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이임학 Ree Rimhak | |
출생 | 1922년 12월 18일 |
함경남도 함흥군 | |
사망 | 2005년 1월 9일 (향년 82세) |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밴쿠버 |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무국적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수학자 |
가족 | 아내 Rhoda Ree (재혼) 장녀 이애란 (전처 소생) 차녀 이희란 (전처 소생) 장남 Ronald Ree (Rhoda 소생) 차남 Robert Ree (Rhoda 소생) 삼남 Richard Ree (Rhoda 소생) |
학력 |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졸업) 함남공립중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갑류 / 수료)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물리학 / 학사)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수학 / 박사) |
경력 | 경성대학 조교수 (1945~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1946년) 서울대학교 교수 (1947~1953년)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연구원 (1955~1961년) 예일대학 연구원 (1961~1962년)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교수 (1961~19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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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경남도 함흥시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활동한 수학자. 리 군을 연구하여 군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1947년 그가 청년이던 시절 남대문시장에서 미군이 버린 수학 학회지(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947)를 주워 직접 학회지의 문제를 풀어내어 막스 초른(Max Zorn)을 통해 미국 수학학회지에 논문을 낸 이야기가 있다. # 이 1949년에 출판된 논문은 세계 저널에 한국인이 수학 논문을 올린 최초 사례이다. 이임학은 2006년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첫 번째 한국인 수학자이며, 영국 MacTutor 수학사 사이트에 기록된 처음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한국인 수학자이다.#
2. 생애
2.1. 일제시대
젊은 시절의 이임학 |
1922년 함흥에서 출생했다. 함흥제1공립보통학교(1928~1934년)를 거쳐 1934년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에 함흥고보에서 이름이 바뀐 함남중학교를 1939년 수석으로 졸업하고[1]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6회, 이과갑류[2])에 입학했다. 1942년 3월 예과 수료 후 경성제대 이공학부로 진학했고, 물리학 제1강좌(실험물리학.[3] 교수 오츠카 하루오(大塚明朗)[4] 및 조교수 사와다 쇼조(澤田正三)[5]) 소속으로 연구했다. 전시 수학연한 임시단축 조치로 인해 예정(1945년 3월)보다 반 년 빠른 1944년 9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한국물리학회 50년사 참조).
경성제대 예과 동기생 다케나카 기요시(竹中潔)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이임학은 예과 생도 시절부터 수학에 두각을 나타냈는데,[6] 당시 수학이 물리학과 함께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져서[7] 경성제대 이공학부에도 별도의 수학과가 설치되지 않고 물리학과에서 수학을 함께 가르쳤기 때문에 이임학은 학부에 올라가며 물리학과를 택했고# 이와 함께 이공학부 수학강좌(교수 우노 토시오(宇野利雄)[8], 조교수 히구치 준시로(樋口順四郎)[9], 강사 마츠모토 카즈마사(松本勝正)[10]) 개설 과목을 수강하면서, 히구치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물리학과 동기인 김종철의 표현에 따르면 '수학을 부전공했다'고 하고[11] 영국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 수학과 홈페이지에 실린 그의 일대기에도 '물리학과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12]라고 서술되어있다. 한국 수학계 원로인 박정기[13] 경북대 총장은 이임학은 우노 토시오 교수의 애제자였을 것이라 했다.[14]
학부를 졸업한 후 화신산업 계열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 배치되어[15] 기술이전을 받기 위해 만주비행기제조주식회사 봉천공장에 파견되어 연수를 받다가 광복 직전 귀향해 함흥에서 해방을 맞았다.
2.2. 대한민국
이임학(1950년 추정) |
해방 직후 서울로 와 1945년 10월 최윤식(당시 경성광산전문학교장)을 비롯한 수학자 20여 명이 모인 회의에서 투표로 경성대학 수학과 교수진을 선출할 때 김지정[16] 주임교수, 이임학 조교수, 유충호[17] 전임강사 등 3명이 뽑혔으나 1946년 7월 국대안 파동으로 9월 5일 이공학부 교수진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할 때 함께 사직했다.# 이후 이임학은 가족을 만나러 고향 함흥에 내려가있다가 북한의 초청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가기도 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 반감을 느끼고 아슬아슬하게 북한을 탈출하여 서울로 돌아왔고 1947년초 서울대 수학과 주임교수 최윤식의 초청으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복귀한다.
그리고 1947년에는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될 사건이 일어나는데, 남대문시장에서 미군이 버린 수학 학회지(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947)에 실려있던 막스 초른(Max Zorn)의 논문에서 '모르겠다'고 되어있던 부분의 문제를 풀어 편지로 보냈고, 막스 초른은 이 편지의 내용을 이임학의 이름으로 미국수학회지에 냈던 것이다. 그의 논문은 1949년 출판되었고 이는 세계적인 학술지에 수학 논문을 올린 한국인 최초의 사례가 된다. # 하지만 학술지를 받아볼 수 없었던 이 박사는 1953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논문이 게재된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시에는 한강철교가 조기 폭파되는 바람에 피란도 가지 못하고 이임학의 가족은 서울에 남게 됐는데, 북한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1946년 국대안 파동으로 경성대학 교수를 사직하고 고향 함흥에 가 있던 이임학이 김일성대에 초빙되어 갔을 때 공산주의 사회에 반감을 느껴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월남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인민군이 징집을 하려 집에 쳐들어왔는데 이임학의 어머니는 “임학이는 의용군에 입대했다”고 둘러댔고 이임학은 국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숨어 지낸다. 1951년 1.4 후퇴 때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했다.
다시 서울대 교수로서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의 수학교수직을 맡아 출강하던 그는 해외에 나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전쟁 중에도 가끔씩 미국공보원(USIS)에 가서 수학학술지인 Math Review의 해외 논문들을 살펴봤다. 하루는 그 학술지에 누군가 올린 논문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여 편지를 보냈는데 이 논문의 주인은 다름아닌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UBC) 스티븐 아서 제닝스(Stephen Arthur Jennings)였다.[18] 그는 이임학에게 장학금을 제공할테니 학교로 와달라고 회신을 했고 이임학은 곧바로 가겠다고 답장한다. 그리고 1953년 그는 마침내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다.[19]
2.3.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시절의 이임학 |
UBC에 도착한 이임학은 그를 초대한 스티븐 아서 제닝스 교수의 지도 아래 위트 대수학(Witt Algebra)을 연구했고 이에 관한 졸업 논문을 작성해 1955년 5월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이 통과되자마자 그는 몬태나 주립대학교 전임강사로 초빙되었고, 그의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져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그는 체류/근로 자격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
캐나다 UBC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후 그는 여권을 연장하기 위해 미국의 주샌프란시스코 대한민국 총영사관[20]을 찾아갔는데, 총영사관에서는 이임학의 여권을 몰수하고 그를 무국적자로 선언했다. 한국으로 당장 돌아오라는 이승만 정부의 압박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21][22] 이로 인해 학자로서의 인생에도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된다.
1955년 여름 캐나다 국립연구위원회(the National Research Council of Canada)의 지원대상으로 선정되었고, 1957년 여권문제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정부가 인도적 조치 겸 유수의 석학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주권을 발급해 주면서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59년 9월부터 1960년 6월까지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에 방문학자로 가 있는 동안 이임학이 한국에서 온 외국인 수학자(visiting foreign mathematician from Korea)로 등재되어있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1957년에는 오늘날까지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군론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0년 새로운 유한 단순군을 발견한다. 프랑스 수학자 갈루아가 도입한 군론 연구는 20세기 현대 수학의 주요 주제가 되었고 1950년대에 뜨거운 관심사였던 새로운 단순군 발견을 이임학이 해냈던 것이다. 1961년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조교수로 승진하며 안식년을 받아 1961~1962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연구하였다. 이즈음 미국 대학으로 옮겨갈 기회가 있었으나 국적 문제가 또다시 그의 발목을 잡아서 이임학은 밴쿠버에 정착하고 캐나다 시민권을 받아 평생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에서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Ree Group 발견 업적으로, 1964년 캐나다 학자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캐나다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Canada)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미국, 영국, 일본의 수학 사전에 이임학의 이름이 올랐다. 가장 권위 있는 수학 역사서인 ‘순수 수학의 파노라마(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에는 군론 분야의 위대한 수학자 21인으로 선정되어 코시, 갈루아와 같은 전설적 수학자와 나란히 실렸다.
이임학은 196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수학자 대회에서 경성대학 수학과 동료 교수였던 김지정 김일성대 교수를 만났다. 또 서울대 수학과 제자였던 조주경 김일성대 교수도 이임학에게 인사를 왔다고 한다.# 가까스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남쪽으로 데리고 온 이임학은 함흥에 남겨놓고 온 아버지와 누나, 다른 친척들의 생사를 간절히 알고 싶어했고, 1960년대 학술 교류를 위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소식을 알아보려 했지만 개인적으로 자유 여행이 불가능하고 감시가 상시화되어있는 북한에서 소식을 얻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방북이 빌미가 되어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금지를 당하면서 이임학은 남한의 가족들까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서한 이임학의 처지에 연민을 느낀 헝가리 수학자 에르되시 팔이 헝가리 외교부와 평양 주재 헝가리대사관을 통해 북한에 살고 있는 아버지와 누나의 소식을 알아봐주었고, 기쁜 아음에 이임학은 에르되시 팔을 통해 받은 가족들의 편지를 바로 서울에 살고 있던 그의 어머니와 누나에게 전했는데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와 누나는 북한과 서신연락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임학은 한국 정부의 적대적인 대북정책에 비판을 쏟아냈다고 한다. #
이임학 개인에게는 생각도 못한 행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당시 한국 정부가 이임학에게 괜한 압박을 넣지 않고 기다렸더라면 한국 수학계의 발전이 상당히 빨라졌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의견이 있다. 당시 몇 안되는 선진수학을 경험한 이임학을 정부가 캐나다에 어이없게 국적까지 말소시켜 깔끔하게 보내주면서(...) 박사 하나가 아쉬운 전후 한국 수학계는 발전할 기회를 놓쳐버렸고, 3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서야 조금씩 인프라가 갖추어지고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임학의 지인들이나 그의 은사, 동문들이 포진한 수학계 원로들이 한국 정부를 증오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23] 물론 학문적 바탕이 좋은 해외로 건너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은 당시까지만 해도 딱히 연구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임학이 당시 해당 대학의 가장 유명한 연구자 중 하나였을 정도이며, 이임학은 UBC에서 20세기의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인 로버트 랭글랜즈(Robert Langlands)에게 대수학을 가르친 은사로도 유명하다. 이임학 교수의 장례 기념식장에서 UBC 수학과장인 블루만Bloomann 교수는 이임학 교수의 수학적 업적을 소개하면서 ‘이임학 교수가 UBC 수학과를 세계 지도 위에 올려놓았다’고 소개하였다.#
2.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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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울펜손홀 앞에서 한국 수학 교수들과 함께(가운데 이임학) |
한국 정부로부터 국적을 박탈당한 일은 이임학에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미한인과학자협회를 만들면서 발기인 명단에 이임학의 이름을 넣자, 그는 "나는 한국 국민이 아니므로 빼달라."며 참가를 거부했다고 한다. 경성제대 재학 중 교육칙어를 붓으로 필사해 제출하라는 과제를 거부하고, 대학 자치를 훼손하는 미군정의 국대안에 반대해 사직했으며, 김일성대에 초빙되었으나 공산주의 사회에 환멸을 느껴 북한의 고향을 등지고 월남할 정도로#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했던[24] 이임학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비판적이었고, 한국 정부 역시 그를 껄끄러워 했다. 그 결과 수학자로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이임학은 국내에서는 지워지고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캐나다에 정착하고 세계적 수학자가 된 뒤에도 그는 조국을 잊지 않았다. 대신 기회가 되면 국제무대에서 남북의 수학자들과 자유롭게 만나 우정을 쌓았다. 또 2001년 국내 언론사와 통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선말로 해 주세요. 조선말로 해 주세요. 조선말을 들으면 다시 생각나는 것이 많습니다.” 2003년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던 그를 찾아간 서울대 수학과 김도한 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가족들의 연주에도 별 반응이 없던 이 선생님께서 제 아들과 조카들이 ‘고향의 봄’을 부르자 금방 눈물을 주르륵 흘리셔서 모두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서울대 교수 시절 제자였던 이정림 전 포스텍 교수는 대한수학회지에 낸 기고에서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측에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2005년 타계할 때까지 끝내 어느 국적도 갖지 않았다”고 회고했으며,# 이임학의 캐나다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말년까지 자신의 국적을 한국(Korea)도 북한(DPRK)도 아닌 "조선(Joseon)"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한국 수학계는 그의 국적을 회복시키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 1985년 8월 하순 서울대학교/대한수학회의 특별초청을 받아,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진행된 세계여자의사대회에 참가하는 아내 Rhoda 여사를 동반하고 방한하여 공개강연을 열었고# 이후 민주화가 된 후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회에서야 그에 대한 입국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방한하여 서울대학교, 포항공대, 대한수학회에서 강연하였다.
2005년 1월 9일 그가 타계하고 나서,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고,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선정한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에 이임학의 리군 이론이 1950년대 대표적인 성과로 선정되었으며, 2017년 최초로 지정된 32인의 과학기술유공자 명단에 등재되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이임학에게 해준 건 없었고 주된 연구와 학문적 성취는 캐나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 정부는 전세계 수학계로부터 또다시 웃음거리가 되었다.
3. 연구
그의 업적 중 가장 유명하고, 높이 평가되는 것은 유한단순군에 대한 연구이다. 유한단순군의 한 분류인 리 형 군(Lie-type group)[25] 중 마지막으로 발견된 2F4, 2G2가 그의 업적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리 군(Ree group)이라고 불린다. 한글로 쓰면 리군(Lie group)과 헷갈리기 쉽지만, 로마자로는 완전히 다른 Ree라는 표기를 사용하므로 세계 수학계에서는 별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는다.[26] 막스 초른을 통해 출판한 첫번째 논문 포함, 32편의 논문을 썼다. 그 중 2편은 수학계 최고 권위를 위시하는 수학연보(The annals of mathematics)에 실렸다.4. 여담
- 여담으로 그가 서울대 교수 시절에 가르쳤던 임덕상과 권경환은 대수기하학과 위상수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세계적인 수학자가 되었다. #
5. 참고
[1] 졸업생 76명 중 이임학을 포함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5명, 내지의 구제고등학교 3명, 경성의학전문학교 2명, 평양의학전문학교 1명, 경성고등공업학교 2명, 경성고등상업학교 3명, 수원고등농림학교 2명, 경성법학전문학교 1명 등 1/3 가량이 상급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주진순, '세계적인 수학자 이임학 형을 그리워하며' 『대한수학회소식』 제112호 (2007년 3월호) 참조.[2] 이공학부 진학반[3]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물리학 강좌들은 제1강좌(실험물리학), 제2강좌(역학), 제3강좌(전자기학), 제4강좌(광학), 제5강좌(물성론 및 열학), 제6강좌(물질구조론) 등 6개 강좌로 구성되어있었다고 한다.[4] 1899년 도쿄부 출생, 제2고등학교(1916~1919년) 졸업,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1919~1922년) 졸업(이학사), 도쿄제국대학 이학박사(1932년). 제8고등학교 교수, 메이지전문학교(現 규슈공업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경성제대 이공학부 창설시 물리학과 주임교수(학과장)를 맡았으며 야마가 신지(山家信次) 이공학부장이 총장에 취임하면서 그 후임 이공학부장에 임명되었다(1944년 5월 22일). 종전 후 세이조대학 교수를 거쳐 도쿄문리과대학(現 츠쿠바대학) 교수가 되어 광학연구소장, 과학기술진흥재단 과학기술관장 등을 역임했다.[5] 1917년 도야마현 출생, 도야마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졸업, 도쿄대학 이학박사(1954년). 학부 졸업 후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조수로 재직하며 고체론을 연구하다 경성제대 이공학부 창설시 물리학제1강좌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종전 후 모교인 도쿄제대로 복귀하여 제2공학부, 이공학연구소 조교수를 역임하며 1954년 이학박사를 받고 1958년 도쿄공업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78년 정년퇴임했다.[6] 입학하자마자 예과시절부터 수학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수학과 물리학 강의에서 동급생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질문을 하여 교수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예과)1학년 때 배운 대수, 기하를 수학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많은 동급생들에게, 이임학은 사영기하학을 설명하면서 수학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 무렵에 나온 高木貞治(다가키 데이지)의 『해석개론』을 꼭 읽어 보라고 추천해 주었는데 자신은 이미 이 책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출처 참조.[7] 일본수학회 또한 일본수학물리학회(日本數學物理學會)가 종전 후인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일본수학회/일본물리학회로 분리되면서 결성되었다(일본물리학회 연혁 참조). 조선에서도 일찍부터 수학을 가르쳤다는 연희전문학교에는 수리과/물리과가 아니라 두 개가 합쳐진 수물과로 존재했으며, 대한수학회 역시 1946년 10월 조선수물학회로 창립되었다(대한수학회 연혁 참조).[8] 1902년 치바현 출생, 1922년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물리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수학과로 전과하여 1927년 졸업(이학사), 도호쿠제국대학 이학박사(1937년). 학부 졸업 후 1928년 도쿄고등상선학교 교수로 부임, 1937년 박사를 받고 경성제대 이공학부 창설시 수학강좌 담임교수로 부임하여 응용수학의 권위자로서 경성제대에서 수학1(미분방정식론), 수학2(함수론) 등의 과목을 주로 가르쳤다. 종전 후 도쿄도립대학 교수, 니혼대학) 교수로 재직했다.[9] 후쿠오카현 출생, 오사카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이학사). 오사카제대 조수를 거쳐 경성제대 이공학부 창설시 수학강좌 조교수로 부임하여 수학특론(행렬론, 군론, 적분방정식) 및 수학특론연습 등의 과목을 담당했다.[10]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이학사). 경성제대에서 수학연습1 및 수학연습2 과목을 가르쳤다. 종전 후 구마모토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어 이학부와 교양부에서 가르쳤다.[11] 김종철, '경성제국대학과 경성대학,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의 변천을 회고함',『한국과학사학회지』 23권 2호 (2001), 180-204 참조[12] "Ree entered Keijo Imperial University in 1939 and there he studied mathematics and physics in the Physics Department."[13]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도호쿠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 졸업(이학사), 경북대학교 이학박사[14] 대한수학회(1998년), 대한수학회사 제1권, 부록 3, 내가 만난 수학자들과 교수생활(박정기)[15] 문과 학생들은 진즉 징병 연기 폐지로 징집 되었고, 의학부 학생들은 졸업 후 군의관으로 동원되었으나, 이공계는 일제 패망시까지 징병 유예가 유지되었다.[16] 1910년 평안남도 평양부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 사가고등학교(이과을류), 도쿄제국대학 이학부(수학과)를 졸업하고 1935년 이학사를 받았다. 이후 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수, 경성사범학교 교수 겸 교유 등을 지냈고 경성제국대학 부설 이과중등교원양성소 교수로 있다 해방을 맞아 경성대학 수학강좌 초대 주임교수가 되었다. 국대안 파동으로 사직한 뒤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수학역학부 해석학강좌장을 맡았으며, 1952년 북한 과학원 창설시 원사로 임명된 10명 중 1명이다.[17] 1920년 경기도 출신으로 경기중학교, 제6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이학부(수학과)를 졸업하고 이학사를 받았다. 경성대학 수학강좌 전임강사에 있다 국대안 파동으로 사직하였으나 이후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강사로 복직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납북?월북? 후 김일성종합대학 수학 교수를 지냈다.[18] 스티븐 제닝스는 이후 UBC로 온 이임학의 지도교수가 된다.[19] 하지만 이후 미국의 워싱턴 대학교에서도 더 큰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한 번 간다고 약속한 후에 변경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UBC로 진학했다고 한다. #[20] 당시 캐나다에는 총영사관이 없었다.[21] 사학계에서 주류의견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으나 6.25 전쟁 당시 이임학 교수가 징집을 피한 것을 문제삼아서 괘씸죄로 이랬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국가공무원 신분인 국립서울대학교 교수들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고(교수들을 징병했다면 전시연합대학 운영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심지어 학생들조차 1950년 2월 시행된 '재학생 징집연기 잠정령'에 의거 중등학교(당시 6년제 구제중학교) 이상 교육기관 재학생은 징집이 보류되어 학교에서 학생군사훈련을 받고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고 이는 정전 후인 1955년까지 지속되었다#. 이임학은 징병대상도 아니었던 데다가 서울 함락 후 인공 치하에서 의용병 징집을 피해 숨어있다가 1.4후퇴시에 부산으로 피난하여 전시연합대학 교수를 지냈는데, 북한 지방 출신인 인물이 북한군에 동조하지 않은것만 해도 한국 정부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게다가 혼란함 탓에 징집을 피해갔다는 혐의로 징벌적 여권 말소를 당한 인물은 현재까지 없다.[22] 한국의 미필 남성들은 2020년대인 오늘날에도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장기간 외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비자를 안내주기는 한다.[23] 원래 타국 출신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미국 등지의 유명 대학으로 몰려오는 것은 흔한 일이긴 하다.[24] 박정기의 표현을 빌리면 '학문 밖에 모르는 학자'였던[25] 리군(Lie group)과 대응되는 대수적 군(algebraic group)으로부터 특정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유한군으로, 순환군, 대칭군과 26개의 산재군을 제외한 모든 유한단순군이 이에 해당한다.[26] 오늘날에도 북한의 리씨들은 여권에다 Ri, Ree, Rie 같은 표기를 쓰는 경우가 꽤 있다. 더욱이 두음법칙을 쓰지 않으면 이름도 '림학'이라고 읽히는지라 Rimhak이라는 표기를 썼다. 한국의 일부 교수들은 영어로 된 교과서와 논문을 갖고 강의를 하면서도 입말은 한국어로 하는 특성상 Lie Group과 Ree Group이 함께 빈번하게 언급될 경우 구분하기 위해 국뽕을 들이키고 '이임학군' 같은 호칭으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