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1. 개요
고대 중국 후한 말의 장사태수로 삼국지 연의에서 피해를 본 사람 가운데 1명.2. 정사 삼국지
그가 언제부터 장사태수로 지냈는지는 불분명하다. 〈황충전〉에 따르면, 유종이 항복하여 형주를 접수한 조조가 황충을 비장군으로 삼아 장사태수 한현에 속하게 했다고 한다. 김선이 조정에서 의랑을 지내다가 무릉태수로 지내게 되었는데, 유표가 중앙 조정의 사람을 태수로 임용했을 리는 없으니 추측컨대 조조가 새로 접수한 형주의 관직을 재배치하면서 김선을 무릉에 배치한 듯하다. 마찬가지로 한현 역시 조조가 요충지인 장사에 태수로 임명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미 유표가 앞서 한현을 장사태수로 임명하여 한현이 이미 장사태수로 지내고 있던 중에 조조가 한현을 유임했을 수도 있다.이후 유비가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으면서 형남 네 군을 치자, 한현은 항복했다는 기록이 한현에 대한 행적의 전부다.[1] 쉽게 말해 그는 장사를 유비에게 바쳤을 뿐인데, 연의에서는 악역이 되어버렸다. 제갈량의 예언대로 뒷날 촉한을 배신하는 위연의 반골상을 표현하고자 한현을 사용한 듯하다.
3. 삼국지연의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함부로 착취하고 여자들과 즐기기나 좋아하고 인격도 개차반인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기질을 보인다. 또한 조조의 부하이자 둔전제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한호와 친형제 사이로 등장하여 나중에 한호가 죽은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며 분발하였다가 황충에게 참패를 당하고 역시나 죽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이 역시 순전히 나관중의 창작이다.유비군의 관우가 장사를 침공하자 황충은 한현에게 본인이 관우를 상대하겠다고 나서려고 하였지만 한현은 다 늙은 장수가 천하의 관우를 어떻게 이기겠느냐고 저평가(?)하였고, 이에 양령이 늙은 장수에게 맡길 수는 없다며 본인이 큰소리를 뻥뻥 치며 나섰지만, 아무것도 못 해보고 허무하게 얼마 안 가 목이 달아났고, 다급해진 한현은 황충에게 관우를 막으라고 명하였는데, 둘 다 워낙 실력이 뛰어난 장수들이라 몇 번이나 겨뤘는데도 손쉽게 승부가 나지를 않았다. 한현은 황충이 아무리 맹장이라지만 늙은 장수가 저러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그만 불러들이라고 명했고, 황충은 그만 돌아가려던 도중 낙마하였다. 그것을 본 관우는 말을 바꾸어 탄 뒤 다시 대결하자며 관용을 베풀었다. 한현이 악역으로 나오는 연의이지만, 여기선 한현이 의외로 대인배답게 자신이 아끼던 명마를 황충에게 내주는 모습도 보인다. 황충은 관우와 다시 승부를 겨룰 때 관우의 너그러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일부러 활을 쏘아 관우 투구를 맞추었다. 관우는 감동하여 그만 돌아갔고, 한편 한현은 이것을 보고 분노해 황충이 관우와 내통함을 의심하고 그를 가두었다. 그러나 한현 휘하의 또다른 부하장수 위연과 평소 황충을 흠모하던 백성들이 힘을 합쳐 봉기하자, 한현은 위연에게 살해되고 장사성은 그대로 함락된다. 그리고 위연은 관우에게 한현의 목을 바친다.
4. 기타
창사시에는 오늘날에도 한현의 무덤이 있다. 1983년 세워진 비석에는 한충신한현지묘(한漢의 충신 한현의 묘)라 적혀 있다. 이 무덤에 엮인 일화를 쓴 청나라 시기의 인물 왕응전(汪應銓)의 '한현묘기'에 따르면 당시(강희제 시대) 장사에서 일종의 재액신으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현묘기에서는 한현이 죽은 때가 여몽의 형주 점령 때라고 나와있는데 이것도 민간 구전일 가능성이 있을 듯.
무덤은 생전 임지였던 장사(오늘날 후난성 창사시)에 있다. 정확히는 장군중학(長郡中學)[2]이라는 학교 안에 있으며, 한국 유튜버 '기행장군 양양이'가 학교까지 방문하였다. 영상:7분17초부터
5.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한현/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위연과 황충, 그리고 관우와 싸움 전체가 허구이며 애초에 황충은 한현 밑에 있었지만 관우와 싸운 적도 없고 위연은 유비의 부곡으로 오랫동안 그를 섬긴 인물이지 한현을 죽이고 유비 밑으로 들어간 항장 출신이 아니다. '유비가 장사를 접수했다/당시 장사 태수는 한현이었다/한현 밑에 있는 황충이 유비 밑으로 들어갔다/황충은 매우 용맹한 장수다'란 기본적인 뼈대를 제외하면 전부 지어낸 것이라고 보면 된다.[2] 1904년에 세워졌으며 창사의 4대 명문학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졸업생으로는 마오쩌둥의 친구 리리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