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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25 23:05:24

오경석



1. 조선 말기 개화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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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慶錫
18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 1879년 10월 7일(음력 8월 22일)

조선 말기의 개화 사상가. 역관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다.#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 진재(鎭齋), 천죽재(天竹齋).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허준과 함께 중인 신분으로 당상관에 오른 둘 뿐인 인물이다.

1831년 3월 5일 한성부에서 사역원 교수를 지낸 아버지 오응현(吳應賢)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의무(李義懋)의 딸 사이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6년에 고종명성황후와 결혼하자 왕비 책봉을 위해 주청사가 베이징으로 갔다. 정사 유후조(柳厚祚), 부사 서당보(徐堂輔), 서장관 홍순학(洪淳學)[1]으로 이뤄진 일행인데 역관 오경석은 프랑스 정보 수집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아 곧 닥쳐올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은 이 없어 외상으로 3개월분 물자만 확보한 상태여서 장기전을 못한다는 결정적인 보고를 흥선대원군에게 급행으로 올렸다.[2] 오경석은 주청사 귀국 이후 병인양요가 끝날 때까지도 남아 정보 활동을 계속하여 <양요기록>을 남기는데 오경석 사진도 주청사 때 찍을 수 있었다. 조선 말기 박규수(朴珪壽)의 개화 사상에 영향을 주었는데 1870년 초부터는 유홍기(劉鴻基)와 함께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 사상을 교육하였으며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도 일정 부분 관여하였다. 1879년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민족대표 33인의 1명인 오세창이 그의 아들이다.

한때 조선 최초로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의 청나라 사절단인 연행사 사절단원들의 사진이 1863년 철종때 찍힌 것으로 밝혀져 조선 사람을 모델로 찍힌 사진들 중 가장 오래된 사진의 주인공을 넘겨주었다. 해당 사진도 그의 아들 오세창이 일본 도쿄에서 만든 복사본이고 원본은 소실되었다.[3]

2. 대원방송애니메이션 더빙 PD 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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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한민국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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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북한정치인

함경북도 인민위원장을 맡고 있다.
[1] 서장관 홍순학이 남긴 <연행가>는 조선의 대표적인 강편 기행 가사이다.[2] 프랑스군은 3개월분의 물자밖에 없고 국내 사정상 장기전할 의지도 없었지만 조선군은 그조차도 없었으며 조선군이 부족해 사냥꾼 의병을 동원했다.[3] 이 사진들 중 독사진을 찍은 사람이 있는데 조선 후기 이조판서경기도 관찰사까지 지냈던 이의익으로 사진을 찍을 당시 70대 초반의 나이였으며 1794년(정조 18년) 태어난 사람이다. 사진이 우리나라에 늦게 들어온걸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