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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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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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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현주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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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박현주
朴炫柱|Park Hyeon-joo
파일:미래에셋_박현주.jpg
<colbgcolor=#00427a> 출생 1958년 10월 17일 ([age(1958-10-17)]세)
전라남도 광산군 평동면
(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충주 박씨 (忠州 朴氏)
직업 기업인
현직 미래에셋금융그룹 Founder & GSO (Global Strategy Officer)
학력 광주북성중학교 (졸업)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학 / 학사)
배우자 김미경
자녀 장녀 박하민
차녀 박은민
장남 박준범
신체 170cm, A형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 전역
재산 15억 달러 (한화 약 1조 6,700억 원)[1]
서명
파일:박현주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경력 사항
3.1. 증권사 근무3.2. 미래에셋 창업3.3. 최초의 기록3.4. 주요 M&A 이력3.5. 해외 진출3.6. 글로벌 주요 투자현황
4. 사회공헌
4.1. 미래에셋박현주재단4.2. 미래에셋희망재단
5. 수상 실적6. 참고
6.1. 하버드비즈니스스쿨 등재6.2. 더케이스센터 등재6.3. AIB (Academy of International Business) International Executive of the Year Award 수상6.4. 저서6.5. 인터뷰
7. 기타
7.1. 가족 관계7.2. 어록7.3. 대체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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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미래에셋그룹 초대 회장.

저축에서 투자로 우리나라 금융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기도 하다. 국내 증권업계 최연소 지점장, 국내 증권업계 최연소 이사, 국내 최초 자산운용사 설립, 국내 1호 뮤추얼펀드 출시, 국내 자산운용사 최초 해외 진출 등의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2. 생애

전라남도 광산군 평동면(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박현주가 고등학교 합격 통지를 받던 날 돌아가셨고[2] 이로 인해 방황하던 그는 신뢰, 성실, 정직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가르침 덕에 바로설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돈을 꿔달라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자기 것을 나눠줄 정도로 인정이 많았지만 박현주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는 1년에 한 번씩만 용돈을 줘서 돈을 계획적 쓰고 관리하는 습관을 키워줬다고 한다. 여담으로 박현주가 어릴 때 어머니가 광주에서 사주를 잘본다는 사람에게 점을 봤는데 "이 아이는 큰 부자가 될 사주"라고 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경영학 강의를 수강하던 중 “자본 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게 계기가 되어 증권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교 2학년 시절 명동의 큰 손인 투자자 백희엽[3][4] 씨를 찾아가 기업의 흐름을 읽는 능력과 투자의 철학을 배웠다. 이때 답답할 정도로 정석 투자를 고집하는 백 여사를 보면서 우량주에 장기투자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가치투자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가 보내준 생활비로 주식 투자를 시작해 당시의 대한민국 증권 1번지인 명동에서 주식투자를 잘하는 청년으로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이때의 투자경험이 이후 박현주의 투자 철학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대학 시절부터 경영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리더십 관련 공부를 열심히 했다. 경영학 이외의 책도 많이 읽었는데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무려 19번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도 책을 많이 읽었고 현재도 책을 많이 읽으며 자신이 가진 통찰력의 원천은 독서라고도 했다.

3. 경력 사항

3.1. 증권사 근무

스물 일곱의 나이에 투자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1986년도에 동양증권에 입사했다. 1988년부터 한신증권에서 금융 상품 운용을 담당했고 이후 32세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대한민국 증권사 지점 중 1위의 영업 실적을 달성했고 곧이어 임원으로 승진하며 샐러리맨으로서의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이때의 조직 관리 경험은 그에게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을 믿고 지지해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했고 이는 훗날 미래에셋 경영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지점훈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였으며 다른 회사로부터 고액 연봉과 승진을 제시하며 스카우트 제의를 여러 번 받았으나 오래도록 간직한 꿈과 신념이 있어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자신만의 회사를 차렸다.

3.2. 미래에셋 창업

1997년 6월 회사를 나와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국내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설립했다. 강남 본부장으로 승진하는 등 잘 나가던 도중 같은 강남 지역 본부의 젊은 지점장들(최현만, 구재상)과 함께 독립했다. 1997년에 미래에셋벤쳐캐피털과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시초로 1998년 미래에셋자산운용, 1999년 사이버증권사 E*미래에셋증권를 각각 설립했다. 창업 후 6개월 만에 IMF 외환위기를 겪었으나, 위기는 곧 기회라는 생각과 함께 소수 전략 즉 다수가 가는 길을 따라가서는 큰 돈을 벌 수 없다며, 소수의 시각에서 투자를 바라보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인사이트와 한국 경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투자 성과를 이끌었다. 벤처캐피털 시절 외환위기가 닥치자 가격이 급락한 채권에 투자해서 대박을 쳤고, 1998년 '박현주 1호 펀드'로 알려진 뮤추얼펀드를 출시하면서 수익률 90% 이상을 기록한 후 1999년 '바이코리아펀드'가 또 다시 시중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자 증시로 돈이 흘러들어 먼저 나왔던 펀드가 수익률이 올라가는 혜택도 봤다.

'다음커뮤니케이션' 투자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테크버블이 불자 '다음커뮤니케이션'이 가치에 비해 주가가 너무 낮다고 판단하고, '다음' 주식에 24억을 투자했는데 '다음' 주식에서만 1,200억원을 벌어들이면서 초대박이 났다. 2000년대 초반 그 유명한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펀드를 출시한다. 그전까지의 펀드들은 폐쇄형 스팟형이라고 해서 몇명 돈많은 사람들한테서 돈을 모은 후 주식에 투자하고 일정 수익이 되면 환매하는 구조였다. 구조상 단기투자나 작전이 횡행했는데 펀드 환매일 근처가 되면 미리 알던 기관이나 외국인들이 시장을 폭락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지곤 했다.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는 공모형 개방형으로 누구나 투자할 수 있고 따로 환매일이 정해지지 않아 그 전 펀드들과는 차별점이 있었다. 이 펀드들을 계기로 소위 간접투자, 펀드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때마침 외환위기 졸업, 테크버블, 중국성장 등 테크트리를 제대로 타면서 2007년 호황시절에는 수익률이 1,000%에 육박한다. 적립식펀드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소액장기투자를 권장했고 이맘때 쯤 나온 펀드가 3억 만들기 시리즈. 은행들이 판매에 가세하면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국민은행에서만 단일 펀드시리즈가 판매잔고 1조 수준에 육박할 정도. 당시 증권사와 은행 지점들은 '우리도 미래에셋펀드 팔아요'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영업하는 등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당시만 해도 '펀드는 미래에셋'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였는데 문제는 이 미래에셋이 증권인지 운용인지 생명인지 일반인들은 잘 구분하지 못했고 생명사 가서 펀드에 가입하거나 보험 상품 클레임을 걸기 위해 증권사 지점을 방문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까지는 증권사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편으로 펀드 판매창구로서의 역할일 뿐 실질적인 주도권은 운용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미래에셋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3억만들기 시리즈 성공 이후 중국 증시가 엄청난 폭등을 기록하면서 미래에셋차이나솔로몬을 위시한 중국 펀드들도 엄청난 수익을 기록한다. 이후 출시된 미래에셋 인사이트 펀드는 투자 대상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당시로선 특이한 형태의 펀드였는데 말하자면 주식, 채권, 원자재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투자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서 잘하면 대박, 못하면 쪽박을 찰 수 있는 구조였다. 아무튼 이게 '박현주 펀드'로 마케팅되면서 시중자금을 단 3주 만에 4조 원 흡수하며 전무후무한 히트를 기록했다. 그렇게 잘 나가는 중에도 국내 금융시장에만 매몰되면 거대 해외 금융자본들의 농간에 이용당할 수 있다고 여겨 그들과 같은 무대에서 겨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외로 눈을 돌렸고, 주식 이외의 해외 부동산 투자로도 투자 범위를 넓혔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글로벌금융위기가 터지자 그의 성공신화는 한순간에 타격을 받게 되었다. 미국을 위시한 글로벌 증시가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고 미래에셋이 자랑하던 펀드들의 수익률도 급전직하. 중국펀드는 고점에 물린 사람들은 단기간에 수익률이 -70% 정도까지 폭락하면서 증권사는 수익에 타격을 받게 된다. 가뜩이나 위탁 수익이 작던 상태라서 펀드잔고 급감은 여러모로 악영향이었으며 2005년도에 50~60개 정도였던 미래에셋증권의 지점 수는 2008년 초에 200개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났었는데 늘어난 지점수만큼 직원들도 많아졌던 상황이다. 소규모였던 회사가 단기간에 급성장하기위해선 외부 인재 영입이 필수였던 관계로 활황장에서 높은 연봉에 많은 직원들을 영입한 것이 부담이 되게 된다. 단적으로 영업이익은 2006회계년도 1,599억, 2007년 3,686억이었으나 08년도에는 2,019억으로 급감. 반면 직원 수는 1,186명, 2,304명, 2,170명으로 1년만에 두 배가 된 후 유지했다. 2011년 8월 폭락장에서 신용융자를 금지해 버렸다. 이에 많은 개인투자자들은 자유시장경제의 총아인 주식을 위탁매매하는 증권사가 반시장주의적 정책을 사용했다며 힐책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곧 코스피는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일례로 그가 20년 전 2,600억원에 매입했던 중국 푸동 빌딩의 경우는 2023년 1조 5,000억원이 될 정도로 일찍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한 것과 주식 이외의 해외 부동산 투자처럼 투자 분산으로 인해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고, 향후 투자할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또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인도 시장의 경우 글로벌 금융자본들이 전부 철수할 때도 미래에셋은 인도 정부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고, 이후 경기가 회복되자 인도 정부의 배려와 인도에서의 좋은 이미지가 남아 오늘날 인도에서만 수십조원의 수탁고를 올리며 그의 지론처럼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3.3. 최초의 기록

1997.08 대한민국 최초 전문 자산운용회사 미래에셋투자자문 설립

1998.12 대한민국 최초 뮤츄얼펀드 박현주1호 출시

2001.02 대한민국 최초 개방형 뮤츄얼펀드 출시

2001.02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랩어카운트 상품 판매

2003.12 대한민국 최초 해외 운용 법인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설립

2004.03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적립식펀드 출시

2004.06 미래에셋증권 대한민국 최초 부동산펀드 출시

2004.12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사모투자펀드(PEF) 출시

2006.05 대한민국 최초 중국 본토 빌딩 투자_미래에셋상해타워

2008.07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한민국 최초 중국 증권감독위원회로부터 적격외국인투자자(QFII)인증

2010.04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SICAV 펀드 국내 출시

2011.01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국내 최초 홍콩증권거래소에 ETF 직접 상장

2012.07 대한민국 최초 중국 합작운용사 (미래에셋화신자산운용) 출범

2013.06 호라이즌 ETFs 국내 계열 운용사 첫 미국시장 ETF 상장

2014.03 호라이즌 ETFs 아시아 자산운용사 최초 미국시장 KOSPI200ETF 상장

2014.09 TIGER ETF, 세계 최초 중국 본토 레버리지 ETF 상장

2014.10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국내 최초 첫 RQFII 활용 ETF 상장

2016.12 미래에셋생명, 국내 최초 모바일 금융오픈마켓 iAll(아이올) 오픈

2018.11 미래에셋증권, 국내 증권사 최초 인도시장 진출

2018.11 미래에셋자산운용 국내 최초 중국 사모펀드 자격 획득

2019.11 미래에셋증권, 국내 증권사 최초 미국 나스닥 상장 주관사 참여(바이오엔텍)

2023.05 미래에셋증권, 국내금융사 최초 선진국 현지 금융회사 '영국 GHCO' 인수

2023.12 미래에셋증권, 국내증권사 최초 인도 현지 증권사 '쉐어칸' 인수

2024.07 AIB 선정 국제 최고경영자, 아시아 금융인 최초로 수상

3.4. 주요 M&A 이력

박현주는 그의 확고한 투자철학과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다수의 M&A를 성공시키며 미래에셋을 국내 굴지의 금융투자전문그룹으로 성장 시켰다.

2004.02 SK그룹 계열 SK투자신탁 인수

2005.06 SK그룹 계열 SK생명보험 인수

2011.11 캐나다 선두 ETF 운용사 호라이즌 ETFs 인수 미래에셋, 캐나다 운용사 '호라이즌ETFs'인수완료

2011.11 호주 선두 ETF 운용사 BetaShares 인수

2016.12 대우증권 인수 후 미래에셋증권 합병

2016.12 산업은행 계열 KDB자산운용사 인수

2017.07 베트남 프레보아 생명 인수 미래에셋생명, 베트남 보험사 지분인수. 첫 해외진출

2017.12 PCA 생명(한국) 인수 미래에셋생명,PCA생명 품었다

2018.07 미국 ETF 운용사 글로벌X 인수 미래에셋, 세계최대 美 ETF시장 승부수, 글로벌X 전격인수

2023.05 유럽 ETF 전문 GHCO 인수 미래에셋증권, 유럽 ETF 전문 GHCO 인수…유럽시장도 본격 진출

2023.12 미래에셋증권, 인도 증권사 '쉐어칸' 인수 박현주 "인도 증권사 인수로 새 20년 시작"

3.5. 해외 진출

박현주는 미래에셋 창업초기부터 해외진출을 염두에 두고 시장조사를 진행했고 현재 대한민국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해외진출의 선두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2003.12 미래에셋자산운용(홍콩) 설립

2006.09 미래에셋자산운용 베트남 하노이사무소 설립

2006.11 미래에셋자산운용(인도) 설립

2007.01 미래에셋증권(홍콩) 설립

2007.03 미래에셋자산운용(영국) 설립

2007.07 미래에셋증권(북경) 설립

2007.12 미래에셋증권(베트남) 설립

2008.02 미래에셋익재투자자문(중국) 설립

2008.04 미래에셋자산운용(미국) 설립

2008.04 미래에셋자산운용(브라질) 설립

2008.08 미래에셋증권(미국) 설립

2008.08 미래에셋명승투자자문(중국) 설립

2010.08 미래에셋증권(브라질) 설립

2012.10 호라이즌ETFs (LatAM) 설립

2016.01 미래에셋자산운용(호주) 설립

2017.10 미래에셋증권(인도) 설립

2019.09 미래에셋글로벌X(일본) 합작회사 설립

2022.09 미래에셋자산운용, 인도법인 두바이 지점 설립

2023.11 미래에셋자산운용, 미국로보어드바이저 운용사 WealthSpot 설립

3.6. 글로벌 주요 투자현황

2009.08 호주 담수화시설물 투자

2011.08 세계1위 골프용품 브랜드 타이틀리스트 인수

2011.10 호주 빅토리아주 이스트링크 사업 투자

2013.09 세계적인 호텔 브랜드 “포시즌스 호텔 시드니” 인수

2014.12 미국 워싱턴Dc 오피스빌딩 1801k 인수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입주)

2015.05 하와이 리조트 호텔 ‘페어몬트 오키드’인수

2015.12 미국 샌프란시스코 랜드마크호텔 ‘페어몬트 샌프란시스코’ 인수

2016.07 미국 아마존 본사 Phase VIII 빌딩 인수

2016.08 서부간선지하도로 사업투자

2016.09 하얏트 리젠시 와이키키 비치 리조트 & 스파 인수

2018.07 미래에셋자산운용, 미국 ETF 운용사 '글로벌 엑스(Global X)' 인수

2022.06 미래에셋자산운용, 호주 운용사 ETF Securities 인수

2023.05 미래에셋증권, 유럽 ETF시장 진출을 위해 시장조성 전문회사 GHCO 인수완료

2023.08 미래에셋자산운용, 호주 1위 로보어드바이저 운용사 'Stockspot' 인수

2023.12 미래에셋증권, 인도 Sharekhan 증권사 인수 SPA(주식매매계약) 체결

4. 사회공헌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겠다.”라고 말하는 그는 미래에셋을 창업할 때부터 기업의 핵심가치 중 하나를 ‘사회적 책임’으로 정하고, 이후 인재육성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또한, 2008년 직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2010년부터 배당금 전액을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이후 매년 미래에셋으로부터 받은 배당금 전액을 재단에 기부해오고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14년 연속 배당금 전액 기부 | 뉴데일리 2024년

박현주회장, 배당금 전액 기부 | MBN 2011년

2015년에는 청년 일자리 해결을 위한 ‘청년희망펀드’ 조성 사업에 사재 20억원을 기부했으며, 2023년에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과 인재육성을 위해 그가 보유한 미래에셋컨설팅 주식을 최대 25%까지 미래에셋희망재단에 기부하겠다는 약정을 체결했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청년희망펀드’에 20억 기부 | Korea IT Times 2015년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미래에셋컨설팅 주식 25% 기부 약정 | 한국금융신문 2024년

4.1. 미래에셋박현주재단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은 박현주회장이 사재 75억원을 들여 2000년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이다. 재단은 ‘미래에셋은 젊은이의 희망이 되겠습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과 다양한 교육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이 재단에서 운영하는 해외교환 장학 프로그램은 국내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미래에셋박현주재단 홈페이지) (재단 설립 인사말)

재단의 주요사업은 다음과 같다.

- 해외교환 장학사업 : 국내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해외교환 프로그램 학업 장려금 지원
- 미래세대 지원사업 : 아동복지시설 이용(거주) 아이들을 위한 해외 문화 탐방, 디지털 체험 교육, 맞춤식 도서지원, 시설 운영비 및 문화체험 프로그램 활동비 지원
- 기부문화 : 임직원 참여 기부 프로그램, 매칭그랜트, 특별기부 프로그램 운영

4.2. 미래에셋희망재단

박현주 회장은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라 일컫는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1998년 미래에셋희망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늘 돈은 꽃과 같다고 생각해 왔다. 바르게 벌어서 바르게 쓸 때, 돈은 꽃처럼 아름답다."면서 "이런 철학을 심어 준 분은 가장 큰 스승이었던 어머님이시고 오늘의 저를 만들어 주신 그 가르침을 생각하며 어머님 고향에 재단을 설립했다."고 말한바 있다.

재단은 설립 이래 국내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학업 및 자기계발을 위한 장학금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래에셋희망재단 홈페이지) (재단 설립 인사말)

5. 수상 실적

- 2008년 제40회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 2009년 언스트앤영 최우수 기업가상 마스터상을 수상했다.

- 2011년 제1회 한국금융투자협회 금융투자인상 대상을 수상했다.

- 2013년 10월 제1회 매일경제 기업인상을 수상했다.

- 2015년 제17회 경영관련학회 통합학술대회 최우량기업상을 수상했다. 한국경영학회 특별강연

- 2017년 제26회 다산금융상 대상을 수상했다. 제26회 다산금융상 대상수상

- 2024년 7월 국제경영학회(AIB) 연례학회 올해의 국제 최고경영자상(International Executive of the Year Award) 수상 AIB 국제 최고경영자상 : 박현주 회장은 미래에셋그룹을 세계적인 수준의 투자은행(IB)으로 발전시킨 리더십을 인정받아 이 상을 수상했으며, AIB 측은 “박 회장은 한국 뮤추얼 펀드 산업의 아버지로 현재 12국에서 자산 투자 자문사로 활동하고 있다”며 “국제무대에서 회사의 평판과 성과를 크게 개선했고, 이해관계자와 경쟁자 모두에게 흠잡을 데 없는 성실성과 성과를 인정받았다”고 밝혔다. 한국인이 이 상을 받은 것은 1995년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이후 두 번째이다.


6. 참고

6.1. 하버드비즈니스스쿨 등재

2010년 3월 박현주 회장은 한국 기업인 최초, 아시아 금융권 최초로 하버드 비지니스스쿨 기업가정신 연구사례로 선정되었고, 창립 10여년 만에 국내 자본시장의 리더로 부상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성공 스토리(Mirae Asset: Korea’s Mutual Fund Pioneer)를 다루고 있다.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기업가정신 연구사례선정_미래에셋

6.2. 더케이스센터 등재

2017년 7월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김수욱 교수 주도로 미래에셋의 혁신을 통한 성공과정을 분석한 Mirae Asset: A Disruptive Innovator in the Korean Financial Industry 연구결과보고서가 세계적인 학술기관인 '더 케이스센터(The Case Centre)'에 등재되었다. 더케이스센터_서울대_미래에셋

미래에셋은 대기업 계열 금융사가 대부분인 한국 금융 시장에서 뮤추얼펀드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투자 문화를 창조했다.

또한 국내 최초의 해외투자펀드, 부동산펀드, PEF 등을 소개하는 등 고객에게 다양한 투자 기회를 제공해왔다.

무엇보다 고객 우선정신으로 새로운 상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사업모델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Permanent Innovator로서의 행보를 보였고 사례연구에서는 이를 높이 평가했다.

6.3. AIB (Academy of International Business) International Executive of the Year Award 수상

2024년 7월 세계최고 권위의 경영학술단체인 국제경영학회(AIB)가 수여하는 '올해의 국제 최고경영자상’수상자로 선정됐다. 아시아 금융인으로서는 최초 수상이고, 한국인이 이 상을 받은 것은 1995년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이후 두 번째이다.

국제경영학회(AIB)는 미국 미시건주에 본부를 둔 국제경영 분야 최대 규모의 학회로, 국제경영 분야 관련 연구와 국가 간 학술 교류, 세미나 활동 등을 전개한다. 저명한 학자와 글로벌 업계 관계자 등 전 세계 90여 개국 3,400여 명 이상의 전문가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현주 회장은 미래에셋그룹을 세계적인 수준의 투자은행(IB)으로 발전시킨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AIB 측은 “박 회장은 한국 뮤추얼 펀드 산업의 아버지로 현재 12국에서 자산 투자 자문사로 활동하고 있다”며 “국제무대에서 회사의 평판과 성과를 크게 개선했고, 이해관계자와 경쟁자 모두에게 흠잡을 데 없는 성실성과 성과를 인정받았다”고 밝혔다.


6.4.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박현주 지음, 김영사 출판사, ISBN 978-89-349-2580-4

박현주 미래를 창조하다, 홍찬선 외 지음, 올림 출판사, ISBN 978-89-958839-8-3

6.5. 인터뷰

신동아: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증권인생 24년
한국경제: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 일문일답
월스트리트저널 : The Wall Street Journal : For Asset Manager, a Future Beyond Korea
매일경제신문 : 박현주 "年 300여건 해외딜 검토…미래에셋, M&A로 국부 키우겠다"
동아일보 : 박현주 “미래에셋에 ‘2세 경영’은 없다…전문경영인 체제로 갈 것”

박현주 회장 스피치 [2017년]
[곽세연의 프리즘] '시대의 아이콘 경영자' 박현주 : https://news.einfomax.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16866

7. 기타

7.1. 가족 관계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농부였다. 고등학교 시절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이 그의 가치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부지런하고 인정 많고 정확했다. 부인 김미경과 결혼해 하민, 은민, 준범을 1남 2녀로 두고 있다. 부인은 6살 연하이고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출신으로 박 회장과는 연애 결혼했다. 김씨가 박 회장을 부모님께 소개했을 때 장인과 장모는 박 회장이 증권회사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금융업계에서는 은행이 최고 직장이었고, 증권사는 ‘한탕주의가 판치는 곳’ 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이 처음 본 김씨의 아버지에게 향후 증권업의 발전 방향에 대해 두 시간 동안 달변으로 ‘사활을 건 브리핑’ 을 해 가까스로 결혼 승낙을 얻어냈다고 한다.

은퇴 뒤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길 예정이라고 말했으며, 박현주는 2세 경영설을 부정하고 있다.[5]

장녀 박하민(1989)은 미국 코넬 대학교 인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맥킨지&컴퍼니 서울사무소에서 1년, 해외부동산 투자자문사인 CBRE에서 1년 일했다. 2013년 8월 미래에셋운용 홍콩법인 해외부동산투자본부에 입사했다.

차녀 박은민(1992)은 미국 듀크 대학교에서 유학 후 전략컨설팅펌 BCG 한국 지사에서 일했다.

장남인 박준범(1993)은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에서 유학했다.

7.2. 어록

“특별히 음식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닌데 1인당 밥값이 10만원을 훌쩍 넘는 호텔들은 우리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지금같이 어려운 때 서민들이 가는 대중식당을 이용하는 것이 서로 상생하는 방법이다” (2012/10/31, 그룹 임원들에게 대중음식점 이용을 독려하며)

“지난해 고객자산 보호에 무게를 둔 전략을 펼쳤지만 만족할 만한 수익을 못 드렸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자산 다각화 포트폴리오로 지혜롭게 투자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2012/01/02, 주요 일간지의 미래에셋그룹 광고에서)

“2013년 한국 가계의 자산 비중에서 보험과 연금이 처음으로 은행 정기예금을 추월했다. IT에서는 융합, 컨버전스가 모바일 디바이스였듯이 향후 금융의 컨버전스는 연금이 될 것이다” (2014/01/02, 신년사에서 연금시장 경쟁우위 확보를 당부하며)

“나는 조직과 관련해 CEO가 하는 일은 점을 찍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을 찍는다는 것은 좋은 사람을 골라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다시 점을 찍고 그 점이 모여 선이 되면서 조직의 체계가 생긴다. 이렇듯 아메바가 확장하는 것처럼 점을 찍고 점이 만나 선이 그려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면이 만들어진다.” (2007/08,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186p~187p)

"투자는 성장의 엔진이며, 투자 없이는 성장도 없다."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231~233p"

7.3. 대체 투자

국내에는 주식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글로벌 시장내의 여러 대체투자자산을 활용한 고른 분산 투자를 진행하고 있음.

<년도별 투자 목록>

2006년 상하이 미래에셋타워
2011년 서울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

2012년
상파울루 파리아리마 4400빌딩
상파울루 호샤베라타워

2013년
시드니 포시즌즈호텔
시카고 225 west wacker
워싱턴 Mstreet2250

2014년
판교 코트야드호텔
워싱턴 Kstreet1801(무려 연준이 입주해 있음)
워싱턴 Kstreet1750
하와이 페어몬트 오키드호텔

2015년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서울 광화문 포시즌즈호텔[6]
페덱스 물류센터
쾰른 Mantelbebauung(쾰른 시청사로 알려짐)

2016년
하와이 하얏트 리젠시 와이키키호텔
하노이 랜드마크72 빌딩
시애틀 Amazon HQ phase 8(아마존 본사) 출처


[1] 2021년 6월 포브스 기준. 대한민국 부자 순위 28위.[2] 당시 전라남도는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었으며 박현주 회장이 졸업한 광주제일고등학교는 전남 최고의 명문 고교였다.[3] 이 사람의 사촌이 백선엽, 백인엽이다.[4] 당시 '백할머니'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다.[5] 경영권과 재산을 착각하면 안 된다.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서구식 경영처럼 자녀들은 이사회를 통해 굵직한 인사만 맡고,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긴다는 뜻이다.[6] 이세돌과 알파고가 대결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