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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22:04:06

이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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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영균(李寧均)
출생 1921년 5월 20일
사망 1994년 8월 25일 (향년 73세)
본관 평창 이씨
학력 춘천공립중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을류 / 수료)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의학사)
주요 직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대한외과학회 회장
제4·5대 서울대학교병원

1. 개요2. 활동3. 평가4. 가족5. 저술6. 수상

1. 개요

대한민국의사이자 교수로서, 한국 흉부외과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본관평창.

2. 활동

1921년에 강원도 영월군에서 태어나 춘천공립중학교(구제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8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5회, 이과을류)로 입학, 예과 수료 후 의학부로 진학하여 태평양전쟁 기간 수학연한 단축으로 1년 빠른 1944년 3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학사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후 동 대학원 외과학교실 조교로 있는 와중에 1945년 광복됨에 따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조교, 1952년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임강사로, 휴전 직후인 1954년 외과학교실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1957년 정부 프로그램인 ‘미네소타 프로젝트’[1]에 따라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2년간 와튼 릴리아이 교수에게 심장수술에 대한 연수를 받았으며, 당시 한국에서는 시행되지 못했던 개심술(開心術)을 연구하였다.

귀국 후 1959년 국내 최초로 개심술을 통한 심방중격결손증 수술을 시도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심혈관질환에 대한 개심술 성공을 위해 동물실험 등 지속적으로 헌신의 정열을 쏟았다. 1960년 부교수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대한의학협회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 1963년 국내 최초로 28세 심방중격결손 환자에게 개심술을 통한 심방중격결손증 교정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였다. 부적절한 사회적 여건, 불충분하고 미비한 의료장비, 그리고 태부족인 의료재료 등 여러가지 악조건 하에서도 지속적으로 심장혈관외과학 분야를 위한 노력으로 이룬 쾌거였다.

1965년 서울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로 승진 후, 북유럽 학문의 중심인 스웨덴 웁살라대학교 외과학교실에 1년간 연수차 출국하였다. 1968년 본인의 책임하에 흉부외과학교실이 외과학교실에서 분리 독립되었고, 같은 해 대한흉부외과학회의 첫 이사장이 되었다. 이후 제7대 이사장 및 2, 10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첫 흉부외과 과장이 되었고 이듬해 대한외과학회 회장이 되었다. 1977년에는 연간 개심술 100차례를 돌파하였으며 이는 국민의료보험제도의 정립과 심장수술의 양적 확대의 상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9년에는 삼일문화상 학술상을 수상하였는데 이 해에 36세 여자 환자에서 승모판막치환술 장기 생존예를 기록하게 되었다.

해외학회 발표도 활발하게 하여 1980년 재미 한국인의사회(뉴욕) 합동학술대회, 일본 흉부외과학회 등에서 발표하였다. 1981년 제5차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82년 서울대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해 개심술 600례를 돌파하였다. 1983년 서울특별시에서 개최한 제6차 아시아 흉부외과학회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 순환기학회 회장이 되었다. 1984년 `흉부외과 영역의 중환자 관리지침서'를 출간하였다.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의 비중도 높아져 1985년 태국에서 개최된 아시아 흉부외과학회에서 회장으로 회의를 주재하였다.

1986년 40여년간의 서울대학교 교수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 이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다. 퇴임후에도 부천세종병원 심장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중 1994년 식도암으로 타계하였다.

3. 평가

한국 전쟁 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험한 흉부외과 의사의 길을 걸으며 좌절감과 고비가 있었으나 노력과 열정으로 이를 이겨내었다. 수술이 있는 날은 밤 열두시까지 회복실과 연구실에 머물다 귀가 후 꼭 전화를 하여 환자의 상태를 물었고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면 야간에도 수시로 병원으로 오거나 전화를 자주했기 때문에 전공의들은 항상 환자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엄격한 생활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1976년 위궤양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동물실험도 사람수술과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였으며 건강상태가 안 좋으면 기생충 약을 사다 줄 정도로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다.

항상 새로운 학문 습득에 열심이었고, 과묵 온후한 신사로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그 청춘과 반생을 지낸 학자였다. 생전에 후학들에게 흉부외과의사로서의 길은 어렵지만 어려우니까 해보겠다라는 도전정신을 가지라고 격려하였다. 후학들에게 수술 및 인공판막에 관한 설명을 해주고 문헌을 챙겨주며 격려해주었다.

한국 심장외과의 틀을 만든 개척자로, 지금도 한국 심장외과의 태두로 남아 있다.

4. 가족

1947년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며 장남 이기진(서울대 1971년 졸업)은 미국에서 흉부외과의사로, 차남 이상진은 가톨릭의대 졸업 후 피부과 의사로 활동 중이다.

5. 저술

6. 수상


[1]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한국전쟁 후에 한국을 의료 수준을 높이기 위해 1955년부터 1961년까지 한국의 의사를 미국으로 연수를 보낸 프로그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