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楚)의 영윤(令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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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자옥 子玉 | ||
최종직위 | 영윤(令尹) | |
성 | 미(羋) | |
씨 | 성(成) | |
명 | 득신(得臣)[1] | |
자 | 자옥(子玉) | |
조부 | 약오(若敖) 웅의(熊儀) | |
백부 | 투백비(鬪伯比)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기원전 6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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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백비의 조카이자 투누오도(鬪穀於菟)의 종형제.[2][3] 초성왕(楚成王) 대 초(楚)나라의 영윤(令尹)이다. 자는 자옥(子玉). 아들인 성대심과 성가도 훗날 영윤의 자리에 올랐다.2. 생애
초 성왕 35년(기원전 635년)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약(鄀)나라를 쳤다. 그곳은 신, 익 등 거대한 현이 있었다. 이에 성득신은 진(秦)나라 군대를 쳐서 포로를 잡았다.초 성왕 38년(기원전 634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치자 노희공이 공자 숙과 장문중을 불러 초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초나라에서 제나라를 쳤다. 그러자 제환공의 아들들이 초나라로 망명하자 그들을 거두었고, 기(紀)나라를 멸했다.[4]
초 성왕 39년(기원전 633년) 가을에 송나라를 쳤다. 이에 송양공의 아들인 송성공이 진(晉)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진문공(晉文公)은 송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초 성왕 40년(기원전 632년) 봄 초 성왕이 진(晉)나라와 싸우지 말라고 했으나 성득신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진군과 싸웠다. 진 문공은 초 성왕과의 약속대로 90여리를 물러 주었다.[5] 그러나 성득신은 그동안 세운 공로와 자신의 재주를 믿고 기고만장하여, 계속 추격하자 진 문공은 성득신을 유인해 물리치니 이것이 바로 성복 전투다. 성득신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초 성왕은 크게 노해 자결을 명령하고 성득신은 그대로 자결하여 생을 마감했다. 나중에 초성왕이 후회하여 자결하지 말라고 사자를 보내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은 이후였다.
3. 사후
진문공은 성복전후 이 후 정문공에게 "성득신이 살아있는 한 중원국은 편치 못할 것이다." 라며 성득신에 대한 경계심을 세웠으나 정문공이 성득신이 자결했음을 일깨우자 "정나라가 복속한 것은 기쁘지 않으나 성득신이 죽은 것은 기쁘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성득신이 얼마나 출중한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그가 죽고 30여년이 지나 기원전 597년 초나라와 진나라가 필 땅에서 싸우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전임 중군장 극결이 죽고 막 순림보(荀林父)가 중군장[6]이 된 상황으로 순림보 외에는 중군좌 선곡(先縠), 상군장 사회(士會), 하군장 조삭, 하군좌 난서, 사마 한궐과 경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위기, 조전, 조동, 조괄, 조영 등이 참전했다. 여러 장수들 중 사회, 조삭, 난서는 초군과 싸우는 것을 반대했지만 군공을 세워 경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위기, 조전 등이 강력히 전투를 주장하고 무엇보다 중군좌 선곡이 독단적으로 강을 건너면서 '강을 건너지 않고 패하면 경이 모든 책임을 져야하나 강을 건너서 패하면 모두가 책임을 나눠서 지니까 건너야 한다'라는 사마 한궐의 말을 듣고 순림보는 강을 건넌다. 하지만 지휘부가 사분오열된 상태의 진나라는 초장왕 아래서 전성기를 누리던 초나라에게 대패했고 패장이 된 순림보는 군말없이 진 경공에게 패장으로서 죽음을 청하자 경공은 수락하려 했다. 이때 사악탁(士握濁)이 '초성왕이 성득신을 죽였을 때 진문공이 기뻐했던 일'을 언급하며 순림보를 죽이면 두 번 패배하는 일이라 말한다.
이 말을 듣고 경공은 순림보를 용서하고 지위를 복권했다. 대신에 상관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돌격한 부장 선곡에게 패전 책임을 따져 선곡과 그 일가를 참살했다. 그리고 3년 뒤 순림보는 사회와 같이 노씨(潞氏)[7]와 장량에서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둔다. 경공은 크게 기뻐하면서 순림보에게 후한 상을 내리며 치하하고 사악탁에게도 3년전 순림보를 함부로 해하는 걸 막게한 공로라면서 역시 상을 내리며 치하했다. 순림보는 다음해에 병으로 죽었지만 적어도 패전 오명을 씻고 상도 받으며 한없이 세상을 뜬셈이다.
4. 대중문화
열국지에서는 송양지인(宋襄之仁)으로 유명한 송양공(宋襄公)을 홍수전투에서 물리치는데 활약한다.[8][1] 이문열은 자신이 평역한 삼국지에서 得臣이라는 글자만 보고 자신만만하게 힘들게 얻은 신하라고 번역하는 오류를 저질렀다.[2] 투씨와 성씨는 둘 다 약오의 후손인 약오씨로 초나라 왕족의 방계이다.[3] 누가 연장자인지는 불확실하나 투누오도가 은퇴하면서 성득신을 영윤으로 추천한 것을 보면 투누오도가 형일 것이다.[4] 다만 기나라가 멸망한 시기가 제양공 대라는 설도 있다.[5] 그런데, 이것은 약속을 핑계로 성득신의 공명심을 역이용해 초군을 몰살시키려는 계책이었다.[6] 진나라는 중군장이 정경, 집정으로서 나라의 모든 일을 총괄했다.[7] 적적(赤狄)의 부락 중 하나이다.[8] 송양공의 성향을 잘 알아 자신만만하게 물리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