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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23:49:52

쇄미록

오희문에서 넘어옴

瑣尾錄
1. 개요2. 구성3. 내용4. 원균5. 번역6. 외부 링크7. 보물 제1096호

1. 개요

조선 시대 선조 대 선비였던 오희문(吳希文)[1]임진왜란정유재란 기간 동안 피난길에 올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9년 3개월간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긴 피란일기. 총 7책. 쇄미록이라는 제목은 징비록처럼 시경에 나오는 문구를 따서 만들었다. 그 구절은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遊離之子)이며 뜻은 무엇보다 누구보다 초라한 것은 여기저기 객지를 떠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피란일기로 꼽히며, 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시기 3대 사찬 사서로도 꼽힌다. 대한민국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일기를 소재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2. 구성

오희문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인 선조 24년, 1591년 11월 27일부터 전쟁의 폐해로부터 서서히 벗어나 사회가 안정되어 가던 1601년 2월 27일까지 9년 3개월간 피난하면서 겪었던 갖은 어려움을 거의 매일매일 기록한 일기이다.

내용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여러 일기로 나누고 있다. 자세한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체적인 작성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은 임진남행일록은 후에 작성된 것으로 즉, 선조 24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이듬해 1592년 6월 28일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요약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록들은 거의 모두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이다.

예외적으로 1593년 1월 14일부터 동년 3월 말까지 45일간은 저자인 오희문이 전염병으로 앓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록(日錄)들은 거의 모두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한 방대한 양의 일기이다.

3. 내용

저자인 오희문은 외거노비의 신공을 받으러 한양을 떠나 1592년 7월 1일에 전라도 장수현감인 처남 이빈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가 밀려오는 왜군을 피하여 장수현감의 가족들, 장수현 아전들과 함께 영취산(靈鷲山)의 석천사로 피난하게 되었으며, 이후 다행히 한양을 빠져나와 친척집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가족과 다시 만난 후 십여 년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1601년 2월 27일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일기를 썼다.

이에 따라 오희문과 그의 가족이 전라도 장수와 충청도 홍주, 임천, 아산 및 강원도 평강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여러 사건들이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전쟁이 발발했던 때에 그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노모를 모시러 전라도 영암과 태안에 다녀오면서 그가 보고 느꼈던 전쟁 중 사회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저자의 처남과 사위(오윤겸의 친구 신응구. 오희문을 친아버지처럼 돌봤으며 전쟁 중 본처가 죽자 오희문의 장녀를 후처로 들였다) 및 아들(오윤겸) 등을 비롯한 친지들이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재임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방문하여 들은 각 지방 고을의 현황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쇄미록은 피란일기인 동시에 일상생활일기로 전쟁 상황 묘사를 제외한 일상생활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 또한 많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제사를 지낸 방법,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 그외 각종 교환경제, 물품수수 등의 모습, 각종 오락과 여가생활 등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 남겨져 있다.

오희문은 고통스러운 피란 와중에도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각별히 지냈는데, 쇄미록에 나오는 각 해 마다 제사를 지낸 횟수는 1595년 17회, 1596년 22회, 1597년 20회, 1598년 28회, 1599년 24회, 1600년 24회 등이다. 주로 삭망례(朔望禮), 천신례(薦新禮), 기타 기제와 다례, 시제(時祭) 등을 지냈으며, 형편이 힘들어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어 반갱(飯羹, 밥과 국)만으로 예를 올리기도 했고,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제물을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제사를 지내려 한 이유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어줄 사람이 당시 오희문 외에는 없었고, 종손까지 죽어서 달리 제사 지낼 사람도 없었으며, 겨우 종손의 아우가 살아남아 있었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를 염려하였기 때문으로, 1600년에 오충일의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이를 멈추게 된다. 이에 따라 쇄미록에는 1500년대 후기 우리나라의 제사 예식과 준비과정, 차례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남겨졌다. 또한 집안 노비들이 전란의 혼란을 틈타 달아나거나 꾀병을 부리며 농사일을 게을리한 일을들 기록하며 분노하면서도 피란 중에 죽은 노비들을 슬퍼하면서 없는 살림을 털어서라도 장례를 치러주고 제사도 지내주려고 노력하는 등 조선 중기 노비제도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쇄미록에는 피란기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한 여러 여가생활 모습도 남겨져 있다. 주로 승경도바둑, 장기와 쌍륙 등이었다. 갑오일록 1월 5일자 일기에는 "‘정경도를 던져 승부 내기해서 종일 놀았다"는 내용이 있으며, 임진일록 11월 19일자 일기에는 "마을의 여러 소년들이 다 모여서 종정도를 노는데 맨 끝에 있는 자는 먹으로 두 눈을 그려서 웃음의 자료로 삼았다"라는 내용도 있다. 계사일록 8월 7일에는 "이른 아침에 아우와 함께 절에 올라가서 제공(諸公)과 함께 두부를 먹고 혹 바둑도 두고 혹 종정도를 놀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라고 나와 있으며, 계사일록 7월 22에는 "저녁때까지 요월당에 있는데 마을의 젊은이와 어른이 다 모여서 혹은 바둑을 두고, 혹은 종정도도 놀고, 혹은 장기도 두고, 쌍륙도 놀아 즐기면서 긴 해를 보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도 정기적으로 조보를 발행하고 각 고을 수령들의 행정력이 잘 유지되어 있는 모습 등 동시대 다른 국가들보다 앞선 조선의 행정력에 대한 기록도 있다.

반면 전쟁기의 끔찍한 기록들도 많이 남겨져 있는데 자녀들 중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이 학질에 걸렸으나 치료를 못 받고 죽은 일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잊지 못했고, 걸식자나 굶어 죽은 사람에 대한 내용,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다는 기록, 전란으로 인한 피란민들의 고통스러운 삶, 군사 징발과 군량 조달. 과도한 부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몰락, 처와 자식을 버리고 도망한 아버지,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 죽은 어머니의 젖을 만지면서 우는 아이, 유행병과 배고픔으로 인해 떼죽음당한 사람들, 싸우지도 않고 밥만 축내는 무능한 의병들과 곽재우 같은 유능한 의병들의 기록, 왜군의 잔인한 살인·방화·약탈·강간 행위들, 명군의 무지한 약탈과 행패, 세든 집 집주인이 멋모르고 가담했다가 처형당한 이몽학의 난 등의 내용이 많이 나와 당시의 처참한 상황 또한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또 들으니, 왜적이 영남 지역 반가의 여인 중 얼굴이 고운 사람을 뽑아 다섯 척의 배에 가득 실어 제 나라로 보내 빗질하고 화장을 시켰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대번에 노하기 때문에 모두들 죽음이 두려워 억지로 따른다고 한다. 이들은 사실 여기서 먼저 겁탈한 뒤 보낸 여자들이다. 그 뒤에도 그들의 뜻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여러 적이 돌아가면서 강간한다고 하니, 더욱 비통한 일이다. 이는 이 고을 복병장 김성업이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하니, 분명 헛말이 아닐 것이다.
지난번 김천 전투에서 어떤 여인이 왜적의 포로가 되어 창고에 갇혀 있다가 전투가 끝난 뒤 밖으로 나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 여인에게 사는 곳을 물었더니, 처음에는 숨기고 말하지 않다가 이실직고했다고 한다. 본래 성주에 사는 선비의 아내로, 흉적이 갑자기 마을로 들이닥쳐서 외숙모와 함께 피하다가 적에게 잡혀 이곳으로 왔는데, 적들이 돌아가며 강간을 하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외숙모의 생사도 모른다고 했다. 허리에 찢긴 치마만 걸쳐 있을 뿐 속옷도 입지 않았는데 우리 군사들이 치마를 들춰 보니 음문이 모두 부어서 잘 걷지도 못 했다고 한다. 아주 참혹한 일이다. 고을 사람 중에 군대를 따라갔던 자가 직접 보고 와서 전한 말이다.
(1593년 7월 7일) 또 어제 오는 길에 7,8세 되는 아이를 보니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역시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해서 그 까닭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지금 내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버리고 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떠돌면서 걸식했는데 이제는 더 빌어먹을 곳이 없어서 장차 굶어 죽게 되었으므로 내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으니 우리 모자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서 우는 것이라 한다. (...) 슬프다, 창생이 장차 다 없어지고 하나도 남지 않으려는가. 탄식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한 꾀죄죄한 여자아이가 길을 떠돌고 있길래 물어보니 부모님은 왜놈들이 데려가 연락이 끊겼고 고모 집에서 살다가 고모는 자식들만 데리고 떠났다고 한다. 어제는 동생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너무 불쌍하다.
(1594년 2월 14일) 길에서 굶어 죽은 시체를 거적으로 말아서 덮어둔 것을 보았는데 그 곁에 두 아이가 앉아서 울고 있다. 물었더니 그 어미라 한다. 어제 병으로 죽었는데 그 뼈를 묻으려 해도 비단 제 힘으로 옮길 수 없을뿐 아니라 또 땅을 팔 도구를 얻을 수가 없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나물 캐는 여인이 광주리에 호미를 가지고 지나가므로 두 아이가 말하기를, 그 호미를 얻으면 땅을 파고 묻을 수 있다고 한다. 슬픔과 탄식스러움을 이길 수가 없다.
그윽이 들으니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가지고 씹어 먹는다 하기에 항상 상서롭지 못하다고 했더니, 이제 다시 들으니 서울 근처에서 전일에는 비록 한두 되의 쌀을 가진 자라도 죽이고 빼앗는데, 근일에는 사람이 혼자 가면 쫓아가서라도 죽여놓고 먹는다.
1500년대 말 우리나라의 문화와 여러 일상 생활에 대한 내용, 그리고 유래 없는 국난에 일반 백성들이 겪었던 비참한 생활 등을 직접 목격자가 세세히 글로 남긴 1차 사료이다.

4. 원균

많이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원균이 공을 세웠다고 적은 내용이 몇가지 있다. 하나는 합류를 미루다가 재촉받은 뒤에야 전선 5척만 끌고 뭉그적대며 합류했던 옥포 해전으로 쇄미록의 내용만 보면 원균의 경상 우수군이 전라 좌우수군을 이끌고 싸운것처럼 보인다. 그 외에도 여러 '원균의 승전보'가 그대로 실려있으며 칠천량 대패 직전에 나무하던 비무장 왜군을 기습해 다 죽이려다가 역습을 받아 피해를 본 그 사건 역시 승전보로 기록되어 그 승전보가 그 실체를 모르는 민간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나온다.
이런 내용은 오희문이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피난지에서 떠도는 소문만을 듣고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관점에 따라선 왜란 당시 민심의 증언이니 만큼 어떤면에선 그 실체가 드러나기 전의 원균의 언플능력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소문의 기록과는 별개로 실제로 원균의 모습을 보고 적은 내용도 있는데, 충청병사로 부임한 원균이 술에 만취해 부축을 받고 가는 모습을 멀리서 봤다는 내용이다. 참 원균답다면 원균다운 내용.

5. 번역

2014년 10월 16일에 한국고전번역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이민수가 번역을 완료하였다.(네이버 책: 쇄미록 세트)
2018년 12월 19일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에서 번역한 쇄미록(한글 번역본 전6권, 한문 표점본 2권 포함 전8권)을 국립진주박물관[2][3]에서 펴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565371)
파일:국역 쇄미록.jpg
2020년 11월 06일에 사회평론아카데미에서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이 출간되었다. 16세기 양반 오희문의 난중일기로 알려져 있는 『쇄미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기록물이며, 9년 3개월의 기록이 51만 9,973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전권을 읽기가 쉽지 않은데, 사회평론아카데미에서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신병주 해설)이 출간되어 쇄미록 읽기가 수월해졌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302933)
파일:쇄미록.jpg

6. 외부 링크

7. 보물 제1096호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년 ~ 1613년)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년) ~ 선조 34년(1601년)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고,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시기에 있어서 관군의 무력함에 대한 지적과 비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 것과 화의 진행과 결렬, 정유재란에 관한 것 등 장기간에 걸쳤던 전쟁에 관하여 전반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오희문 자신이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분이 두터운 많은 고을 수령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보를 입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수현에서 보고 들은 각 지역의 전투 현황과 각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한 살인과 약탈 행위, 명나라 군대의 무자비한 약탈과 황폐화, 전란에 따른 피난민 사태, 군대 징발, 군량 조달 등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민중의 생활상과 지방행정의 실태 등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전반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인으로서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해준다.

[1] 본인은 미관말직도 얻지 못한 선비였지만 아들 오윤겸은 서인이긴 했으나 강직했고 당색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으로 광해군과 인조를 모두 섬기며 정묘호란 이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오희문 또한 아들 덕택에 선공감감역이 되어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75살로 당시 사람 치고는 엄청 장수했고, 아들이 영의정에 오른 것은 보진 못했지만 그럭저럭 중앙정계로 출세한 모습을 보고 죽었다. 또한 손자이자 아들 오윤겸의 조카가 되는 오달제는 삼학사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오달제 역시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므로 삼대가 모두 생전 혹은 사후에 정승에 올랐던 것. 게다가 후손 중에 영조 대 소론의 영수 오명항이 있다.[2]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에 특화된 박물관으로, ‘임진왜란자료 국역사업’의 일환으로 쇄미록을 첫 작업물로 선정해 발간한 것이다. 또한 현존하는 필사본 『쇄미록』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현재 〈오희문의 난중일기 『쇄미록』 ―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특별전시를 2019년 10월 13일부터 2021년 3월 7일까지 열고 있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974574[3] 국립진주박물관은 『쇄미록』에 이은 임진왜란 자료 번역사업의 두 번째 결실로 명나라 장수 송응창(宋應昌, 1536~1606)이 쓴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의 일부를 2020년 10월에 『명나라의 임진전쟁』(1, 2)으로 발간했고, 나머지를 2021년에 발간할 계획이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01111/1038999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