추어져 있다. 심지어 축구교실이 온갖 관련 문제가 터질 때에 그런 관련성도 침묵된 것이 위의 문제가 동일한 상황이다.

7. 대한민국 국군 최초 원수 추대 논란

6.25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백선엽을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로 추대하자는 이야기는 성우회, 재향군인회 등의 예비역 단체들에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거론되어 왔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2월, 당시 국군기무사령부 사령관이던 김종태 중장은 예비역 장군들의 이러한 의견을 수렴하여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김종태 사령관은 추대 이유로 "명예원수 추대는 오성(五星) 장군에 준하는 장군 임명 건이기 때문에 이번에 추대를 하면 백선엽 장군이 개인적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6·25전쟁 참전자들의 자긍심도 올라가고, 국민들의 안보의식도 높아질 것" 등을 꼽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청와대에서 직접 나서는 것보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나서는 것이 모양새가 좋다는 의견을 추가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국방부는 법률 검토에 착수하였다.#

시기상으로도 2010년은 6.25 전쟁 발발 60주년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민관 합동의 '6·25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한승수 당시 국무총리, 이홍구 전 국무총리 공동위원장)를 발족시켰고, 대한민국 국방부도 자체적으로 '6·25전쟁 60주년사업단'을 만들어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백선엽의 원수 추대 및 회고록 발간도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가 기획한 사업안 중 하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방부의 법률검토 결과 정식 원수로 추대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당시 원수 계급에 대해 규정하고 있던 군인사법(軍人事法) 제27조는 다음과 같았다:
제27조(원수임명) ①원수는 국가에 대한 공적이 현저한 대장중에서 임명한다.
②원수의 임명은 국방부장관의 추천에 의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행한다.
우선 여기서 1항의 대장은 현역 대장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예비역 대장인 백선엽은 해당이 안 된다. 또한 군인에게 있어 현저한 공적이란 당연히 전공(戰功)을 의미하므로, 이 조항의 취지를 따져보면 원수 진급은 전시에만 가능하다. 결국 이는 부담스러운 법률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김태영 국방장관은 부담이 덜한 명예원수 계급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하지만 이 역시 법률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진급을 규정한 군인사법 제24조와 '예비역의 진급 및 장교 임용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군인사법]
제24조의4(명예진급) ①복무중 공적이 특히 현저한 자가 제53조의2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명예전역하는 때에는 명예진급시킬 수 있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명예진급된 자의 연금, 명예전역수당등 각종 급여의 지급은 명예진급전의 계급으로 하고, 기타 예우는 명예진급된 계급으로 한다.
③명예진급의 요건 기타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예비역의 진급 및 장교 임용에 관한 규정]
제2조(진급대상자) 예비역의 장교·부사관 또는 병으로서 제3조의 규정에 의한 진급에 필요한최저복무기간을 경과하고 120일의 범위안에서 국방부장관이 정하는 기간의교육소집을 마친 자에 대하여는 그 원에 의하여 진급시킬 수 있다.
제3조(진급최저복무기간) ① 예비역장교의 진급에 필요한 최저복무기간은 다음과 같다.
진급될 계급 최저복무기간
대령 중령으로서 7년
중령 소령으로서 7년
소령 대위로서 7년
대위 중위로서 6년
중위 소위로서 2년

이들 조문을 살펴보면 예비역은 대령까지만 진급이 가능했다. 명예원수로 추대하려고 해도 법적 근거가 없던 것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국방부는 입법부 차원에서의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군 출신 국회의원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김장수 의원(전직 제40대 국방장관), 황진하 의원(전직 유엔 키프로스 평화유지군 사령관, 하나회 출신) 등이 나서서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를 위한 제도 정비를 역설했다.

그런데 문제는 법률적 부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 소식이 알려지자, 군 원로들 가운데서도 백선엽의 원수 추대를 극력 반대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터져나왔다. 예컨대 역시 6.25 전쟁 영웅이자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42] 장군이 그러했다.
채명신: 큰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 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 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 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 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 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

박경석: 제 생각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령관님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일반 국민들의 상당수가 백선엽 자신에 의해 과장된 6·25 전쟁사를 통해 (백선엽을) 낙동강에서 조국을 구한 유일한 영웅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반인 뿐만 아닙니다. 국방장관을 역임한 예비역 장성과 중앙일보 등 일부 보수 일간신문도 백선엽이 우리나라 제일의 전쟁 영웅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용 상당량이 과장된 것이지요.
박경석, 《불후의 명장 채명신》, 460쪽

이 증언을 채록한 박경석[43] 예비역 준장도 격렬한 반대자였다. 박경석은 본인의 홈페이지에 '백선엽이 일본국 괴뢰정부인 만주국 간도특설대의 육군중위 계급으로 독립군 소탕작전을 지휘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는 점, 낙동강 전선에서 활약이 과장 평가되었다는 점, 북한이 남한에 대해 건군 과정을 헐뜯는 내용이 일본군과 만주군에 의한 건군인데 백선엽이 건국 첫 명예원수가 된다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점'을 담은 성명서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는 세기의 난센스다〉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름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은 많은 군 원로들도 대한민국 국방부청와대에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단독]군 원로들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다 이들은 다른 장교들도 백선엽 못지 않게 많은 고생을 하며 전공을 세웠는데, 유독 백선엽만이 영웅시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44]

특히 다부동 전투 이전 개전 초기에는 경험 부족으로 상당한 실책도 연발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모 장군은 "백선엽 장군은 간도특설대 출신인데 대장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제대로 한 것이 뭐가 있는지 궁금하다[45]"면서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金鍾五) 장군(작고·예비역 대장)은 잘 싸웠기 때문에 서울 진격을 지연시켰지만,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개성을 무방비 상태로 점령당하고, 봉일천에서 사단사령부가 기습당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했는데, 무슨 영웅이고 원수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일부 창군 원로는 청와대 안보특보실에 자필 편지를 보내 "비열했던 백 장군의 과거까지 까겠다"고 극언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군 원로들의 반발,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광복회의 반발 등이 겹쳐지자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명예원수 추대 사업에 대한 의지를 꺾게 된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에서도 백선엽 회고록 출간 정도로 관련 사업을 축소하여 진행한다. 이어 전쟁 발발 6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시기가 지나고 그해(2010년) 11월 23일에 연평도 포격전이 이어지며 명예원수 추대 사업은 완전히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백선엽 원수 추대를 환영하던 몇몇 보수 단체는 되려 보수 단체를 지지하던 채명신 장군이라든지 여러 군인사들 결사반대에 실망하여 손수 찾아가 공감하시라고 설득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이런 설득에 결사반대 자세를 보였다고 한다. 조선일보나 월간 조선에서도 환영하던 논설을 썼지만 여기서도 집필하던 채명신을 비롯한 보수 인사들 반대에 이걸 뭐라고 비난할 수도 없어 결국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했다.

8. 국립현충원 안장 논란

2020년 5월 24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가 개최한 '2020 친일과 항일의 현장, 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기' 행사에서 더불어민주당이수진 국회의원(서울 동작구 을)과 김병기 국회의원(서울 동작구 갑)의 발언으로 촉발된 논란이다. 이 자리에서 이수진 의원은 "친일파 묘역을 파묘(破墓)하는 운동과 함께 법률안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고, 김병기 의원은 한술 더 떠 "지금까지 묻힌 자들도 문제지만 앞으로, 예를 들면 백선엽의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46]발언하였다.

이렇게 백선엽을 비롯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된 인물들을 국립현충원에서 내몰거나, 그 사실을 적시하려는 시도는 국가보훈부 산하 공법단체인 광복회 등 독립운동 기념 단체들을 중심으로 그간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실제로 광복회는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친일찬양금지법의 제정과,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 인사의 묘지에 친일행적비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이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입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하자 논란이 수면 위로 불거진 것이다.

그러자 반대 여론도 즉시 격렬하게 제기되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입장문을 통해 "정치권을 중심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워 국립현충원에서 친일파 무덤을 파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무책임한 행위"라면서, 백선엽이 6.25 전쟁에서 헌신한 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친일로 매도하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일단 현행 국립묘지법 상으로 백선엽이 국립현충원 안장 대상임은 명백하다. 국립묘지법에는 국립서울현충원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대상자를 규정(제5조 제1항 제1호)하고 있는데, 백선엽은 다음 2개의 목에 해당된다:

백선엽은 무공훈장 중 최고 1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역시 대한민국 국군 최고 계급인 대장으로 전역했기 때문이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도 "백 장군은 현행법상 현충원 안장 대상이 맞다"며 "다른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이를 재차 확인하였다.

다만 국가보훈처국립서울현충원은 장군 묘역이 포화된 상태라 불가능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게 합당하다는 방침이다. 이는 과거 이명박 정부 및 박근혜 정부 시절의 입장에서 다소 변화한 것이다. 당시에는 6.25 전쟁 최고의 공적을 세운 백선엽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 예우하자는 의견에 호의적이어서, 위의 두 요건 대신에 국립묘지법 상의 국가유공자 요건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이는 빈 자리가 없는 장군 묘역 대신에 약간 여유가 있는 국가유공자 묘역을 이용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겠다는 방안이었다. 백선엽은 무공훈장 이외에도 산업훈장 중 역시 최고 1등급인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으므로,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 규정을 적용받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가보훈처국방부는 특혜 논란[47]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이 방안을 적용할 수 없다는 방침을 백선엽 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예외로는 2013년 작고한 채명신 장군(전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이 생전에 "내가 장군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니 내가 죽으면 나를 국립묘지의 장군묘역에 묻지 말고 월남에서 전사한 사병들의 묘역에 묻어달라"며 장군으로서의 특혜[48]를 포기함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사병 묘역에 안장되려면 공간이 협소하여 화장이 불가피한데, 백선엽 본인이 매장을 원하고 있어 이 전례를 따를 가능성은 없는 상태이다.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방침에 대해 보수 정치권 및 퇴역군인 단체를 중심으로 여전히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을 주장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윤상현 국회의원은 "서울현충원에 자리가 부족해도 없는 자리를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모시는 게 나라다운 책무이고 예의이고 품격"이라고 주장했고,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백 장군을 위한 자리는 서울현충원에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이 일종의 '홀대'라는 주장이 존재하지만 정작 홀대라는 객관적 근거는 없다.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은 예우와 훈격 수준에서 차이가 없으며, 국방부와 국가보훈처에서는 "같은 국립묘지로서 차등은 전혀 없다"고 밝히고 있다. 국립묘지별 안장 대상자를 적시한 국립묘지법 제5조에도 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연천현충원은 한 항목으로 묶여 있듯이 동등한 예우를 받는다. 현충일 추념식도 서울, 대전에서 번갈아가며 치러지고 있다. 이렇듯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홀대'로 볼 근거는 없으나,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을 바라는 쪽에서는 서울이 갖는 상징성과 접근성을 이유로 서울 안장이 적절하다주장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애초에 6.25 전쟁 전사자들을 매장하기 위한 국군묘지로 설립된 곳이기 때문에, 6.25 전쟁의 영웅으로 꼽히는 백선엽을 전우들과 안장한다는 상징성도 거론되고 있다. 채명신이 특혜를 포기해가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고자 했던 이유도 6.25 전쟁베트남 전쟁의 전우들 대부분이 묻힌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울현충원 포화 상태로 안장이 중지된 이후 새로 발굴되거나 안장 자격이 생긴 6.25 전사자들은 대전에 안장되고 있기 때문에, 이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논란에 대한 백선엽 및 가족의 의사는 유동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국가가 정하는대로 따른다입장만을 내세우고 있다. 특별히 국립서울현충원을 고집하지 않고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 안장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로 해석된다. 다만, 이번 논란이 초래된 바와 같이 정치권에서 파묘 또는 친일행적 적시 등을 명문화하는 법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아 보일 경우, 그런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고 싶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비하여 가족과 측근들은 다부동 전투 전적지 주변에 따로 땅을 마련해놓았다고 한다. 관련하여 백선기 칠곡군수는 "4~5년 전 백 장군을 찾아뵈었을 때 ‘다부동 인근에 땅을 사둔 게 있다’며 ‘전우들의 넋은 다부동 산하에 누워있는데 내가 국립묘지로 간들 편히 발을 뻗을 수 있겠나’는 말을 하시더라"고 증언하기도 했다.[49]

2020년 7월 10일 별세 후 장지는 유족들의 신청으로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정해졌다는 발표가 나왔다.

2020년 7월 16일 국가보훈처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 내 백선엽의 안장자 정보 비고 항목에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라는 문구를 명시했다. 다만 해당 문구는 백선엽 외에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사람 중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다른 11명[50]에게도 모두 적혀 있다. 이러한 비고란 표기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지적을 받아 피우진 전 보훈처장이 결정한 사항이다.

9. 국방부의 백선엽 미화 뮤지컬 제작 논란

국방부는 2012년,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을 모델로 한 '더 프로미스'라는 뮤지컬에 수 억원을 투자했는데 이것이 국정감사때 문제가 되었고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잘못된 ‘과’를 가지고 있는 이 민족반역자를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잘못을 청산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 사람을 칭송해야 된다는 현실이 참 부끄럽다"라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측에서 전쟁 영웅에 대한 모독으로 사과를 요구했지만 김광진 의원은 "백 장군은 법률이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에서 규정한 것으로 논쟁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면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해야 할 것”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

그러자 국방부 사이버사령부는 김광진 의원에 대한 여론조작을 실시하여 그 성과를 청와대에 보고하는 걸로 보복하였다.

2013년 6월 문화재청이 백선엽이 6.25 전쟁 당시 입었던 군복을 '대한민국 근현대사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공고를 냈다. 민주당 김광진의 반대 운동과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격렬한 항의에 밀려 취소됐다.

10. 국방부의 과도한 특혜 및 차량 사적 운용 논란

2013년 9월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백선엽 장군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개인 보좌관, 관용차, 개인 사무실, 관용차를 제공받는 등 장관급 수준의 과도한 특혜를 받았다고 지적했다.

백선엽 자문위원장의 개인 보좌관은 4급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장의 정식 보좌관이 7급 군무원인 점을 감안할 때 위원장 보좌관보다 급수가 높은 과도한 특혜이다. "백 위원장 보좌관의 군사편찬연구소 직급은 '계약직 4호 연구원’이고 업무는 '군사연구'다. 그런데 개인 수행 보좌관을 하는 것은 업무 배정 취지에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업무용 승용차 사적 운용 부분에서는 국방부 근무지원단의 2012년~2013년 9월까지 해당 차량운행일지를 보면 평일과 주말까지 운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업무용 승용차로 대형 세단인 에쿠스를 운전병과 함께 지원받아 개인 전용 차량으로 운용한 것이다. 국방부 '군 승용차 운용 훈령'에는 “군 승용차는 사적 용도로 사용·수익을 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고, 특히 업무용 승용차는 출퇴근 지원 등 사적 운용이 제한돼 있다.

개인 사무실의 경우 '국방부 맞은편에 위치한 전쟁기념관 434호실'으로 한국광복군동지회 사무실은 초라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그러나 국방부는 특정인에게 장기간 개인 사무실을 제공한 특혜를 제공했고, '자문위원장으로 있는 10여 년 동안 백 위원장이 원고 감수 등 자문위원장 본연의 업무를 수행한 것은 20여 차례 정도'라고 한다.

김광진 의원은 '2003년 백 위원장이 국방부 6·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 위원장을 맡을 당시 자문위원장 직급이 신설됐다는 점에서 ‘위인설관’ 의혹이 짙다.'라고 말했다. 백선엽 위원장 측은 '국방부 장관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11. 사생아 자녀 논란

2016년 자신에게 사생아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60년만에 인정했는데 이후 자신을 호적에 올려 달라는 사생아 자녀의 호소를 거부하고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 말라는 통보를 해 논란을 일으켰다. #

[1] 1938년 9월 만주국의 간도성 성장 이범익의 건의로 만주군 각 부대에서 간부와 병력을 선발하여 창설되었다.[2] 만주국 정부는 이와 함께 간도특설대 경력자는 퇴역 후 간부 교육을 받게 지원해준다는 등의 당근도 함께 제시하였다.[3] 중국 군사 용어에서는 련(連)이 중대를 의미한다.[4] 참고문헌: 김주용 (2008).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 한일관계사연구, 31, 169-199[5] 팔로군 등 중국 공산군은 항일에 더 중점을 둔 장개석의 국민당과는 달리 대일 항전보다 국민당과의 투쟁 및 자기 세력 확대에 더 골몰한 것은 사실이나 과정이 어찌됐던 중국 공산당도, 국민당도 중일전쟁에 참전해 승리로 종전을 맞이하였으므로 두 세력은 모두 연합군으로 평가받는다. 백선엽의 사례는 아니지만, 똑같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던 현승종 전 국무총리는 일본이 항복하던 8월 15일까지 팔로군과 싸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 팔로군이 종전까지도 일본군과 싸웠다는 증거다.[6] 사실 일본 제국 해군은 워낙 배타적인 조직이라서 당시에는 조선인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구 일본군 출신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 해군은 일본군과 무관한 상선사관 출신 손원일 제독 등이 주축이 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 창군 멤버가 광복군, 중국군, 일본군, 민간인 출신으로 다양하지만 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용덕 장군(제2대 공군참모총장)이 광복군 출신이고 김신 장군(제6대 공군참모총장)이 김구의 차남인 점, 그리고 현역 공군 장병 및 공군 예비역 사이에서 김정렬 장군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좋지는 않은 편에 속하는 등으로 인하여 일본군과의 관계가 훨씬 약하게 인식된다. 다만 간도특설대 간부들 다수가 남한으로 내려온 것만은 아니다. 전후 조사된 바에 따르면 간부들 중 남한행을 택한 것보다도 많은 수가 간도에 잔류하거나 북한에 가는 쪽을 택하였다. 간도특설대 대원 중 직접 잔혹한 범죄에 가담한 일부 이외에는 의외로 큰 흠결이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7] 일제강점이 끝난지 20년이 지난 1965년만 해도 한일협정 체결에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까지 발동해가며 국민여론을 억누르고 일본과 수교를 맺었다.[8] 제2군 소속으로 중국 공산당과도 연관이 있었다.[9]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경력자이면서도 한국군 장병들에게 가혹하거나 무모한 일본군이나 만주군의 악습을 답습하게 하지 않은 점과 6.25 전쟁 시기 적군 포로나 민간인 학살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한 점 등 인정해 줄 만한 긍정적인 면은 분명히 있으며, 6.25전쟁 당시에 민간인 학살을 일삼은 독립운동가 해기사 출신의 타락한 모 사령관보다는 훨씬 낫다. 따라서 백선엽이 깔끔하게 간도특설대 일원이었던 과거에 대해 대국민 사죄 겸 고해성사를 했더라면 이런 측면들이 더욱 주목을 끌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는 견해가 많다. 결국 사후에도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게 되었다. 그나마 6.25 전쟁에서 보여준 전공과 일본군 출신답지 않은 의외성[51] 덕분인지 같은 급의 죄를 지은 친일파들에 비해서 좋게 평가될 부분은 있으며, 그가 일제시대때 소속되어 있는 곳이 간도특설대원 인것을 감안하면 그 시기의 과오는 절대 고칠수 없겠지만 개인으로만 보자면 인간 쓰레기들만 가득한 간도특설대원 출신치고는 그나마 (그곳 소속에서는) 정상인에 가까운 인물로 볼수 있다.[10] 여기서 '우리'란 당시 백선엽이 소속되어 활동하던 부대인 간도특설대를 의미한다.[11] 특이하게도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 중 독립군 토벌 내용은 일본어판에만 있고, 한국어판에는 전혀 없다.[12] 저자는 한겨레 대기자를 지낸 김효순이다.[13] 종전 당시 계급은 소좌로, 이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10년 가까이 억류되어 있다 귀국하였다.[14] 1952~54년 최연소 국무총리를 지냈던 백두진도 시라카와 미노루(白川実)로 창씨개명한 바 있다.[15] 육군성의 국무대신으로, 1927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입각했었다.[16] 김홍일은 당시 중국 국민혁명군의 병기 장교였다.[17]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당시 4개 전방사단 사단장 중 1사단장 백선엽을 제외한 3개 사단 사단장들(6사단 김종오, 7사단 유재흥, 8사단 이성가)은 모두 부대에 있었다.[18] 박경석은 2010년 무렵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 움직임이 있었을 때 극렬히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그때도 백선엽보다 김홍일이 한국군의 첫 명예원수로 적합하다고 주장했다.[19] 일부 인터뷰에서는 1984년의 일이라고 한다.[20] 박경석은 특히 적지 않은 공훈을 쌓았음에도 윤필용하나회에 밀려 장군 진급에서 연거푸 누락되는 등 많은 직접적인 불이익을 당했다.[21] 예컨대 박경석은 백선엽 등과 대조되는 참군인으로 채명신을 부각시키며 그의 평전도 쓴 바 있다. 다만 채명신은 6.25 당시 중대장이었고 백선엽은 사단장이었기에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박경석은 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정작 "참군인" 채명신의 5.16 쿠데타 참여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사실 항목을 보면 채명신도 모범적이고 명장인건 맞지만 참군인으로 보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5.16 군사정변 부분 참조.[22] 전쟁 중에 미군이 감청하거나 노획하여 보관하던 많은 북한군 문서들이 발굴되었고, 당시 북한측 작전을 지도, 참관하던 소련군 군사 고문단의 보고서들이 소련 붕괴 이후 한국에 제공되었다.[23] 제13사단과 제15사단이 처음 공격을 퍼부었고, 이후 미군 제1기병사단을 피해 제3사단과 제1사단 병력이 증원되었다.[24] 당시 제1사단은 전투가 너무 격렬하여 행정요원까지 다 일선에 투입하는 바람에 정확한 보충 및 사상 통계를 작성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1950년 8월에 제1사단이 정확히 몇 명의 피해를 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선 지휘관들이 증언한 개략적인 보충 및 피해 규모를 모아서 어림잡은 것이 사상자 약 1만명이다.[25] 김홍일의 회고에 의하면, 사단장은 대부대 지휘관으로 독단적인 결정이 필요한데, 소부대적인 지휘 스타일에 아쉬움을 내비쳤었다.[26] 90km에 가깝다.[27] 김홍일김석원은 알려져 있다시피 미군과의 알력으로 전쟁 초기 활약 이후 후방 임무로 물러나야 했고, 김종오는 본인의 심각한 과오라 보기는 어렵지만 현리 전투에서 사단 전체가 붕괴된 참패가 오점으로 남아 있다.[28] 만약 기업인이 영어외국어에 능통해서 해외 파트너와 사업을 잘 벌여 높은 평가를 받은 경우, 그 사람이 영어를 잘해 실력 이상으로 평가받았다고 폄하할 것인가? 리더로서의 자질에 파트너들과의 소통 능력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29] 박경석 본인도 정확한 년도를 헷갈리고 있는데, 이를 명확히 할만한 자료도 없다.[30] 보다 정확히는 이들 4인이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 영웅들 중에 이미 작고한 인물들이어서 우선 뽑혔을 가능성이 높다. 김종오는 지병으로 1966년 40대의 창창한 나이에 사망했고, 김홍일은 1980년 작고하여 당시 군의 큰 어른으로 추모사업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당시 한국 정서에서 고인들을 제쳐두고 아직 팔팔한데다 전두환과도 껄끄러운 사이였던 백선엽을 선정할 리는 없었다.[31] 김동석 대령은 전 HID(육군첩보부대) 36지대장으로 북파공작을 여러 차례 벌여 북한 후방을 교란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오늘날 주한미군에서는 제2보병사단 박물관에 'Governor Kim, Dong Suk Hero Room'을 마련해놓을 정도로 각별하게 기념한다.[32] 김홍일김종오도 당연히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들이다.[33] 다만 이곳에서 싸운 부대가 한국군 해병대 외에는 주로 미군 제25보병사단이었기 때문에 미국 측에 더 상세한 자료들이 있는 것일 뿐이다.[34] 백선엽도 자서전에서 이성가를 관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35] 김홍일은 1980년, 김석원 1978년, 김종오는 1966년, 이성가는 1975년 사망했다.[36] 1층에 파리바게뜨가 입주해 있는 지하 5층, 지상 16층 규모의 대형 빌딩으로 대지는 853㎡(258평), 건평은 1만1381㎡(3443평)이다. 2020년 공시지가 기준으로 땅값만 약 683억원에 이른다.[37] 2020년 백선엽 사후 한겨레후속 취재에서는 공시지가 기준으로 땅값이 683억원, 건물 시세는 최소한 2~3천억원 정도 될 것이라는 의견을 실었으나, 실제 덕흥빌딩은 시중 부동산 거래법인에 1300억원매물로 나와 있다. 이를 감안하면 한겨레의 기사는 약 2배 정도 시세를 부풀려 기사를 작성한 셈.[38] 현재 팽성읍 남쪽 예비군 훈련장 부근이다.[39] 현재 삼성역 8번 출구 부근 땅 140㎡를 구입했다.[40] 장남 명의로 돼 있던 땅에 건물을 올려 1994년 12월 당시 41살이던 장남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다. 이에 대해 전필건 전 교육부 사학혁신위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강남 한복판에 대형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명의신탁에 의한 차명소유로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41] 장남이 돌려준 돈은 백선엽 부부와 다른 3명의 자녀들이 분배했을 것이라 한다.[42] 채명신 본인은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어서 친일 문제에서 당당하다. 굳이 따지면 처조부가 거물급 친일파 문명기인데 결혼 후에도 몰랐다가 임종국이 설명해주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자기 부모의 친일은 커녕 당사자 본인의 친일도 얼버무리는 세상인데 하물며 처가집 일 까지야 부채의식을 따지긴 어렵다.[43] 월남전 당시 채명신맹호부대 산하 재구대대 대대장. 파병 준비 도중에 산하 중대장인 강재구 대위가 수류탄 훈련중 사망하였다. 준장 전역 후 전업 작가로 전직.[44] 이는 일리가 있는 것이, 당시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것은 백선엽의 제1사단만이 아니다. 그 동쪽 전선에서도 제3·6·7·8사단과 수도사단이 영천, 신녕, 안강, 포항 등지에서 격전을 벌이며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냈기에 낙동강 전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다부동 전투는 바로 경부축선을 따라 대구 목전에서 벌어졌다는 상징성 때문에 더 주목받는 경향이 있다. 다만 미군쪽 책을 보면 미군이 담당한 방어선만 매일 위기에 엄청난 적의 공세를 받는 것으로 나오며 다부동이나 안강 전투는 이름만 언급되는 정도. 즉 자기가 담당한 곳이 제일 위기이고 제일 큰 공로로 판단하는 건 전세계 공통.[45] 실제로 6.25 전쟁 이전에 대한민국 국군에서 사단급 병력의 지휘경력이 있는 장성은 유일하게 김홍일 장군밖에 없었다![46] 이 말처럼 실제로 그 해 7월 10일 향년 99세로 백선엽이 고령으로 별세하면서 문제로 떠올랐다.[47] 단순히 국가유공자로 분류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가유공자 묘역도 1기당 1평 배정이 원칙이므로, 장군 묘역처럼 8평을 배정하면 특혜가 된다. 1기 1평을 받아들일 요량이면 아래 채명신의 전례처럼 차라리 사병 묘역에 안장되는 것이 깔끔하다.[48] 국립묘지법 상 장군 묘역은 1기당 8평, 사병 묘역은 1평씩을 할애한다.[49] 만약 파묘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 이념문제까지 비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50] 대전현충원 4명, 서울현충원 7명.


[51]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은 똥군기의 궁극체 그 자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생이 친일파로는 등재되지 않았음에도 똥군기를 엄청 부려서 친일파인 백선엽보다 평가가 훨씬 더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