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무릉 지방에 살던 이민족이다.고대 중국 남방에서 살던 삼묘(三苗) 종족의 후예로 보이며, 지금의 소수민족 야오족(瑤族), 토가족 계통의 선조에 해당하는 종족으로 추측된다. 무릉만 이외에도 당대에 장사만(長沙蠻), 무릉군의 웅계(雄溪), 만계(樠溪), 유계(酉溪), 무계(無溪), 신계(辰溪)를 합한 것을 뜻하는 오계만(五溪蠻) 등이 기록되어 있고 다들 비슷한 종족으로 보고 있다. 즉, 무릉에만 틀어박혀 있는게 아니고 형주 일대에 비슷한 종족이 여기저기 널리 분포했던 것이다. 삼국 시대는 아직 먀오족(苗族)과 야오족이 분열되기 전이므로 지금의 먀오족과도 비슷한 종족으로 볼 수도 있다. 아니 애초에 초나라 자체가 묘족이 세운 국가인 만큼 이들 종족이 형주에 널리 분포해있는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산월 역시 비슷한 계통으로 보고 있다. 난폭하게 묶어버리자면 다 똑같은 묘족이다.
지금도 무릉 지역은 험난하고 아름다운 협곡을 관광지로 내세울 정도인데, 고대에는 지형 때문에 게릴라 전에 매우 유리했고 이 때문에 무릉만은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한족과 대결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직계 후손인지는 판명할 수 없으나, 무력으로 유명했던 이들이 살았던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장군들이 많이 나왔고 중화인민공화국의 10대 원수들 중 2명인 류보청, 녜룽전도 그들 중 둘이다.
2. 역사
후한 초부터 등장하는데 광무제 시절인 47년에 상단정이 봉기하자 광무제는 공손술을 물리치거나 서남이의 동잠, 월수의 공곡왕 임귀를 토벌하고 남군에서의 만이들도 토벌한 유상에게 1만의 병사를 보내 이들을 정벌하게 한다.하지만 결과는 유상이 적을 가볍게 보고 깊이 들었다가 무릉만이 험한 지세를 이용해 맞아 싸우면서 유상의 1만 병사는 전멸하며, 48년 가을 7월에는 무릉의 치소가 있는 임원현까지 정복당한다. 유상이 패배하자 이숭, 흉노족 정벌로 이름이 높던 중산 태수 마성이 파견되었지만 또다시 패하면서 공이 없다는 이유로 태수의 인수를 반납하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노령의 마원(馬援)이 광무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무, 경서 등을 인솔하면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게 된다.
마원은 임향에 도착해 격파해서 붙잡거나 참수한 것이 2천여 명이 되는 전과를 이루지만 죽림으로 들어가 게릴라 작전[1]으로 나오고 마원은 하준에 도착해서 길이 두 갈래로 나오자 길이 가깝지만 물이 험난한 호두, 길이 평탄하지만 운송로가 먼 충 주에서 날짜를 허비하고 양식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 호두로 들어갔다.
무릉만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장애물을 이용해 방어하는데 물살이 빨라서 배를 타고 올라갈 수 없을 정도였으며, 더위가 심해 군사들이 대부분 역질로 사망하고 마원도 병에 걸려 강안을 뚫어 방을 만들어 더위를 피했지만 끝내 병사했다. 마원 사후에 알자 종균이 황제의 명을 받들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령을 받든 것처럼 해서 사마 여충을 시켜 조서를 보내 무릉만의 진영으로 들어가 은혜를 베풀고 믿음을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 기회를 통해 군사를 인솔해 그 뒤를 좇게 했다.
겨울 10월에 무릉만에서는 놀라고 두려워 해 수괴의 목을 베고 항복하자 종균이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그 무리들을 흐트러뜨려 본래 소속된 군으로 보내고 장리들을 두고 돌아오면서 이들을 평정했다.
한 줄로 요약하면 남만(정확히는 베트남 쯩 자매의 봉기)을 정벌했다는 마원도 쉽게 잡지 못하고 기어이 병사한 종족.
이후 장제 때인 79년에도 봉기하면서 80년에 형주와 예주에 있는 여러 군의 병사들이 이들을 격파했으며, 화제 때인 92년에 무릉, 영릉, 풍중 등에서 봉기했다가 93년에 무릉군의 군사의 공격으로 격파되었다. 안제 때인 115년 12월에 풍중에서 봉기했다가 주변 주와 군에서 토벌해 평정했으며, 116년에도 5월, 가을 7월에 두 차례로 무릉에서 봉기했다가 토벌당했다.
순제 때인 137년에 부세를 올렸다가 이에 반발해 풍중, 누중 등에서 봉기해 향리를 살해했으며, 무릉에서도 봉기해 2만 명이 충성을 포위하고 8천 명이 이도를 공격했다가 이진이 파견되어 이들은 격파되어 평정되었다.
환제 때인 151년, 153년에 무릉에서 봉기했고 160년에도 장사에서 일어나 익양에 주둔했으며, 영릉에서도 일어나 장사에서 노략질을 했다. 162년에서 장사, 영릉에서 일어나 계양, 창오, 남해로 들어가자 교지 자사, 창오 태수는 풍문만 듣고 도주했고 성수가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으며, 164년에는 형주 자사 도상이 계양의 복양, 반홍 등을 토벌하기 위해 이들을 동원했다. 169년에 강하에서 봉기하자 주군에서 이들을 토벌했으며, 180년에도 창오, 계양에서 봉기해 군과 현을 공격했다가 양선에게 토벌되었다.
삼국시대에도 활동을 계속해 215년 이전에도 봉기했다가 황개한테 토벌되었고 이릉대전에서 촉한 측에 섰는데, 마량이 촉의 이름난 비단을 많이 주고 한 편으로 끌어들여 오나라와 대적했으나 촉한이 패배하면서 함께 큰 타격을 입었다. 마량이 무릉만이들을 끌어들인 것을 보고 촉과 무릉만이들이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자치통감을 보면 마량도 이 오계만에서 죽었다고 나온다. 다만 이릉대전 문서에도 나오듯이 이 지방의 만족이 촉한에 먼저 복속을 요청했고 마량 문서에도 나오듯이 당시 파견된 마량과 그 지역 만족들이 서로 호의적이었다는 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촉한이 오나라보단 낫다고 생각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당시 오나라가 이릉대전 이후 바로 낙통과 육손의 주장으로 조비의 세갈래 군대를 막으러 움직였던지라 여기 오나라 부대 중 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건 익양에 있으면서 무릉만, 계양, 영릉의 반란 세력을 토벌한 보즐인데 이들에 의해서 무릉만은 진압된다.
오나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오에 대해 수차례 봉기하면서 보즐, 반준, 여대 등이 지속적으로 토벌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끝까지 오나라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진이 오를 공격하자 바로 진나라 편을 들었다.
반준이 231년부터 234년까지 5만을 이끌고 정복하면서도 종리목이 죽을 뻔 하는 등 보낸 병사는 많은 데다가 그것마저도 고전했다며 비난하는 경우도 있으나 광무제 때의 일화를 보면 당시 에이스급 무장 세 명을 보내고도 저 모양이었으니 결코 과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3. 대중 매체에서 등장
어쩐지 이민족이 자주 구현되는 삼국지 게임에서도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 마이너 종족이다. 물론 운남성의 남만과 무릉만은 넓게 보면 친척뻘의 묘족이기에 중복이라 여겨져서일 수도 있다. 삼국지 3에서는 땅 배치상의 문제 때문에 어째 죄다 맹획의 수하로 들어가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무릉에서 만족병이 징병 가능한 걸로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다. 코에이에서 만든 웹게임 삼국지 패도에서는 오계만이라는 이름으로 무장의 개성으로 등장한다. 사마가와 무릉의 호족인 문포, 등개는 그렇다쳐도 저족 수령인 강단, 파족 수령인 두호, 박호가 가지고 있는 건 미스터리다.토탈 워: 삼국 네 번째 DLC '흉폭한 야생'에서는 사마가를 세력지도자로 한 이민족 세력 중 하나로 나온다.
4. 무릉만 소속 인물
[1] 무릉현은 지금도 장관을 이루는 협곡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