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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3:44:20

자오곡 계책


1. 개요2. 내용3. 논쟁
3.1. 가능론3.2. 불가론
4. 유사 사례5. 매체6. 관련 항목

1. 개요

자오곡 계책(子午谷計策), 자오도 대책(子午道對策)이라고도 하며, 삼국 시대촉한 장수 위연출정할 때마다 제갈량에게 제안한 북벌 계책이다.

촉군의 병력을 나누어 한쪽에서는 본인이 우선 소수 정예로 자오곡을 넘어 장안을 기습해 확보하고, 다른 쪽에서는 제갈량의 본대가 정석적인 먼 길로 돌아서 도착해 지원하자는 것이 작전의 내용이었다. 제갈량이 거절하여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2. 내용

위연은 매번 제갈량을 따라 출진할 때마다 번번이 군사 만명을 청해 제갈량과 서로 길을 달리 하여 동관에서 만나 한신(韓信)의 고사(故事)처럼 하고자 했으나 제갈량이 이를 제지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위연은 늘 제갈량이 두려움이 많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재주가 모두 쓰이지 못함을 한탄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1]
하후무가 안서장군(安西將軍)이 되어 장안(長安)을 진수하니 제갈량은 남정(南鄭)에서 군하[2]들과 함께 계책을 의논했다. 위연이 말했다: "듣기로 하후무는 어려서 주인의 사위가 되어 겁이 많고 꾀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 위연에게 정병[3] 5천과 부량[4] 5천을 주신다면, 곧장 포중(褒中)을 나가 진령(秦嶺)을 돌아 동쪽으로 진군하고 자오(子午)에 당도한 뒤 북쪽으로 향할 것이니, 10일을 지나지 않아 장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후무는 저 위연이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배를 타고 도주할 것입니다. 장안에는 오직 어사(御史)와 경조태수(京兆太守)만이 있을 것이고, 횡문(橫門)의 저각[5]과 흩어진 백성들의 곡식으로도 두루 먹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동방에서 군사들을 취합하는 데는 20일은 걸릴 것이니, 공이 야곡(斜谷)을 나와 도달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일거에 함양(咸陽) 서쪽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이 계책이 위태로워 안전하게 평탄한 도로를 따라 농우(隴右)를 평정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니, 십전필극[6]하며 근심이 없어야 한다고 하여 이 때문에 위연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
위략[7]

자오곡 계책은 『정사 삼국지』와 『위략』의 내용이 서로 다른데, 『위략』은 군사 5천 ~ 1만을 데리고 장안을 곧바로 찔러 보겠다는 내용이고,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오곡 계책이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는 유방의 본대와 서로 다른 길로 진격해 삼진을 토벌한 한신고사를 예로 들어 얘기하는데, 분군하면서 자오곡 계책이 포함될 수 있으나 추측에 불과하므로 단정하기는 무리이다. 따라서 『정사 삼국지』를 따른다면, 위연은 관중을 전역으로 하여금 제갈량의 본대와 자신의 별동대가 각기 위군을 분산, 격파하며 나아가 양주를 흡수하고 동관에서 합류하여, 사례로 진출하자는 뜻으로 보인다. 제갈량의 대위 전략 또한 일관하게 옹양주 흡수 뒤 사예 진출이었으나, 그 대전략을 실행하는 데 있어 위연은 제갈량과 이해를 달리한 것이다.

어느 일화가 진짜 위연이 제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둘 다 위연이 실제로 말한 것이라면 『위략』의 기록은 하후무 때문에 제1차 북벌 때 나왔고, 제2차 북벌 때부터는 매번 『정사 삼국지』의 기록대로 이른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둘 다 주장했을 수도 있다.

3. 논쟁

3.1. 가능론

촉나라는 각 보루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싸우지 말고 물러나 한(漢)과 낙(樂) 두 성으로 돌아와 지키라고 했다.
위흥태수(魏興太守) 유흠(劉欽)은 자오곡(子午谷)으로 달려갔고, 기타 각 군은 몇 갈래길로 나란히 진군하여 한중(漢中)에 도착했다.
한수(韓遂)•마초(馬超)가 난을 일으켰을 때, 관서(關西)의 주민들이 자오곡(子午谷)으로부터 장로에게 달려온 자가 수만가구(數萬家)였다.

자오곡은 군대의 이동이 불가능한 땅으로 알려졌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피난민들, 상인들이 사용하는 길이며 흥세 전투에서도 하후패는 자오곡을 통해 한중으로 진입했다.[8]
기습 병력을 출동시켜 장안을 점령하자는 위연의 건의를 제갈량이 채택하지 않은 것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 유비는 형주 쟁탈전에서 대패하여 병력을 거의 다 잃었다. 유비가 죽은 뒤, 촉한은 아무런 활동 없이 조용히 지냈다. 위가 경계 태세를 푼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하후무는 곱게 자란 명문가의 자제로, 능력도 용맹도 없었다. 따라서 위연이 기습 부대를 출동시켜 장안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제갈량은 평생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다. 위연은 항상 제갈량이 두려움이 많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기량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다고 한탄했는데, 공감할 만한 주장이다.
허쯔취안, 『위촉오삼국사』 14. 제갈량의 촉한 통치와 남정 북벌

자오도의 지세가 오늘날에도 시골길이라며 비판받지만, 아무리 험하고 멀다 해도 오늘날 서울-대전 거리보다 살짝 길다. 이는 남정에서 기산도를 거쳐 상규로 진격하는 제갈량의 북벌 경로와 걸리는 시간이 비슷하다. 따라서 자오곡은 충분히 넘어갈 만했으며, 게다가 위연은 독한중으로서 지형에 능숙하고 정예병으로 구성된 별동대는 더욱 빨리 급습하였을 것이다.

환온의 북벌 때 자오곡으로 간 사마훈은 3월에 처음 진격하였는데, 4월 말에 패배하였음에도 머물렀으며 6월에 다시 진창에서 격파당하고 나서야 익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적어도 1 ~ 3개월은 보급이 가능했다고 보이며, 위연이 군량은 충분하리라 예견했던 것도 타당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위략』은 위나라 입장에서 쓰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하후무를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만큼 하후무가 졸장이었고, 하후무가 도망가 지휘 체계가 무너진 장안은 쉽게 점령할 수 있다는 위연의 추측은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았다.[9] 만에 하나 장안에서 대비를 한다면 그때 돌아와도 늦지 않다.

게다가 불가론자들은 장안 함락과 유지 여부만 줄기차게 따지지만, 위연이 정말 장안만 염두에 두었더라면 경조[10]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는 함양(咸陽)[11] 서쪽을 언급하였다. 이것은 장안만 무작정 공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차 하면 우부풍[12] 주둔 병력을 깨뜨리고 길만 끊어도 옹양주에 남은 곽회, 서막 등이 이끄는 위군은 고립되어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수를 두었던 것이다. 제1차 북벌로 얘기하면, 조진이 이끄는 본대는 기곡에서 조운을 막다가 뒤에서 나타난 위연에게 협공당하는 것이다.
촉의 국력을 고려하면 성공 방법은 기습밖에 없었다. 그러나 완벽한 기습을 노리는 제갈량은 두 가지 잘못된 선택을 한다. (중략) 두 번째는 잘못된 진격 경로다. 관중으로 가는 통로는 여럿인데 위연은 자신이 최단 거리로 진격해 관중을 점거하고 제갈량의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겠다는 대담한 작전을 제안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이를 거부했다. 그가 채택한 경로는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이었다. 기습 공격에 먼 거리는 완벽한 모순이다.
임용한, 『세상의 모든 전략은 삼국지에서 탄생했다』

자오곡 계책은 위험이 컸던 것이 맞다. 그러나 소국이 대국을 무턱대고 안전하게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은 병법을 다시 써야 할 일이다. 제갈량의 북벌은 공격하는 입장으로서 결과적으로 전패했으며,[13] 이제 와서 보면 어차피 국력만 낭비할 건데, 자오곡이라도 시도해 보지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위연곽회비요를 격파하고 노성에서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 본대를 깨뜨린 적도 있는 명장이었다. 자오곡 대책은 단순히 운 따위에 믿는 계책이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지략을 갖춘 장수가 여러 상황을 가정하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계책과 다름없는 것이다.

또 『정사 삼국지』를 따른다면 위연은 단지 군을 나누어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각개 격파하자는 지극히 평범한 제안을 한 셈이 된다.

3.2. 불가론

자오곡 계책이 실현된다고 해도 제대로 작동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일단 자오곡 계책은 적장의 미숙함이란 불확실한 변인에 크게 의지하였고, 따라서 도박성이 짙다. 배후를 장악하지 않은 채 공성전을 치르는 것은 위험하고,[14] 퇴각한다고 쳐도 뒤를 잡히게 된다면 그 피해는 꽤 클 것이다.

또 『위략』은 하후무를 폄하해 기술했다는 결론은 성급하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위연의 평가를 기록한 것이고 저자가 직접 폄하하지 않았고 위나라 인물들이 하후무를 폄하하는 기록이 아니라 적장 위연의 평가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위연의 자오곡 대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위연의 하후무 평가가 부가적으로 나온 것이기에 저자가 하후무를 정말로 비하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불명이다. 하후무가 정녕 안일했는지 부정확하고, 설령 하후무가 도망가 장안을 손쉽게 접수한다고 쳐도 협공당할 위험만 커질 뿐이다. 실제 제1차 북벌 때 조예가 장합을 보낸 뒤 곧바로 장안으로 와서 시찰했던 것을 생각하면, 위나라의 태세가 그리 안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재수가 없으면 장합의 선발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애초부터 하후무가 도망쳐서 지휘 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은 과장이다. 하후무가 도망가도 경조 태수가 존재한다. 위연도 설명한 부분이다. 경조태수가 하후무처럼 도망가지 않으면 골치아파진다. 곽회가 옹주자사로 있기에 하후무의 공백을 대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중 공방전에서 하후연이 전사하자 일시적으로 하후연의 자리를 장합이 대신한 경우가 있으니 불가능하지 않다.
진수가 제갈량을 논하며, "재주가 군을 다스리는 게 장점이었고, 기묘한 계책은 단점이었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장수의 지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일렀는데, 이는 슬퍼서 나온 말이 아니다. 용병하며 기책을 내는데 능숙함은, 의당 위무제(魏武帝)만 못하다. 그러나 더불어 대적한 바는, 원소 이외에는, 모두 큰 모략이 없었고, 또한 모두 깊고 단단한 뿌리가 없었으나, 위(魏)와 같은 경우는 힘써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위연의 다른 길을 통해 모두 모이는 모략은, 취하지 않음이 아까워할 만하다. 그러나 포야(褒斜), 자오(子午)는, 나오기는 쉬워도 이어지기는 어려워, 함양(咸陽) 이서가 만약 평정될 수 있어도, 위가 대군을 일으켜 이를 다투고, 농우의 여러 군이 그 뒤에 기대면, 촉이 과연 이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가 제갈량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자 한 이유인가?
여사면(呂思勉, 중국의 근대 사학자), 진한사(秦漢史)

그런 상황에서 촉군 본대는 서북 삼군을 치자니 장안의 분견군이 위태롭고, 장안을 구원하자니 서북을 등 뒤의 칼날로 놓고 싸우는 모습이 된다. 앞뒤로 협공당하는 뒤치기 뿐만 아니라 한중이나 본토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도래하는 일이다.

제갈량은 언제나 촉군이 위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며 싸워야 했다. 위군은 관중 수비군만 10만이 넘어가는데 촉군은 전력을 다해도 8 ~ 10만 사이를 동원할 수 있었다. 자오곡 계책을 실행한다면 위연의 분견군 1만과 제갈량의 본대 7 ~ 9만은 서로 연결이 끊긴 채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때에 위연의 분견군이 고립된다면 촉은 얻기 드문 야전 사령관과 1만의 정예 부대를 잃는 셈이다.

따라서 차라리 제갈량이 생각했던 대로, 몇몇 거점을 꾸준히 점령하여 최소한의 싸움으로 서량을 얻는 방법이 더욱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 교수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갖고 있으며,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 도서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는 집필한 최진열 교수는 중국 역사에서 자오곡 군사작전의 숫자는 적으며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역사 삼국지 참조. 최진열 교수는 한국 역사하계에서 위상이 높은 동북아역사재단에 삼국지 연구 관련 논문을 기재한 교수다.#

자오도를 직접 답사한 한 유튜버에 따르면 위진시대 자오도 북쪽에는 검각과 비슷한 역할의 관문이었던 석양관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 # 석양관의 지리적 이점은 검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기에 수 천 병력으로 이를 돌파해내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라는 평가 또한 덧붙인다.

더불어 장안을 점령한 위연의 분견대에 대한 보급도 문제이다. 자오곡의 오솔길은 대규모 보급부대를 보내기에는 너무 위험한데다, 옹양주의 선점 없이 장안성만 덩그라니 점령한다는건 마치 바다 한가운데의 섬에서 홀로 버티는 형세가 되어버린다. 이를 해소하려면 제갈량의 본대가 정말 미칠듯한 쾌진격으로 옹양주의 관서 방어군을 섬멸해줘야 하는데, 아무리 1차 북벌이 기습의 충격력을 극대화한 전장이었다지만 그걸 고려해도 너무 무리한 공격 계획이다. 물론 장안성이 워낙 거성이기도 하고 방어력도 막강하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렇다 쳐도 위군이 긴급히 동원할 중앙군에 비하면 1만은 너무 초라한 숫자여서, 말 그대로 방어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게 또 문제인게, 장안성은 가정이나 열류성 같은 길목의 요충지가 아니기 때문에 위군 입장에선 위연이 장안성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올 정도의 규모만 유지한 채 나머지 주력군을 우회시켜 가정으로 쇄도하는게 가능하다는 점이고 이렇게 되면 제갈량은 애써 촉한 최고의 무장과 정예군 1만을 빼낸 보람도 없이 똑같이 가정에서 위군을 맞서야되는 상황이 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물론 위군도 장안에 포위 병력을 배치해야하니 결과적으로 맞붙는 병력비는 비슷하겠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오히려 촉군에게 불리하다. 촉 입장에선 역사 그대로의 전개보다 의도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추가되는 셈이기 때문.

비슷한 사례로 3차 십자군 당시의 사례를 볼 수 있는데, 살라딘에 의해 십자군 공국들이 완전히 붕괴된 뒤로 예루살렘은 마치 자오곡 대책의 장안성 마냥 적지에 혼자 외따로 떨어진, 심지어 수로로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점까지 여러모로 비슷한 조건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이 예루살렘이었기에 당시 총사령관인 리처드 1세도 끊임없이 이 도시를 노렸으나, "공성전에 들어갔을 때 보급선을 유지할 수 있는가?", "공성전 중에 배후에서 적의 원군이 오면 대응할 수가 있는가?", "설령 점령하더라도 이후 재포위되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같은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을 수가 없어 결국 공략을 포기해버린다. 자오곡 대책의 장안성 공략도 이 3가지의 의문점은 명쾌히 해소할 수가 없으며, 위연이 지휘관으로서 천재였던 리처드 1세보다 월등히 뛰어난게 아닌 다음에야 이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가 없다. 오로지 천운에 기대는 군사적 모험주의는 제갈량 입장에선 성격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채택하기에도 촉한의 한정된 국력 상 어려웠을 것이다.

4. 유사 사례

5. 매체


우선 해당 시나리오에서 촉군의 상황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촉빠들이 눈물 줄줄 흘릴 정도로 모든 IF 상황이 촉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터져있다. 사실 이 정도로 조건이 좋은 상황이라면 구태여 자오곡 같은 고난도의 루트를 택할 필요 없이 오장원을 경유하는 제대로 된 루트로 장안을 공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그게 정답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연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참모 둘에 서량군의 대부인 마초까지 합세, 게다가 농서 방면에 대한 양동조차 포기했을 정도면 그 군세가 상당할 텐데 이걸 좁아터진 자오도로 이동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진삼국무쌍 8 시즌패스 3에 포함된 법정 IF 시나리오 후반부의 북벌 같은 경우도 어느 정도는 자오도 대첵을 반영한 내용이 나온다. 원래 역사대로 제갈량이 북벌군을 이끌고 위와 대립할 때 제갈량의 몸상태를 걱정한 유비가 법정에게 그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법정이 위연과 마대를 데리고 소규모 기습부대로 장안을 찔러 위군이 제갈량의 북벌군만 아니라 빈집털이까지 걱정해 병력을 집중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고 이후 법정이 몸상태가 안 좋은 제갈량 대신 북벌군을 지휘한다는 식이다. 물론 여기서도 여러 IF 조건들이 있어서 가능했고, 위연은 욕심을 부려서 "장안... 뺏는다..."라는 기세로 그냥 찌르고 빠지자는 법정의 말을 무시하고 돌발행동을 하려다 마대가 "주공이 싫어하실 텐데 상관없음?" 이렇게 경고하여 말을 듣게 하고서 철수에 성공한다. 제작진의 제갈량 까기와 위연 편들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기습군만으로 장안을 온전히 빼앗아 지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묘사한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삼국전투기에서 제갈양위연에게 자오도 계책을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내용이 꽤 나 합리적이다. 핵심은 자오도와 가까운 상용이 조위의 손에 있다는 건데, 만약 상용이 촉한의 손에 있었다면 위연의 별동대를 막기 위해 미성 인근에 주둔중인 조진의 본대를 끌어다 써야 한다는 양자택일에 걸리는데 반해[23], 상용이 조위의 손에 있다면[24] 미성에 있는 본대를 움직일 것 없이 상용의 병력으로 별동대를 견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6. 관련 항목



[1] 출처: 파성넷[2] 群下, 여러 수하.[3] 精兵, 정예병을 뜻한다.[4] 負糧, 군량을 짊어질 군사.[5] 邸閣, 곡식 저장고.[6] 十全必克, 완전무결하게 하여 반드시 이김.[7] 출처: 파성넷[8] 촉한멸망전 때 유흠은 위흥(서성)태수였으므로 자오곡(의 입구)을 거쳐온 것이지, 자오곡을 통과한 게 아니다.[9] 전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휘 체계는 무척 중요하다. 통주 전투, 용인 전투, 쌍령 전투 모두 지휘 체계의 붕괴로 대패한 전투들이며, 제2차 세계대전 마켓 가든 작전발터 모델은 후방의 수병, 훈련병 등을 급조했음에도 연합군의 정예 공수부대를 막아 이겼다.[10] 오늘날 시안시, 즉 장안이다.[11] 오늘날 셴양시이다.[12] 오늘날 싱핑시이다.[13] 특히 제5차 북벌 때, 제갈량은 천천히 세를 뒤집겠다는 의도로 지구책을 썼다가 정작 본인의 수명을 고려하지 못하고 과도한 업무에 눌려 병들어 죽었다.[14] 게다가 장안은 수도였던 적도 있는 만큼 조그맣지도 않았으며 이각-곽사 시기에 수 차례 공성전을 치른 적도 있는 거성이었다.[15] 다만 하후패의 자오도 진군이 230년인지 244년인지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230년일 경우 흥세 전투의 자오도 진군은 제외해야 한다.[16] 나머지는 한중에서 장안으로 통하는 길이 대부분 오장원 뿐이다.[17] 이 중 장안 기습에 참가하는 것은 마초, 방통, 서서, 그리고 처음 발안한 위연.[18] 특히 마초의 경우 본거지가 양주였으며, 옹주 그것도 장안까지도 점령하고 조조와 대치한 경험이 있는 만큼 옹양주의 지형 정보에 밝으니, 그가 참가했을 때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19] 실제로 관우의 번성 진출 당시 조조는 천도를 고민하기도 했다. 허창 코앞에서 전쟁 벌인 관도대전도 있는 마당에 허창에서 800리 떨어진 번성으로 뭐 그리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관도 대전 때는 서로 땅 크기도 고만고만했고 상대인 원소의 수도 업성도 전장 코앞인 것은 마찬가지였다.(허창-관도보다 연진-업 거리가 더 가까울 정도). 즉 조조의 하북 평정 이후로 허창이 이렇게까지 군사적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경우는 없었다. 마초의 서량군 거병 때에는 허창성 천리 밖에서 저지되었고 적어도 황하와 동관-함곡관으로 이어지는 회랑 지대 등 자연 장애물이 제법 있었지만 번성에서 허창 사이에는 이렇다 할 자연적인 장애물도 없다.[20] 번성 공방전 당시 조위는 10만 병력을 투입하고도 동오의 형주 뒤치기까지 겹쳐서야 간신히 관우의 목을 베고 형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후에 촉한을 갈아버리겠다고 벌인 흥세 전투의 투입 병력이 10만이었고 이 병력 날려먹은 후 조위는 무려 20년간 대촉 전선에서 수세로 일관해야 했다. 형주 전선은 이미 모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오군은 합비에서 네 번이나 상호구 인증을 한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하물며 그 10만이 죄다 형주 전선에 몰려있다면?[21] 원래대로라면 상규에 주둔하다가 촉군을 맞아 필사의 공방전을 벌였어야 할 옹주자사 곽회가 여기서는 곽가 뭐요? 아래서는 노숙도 살아있다 와 함께 마지막에서야 증원군으로 도착하는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즉 코에이도 한중 방면 방어선이 실제보다 허술할 상황을 가정하고 시나리오를 짰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게임에 뭐 그 정도로까지 고민했으려고. 이래봬도 삼국지만 20년을 파먹는 친구들인데? 다만 밑에서 보겠지만 위 측은 조진과 장합이 처음부터 장안성에 대기하고 있기도 하고, 다른 네임드 캐릭터가 연이어 줄줄이 등장하긴 한다.[22] 꽤 간과하기 쉬운 부분으로, 이 게임에서 촉오 양측 모두 가상 시나리오의 북벌은 절대 단독 작전이 아닌 촉오 공동 작전으로 전개된다. 그만큼 위가 넘사벽의 국력이라는 점을 어필하는 부분.[23] 별동대를 막기 위해 본대를 후퇴시킬 경우 기산에 위치한 제갈량 부대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고, 제갈량 부대를 견제하기 위해 미성에 알박기를 시전한다면 별동대를 경조(장안) 수비군만으로 상대해야 한다.[24] 설명에는 무려 사마의가 상용에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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