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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5-07 03:24:49

이막



李邈
(?~234)

1. 개요2. 생애3. 처형당한 배경4. 평가5. 기타6. 창작물에서

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로 자는 한남(漢南)이다. 이소이조의 형제이며 요절한 동생이 하나 더 있었다.[1] 익주 광한군 처현 출신이다. 그의 형제들은 재능과 명성이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이씨 삼룡(李氏三龍)'이라 불렸으나, 이막은 성격이 오만하고 강직하여 이 삼룡에 포함되지 못했다.

2. 생애

원래 유장 휘하에서 우비장을 지내다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면서 그의 휘하가 되었다. 정월 초하루에 유비가 술을 권하자, 이막은 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기 전에 적이 먼저 소멸되었기에 유비가 익주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간언했다. 유비가 옳지 않다면 왜 그 자를 돕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막은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했던 것이라 대답했다. 이에 분노한 관리 하나가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제갈량이 간청하여 화를 면했다.

이후 건위태수, 승상참군, 안한장군을 역임했다. 228년 제갈량이 위나라 북벌에 나섰다가 가정 전투에서 큰 실책을 범한 마속을 처형하려 하자 이를 만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秦)나라는 맹명(孟明)을 용서함으로써 서융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초나라는 장군 자옥(子玉)을 주살함으로써 두 번 다시 천하를 다투지 못했습니다.

이 발언은 역사적 고사를 인용한 것이었으나 제갈량의 처벌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이었기에, 이막은 결국 제갈량의 신임을 잃고 촉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34년 제갈량이 사망하자 황제 유선은 소복을 입고 크게 애도했다. 그러나 이막은 이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여록(呂祿), 곽우(霍禹)가 꼭 역심을 품은 것은 아니며 효선제(孝宣帝)도 신하를 죽이는 군주가 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신하는 핍박이 닥쳐올까 두려워하고, 군주는 신하의 위세를 두려워한 까닭에 간사한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제갈량은 강한 군대에 기대어 이리(狼)처럼 사방을 둘러보고 범처럼 사납게 노려보며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았으니, 신은 늘 그것을 염려했습니다. 이제 제갈량이 죽었으니 일족은 온전함을 얻었고, 서융은 모두 평정되었으니 모두가 경축해야 할 일입니다.

이 상소는 국가적으로 존경받던 제갈량을 호랑이와 이리에 비유하며 비방한 데다, 그의 죽음을 경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유선은 크게 격노하여 당장 이막을 체포해 하옥시킨 뒤 주살하였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은 유선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진한(秦漢) 이래로 나라를 망친 임금이 모두 다 어리석고 포학한 이들만은 아니었다. 초나라 의제는 참으로 뛰어난 임금이었고, 진나라 자영은 즉위 초에 조고를 죽일 수 있었으니 또한 뛰어난 임금이라고 할 만하며, 한나라 헌제는 중간 정도의 임금이 되기에 충분하였지만, 불행하게도 말운(末運)을 만났을 뿐이다.

유선은 참으로 평범한 재주였지만, 시종일관 무후(武侯)에게 국정을 잘 맡겼다. 무후가 죽자 이막이 "무후가 죽지 않았으면 필시 나라에 불리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니 유선이 노하여 이막을 죽였다.

한나라 소제(昭帝)가 곽광을 믿고 맡긴 것도 이보다는 못하였다. 그런데도 용렬한 임금이라고 시호를 받았으니 원통하지 않겠는가.
(중략)
청성잡기

3. 처형당한 배경

일반적으로 유선은 성품이 온화하여 크게 화를 내는 일이 드물었던 군주로 알려져 있으나, 이막의 처형 건에서는 예외적으로 강경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막의 상소가 단순한 의견 개진을 넘어 여러 측면에서 심각한 정치적, 도의적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유선에게 제갈량은 선제인 유비가 탁고를 남긴 충신이자, 국정을 이끌어온 재상이며, 개인적으로도 스승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유선이 당대의 유교적 예법을 뛰어넘어 신하인 제갈량의 죽음에 직접 소복을 입고 3일간 애도한 것은 제갈량에 대한 두터운 신뢰와 예우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이막의 상소는 황제의 이러한 확고한 입장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또한 이막은 상소문에서 "군주가 신하의 위세를 두려워했다"고 언급했다. 제갈량 사망 당시 유선은 28세로 이미 즉위 11년 차를 맞이한 성년 황제였다. 이러한 발언은 황제가 권신에게 휘둘려 눈치를 보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황권과 군주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발언이었다.

나아가 이막의 주장을 수용할 경우, 제갈량이 수립해 놓은 촉한의 국정 운영 체제와 북벌이라는 건국 이념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제갈량 사후 촉한 조정에 장완, 비의 등 제갈량의 후계자들이 연이어 집권한 것을 보면, 유선은 제갈량의 정책 기조를 뒤집을 의도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이막의 처형은 제갈량의 정책을 흠집 내려는 시도를 차단하고, 기존의 국정 방침을 그대로 이어나가겠다는 황제의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다.

민심과 조정의 동향 역시 이막의 발언을 수용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제갈량은 생전에 백성들과 이민족들로부터 자발적인 사당 건립 요구가 일어날 만큼 깊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에 의해 좌천되었던 이엄이나 요립조차 제갈량의 부고를 듣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인망이 두터웠다. 조정 내에 뚜렷한 반(反) 제갈량 세력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나온 이막의 극단적인 비방은 공감을 얻기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도의적인 측면에서도, 이막은 과거 유장 두둔 발언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제갈량의 간청으로 목숨을 구한 바 있다. 자신을 구명해 준 은인을 사후에 맹렬히 헐뜯은 행동은 당시 사회의 도덕적 관점에서도 극심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4. 평가

《정사 삼국지》와 《화양국지》 등의 기록을 보면, 이막은 뛰어난 형제들 사이에서도 홀로 '이씨 삼룡'에 들지 못할 만큼 대세를 겉돌고 성격이 모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유비 앞에서의 직언으로 미루어 볼 때 본인의 소신과 기개, 그리고 제갈량이 구명할 정도의 기본적인 실무 능력은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상황에 맞지 않는 극단적인 언행으로 늘 마찰을 빚었다.

결과적으로 큰 정치적 대안이나 명분 없이 오직 반대를 위한 반대와 독설을 일삼다가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는 점에서, 후대의 긍정적인 평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생명의 은인이자 국가적 영웅인 제갈량을 모욕하다 처형된 행적 때문에, 종종 예형이나 양수처럼 재능을 믿고 오만하게 굴다 최후를 맞이한 인물들과 묶여 부정적으로 회자된다.

5. 기타

이씨 삼룡으로 묶였던 뛰어난 동생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그룹에 들지 못한 이막이 가장 오래 살아남아 동생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4형제 중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 역시 이막 본인이었다.

6. 창작물에서

소설 《삼국지 유지경성》에서는 광록대부로 등장한다. 촉과 위가 싸우는 와중에 가맹관이 함락되고 위군이 성도까지 진격하는 상황에서, 유선이 위나라와 비밀리에 합의한 일로 인해 비의가 암살된다. 이에 북벌을 나갔던 유비와 제갈량이 유선을 치기 위해 군사를 돌리자 이풍과 함께 이를 제지하려 나서며 유비에게 호통을 치지만, 결국 유비의 칼에 베여 죽는다.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는 실제 역사처럼 제갈량 사후 그에게 폭언을 퍼붓지만, 마속이 배려하여 사적인 술자리에서 한 실언으로 무마해 준 덕에 처형당하지 않고 유배를 가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막말을 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해, 그를 거두어 활용하려는 마속조차 이막의 인성 부분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묘사된다.
[1] 중국 위키백과에서는 이막이 이조의 형으로, 4형제 중 장남인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