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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4:57:25

영의정

영의정부사에서 넘어옴
<colcolor=#fff> 삼정승
좌의정 영의정 우의정
육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1. 개요2. 연혁3. 위상4. 영의정 목록5. 주요 영의정 역임 인물
5.1. 태종 ~ 명종5.2. 선조 ~ 효종5.3. 현종 ~ 정조5.4. 순조 ~ 고종
6. 영의정 추서 인물7. 영의정 배출 가문 순위8. 관련 문서

1. 개요

영의정() 또는 영상(領相)은 조선 시대 의정부의 으뜸 벼슬인 영사(領事)로 품계는 정1품이고 관원의 자급(資級)은 대광보국숭록대부이며 정원은 1인이다. 조선의 관제에서 오늘날의 수상, 총리에 해당한다. 영상(領相)이라고도 하며 좌의정우의정과 아울러 삼정승이라고도 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신하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다. 오늘날의 국무총리와 비슷한 격이다. 역사적으로도 조선 영의정은 차후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현 대한민국 국무총리의 전신으로 여긴다.

학술기관[1]경연, 홍문관, 예문관(藝文館), 춘추관, 관상감(觀象監)의 영사를 겸한다. 재신(宰臣)의 등급을 겸하고 있는 학사(學士)로 나타낸 송나라고려전통에 따라 조선에서도 재상이 학사를 겸하였는데, 재신들이 등급에 따라 각각 학사 한 두 개 정도를 겸한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영의정이 경연을 제외한 나머지 학술기관의 영사를 혼자 겸하는 것이 규례인 것에서 그 상징성을 알 수 있다.

2. 연혁

고려 초기에는 내사령, 중서령이었다가 고려 후기에는 영도첨의(領都僉議), 영문하(領門下), 판문하(判門下) 따위로 불렸고 조선 초기에는 영문하라고 불리다가 다시 판문하라고 불렸는데, 명예직이었던 고려의 중서령처럼 명목상 으뜸 벼슬에 불과하였다.

영의정이라는 명칭은 문하부 재신이 의정부에 통합된 1401년(태종 1) 당시 우정승(右政丞)이었던 이서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임명되면서 처음 나타난다.[2]

태종 연간(1401~1418)까지는 1414년(태종 14) 좌의정(左議政)으로 바뀌는 좌정승(左政丞)이 여전히 수상이었고 영의정에게는 명목상의 결재권조차 없었다.

그러다 세종 연간(1418~1450)인 1436년(세종 18) 왕이 이조병조인사[銓選], 병조의 군사(軍事), 형조의 사형수 판결을 제외한 나머지 업무에 대하여 먼저 의정부의 서명을 거치게 하였을 때, 고대 삼공의 모범을 따라 영의정도 좌우 의정과 함께 의결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면서 처음으로 실질적인 재상이 되었다.[3]

1466년(세조 12) 관제를 개편하면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영의정(領議政)으로 고쳤다. #

명종 시기의 을묘왜변(1555)과 선조 시기의 임진왜란(1592~1598)을 거치며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대신 비변사가 점차 국정 전반을 담당하게 되자 영의정은 좌우 의정과 함께 정1품 자문관 도제조(都提調) 자격과 관료들의 우두머리라는 명목을 가지고 집권 붕당 또는 국왕의 명분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자리가 되었다.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의정부가 내각으로 개편되면서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896년(건양 1) 아관파천으로 내각의 명칭이 의정부로 환원되면서 의정이 되었다. 1905년(광무 9) 의정대신(議政大臣)이 되었고, 1907년(광무 11) 다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가 1910년(융희 4) 경술국치를 거치며 사라졌다.

3. 위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도 하는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위직이라 위상은 높지만, 그에 비해 실권이 크진 않다고 여겼다. 영의정은 원로이자 조정 영수라는 명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 운영에 필수적인 담당 실무가 적었기 때문이다. 영의정의 입지는 국왕과 관료, 관료 내부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잦은 부침을 보인다. 이는 조선 초기의 판문하가 명목상 문하부의 우두머리이지만 도평의사사에는 참여하지 않는 명예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영의정부사로 바뀌고 나서도 처음 몇년간은 영삼사사(領三司事)의 후신인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와 앞뒤 순서를 오갔고, 일반적으로 집정(執政)으로 인식되었던 관직은 좌우 정승이었다. 이러한 점은 현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비슷하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조선 초기에 좌정승이 판이조사(判吏曹事), 우정승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한 것이었다. 판사는 담당 부서의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 주 업무로 문관(東班)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무관(西班) 인사, 군사를 담당하는 병조의 실무에 개입하는 좌우 정승의 권한이 담당 실무가 적은 영의정의 권한보다 실질적으로 강할 수 밖에 없었다.

KBS 1TV 징비록에서도 이조판서로 영전한 류성룡에게 좌의정 정철이 자신에게 업무를 보고할 필요없이 소신대로 하라는 대사를 통해 좌의정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세종의 장인 심온이 불평한 것과 구성군이 구훈(舊勳)에게 쉽게 밀린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판상서사(判尙書事)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것으로 중서문하성의 재신들이 상서판사를 겸하며 중서문하성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는 데 이용되었다.(당 초기에는 상서령/중서령/문하시중이 신료들의 수장으로 위치하였지만, 현종 말년이 되면 3품의 상서들이 동중서문하직을 겸직하면서 재상으로 업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재상직이 2품에 위치하면서 실질적 업무부처인 상서6부와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장관인 3품의 상서 위에 재상이 관리하는 판사직을 설치하였다.) 고려에서는 수상이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한 것과 달리 조선 중기 이후에는 현직 삼정승이 이조와 병조를 겸판(兼判)하지 않았다. 실제로 육부(六部)의 위상이 떨어지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비변사 대두 이전까지 육조 위주의 정치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판서는 정2품관이고, 고려의 상서는 정3품관이니 당연한 결과다.

겸판사(兼判事)는 세종 연간을 거치며 의정부 좌우 찬성(贊成) 및 참찬(參贊)에게로 넘어갔다가 1458년(세조 4)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대체로 성종 연간(1469~1494)까지 재상급 대신들이 부서와 업무에 따라 상설 혹은 특설된 겸판서(兼判書)로서 실판서(實判書)를 직접 지휘하는 형태로 남아있었고 이후에도 간간이 나타난다.

태종 연간의 이숙번은 사람 자체가 기가 센 편이라곤 해도 종1품 의정부 찬성(贊成)이 최종 경력이었음에도 오히려 정승급인 남재, 성석린 등을 호령했으며, 하륜 역시 영의정을 꽤 했지만 좌의정 시절 힘이 더 강했다. 문종 때 영의정은 하연, 단종 때의 영의정은 황보인이었으나 세종, 문종의 고명대신이자 남재의 장손자인 남지가 문종때 우의정으로 그 후 승차하여 좌의정으로서 정권을 이끌었다. 남지가 사망한 후에는 단종의 조정을 이끄는 영수로 후임인 좌의정 김종서가 실권을 장악했다. 세조의 사돈이자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도 좌의정이었으며, 세조의 책사 권람도 좌의정이었다. 세조의 계유정난에서 큰 공을 세운 홍달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세조의 공신이자 훈구파 원로대신이던 김국광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정희왕후의 측근이자 왕실의 인척이던 홍응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반정 이후 공신들과 친하게 지낸 신용개, 김응기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 연간(1506~1544) 후기 최강의 권신 김안로는 좌의정이었고 김안로가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지내며 실권을 쥘 때에 영의정이던 장순손, 한효원, 김근사는 김안로의 오른팔들이었지만 김안로에 비해서는 권력이 약했으며, 중종 때 다른 권신인 심정, 이행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중종 때 조광조를 추천한 안당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냈다. 윤원형은 우의정이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일 때 최고 권력을 누렸지만 영의정일 때는 또다른 권신 이량과 좌의정 심통원의 급부상으로 힘이 약해졌고, 숙종 연간(1674~1720) 초기에 공작 정치로 권신이 된 김석주도 우의정으로 병권의 핵심이어서 역시 송시열의 제자이며 사형인 영의정 김수항마저 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두둔할 정도였다. 정광필의 손자인 정유길도 동인집권기에 야당인 서인임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김수항 또한 남인인 허적이 영의정에 있을 때 좌의정에 있었던 적이 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재집권한 남인의 핵심 권력자였던 민암도 우의정이었고, 홍봉한도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좌의정이었다. 홍봉한의 동생인 홍인한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노론 4대신 중 가장 낮은 연배인 조태채도 우의정이었다. 그리고 영조 때 노론 핵심 권력자이자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이자 숙종의 작은 처남인 민진원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그리고 숙종의 외척이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도 좌의정까지 지냈고, 그 아들인 민진장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 외에 자의대비의 친척이자 인조의 외척이고, 현종과 숙종의 외척으로, 희빈 장씨를 추천했던 조사석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서인의 영수이자 노론의 영수이자 유림의 대표였던 송시열 역시 좌의정까지 지냈다. 그 뿐 아니라 세조의 외척이자 정희왕후의 형제인 윤사분윤사흔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또 소현세자빈인 민회빈 강씨의 아버지인 강석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인조반정 공신이자 왕실의 외척이던 원두표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오명항도 병조판서 시절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에 우의정까지 올랐다. 소론 산림의 영수였던 윤증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무인 출신이자 적개공신이자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강순도 최종 관직이 우의정이었다.

을사사화의 주역인 이기정순붕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 시절에 을사사화를 주도했으며 영의정 윤인경은 힘이 약했다. 이기 역시 영의정이 된 이후로는 예전보다 실권이 약간 약해졌고, 영의정에서 물러나기 직전에는 윤원형에게 실권을 다 빼앗긴다. 그리고 대윤의 핵심인 유관성세창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또한 노론 4대신 중에 좌장이던 이이명, 이건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영조 때 노론4대신의 일원인 이관명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태종의 명을 받들어서 영의정 심온의 사사를 주도하고 군권을 쥐고 있던 박습과 강상인, 심온의 동생 심정의 사형을 주도한 박은도 좌의정이었다. 정순왕후의 오빠이자 외척이던 김관주도 우의정을 지냈고, 안동김씨 일족이지만 벽파의 영수였던 김달순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같은 소론이었지만 희빈 장씨와 장희재에 대해 중벌을 주장한 박세채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희빈 장씨와 장희재에게 사약을 추천한 이세백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화완옹주의 인척이던 정희량, 정우량도 각각 좌의정, 우의정까지 지냈다. 한효순도 광해군 시절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면서 폐모론을 주장했다. 송시열의 수제자인 이단하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강력하게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김종수도 좌의정 시절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과 대립했으며 채제공 역시 좌의정을 지내면서 독상체제로 정국을 주도하였다. 예종의 장인이던 한백륜도 우의정까지 지냈고 정희왕후의 인척이던 성봉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일원인 김이교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헌종의 총애가 각별했고 천주교를 탄압할 것을 주장한 이지연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따라서 단지 영의정까지 올라서 권신이 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후술한 것처럼 수양대군, 김좌근처럼 실세 영의정도 있었지만 영의정으로 권신이 되었다기보다는 권신이 영의정 한 것에 가깝다. 하위직인 판서도승지도 왕의 신임이 두터우면 정승을 호령할 정도였다. 명종 연간의 외척 이량은 이조판서로서, 또 다른 외척 심통원은 좌의정으로서, 영의정 윤원형보다 권력이 강했고, 광해군 연간(1608~1623)의 권신들인 삼창(三昌) 중 이이첨류희분도 각각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서 권력을 행사했으며, 박승종은 영의정을 하기 전에 병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겸하면서 각종 옥사를 처리했고 정조 연간(1776~1800) 초기의 홍국영은 도승지, 숙위대장(宿衛大將), 훈련대장(訓鍊大將), 금위대장(禁衛大將),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따위의 직책을 맡으면서 모든 소(疏)와 의견이 그를 거쳐 왕에게 전달되었다.[4]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순원왕후의 장인인 김조순도 이조판서, 병조판서, 대제학, 금위대장, 훈련도감대장 등을 지냈다. 신정왕후의 장인인 조만영도 이조판서, 호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금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서 잡채상서로 불렸던 이충도 호조판서, 우찬성까지 지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이자 세종의 장인인 심온도 세종 즉위년 영의정에 올랐을 때보다 태종 시기에 이조판서 등을 지낼 때 권력이 더 강했다. 이직도 영의정 시절보다 좌의정 시절에 힘이 더 강했다. 심온의 아들 심회도 세조 말년 영의정을 지낼 때보다 성종 시기에 원상을 지내고 좌의정일 때 권력이 더 강했다. 인조 시기의 권신이자 인조반정 1등 공신 심기원도 좌의정까지 지냈고, 심희수도 선조 시기에는 좌의정, 광해군 시기에는 우의정을 지냈다. 좌의정 심정의 손자 심수경도 선조 시기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효종의 사위 심익현의 아버지 심지원도 효종 시기에 영의정을 지내고 현종 시기에 원상과 좌의정을 지냈다. 이항복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광해군 때 다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이덕형 역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광해군 때 다시 영의정을 하기 전에 좌의정을 지냈다. 선조 말기에 영의정을 지낸 류영경도 좌의정을 지내던 시절에 영의정 윤승훈을 탄핵한 일이 있었다. 권대운도 남인 2차집권기에 영의정을 지낼 때보다 남인 1차집권기에 우의정, 좌의정을 지낼 때가 권력이 더 막강했다. 홍치중도 영의정을 지낸 뒤에 좌의정을 다시 한 번 더 지냈다. 탕평책을 입안한 조현명도 영의정을 지낸 뒤에 다시 한 번 좌의정을 지냈고 동생 조문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같이 탕평책을 입안한 송인명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성종 초에도 성종의 장인이자 외척인 한명회가 좌의정으로 있고 정희왕후의 처남이자 역시 외척인 윤사흔이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한 적이 있고 영의정 정창손은 한명회와 윤사흔의 의견을 따랐다. 오윤겸도 영의정을 한 뒤에 다시 한 번 좌의정을 더 지냈다. 홍서봉도 영의정을 한 뒤에 좌의정을 지낸 적이 있고 심열도 영의정을 한 뒤에 우의정, 좌의정을 또다시 지낸 적이 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효종의 장인인 장유도 우의정까지 지냈다. 순조 때 김재찬도 영의정을 한 뒤 다시 영의정을 지내기 전에 좌의정을 또 한 적이 있고 이시수도 영의정을 한 뒤에 좌의정을 다시 지낸 적이 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도 숙종 시기에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또한 역시 숙종 때 인현왕후의 큰오빠이자 숙종의 큰 처남인 민진후도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맡으면서 실권을 행사했다. 한성판윤이나 공조판서가 정치적 영향력은 없는 자리인걸 감안하면 그냥 본인이 권신이라 강한거지 관직 때문에 강한게 아니었다. 그리고 숙종의 작은 처남이자 인현왕후의 작은 오빠인 민진원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행사했다. 영조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심수현도 영조 초기에 병조판서 겸 금위대장을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 외에 김만중, 김만기 형제도 병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김만기는 군권까지 쥐고 있었다. 이세백도 좌의정을 지내면서 희빈 장씨의 사사를 주청했다. 박원형도 좌의정을 할 때 영의정이던 귀성군 이준을 끌어내리는 데 앞장섰다.

최항과 조석문도 역시 세조 말에 영의정을 지내다가 성종 초에 다시 좌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가졌다. 윤자운 역시 성종 초에 영의정을 하다가 다시 우의정을 지내면서 실권을 가졌다. 김질 역시 예종 때 좌의정을 하고 성종 때 다시 우의정을 했다. 한치형 역시 죽기 직전 영의정을 할 때보다는 우의정과 좌의정 시절에 무오사화 때 사화를 주관하면서 힘이 강했으며 어세겸도 좌의정 시절에 실록청총재관을 했다. 그리고 윤필상도 오랜 기간에 영의정을 했지만 우의정 시절에 폐비 윤씨의 폐출을 강력하게 주청하고 좌의정 시절에는 폐비 윤씨 사사를 주청하면서 실권을 가졌다. 정인홍도 우의정 시절에 봉산옥사를 처리했고 좌의정 시절에 대북정권의 정국을 주도했다. 광해군 때 실세였던 한효순, 민몽룡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인순왕후의 6촌인 심희수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광해군 때 다시 우의정을 지냈다. 성종의 측근인 현석규는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정창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했지만 좌의정 시절에 단종 사사를 주청했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던 심기원도 좌의정을 지냈고, 김자점도 좌의정 시절에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청했다. 병자호란 당시에 척화파였던 김상헌도 최종 관직이 좌의정이었고, 병자호란 당시 대청 강경파로써 자결을 한 김상용도 최종 관직이 우의정이었다. 노론 선봉이던 이관명도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소론 선봉이던 이태좌도 좌의정까지 지냈다. 기자헌도 영의정을 했지만 우의정과 좌의정 시절에 광해군을 강력히 지지했고 영의정 시절에는 약간 힘이 약해졌다. 윤두수 역시 좌의정 시절에 힘이 강했으며 영의정 시절에는 힘이 약해졌다. 이원익도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번 영의정을 했지만 영의정 시절보다는 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하던 시기에 힘이 강했다. 대윤의 영수였던 윤임도 형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우찬성을 여러차례 하면서 권력을 가졌고 유인숙 역시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하면서 권력을 가졌다. 송시열과 더불어 양송으로 불렸던 송준길도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광해군 때 북인의 거물이던 박홍구조정도 각각 좌의정, 우의정까지 지냈다. 그리고 윤원형, 이기, 정순붕과 더불어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앞장선 임백령도 이조판서, 우찬성까지 지냈고 역시 을사사화를 일으키는데 앞장선 허자도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우찬성, 좌찬성을 하면서 힘을 가졌다.

태종이 기초를 놓고 세종이 짓고 문종이 마무리한 군신간의 정치적 균형관계를 일거에 무너뜨린 계유정난의 부작용으로 인해 조선 조정 내에서 실세 권신과 그를 따르는 파벌집단들의 개념이 생기면서, 권신들이 세력 유지를 위해서 명망은 높으나 세력기반은 없는 말년 원로들에게 모양새 좋게 넘기는 자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영의정 자리를 누가 먹냐를 놓고 상대 파벌과 죽자사자 사생결단을 내다가 피보느니 차라리 중립인 인사를 기용하는 걸로 합의하는 경우가 잦았다. 중종 연간의 정광필은 권신 이항(李沆), 심정, 이행, 나중에는 김안로 등이 모두 명목상의 영의정으로 내세운 경우이고,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이후에도 반정 4대장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 등의 합의로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었다. 인종과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윤인경의 경우에도 대윤의 윤임, 유관, 유인숙, 소윤의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허자 등의 합의로 영의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상진심통원, 이량, 윤원형, 이기 등의 합의로 영의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1) 영의정은 조정의 행정을 총괄하는 수장, 2) 좌의정은 조정의 다수파 대표, 그리고 3) 우의정은 조정 내 병권과 사법권, 삼사의 대간과 옥당을 총괄하는 역할에 해당했다. 그리고 영의정이 온건파이면, 좌의정과 우의정은 강경파인 경우가 많기도 했다. 또한 영의정은 집권붕당의 주류 출신들이 많이 맡았지만, 좌의정과 우의정은 집권붕당의 주류 출신들도 맡았으나 집권붕당 비주류와 야당들도 꽤 많이 맡은 경우도 있었다. 영의정이 조정 대신들 중 신망이 높거나 명망이 높은 대신, 즉 명신들이 맡는다면, 좌의정은 권력이 막강하거나 정파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대신, 즉 권신들이 맡는다고 할 수 있고 우의정은 무신 출신의 대신이나 무관들이나 대간들에게 신망이 높은 대신, 즉 무인, 대간을 총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맡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의정은 대신들 중에 나이가 상당히 많고 연배가 높은 노대신들이 맡는 경우가 많고 좌의정은 그 중간 쯤인 대신들이 맡는 경우가 많고 우의정은 나이가 약간 낮거나 연배가 낮은 대신들이 맡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의정이 과연 실권은 없고 명예만 있는 관직이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명색이 관료가 오를 수 있는 최상위 관직인 만큼, 영의정씩이나 오를 만한 관료라면 이미 주요 관직을 다 거쳐 올라온 사람들이라 그 관록이 결코 만만치 않다. 거기다 비록 지금은 실권이 없더라도 그만한 경력을 쌓던 중에 어지간한 중상급 관료를 부려본 적이 있었을 것이고 인맥도 쌓을 만큼 쌓아뒀을 터라, 실권이 더 많지만 더 낮은 관료 입장에서도 상사 겸 선배라서 대놓고 거스르기도 뭣하다. 관직 자체에는 별 힘이 없다지만, 이미 영의정에 오를만한 수준이라는 점만으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충분히 행사할 수는 있는 것이다. 굳이 따지면 실권은 없고 명예만 있되, 명예가 너무 강력하기에 그것만으로도 실권이 생길 정도인 것. 실제 정책 토론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좌의정이고, 정책이나 현안에서의 법률이 관여토록 하는 것은 우의정이며, 주 현안을 집행하는것은 육조이기 때문에 그냥 보면 영의정은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조율하기가 바로 영의정의 역할이다. 여러 대신들이 이런저런 목소리를 낼 때 토론 과정이 과열되지 않도록 조절하고, 가장 건설적인 방향으로 결정을 이끌어내도록 만드는게 영의정의 주 업무인 것이다. 또한 권신이나 그 당여 중에 어전에서 지켜야할 선을 넘으려는 자가 있으면 자제시켜서 국왕이 최소한의 체면은 지키게 하는 데는 역할도 수행했기에 영의정 제도가 주효하기는 했다.

의미 있는 권력을 누린 영의정으로는 태종조 하륜을 시작으로 세종조의 황희가 가장 대표적이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집권하여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가 된 수양대군 이유, 세조 연간(1455~1468) 말년부터 성종 연간 초기까지 원상이었던 한명회신숙주, 모두 일찍 죽기는 했지만 1506년(연산군 12)에 중종반정을 주도한 3대장인 박원종유순정성희안 등이 있었다. 선조 연간(1567~1608) 초기의 이준경이나 선조 중기의 류성룡이나 선조 말기의 류영경이나 광해군 연간 후기의 박승종이나 숙종 연간 초기의 허적도 상당한 힘이 있었다.[5] 또한 숙종 말기의 노론4대신 중의 우두머리인 김창집도 영의정으로 힘을 행사했다.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정조 말기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으로서, 순조 초기에는 원상과 영의정으로서 권력의 정점을 누렸다. 철종 연간(1849~1863)에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이었던 김좌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세도정치 권력의 정점을 누렸다.

조정 서열 1위의 관직답게 배향공신을 가장 많이 배출한 관직이다.

4. 영의정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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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태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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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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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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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요 영의정 역임 인물

5.1. 태종 ~ 명종

5.2. 선조 ~ 효종

5.3. 현종 ~ 정조

5.4. 순조 ~ 고종

6. 영의정 추서 인물


이하는 사후 바로 추증되지 않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추증된 경우이다.

7. 영의정 배출 가문 순위

순위성씨영의정
1위전주 이씨11인
2위청송 심씨9인
3위신 안동 김씨8인
4위대구 서씨7인
5위청주 한씨6인

8. 관련 문서


[1] 당대 명칭 館閣(관각)[2] 조선 초기에는 관부의 종류와 등급에 따라 영사(領事), 판사(判事), 동판사(同判事), 지사(知事), 참지사(參知事), 동지사(同知事), 동참지사(同參知事), 첨지사(僉知事) 따위의 벼슬 이름이 있었다. 이러한 경우 ○+관부+사의 형식으로 벼슬 이름이 정해졌다. 이를테면 영의정부사는 영+의정부+사로 조합된 것이다. 세조 연간(1455 ~ 1468) 이후 이러한 형태의 벼슬 이름은 중추부, 돈녕부(敦寧府)와 같은 명예직 관원이나 타관이 다른 부서를 겸관하는 경우에만 남았다.[3] 세종이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하면서 기존 좌우 의정에 더해 영의정에게도 의결권을 준 데에는 육조직계제의 과도한 업무 부담에 더불어 당뇨병과 같은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던 건강 문제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4]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 경호실장, 합참의장or참모총장<훈련도감은 조선후기 중앙군의 중심으로 급료를 지급하는 특수병들이였고, 함께 한성을 방위하는 어영청과 금위영보다 앞선 위치>, 참모총장, 국세청장+조달청장, 한국은행장 권한보유<각 군영은 화폐주조권한이 있음>를 가진 것[5] 이준경은 선조의 원상으로,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은 인순왕후수렴청정이라는 명목하에 모든 결정권을 이준경에게 넘겼다. 높은 지위에 명종 사후 후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책임지고 인순왕후의 결정을 도왔으며 조정의 신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종 연간 초기 남인은 서인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강경파 청남(淸南)과 온건파 탁남(濁南)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갈등하였고 온건파 남인의 대신인 허적의 중재를 통해 청남, 탁남, 서인이 혼합된 국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결정은 모두 허적을 통해 이루어졌다. 조정의 인사가 허적의 사랑채에서 행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는 그나마 왕권에 우호적이었던 남인들을 기용하려 했던 숙종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남인의 권력이 너무 강해졌다고 판단한 숙종은 1680년(숙종 6) 허적을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신환국을 일으켰다.[6] 이항복네 마당에 있던 배나무가 옆집 권철네 집으로 가지가 담을 넘어갔는데 그걸 권철이 멋대로 따먹은 게 계기가 되었다. 즉, 남의 나무에 달린 과일을 멋대로 먹고는 가지가 우리 집으로 넘어왔으니 우리집 거라고 권철이 먼저 우겼고 이를 갚아주기 위해 문지방에 손을 넣고 이 손이 대체 누구 것이냐고 물은 것. 참고로 현재 민법으로 보면 (과실은 나무 소유자에 귀속되므로)당연히 과실은 이항복네 것이고 당시도 마찬가지였다.[7] 이수광 본인도 영의정으로 가는 청요직 이조판서 재직중 병사했으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된 것을 보면 그가 좀 더 오래살았을 경우 생전에 영의정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8] 이태좌가 이광좌의 8촌 형이다.[9] 2009년에 그의 집안이 보관했던 비밀 편지들이 공개되면서 '정조 독살설'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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