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諸葛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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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갈량의 인간관계를 다루는 문서.2. 군신 관계
- 유비-유선: 제갈량이 주군 유비를 위하여 힘을 다한 헌신적인 충성은 유비가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유선을 섬기어 생애를 일관한 것으로 세상에 유명하다. 그 일은 제갈량이 위를 향하여 북벌의 군사를 일으켰을 때, 유선에게 헌상한 출사표에 그 충절이 나타나 있다. 또 유비는 거병의 당초부터 유명한 관우와 장비와의 사이에 의형제에 준하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즉 임협자간에 이루어지는 매우 인격적인 맺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는 개인과 개인과의 사이에 맺어지는 매우 인격적인 종적관계 즉, 주종관계가 사회속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지금 본 임협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이것은 지식인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관계가 보편적으로 있었다. 즉 "사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인정해 준 자로서 제자는 선생에 대하여 아랫사람은 자신을 인정해 준 윗사람에 대하여 이후 오랫동안 헌신적인 충성을 다하였다. 이를 "문생(門生), 고리(故吏)"의 관계라고 한다. 일류의 지식인인 제갈량의 경우는 유비를 둘러싼 임협적 주종관계와 삼고의 예를 가질 만큼 인격을 인정받은 데 대한 은의감의 혼합상황이 느껴지는데, 이윽고 유비의 사후, 그가 승상으로서 촉한의 유지와 위에 대한 공격에 전심할 때, 촉한에서는 임협적 주종관계보다 그의 문인으로서의 합리적 통치가 우선되어 간다.[1][2]
3. 가족 관계
- 황부인: 제갈량의 부인이자 양양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 머리는 누렇고 얼굴은 검어 외모는 그리 볼품없으나 총기와 재주는 탁월했다고 한다. 이 결혼을 통해 제갈량은 양양의 상류 귀족층에 진입하였다. 황승언은 황부인의 외모를 폄하하면서도 그 재기만큼은 제갈량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딸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지만 공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3]
- 제갈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제갈량의 친형. 일곱 살 연상이다. 제갈 형제의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과 제갈균, 그리고 제갈량의 큰 누이와 작은 누이를 데리고 남하할 당시 고향의 전원과 묘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에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된 제갈근이 계모를 모시고 영도에 남아 이들은 13여 년 동안 생이별을 하게 된다. 젊어서 낙양에서 유학했으며 결국 자신도 전란을 피해 계모를 모시고 강동으로 들어가 노숙의 인맥에 편입되어 손권의 막하에 들어가게 된다. 겸허하고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로 장소와 함께 군주 손권의 불 같은 성격을 제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군사, 외교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며 오나라의 신하로써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할 만큼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다.[4] 동생인 제갈량과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한번 만났고 근이 오의 중신, 량이 촉한의 승상이 되어서도 만났는데 사적인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한다.[5] 다만 혈연이 혈연인지라 손권에 의해서 대촉 외교에 많이 애용되었다.[6] 이릉대전 당시 제갈량이 유비를 적극적으로 말릴 수 없던 것도 제갈근 문제 때문이었음을 고려할 때 마냥 좋게만 작용한 건 아니었지만.[7] 그 형에 그 동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케이스. 두 명 다 충신 중의 충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형주 소유권 분쟁 이전 제갈근은 차남 제갈교를 동생에게 양자로 보냈는데 이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 제갈균: 제갈량 삼형제의 막내. 형이 유비에게 출사한 뒤 유비를 따랐으며, 장수교위의 지위에까지 올랐다.[8] 형인 제갈량을 위해 약혼을 했다고 하는데 정치적인 정략결혼을 한 모양이다. 부인은 임씨로, 둘 사이에서 망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제갈망의 후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워낙 후대 기록이라 신빙성은 떨어진다. 한편 제갈균이 제갈량의 이복동생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황이 몇 가지 남아 있는데 친동생이라는 설 또한 존재하여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 큰누나: 괴월, 괴량 등으로 유명한 양양의 명문가인 괴씨 가문의 자제 괴기와 결혼. 제갈량이 융중에서 밭을 갈며 공부를 할 당시 경제적 부분 등 이방인인 그가 양양에 정착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남편인 괴기가 위나라 소속으로 근무하다가 촉장 맹달에게 패사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 작은누나: 양양의 명문귀족이자 명성 높은 선비인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과 결혼. 즉, 방통의 사촌형수 되시겠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양양에 정착하고 공부하는데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 제갈첨: 제갈량이 47세 때 태어난 외아들이다. 태어난 해부터 북벌이 시작되었고 제갈첨이 8살 때 제갈량이 사망한 탓에 많이 만나지 못했지만 제갈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이가 총명하고 사랑스럽다며 팔불출 기질을 보였다. 촉한에서 벼슬을 하여 상서부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263년 면죽에서 위나라 장군 등애에게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 제갈상: 제갈첨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다.
- 제갈경: 제갈첨의 차남으로 촉 멸망 때는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 형과 달리 참전하지 않았다. 촉이 멸망한 뒤 하동으로 이주했으며 서진 아래에서 강주 자사를 지냈다. 족보에 따르면 그의 아들 제갈충(諸葛忠)이 신라로 귀순하여 한국 제갈씨들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제갈반: 제갈교의 아들. 제갈량에게 있어선 양손자에 해당되는데, 제갈근의 장남인 제갈각과 그 가족이 오나라에서 죽임을 당해 제갈근의 대가 끊겼다. 훗날 손침이 주살되고 제갈각이 복권되자 오나라로 돌아가 제갈근의 후사를 이었다.
- 제갈각: 제갈근의 장남인 관계로 제갈량에게는 조카. 제갈근 사후 손준과 더불어 오나라의 실세가 되었지만 오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했고, 전횡을 일삼은 것을 계기로 살해당하고 만다. 이 때문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제갈씨 능력자 3인방(제갈량, 제갈근, 제갈각) 중 혼자만 매력이 유난히 낮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둘 다 90대를 호가하는 매력이지만 제갈각 혼자만 50~60대의 매력이다. 매력 이외의 능력은 작은아버지와 거의 흡사할 정도의 귀재. 그래도 동흥제 전투는 소규모 피해에 불구하고 위군 수 만명을 그대로 죽였는데 이는 숙부 제갈량조차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합비전투의 삽질로 다 말아먹었다.[9] 제갈각도 숙부 제갈량의 명성을 알고 있었는데 손권이 니 부친과 숙부중에 누가 더 뛰어나냐고 묻자 "신의 부친은 섬길 곳을 알지만 숙부는 모르기 때문에 뛰어난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손권을 만족시켰다. 다만 서로간의 안면식도 없었음에도 제갈량은 후일 오나라에서 제갈각이 서성의 후임을 맡아 군량을 책임지게 된다는 소식을 듣자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조카 제갈각은 부친 제갈근과 다르게 성격이 사나워 이를 맡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다른 업무를 보게하는게 나을겁니다 하고 조언주고 육손은 옳게 여겨 손권에게 제갈각의 보임을 군사지휘로 변경시킨다. 사실상 타국의 군사행정에 간섭하는 것인데도 불만없이 수용한것을 보면 꽤 아리송한 부분.
- 제갈과: 제갈량의 딸로 전해진다. 선과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여 이름을 과로 바꾸었다. 신선이 되었고 성도 근처에 성모선사승연갈녀지사라는 사당에 모셔져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물론 제갈량에게 딸이 있다는 역사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제갈회(諸葛懷): 전설상에 나오는 제갈량의 어린 아들.
- 제갈풍(諸葛豊) 한원제 때 인물로 제갈량의 조상이다. 제갈풍은 명경(明經) 출신으로 군문학(郡文學)이 되었으며, 인품이 뛰어나고 천성이 강직하여 사예교위(司隷校尉)가 되었는데, 비리를 지적함에 있어서는 피하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경사(京師)에는 "그 사이 어찌 보기가 뜸한가? 제갈풍을 만났기 때문일세."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시중(侍中) 허장(許章)이 황제의 외속(外屬)으로서 법을 무시하고 사음(奢淫)한 행동을 하자, 제갈풍이 부절(符節)을 들어 허장에게 명하며 포박하려고 하였다. 이때 황제는 제갈풍의 부절을 거두어들였으니, 사예(司隷)에 부절이 제거된 것은 제갈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제갈풍은 황제에게 글을 올리기를, "포의의 선비로서도 오히려 문경지교가 있는데, 이제 사해의 광활한 땅에 일찍이 절의를 지키고 정의를 위해 죽는 신하가 없습니다. 모두 아첨하며 구차한 태도나 취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서로 알랑거리는 행동을 하며, 사가의 이익만 생각하고 국가의 정사는 망각하니, 신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충신(忠臣)과 직사(直士)가 화를 피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군주를 위해서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곧았다. 그는 뒤에 서인(庶人)이 되어 집에서 죽었다.
- 제갈규: 제갈근, 제갈량, 제갈균의 친부. 자는 근공. 제갈풍의 자손이나 몇 대 자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국 학계에서는 제갈풍과 제갈규 사이의 공백기를 따져 약 7-8대손 정도로 추정하는 모양. 태산군의 군증을 역임했으며 부인 장씨 사이에서 3남과 2녀를 출산. 순서대로 장남 제갈근, 장녀, 차녀, 차남 제갈량, 막내 제갈균이 태어난 모양. 제갈량이 3, 4세 때 장씨가 사망하자 후처를 들였고 제갈량이 8세 전후가 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제갈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 제갈현: 제갈규의 동생. 제갈규 사망 후 제갈규의 가족을 수습했으며, 조조로 인해 전란이 서주까지 미치자 제갈량, 제갈균, 그리고 두 명의 질녀를 데리고 남하한다. 이때 원술의 요청으로 예장 태수를 역임. 예장은 양주 자사 관할로 원술에게는 권한이 없었으며 조정의 비준도 받지 않은 모양으로, 원술은 한실을 무시하고 있었고 또한 군벌로써 세력을 확장하려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조정에서 예장태수 주호가 파견되자 순순히 물러나고[10] 형주목 유표를 찾아가 정착한다. 이후 제갈현의 두 질녀가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과 방씨 가문에 시집을 간 것으로 볼 때, 유표가 제갈현을 후하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제갈량이 17세가 되었을 때 병으로 사망한다.
4. 친인척 관계
- 황승언: 제갈량의 장인. 양양의 명문귀족이며 채풍[11]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유표가 채풍의 차녀를 후처로 들였기에 황승언은 유표와 처형제가 되는 셈. 고로 제갈량은 유표와 처조카사위[12], 처이모부[13]에 해당되는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제갈량에게 자신의 딸을 추천했으며, 이로써 제갈량은 양양의 명문귀족인 유씨, 채씨, 황씨, 괴씨와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 방덕공: 양양의 이름 높은 선비.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그의 며느리가 되기에 제갈량과는 친인척 관계가 된다. 벼슬길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으나, 유표는 그가 벼슬길에 나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해 찾아가곤 했었다. 유표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무얼 남겨줄 수 있겠소?" 방덕공이 답하기를,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안전을 물려줄 수 있지요." 유표는 그저 탄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마휘보다 10살이 많아 사마휘가 형으로 모셨으며,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자주 지도했다. 와룡이라는 별호는 방덕공의 입에서부터 퍼진 것이라 한다.
- 방통: 자는 사원. 방덕공이 별칭으로 붙여준 봉추로도 유명하다.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로 방덕공의 조카.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방덕공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방통과는 또 친인척에 해당된다. 사마휘 방덕공 부손 등 인사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이들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유비의 참모로 합류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유비가 익주에 입성하기 위하여 출전할 때 일군을 이끌다 전사하였다.
- 방산민: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작은 누이와 결혼하였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황문이부랑에 올랐으나 요절. 그와 제갈량의 작은 누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환이 진나라에서 태수직을 얻었다.
- 제갈탄: 제갈근, 제갈량의 먼 친척. 같은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손으로 고향도 같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진동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후에 수춘성을 근거로 기병했다가 사마 가문에 주살당한다.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을 빗대어 촉나라는 용(제갈량)을 얻었고 오나라는 범(제갈근)을 얻었으나, 위나라는 개(제갈탄)를 얻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진동대장군에 오를 만큼의 인재였으며 당대 선비들에게 흠모를 받기도 한 인재인지라 용과 범은 아니었어도 준걸은 분명 준걸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인재가 "개"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제갈량과 제갈근이 대단했다는 말도 된다.[14]
- 괴기: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큰누이와 결혼하였으며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상기했다시피 위나라에서 방릉태수를 지냈으나, 맹달이 방릉을 공격했을 때 살해당했다. 괴씨 가문의 자제인 그가 자형이라는 것만으로도 제갈량이 양양에 입지를 얻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제갈량과도 교우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유기: 형주의 주목 유표의 장자. 기록에 따르면 유기 또한 평소에 제갈량을 매우 중시했다. 유기는 매양 제갈량과 더불어 스스로 안전할 수 있는 계책을 알려했는데 제갈량이 번번히 거절하니 어느 날 후원을 산책하다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연회를 베푸는 사이 사다리를 치우게 하여 제갈량으로부터 신생과 중이 이야기를 듣고 강하태수를 자청, 일신의 안전을 꾀할 수 있었다. 나중에 강하태수가 된 유기가 유비와 제갈량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덤. 유기가 누각 위의 사다리를 치우면서까지 제갈량에게 계책을 구했다는 것도 그렇고 사사로이 후원을 같이 산책하고 연회에 초대될 정도면 평소 친분이 있던 사이라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제갈량과 인척관계에 있어 자주 왕래하다가 제갈량의 능력을 보고 평소에 매우 중시하게 된 듯 싶다. 거기에 유기는 제갈량을 중시함으로써 유비와의 관계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 유종: 부인들이 모두 채모의 조카였던 동서 관계이다. 하지만 채모랑 같이 후계자 문제로 사실상의 정적.
- 채모: 유표의 신하로 형주의 2인자. 채모의 형제들 중 둘째누나는 유표, 큰누나는 황승언의 부인이다. 즉, 제갈량에게 채모는 처외삼촌인 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후계자 문제 때문에 채모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5. 교우 관계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면서 득을 본 것 중에 하나가 제갈량의 인적 네트워크란 시각도 있다. 그전까지 유비는 그를 보좌해 줄 인재들이 그리 많지 못했지만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써 제갈량이 알고 지낸 형주의 인사들을 추천받거나 하여 상당수의 인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15]- 사마휘: 수경이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 인물평이 실로 정확했으며, 방덕공과 형님아우하는 사이였다. 제갈량의 스승으로써 그를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여남에 사는 풍구라는 이를 스승으로 모셔와 제갈량을 지도했다. 후에 제갈량을 유비에게 천거하였다.
- 최주평: 박릉 출신.[16] 이름은 균,자가 주평으로 한글로 동명이인인 형 최균이 있다.아버지는 한 영제 때 사도, 태위 벼슬을 지낸 최열로 동취(銅臭)라는 고사를 남긴 사람이다. 부패 관료인 아버지와는 달리 건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을 때 다른 이들은 수긍하지 않았으나 최주평과 서서만은 그 재주를 인정하고 변호해 주었다. 또한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단점을 수시로 지적해줬는데 제갈량은 이 일을 들어 훗날 신료들에게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말 것을 권했다.
- 서서: 자는 원직. 본명은 복. 양양에 모여있던 인재들 중의 한 명이며, 제갈량의 가장 친한 친구로 추정된다. 제갈량과는 형주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교우를 맺게 되었다.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교할 때 진지하게 그 말을 인정했던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제갈량과는 유별나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보다 먼저 유비를 섬기던 중, 장판파 전투의 혼란 속에 어머니가 조조에게 사로잡히자 조조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대로 출세했다.
- 석도: 자 광원.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을 했던 인물. 제갈량과 우의가 상당히 깊었다. 조조가 형주로 남하할때 임관해 군수, 전농교위 등의 관직을 거친다.
- 맹건: 자 공위. 역시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했던 인물.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고향에 돌아가 조조 밑에서 벼슬살이 했다. 친구들 중에선 가장 먼저 출사한 인물. 이때 제갈량은 "중국에는 사대부가 많은데 왜 하필 고향에서 노니려 하시오." 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제갈량이 기산에서 사마의와 대치할 때 사마의의 편지에 답하면서 자신의 안부를 맹건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 걸로 보아 둘의 우정은 그때까지도 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마량: 양양의 명문귀족인 마씨 가문의 아들. 백미(흰 눈썹을 가진 기재)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제갈량보다 나이가 어려 제갈량을 존형이라 불렀다. 제갈량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던 인물로 그를 따라 촉에서 벼슬을 지내나 이릉대전 때 사망.
- 마속: 마량의 동생. 제갈량이 남정북벌을 준비하는 동안 자주 군략을 의논했던 상대. 마량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더더욱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제1차 북벌 때 길목을 지키라는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며 산으로 올라가는 실책을 범하고 장합에게 패배, 1차 북벌이 실패로 끝나 군법을 지키기 위해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베었다.[17]
- 장완: 제갈량의 후임자. 일찍이 근무태만 혐의로 유비가 죽이려 했으나 그 능력을 알아본 제갈량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제갈량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북벌기간 동안 촉군의 후방을 지원했고 제갈량의 뒤를 이어 사실상의 제1인자로 촉한의 국정을 책임졌다.
- 조운: 제갈량과 뜻이 잘 맞아 사실상의 교우.[18][19] 조운이 죽자 가장 슬퍼한 이 역시 제갈량이었다. 촉한의 원로 장수이면서 제갈량의 군사 사상에 제일 부합하는 인물이었기에 (내정에서 장완과 비의가 있다면 군사에서는 상위호환으로 조운이 있다고 보면 됨) 유비 사후 군사를 맡길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이었다. [20][21]
- 강유: 제갈량이 북벌 중에 발굴한 젊은 인재. 기성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현의 학문(훈고학)을 익히며 한실 부흥에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북벌 당시 촉한에 귀순했고 그 재능을 알아본 제갈량이 중앙에 그를 추천하여 군사 경험을 쌓게했다. 이후 촉한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장완과 비의 사후 현상유지에 급급한 유선 때문에 망국 루트를 타는 촉한의 마지막 보루가 된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평생동안 병법을 연구하여 만들어낸 심서를 강유에게 물려준다. 그걸 바탕으로 북벌을 계승하였으나, 제갈량만 한 기반이 없는 데다(위 출신의 항장이니까) 정치력이 모자라(싸우는 것 말고는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스승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촉을 점령한 위군 상대로 반간계를 쓰다가 실수로 패사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최후는 연의에서는 자결이지만 정사에서는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죽었다.
- 엄준: 손권이 황제가 되자 위위로 임명되어 촉한에 사자로 갔는데, 제갈량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그의 장면을 알고 있다면 참 눈물이 나는 장면.
- 가비능: 선비족의 족장으로 위나라에 상당한 위협을 가했으며 제갈량의 북벌에 협조적이었다. 연의에선 오로침공전에서 촉한을 공격하는 포지션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제갈량의 협력자였다.
- 노숙: 노숙은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의 친구였으며, 제갈량을 동오로 데려가 손권과 대담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연의에서는 위태로운 행동을 일삼는 제갈량의 성실한 조력자를 넘어 거의 보호자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노숙이 사망하였을 때 제갈량이 사흘을 내리 슬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바, 실제로도 둘의 교분은 매우 두터웠던 것 같다. 그 이전에 노숙이 유일하게 강경파를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 이거 이제 어떡하지'에 가까웠던 것 같지만.
- 관우: 연의에서 둘이 신경전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고우영이 관우를 질투하여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창작을 넣었다. 그런데 이문열 등이 이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제갈량과 관우는 실제로 사이가 나빴다고 주장하여 적지 않은 세월을 여러 사람이 낚였으나 오히려 정사에서는 서로 서신을 나눌만큼 친분이 있음이 밝혀졌다. 실제로 제갈량이 유비에게 임관한 초기에는 관우와 장비를 상대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몇 차례 관우를 치켜세워주는 서신을 보내줬다. 관우도 같이 알고지내는 시간 동안 그를 인정해서인지 제갈량이 자기를 띄워주는 서신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뻐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15~20세 정도로 거의 부자뻘에 가깝다는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관우는 제갈량이 어린아이였던 시절부터 무장으로 활약해왔고, 갓 청소년~청년기에 접어들었을 시기에는 당대의 용장으로 그 이름이 중국 전역에 알려진 인물인 것이다. 그런 관우가 까마득한 후배뻘인 제갈량과 사적인 서신을 주고받으며 심지어 일종의 애칭이나 별명삼아 염(髥)이라 불리기까지 한 것이니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상당한 친밀감과 호감이 없었다면 성립하기 힘든 관계이다. 오늘날로 치면 나이도 거의 아버지뻘에 경력도 까마득한 직장 선배를 "수염아저씨~!" 하고 불러댈 수 있을만큼 친한 관계였던 셈이므로 이쯤 되면 일종의 망년지교를 나누는 관계였다고 보아도 상관없어보인다. 특히 마초에 대해 문답한 두 사람의 서신 내용을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하다. 현대식으로 해석해 보자면 형주 지사장쯤 되는 관우가 익주 본사 사장 비서실장쯤 되는 제갈량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본사에 마초라는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던데, 그 사람 대단하다며? 네가 보기엔 어떠냐?" 하고 묻고, 이에 제갈량이 "그 사람 물론 대단하긴 한데 수염아저씨만은 못하죠. ㅋㅋ"하고 대답하자 이 대답을 들은 관우는 "하하하! 본사 량이가 보기에 마초가 대단하긴 해도 내가 더 낫다는군!" 하고 기분이 좋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한 격이다. 이런 파격적인 관계가 가능할 정도라면 두 사람은 단순히 별 문제 없이 잘 지내는 수준을 넘어 서로에게 명확한 호의를 가지고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였다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거기에 제갈량은 관우 사후 아들인 관흥의 인물평을 좋게 해주었는데 당시 시대상 나이든 명사가 젊은 인재의 인물평을 해주는 것은 그의 후견인이 되어준단 의미이니만큼 관우 사후에도 그의 가문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인 수일 뿐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지위가 되는 사람의 선택치고 정치적이지 않은 선택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사실 연의 기준으로도 처음에 관우가 불복했던 때를 제외하면 둘의 사이가 좋았던 편이다. 아무래도 관우가 오만했다는 점도 있고, 둘이 유비군 내의 서열 2위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다.[22]
- 등지 : 이릉대전 이후 오나라에 화친을 맺기 위해 보낸 외교관으로 사실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해도 오나라에 보낼 사신이 마땅치 않았으나 수많은 신하들 중 등지만이 촉오동맹을 주장하며 등지의 인품에 만족한 제갈량이 추천하여 외교관으로 오나라에 보냈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6. 공적 관계
- 법정 : 제갈량과 법정은 비록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았으나 공적인 도의로 서로 따랐고 제갈량은 늘 법정의 지모와 권술을 높게 여겼다.[23] 다만 법정이 밥 한 그릇 얻어먹은 은혜나 눈 흘긴 사소한 원한을 되갚지 않는 법이 없었고, 자신을 헐어 상하게 한 자 몇 사람을 함부로 죽였을때 탄원이 나오자 제갈량이 법정의 행동이 마음에 안들어도 법정의 능력이 필요하여 법정을 변호하기도 했다.[24] 이후 유비가 황제에 오른 뒤 장차 동쪽으로 손권을 정벌해 관우의 치욕을 되갚으려 하니 뭇 신하들이 여럿 간언했으나 하나같이 따르지 않았고, 이릉대전에서 크게 패하고 백제(白帝)로 돌아와 머물게 되었다. 이때 제갈량이 탄식하며"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유비)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형세가 위태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언급한것을 보면 꽤 중요하게 여긴것으로 볼수 있다.[25][26]
- 이엄: 익주 토박이로 오해받지만 형주 출신으로 유비의 입촉때 바로 투항, 나중에 한중 공방전때 병력을 징발할수 없음에도 5천의 군사로 수만의 도적들을 토벌했으며 유봉,맹달과 함께 상용을 공격하여 신탐,신의 형제의 항복을 받을 정도의 인재로. 유비가 사망할때 같이 유언으로 나라의 중책을 부탁받은 탁고대신으로서 제갈량이 내치를 이엄이 군권을 지휘해 촉한을 안정시켰다. 다만 문제는 이엄이 탁고대신으로서 선을 넘어버린것. 이엄은 황제에게 반역만 안저질렀지 제갈량에게 '구석과 칭왕을 하라'고 꼬드긴다. 진의야 진짜였는지, 제갈량의 충심을 시험하려는 건지, 또는 제갈량을 숙청하려는 낚시였는지는 모르나 제갈량은 이엄을 꾸짖어(선제에게 영을 받은걸 알면서도 칭왕을 말하는 거냐?) 일단 무마시킨다. 이후에도 태업 및 파촉 일부를 자사를 만들어 그 자사에 자신의 이름을 쓰게 해달라는 등 보신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이자 충신 제갈량의 속을 아주 긁어준다. 어찌되었건 탁고대신으로 받을 정도로 신뢰와 능력이 있는지라 제갈량은 4차 북벌때 신하들이 어찌 이엄에게 너무 우대해줍니까? 할 정도로 이엄을 믿고 권위를 실어주면서 이엄에게 보급을 맡기고 4차 북벌을 강행 4차때는 사마의,곽회,장합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고 촉한의 우세가 된 상황에서 갑자기 이엄이 장마라는 자연재해 때문에 보급이 불가하다는 편지가 오고, 아무리 우세한 상황이라도 보급이 안되면 진행이 안되기에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퇴각한다. 막상 촉한으로 귀한했을때 이엄은 "군량이 충분한데 왜 돌아오셨습니까?" 라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감추려고 했다.[27] 또한 은폐를 위해 부하 잠술을 처형하려 했으며 유선에게는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는 등 유비의 탁고를 받은 이엄이 조정을 기망하려고 하자 제갈량의 인내게이지를 완전히 박살내버린다. 아무리 이엄이 잘못이 있더라도 같은 탁고대신인 만큼 제갈량은 증거를 정확하게 수집하고 정리하여 대소신료들의 의견을 모아 정식적 절차를 밟아 유선에게 상소를 올려 이엄을 탄핵했으며 여기서 나오는 상소문에서는 같은 탁고대신으로서 이엄에 대한 배신감이 처절하게 드러난다.[28] 이후 이엄은 유선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유배되었다. 그래도 제갈량은 이엄을 다시 쓸려고 이엄의 아들 이풍(연좌제로 같이 처벌받았지만 유배간 이엄과 다르게 직위가 강등당하는 선에서 그쳤다.)에게 서신을 보내 몇번이나 파직당하고 복권한 초나라 명재상을 빗대어 진심으로 뉘우치고 나라에 힘을 쓴다면 다시 써주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다만 5차에서 제갈량이 사망하자 이엄은 자신이 복권되지 않을 걸 알고 홧병이 들어 사망한다.[29]
- 황권: 황권과 개인적 친밀감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일단 제갈량과 황권은 서로 높게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편지를 쓴 것도 있고, 황권도 촉한이 황권의 일가족을 주살했다는 헛소문이 돌며 위문제가 황권에게 발상을 명하자 이를 일축하며 황권 본인은 "유비, 제갈량을 믿고 있으며 유비, 제갈량 또한 황권 본인의 진심[30]을 알 것이기에[31] 이후 사실관계가 제대로 확인되면 그때가 돼서야 상을 치르겠다"고 한다. 이후 황권의 말대로 되었다.
- 위연-양의: 능력은 있지만 성격과 인간관계가 개차반인 이 둘을 버릴만큼 인재 여력이 있던 상황이 아니라 제갈량은 이들을 중용하여 잘 써먹었지만 그 막장 성격들이 어디 안 가서 잊을 만하면 말썽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중립을 지키며 이 둘을 중재하고 타일렀지만 들어먹지 않았다. 그나마 어찌저찌 이들을 중재하고 다룰 수 있던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기 무섭게 고삐가 풀린 둘은 병림픽 끝에 공멸했다.
- 육손 : 이릉대전때 손오의 도독으로 사실상 선제(유비)를 죽게한 윈흉이긴 하나 미래를 생각해 유비 사후(더 정확히는 이릉대전 대패후 유비 생존때도 화친이야기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손오와 우호를 다졌고 서로 편지를 보냈다. 조카 제갈각을 손오의 식량 관리를 담당하는 관직에 앉힌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제갈각은 부친 제갈근과 다르게 성격이 사나워 식량관리에 부적합하다고 육손에게 충고해주었으며 육손은 이를 옳게 여겨 제갈각을 군사관리 담당으로 변경했다.(강표전) 다만 제갈량의 북벌과 제대로 연계되지 않았다.
- 맹달 : 연의나 정사에서 제갈량의 2차 북벌때 위나라에 투항한 맹달의 배신으로 북벌을 스무스하게 처리하려다가 맹달의 계획 누설과 사마의의 신속한 공격으로 16일 만에 반란이 평정되었다. 수준이지만 알고보면 꽤 복잡한 관계다. 맹달은 유장 휘하였을때 맹달은 유비가 입촉(入蜀) 당시 유장을 배신하여 익주를 정복하는 것을 도와줬고 제갈량 입장에서 서로 공적 관계였으나 능력을 인정하는 법정과 친밀한 관계라 불화는 없었을것으로 보인다. 유비는 조조를 몰아내고 한중공방전에서 한중을 손에 넣고 맹달과 유봉에게 상용군(上庸郡)을 공격하게 했으며 맹달은 자귀현(秭歸縣)에서 출정하여 방릉군(房陵郡)을 쳐서 방릉군 태수 괴기(蒯祺)를 죽였는데 괴기는 일찍이 제갈량의 큰 누나와 결혼하였으므로 제갈량의 자형인 셈이며 맹달이 제갈량의 자형을 죽인 셈. 다만 맹달은 유비의 명을 수행했고 제갈량은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인물이라 이에 대한 불화는 없었던 것 으로 보인다. 나중에 상용에서 맹달이 관우를 구원하지 못해 책임을 물을까봐 위나라로 투항한 이후 나중에 투항한 왕촉이 맹달의 처소에서 제갈량이 이를 갈며 맹달의 처자를 죽이려 한 걸 유비가 만류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제갈량은 본말을 잘 살피는 사람이라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다만 배신 계획을 서신으로 보냈을때는 맹달의 언행(言行)을 늘 이랬다저랬다 하여 자꾸 고쳤고 제갈량은 맹달이 스스로 화를 일으키기를 염려했다. 당장 촉에서도 맹달에 대해 우려하는 반응이 있었으며 비시는 맹달은 이미 여러 번 배반한 자이며 관성(款誠)이 없으므로 믿어선 안 된다고 했다. 제갈량은 그렇기에 그동안 맹달의 거듭한 배신, 변심(反覆)행위를 할까 우려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맹달의 거사를 재촉하고 그의 태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곽모를 위흥태수 신의에게 위장 귀순시켜 그간의 모의를 흘려 맹달을 초초하게 해 반란을 이르키게 재촉했다. 여러모로 이해관계가 엮여 있었는데 제갈량 개인의 감정은 둘째치고(자형 사망, 관우 사망 일조, 배신) 맹달의 위나라 반란이 제대로 되었다면 제갈량은 포커에서 조커를 가진 타이밍이었다. 아무리 위나라가 대국이라고 해도 제갈량의 본대와 형주 북부의 맹달은 조진/장합의 관중군 전력도 1차보다 더 크게 분산시켰다면 본래 위나라의 지배력이 강하지 않았던 관서 지방도 스무스하게 먹을수 있었으나 맹달의 오판으로 실패했다.
7. 적대 관계
- 조조: 고향을 생지옥으로 만들어버린 불구대천 원수. 원래 서주 낭야군 출신이던 제갈량은 조조가 자기 고향을 개박살내자 고향을 버리고 멀리 형주로 피난갔다. 그가 유비에게 임관하고 평생을 위나라를 상대로 죽을 때까지 싸운 것은 바로 조조에 의해 어린 시절에 개고생을 한 영향도 적지 않다.
- 사마의: 4차 북벌과 5차 북벌에서 첨예하게 대립한 숙적으로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삼국지에서는 아주 유명하다. 한편으로는 내심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면모를 보여줬으며, 전쟁터에서도 서신을 교환하였다.
- 학소 : 2차 북벌의 난적으로서 단 1만명의 병사로 수만의 촉군을 상대한 위의 명장. 학소가 쌓은 진창성은 제갈량도 무리라고 판단하여 학소와 같은 고향 출신인 근상을 보내 항복을 3번씩이나 권유했지만 전부 씹혔다.[32] 제갈량은 운제, 충차, 정란, 참호 메꾸기, 성벽 기어오르기, 땅 파기-을 동원해 진창성에 공격을 퍼부었으나 학소의 농성에 막히고 만다. 이것만 봐도 제갈량의 난적이었으나 2차 북벌에서 제갈량을 막은 뒤 병사했다. 나관중은 어떻게든 제갈량에게 설욕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제갈량이 후퇴한 사이 학소가 병에 걸려 누워 있다가 역습에 놀라서 죽었다는 창작을 억지로 연의에 집어넣었다.
- 장로: 예문유취에 따르면 제갈량은 장로에게 글을 보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교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제갈량에게 있어 종교 왕국을 세운 장로는 그렇게 좋은 인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3][34]
- 이막: 원래 유장의 신하였는데 아예 대놓고 유비에게 나는 유장의 신하이지 너(유비)의 신하가 아니다. 너를 섬기는 건 너가 좋아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거다.라는 말을 해 유비를 머리 끝까지 분노하게 만든 걸 제갈량이 잘 변호해서 이막을 살려냈더니 정작 이막은 나중에 읍참마속의 일이 발생하자 제갈량에게 개기다 좌천되었다.[35] 그리고 이막은 계속 제갈량을 이를 갈며 증오하다가 제갈량이 사망하자마자 바로 유선에게 '제갈량의 죽음은 쌤통, 유선이 제갈량의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제갈량이 죽었으니 기뻐해'라며 기뻐했다. 그러자 유선은 그대로 이막을 참수형에 처해버렸다.[36][37] 아이러니 한것은 이막의 다른 형제들 이소와 이조는 이막과 다르게 고결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224년에 제갈량이 두미를 등용하기 위해 그에게 보낸 글에도 이조와 이소형제에 대한 고결함을 칭찬함으로서 언급한다. 참고로 이조는 유비가 한중왕표를 올릴때 초안을 작성할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둘은 각각 이릉대전과 남중정벌 이후 사망했던걸 감안하면 이막은 제갈량 사후 때까지 생존했는데 그놈의 어그로 끄는 법을 고치지 못해 유선에게 분노를 사서 처형당했으니 가문과 죽은 형제들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38]
8. 관련 문서
[1]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2] 유비는 유언을 남기기 전 제갈량에게 유선에게 능력이 없다면 성도의 주인이 되라고 할 정도로 신뢰를 쏟았다.[3] 양양기襄陽記 - 당시 사람들은 이를 우스워하고 즐겁게 여겼다. 마을에서는 그 때문에 '공명처럼 부인을 선택하지 말 것이니, 그리되면 아승阿承(황승언을 말함)의 추녀를 얻게 되리라'는 말이 유행하였다.[4] 최종 직위는 대장군이다. 그리고 제갈근이 죽었을 때, 손권이 정말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는데, 제갈근이 유비를 회유하기 위해 서신을 보냈을 때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손권이 직접 나서 제갈근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해 준 덕에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적인 이야기를 안 하면서 처신을 조심했다고 볼 수 있다.[6] 덕분에 연의에서는 최후의 보루의 사신으로 가기도 한다. 다른 놈이 갔으면 분명히 당장 목이 날아갔겠지만 제갈근이라 목숨을 부지해나오는 경우가 대다수. 관우에게 투항을 권하러 갔다가 관평이 목을 치려고 하는데 관우가 말리는 장면도 있고, 유비에게 동오 침공을 멈춰달라 부탁했다가 동생 때문에 살아돌아가는 거라고 수모를 겪는 일도 당하는 편. 애초에 제갈근이 보내지는 것은 진짜 급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7] 사실 제갈근이 걱정되어 위해서 말리는것 아니냐고 오해받기 쉬웠다. 다만 제갈량이 아니라 조운 등 여러 대신들이 손오를 공격하는것을 말렸다. 누가봐도 먼저 치고나가는 쪽이 불리했기 때문.[8] 현대로 치면 경찰청장으로 두 형이 각각 대장군과 승상(현대로 치면 각각 국방부 장관과 총리)에 올라서 낮아보이는 거지 결코 낮은 지위가 아니다.[9] 제갈량도 북벌을 계속 실패했으나 자신의 벼슬을 깍거나 공손하게 행동하였고 상국의 지위에도 교만하지 않고 책임을 다한 반면 제갈각은 합비 전투의 실패를 남 탓으로 몰고 오히려 또 다른 외정을 즉시 준비하는 등 모두의 공분을 샀다. 제갈량은 북벌을 행하면서 나라의 국력을 다시 축적하는걸 기본으로 삼은 반면 제갈각은 패전 한 번으로 나라가 엉망진창(...).[10] 다만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와 헌제춘추에서는 주호와 제갈현이 싸웠다고 기술되어 있다.[11] 채모의 아버지[12] 유표 입장에서 제갈량이[13] 제갈량의 입장에서 유표가[14] 고대 중국에서 '개'는 의미와 달리 충성스러운 동물의 이미지를 띄며, 사자성어인 '견마지로(犬馬之勞)', 몽골 건국의 '사준사구(四駿四狗)'처럼 긍정적으로 활용되는 용례가 있으니 이는 비하적 의미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지만, 잘못된 주장이다. 어떤 언어에서든 용례에 따라 단어에 내포된 의미는 달라지는 법이다. 포청천에서 작두에 들어가는 세 동물이 용, 범, 그리고 개인 이유가 각각 신분의 차이를 상징함을 생각해보자. 비교급에서 다른 동물들과 개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에는 용례 중 "격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당장에 같은 시대의 동탁이 여포에게 죽으며 남긴 유언이 개새끼 같은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였다.[15] 제갈량을 얻기 전 유비군의 인적자원 구성은 관우, 장비, 간옹, 손건, 미축, 진도, 유염, 위연, 조운 등이다. 그러나 이들도 생활 기반을 모두 버리고 온데다가 사마휘의 평가처럼 한 국가를 경영하고 유지할 재목은 되지 못했다. 진등, 진군, 전예, 원환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부하들도 있었다. 유비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닌 생활이 길어서인지 친족 중심으로 운영하던 조조나 손씨 가문과 달리 유씨 종친 네트워크나 스승 노식으로 구축된 학파 인맥의 덕을 거의 보지 못한 듯하며 유표 사후 유기를 따르는 형주의 잔여 세력을 포함해 제갈량과 방통으로 대표되는 형주파와 입촉 전후로 유장 휘하에 있던 익주파를 다수 얻게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재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16] 박릉 최씨는 남북조, 수당시기 태원 왕씨 등과 함께 산동귀족의 대표가문이다.[17] 다만 슬퍼서 베었다와 또는 유비가 죽기전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히 쓰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떠올라서 울었다가 있다.[18] 연의에서 오나라에서 동남풍을 불게 한 후 도망칠 때 유비에게 도울 사람으로 조운을 요청했으며, 유비가 오나라로 정략결혼을 갈 때도 조운에게 호위를 맡기며 계책 3개를 주는 내용이 있다. 그만큼 조운을 신뢰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19]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이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반대하기도 했다.[20] 다만 1차 북벌 이후 사망함에 따라 제갈량의 군정 부담이 늘어나 결국 일찍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21] 최소한의 대안이 될 수 있었던 이엄은 자멸하고, 강유는 군재가 충분하나 위의 항장출신인 약점이 있어, 위연이나 양의 같은 인물을 중재해가며 쓸 수 있는 인물이 사실상 제갈량밖에 없었다.[22] 이렇다 보니 설화에서는 제갈량과 관우가 대립, 대결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부분 관우가 지거나 하는 식으로 제갈량이 띄워지는 식으로 흘러가는 편.[23] 촉서 법정전.[24] 이런 점 때문인지 삼국지연의 이외의 미디어 믹스, 만화나 드라마에서는 관우와 제갈량이 대립하는 묘사처럼 정치적으로 법정과 제갈량이 둘다 유비를 따른다는 뜻은 같으나 방향성에 대해 대립하는 묘사가 나온다.[25] 또 법정이 한중공방전에서 유비의 참모로서 참군하며 위나라 상대로 책략을 썼고 유비가 물러서지 않자 몸소 나서서 화살을 피하지 않고 "명공께서 친히 화살과 돌을 당해내시는데 하물며 소인이 피하겠습니까?" 몸으로 간언을 하여 유비에게 크게 신용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꽤 신빙성 있는 언급이다.[26] 또 관우,장비,조운에 버금가는 유비의 충직한 신하였기에 살아있었다면 익주 토박이로 오해받는 이엄 대신 제갈량과 같이 탁고를 맡았을 가능성이 꽤 있었다. 제갈량과 이엄 대립에 대한 행적은 하단의 이엄 참고.[27] 연의에서는 한술 더 떠서 위와 오가 손을 잡는다는 거짓정보를 흘렸다.(맹달이 공격했을때 편지로 퇴각시켰다는 버프를 받았지만.) 사실상 양수 이상의 트롤링.(애초에 한중 공방전은 조조가 불리하여 퇴각을 고민하는 선이었으면 4차 북벌은 제갈량이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다. 거기서 이엄이 오나라와 위나라가 손을 잡는다는 위보를 흘렸으니 정사의 자연재해보다 더한 거짓말을 한것.)[28] 칭왕제의도 엄밀히 표현하면 100년전도아니고 몇년전에 한실 역적 조조가 구석을 받고 위왕이 되었다. 조조의 위세가 컸음에도 조조가 위왕이 되자 역적질이라고 전국적으로 소규모 반란들이 일어났는데 누가봐도 역적질 하라고 꼬드긴것이다. 유비에게 탁고를 받은 대신이 게다가 상국이 되어도 아무런 욕심도 없이 촉한에 충성을 바친 제갈량의 생애를 본다면 당시 이엄의 칭왕 제의는 제갈량 입장에선 선제의 신뢰에 대한 지나친 배신이었기에 상소문 첫 마디에서는 선제에게 탁고를 받은 이엄이 선제의 신뢰를 배신했다고 언급되어 있다.[29] 생전에 정황이 있어봐야 제갈량의 후예들이 이엄을 쓰기 어렵고, 거기에 제갈량도 이엄이 탁고대신이라 통제하지 못한 정황도 있는데 제갈랑의 후예들이야...[30] 황권은 위나라에 항복하면서도 자신은 '동오에는 도저히 항복할 수 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괜히 황권이 조위로 전향했는데도 촉한에서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게 아니다.[31] 실제로 유비도 황권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황권을 배신한 격이라고 하며 법 집행을 담당하는 관리의 황권의 일가족 체포 상주에 대해 일축한다.[32] 2차 권유에선 학소가 근상에게 제갈량에게 항복권유에 감사하다고 하면서 어디 한번 공격해봐라 도발하는 뉘앙스로 대답한다.[33] 몇 십년 전만 해도 대규모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의 수뇌부가 태평도라는 종교집단인걸 감안하면 제갈량의 장로에 대한 부정적 인상은 이상하지 않다.[34] 정작 장로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태평도와 다르게 자신이 차지한 한중을 그런대로 잘 다스려서 당시 한 조정으로부터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받기까지 했다.[35] 장완도 마속의 처형을 막기위해 "중죄를 지은 건 맞지만 그래도 처형까지는 심한것 같다"고 의견을 낸적이 있었지만 이막은 "저 인간같지도 않은 서쪽 오랑캐들도 용서라는 걸 하는데, 넌 왜 못 하는 거야? 오랑캐만도 못한 거야? 대업 이루기 싫어?'라며 만류하는 척 하며 제갈량을 돌려 깠다.(당연히 장완이 가뜩이나 나라에 인재가 없는 이유로 마속을 변호라도 했지 이막은 오로지 제갈량을 까기 위해서 도리에 맞지 않는 비유를 들며 마속을 변호했다. 문제는 마속이 한 병크는 너무나 초보적이고 명백한 자신의 잘못, 그것도 정상적인 정신 상태라면 당연히 이행해야 할 명령을 고의로 어긴 것(항명)으로 인해 국가의 대업인 북벌을 좌절시켰으며 탈영까지 한 정황도 있었다. 이쯤되면 제갈량이 마속을 살려주고 싶어도 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융이라는 표현도 제갈량이 남쪽으로는 남월을 북서쪽의 강족과 화친을 맺으려고 기를 쓰고 있는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개소리인 셈.[36] 성격만큼은 순한 유선도 이 때만은 크게 분노하며 이막을 죽였다.[37] 제갈량이 만약 권력 욕심을 내거나 이엄처럼 사유화 하며 황실을 기망했다면 이막의 주장은 변호받을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었겠지만 그 반대였다. 고대 중국사에서 드물게 상국의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직무에 충실했고 정치를 할때도 황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택하여 유선도 제갈량을 마음에 들어했고, 촉한의 신하들의 모범이었다. 이런 제갈량을 모욕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촉 황실을 기만하는 것이기에 이막은 죽음을 자초한 셈. 굳이 유선이 아니더라도 일개 관리가 개국공신의 사망을 기뻐하는 표를 올린다면 군주는 기강을 잡기 위해 표를 올린 관리를 바로 참할것이다.[38] 제갈량이 엄격한 통치를 펼쳤음에도 그 동안 그를 원망한 백성들은 없었던걸 감안하면 촉의 민중들에게 경애받고 있다는걸 알수 있다. 이런 제갈량을 억지로 비방했으니 이막을 변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