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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21:50:59

강유의 북벌

파일:Jiang Wei's Northern Expeditions.jpg

1. 개요2. 정황
2.1. 촉 내부 : 위연양의의 내분과 수습2.2. 촉 외부 : 요동의 혼란
3. 진행
3.1. 1차 북벌(238년)3.2. 2차 북벌(240년)3.3. 번외편 : 위의 반격 시도(244년)3.4. 3차 북벌(247년)3.5. 4차 북벌(249년)3.6. 5차 북벌(250년)3.7. 6차 북벌(253년)3.8. 7차 북벌(254년)3.9. 8차 북벌(255년)3.10. 9차 북벌(256년)3.11. 10차 북벌(257년)3.12. 11차 북벌(262년)
4. 평가5. 기타
5.1. 참전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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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 제갈량 사후인 238년부터 촉 멸망 직전인 262년까지 촉한의 장군 강유가 벌인 위나라에 대한 공격이다. 소설 삼국지연의 최후반의 주요 사건이기도 하다.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는 강유가 제갈량의 후계자임을 강조해 강유가 벌이는 북벌에 대해 다루지만, 제갈량의 북벌에 비해 다루는 비중은 크지 않고 촉 멸망 직전까지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에 다뤄주기는 한다.

제갈량의 뒤를 이어 강유가 북벌을 시도하면서 초기에는 장완, 비의 등이 계획을 세우고 강유가 세 차례 군사 행동을 벌였으며, 비의 사후에는 강유가 전적으로 주도해 약 13여년에 걸쳐 8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2. 정황

2.1. 촉 내부 : 위연양의의 내분과 수습

제갈량이 죽기 전에 양의, 비의, 강유 등에게 자신이 죽은 후 퇴군시킬 명령을 짓고, 위연에게는 뒤를 끊게 하면서 강유가 위연의 다음에 있게 하면서도 위연이 명령을 따르지 않더라도 군사를 출발시키도록 했는데, 제갈량이 죽자 이를 숨기고 양의는 비의에게 위연의 뜻을 살피게 했다.

위연은 승상(제갈량)이 죽었어도 건재하다면서 승상부의 관리들이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고 해도 군사를 이끌고 적을 공격할 것이라며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천하의 일을 폐하냐면서 양의가 정한 바에 따라 뒤를 끊는 장수가 되겠냐며 따르지 않았으며,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을 부대를 나누면서 비의에게 친필로 자신과 함께 연명해 여러 장수들에게 알리게 했다.

비의는 위연을 속이기 위해 양의를 이해시키겠다면서 군사에 어두워 거스리지 못할 거라면서 위연에게서 떠났으며, 위연은 후회하고 비의를 추격했지만 잡지 못했다. 위연이 사람을 보내 양의 등이 제갈량이 지시한 바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떠나는 것을 확인하자 분노해 양의가 출발하기 전에 군사를 이끌고 앞질러 남쪽으로 돌아가며 지나온 것의 잔도를 불태워 끊었으며, 위연과 양의는 서로 반역했다고 성도에 표를 올렸다.

유선동윤과 장완에게 묻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했으며, 양의 등이 길을 뚫고 밤낮으로 행군해 위연의 뒤를 따라붙었다. 위연이 남곡구를 점거하고 양의 등을 공격하려 하자 양의는 왕평을 앞세워 위연을 막았고, 왕평이 공(제갈량)이 죽어 시신이 식지도 않았는데 감히 이처럼 구느냐고 꾸짖자 위연의 사졸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고 흩어졌으며, 위연은 아들 몇 명과 함께 한중으로 달아났다.

마대가 추격해 위연을 참수했고 위연의 수급이 도착하자 양의는 위연을 모욕한 후 삼족을 멸했으며,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북쪽으로 행군한 장완은 위연이 죽은 것을 알고 군사를 되돌렸다. 위연이 토벌되자 양의는 공훈이 매우 크다고 생각해 자신이 제갈량을 대신해 정무를 한다고 여겼으나, 제갈량은 이전에 유선에게 은밀히 양의의 성정이 성급하고 마음이 좁아 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장완에게 신을 대신케 해달라는 표를 올렸다.

장완이 상서령, 익주자사가 되었다가 승진해 대장군, 녹상서사가 되었고 안양정후로 봉해져 촉한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양의는 중군사에 임명되었지만 통괄할 것이 없어서 한가로웠고, 양의는 스스로 나이와 관직이 장완보다 앞서고 재능이 더 뛰어나다고 여겼지만, 장완이 자신보다 높자 원한을 품고 분노해 탄식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의 언어가 절제되지 않음을 두려워해 따르지 않았고, 비의가 홀로 가서 양의를 위로했다. 양의는 비의에게 지난 날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약 군을 이끌고 위씨(위나라)에게 갔다면 내 처리가 어찌 추락했겠냐면서 후회해봤자 다시 어찌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비의가 이를 상표했고 235년에 양의는 일반 백성으로 폐해 한가군으로 유배를 보냈고, 양의가 유배지에서 다시 비방하는 말을 하자 군에 명해 잡아오게 하자 양의는 자살하고 처자는 촉으로 돌아왔다.

장완은 제갈량의 사망으로 인해 촉한의 내부가 어수선했지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맡은 일을 충실히 살피며 내부를 안정시켰다.

2.2. 촉 외부 : 요동의 혼란

위나라는 제갈량이 죽고 북벌이 끝나자 안심했는지 조예가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 태극전, 총장관 등 건축 공사를 진행해 백성들의 농번기를 빼앗자 신하들이 이를 간했을 정도였다. 사마의가 제갈량 사후의 혼란을 보고 진격하려 했지만 조서를 통해 허가하지 않았다고 하며, 오히려 235년에 촉에서 마대를 보내 공격했다가 우금이 이를 막고 패주시켜 촉의 군사 천여 명이 죽었다.

오나라는 제갈량과 동시에 북벌을 진행해 군사를 다섯으로 나누었다가 실패했기에 위나라에 대한 공격을 한동안 중단하고, 이환, 나려, 팽단 등 오나라에 대항하는 남부에서 일어난 도적들과 산월을 진압했다.

제갈량의 북벌이 끝나기 2년 전인 232년 3월에 오나라가 요동에 사신을 보내자 겨울 10월에 공손연도 사신을 보내 손권에게 번국이라 칭하고 모피와 준마를 바치자 오나라에서는 공손연에게 작위를 주었는데, 공손연은 오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보물을 탐내면서 애초부터 오나라와의 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어서 233년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자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고 그들의 보물을 빼앗았다. 공손연은 사신의 목을 위나라에 바쳐 낙랑공의 작위를 수여받았지만 위나라는 공손연에게 의심을 품었다.

사신의 목을 벤 오나라에서는 분노해 공손연을 정벌하려 했지만 그만두었고, 공손연에게서 도망쳐 살아남은 사신들이 고구려에게 대접을 받아 돌아오자 236년에 사신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고구려에서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냈다. 237년에 공손연이 낙랑공에 임명되면서 공손연의 계리가 공손연에게 보내는 사자들이 용력있는 자를 뽑아 범상한 인물들이 아니라 했고, 이에 공손연은 의심을 품었다.

공손연은 사신이 오자 의심해 군사를 배치하고 주변을 포위해 사자와 만났고, 사자 부용, 섭기 등은 두려워해 낙양으로 돌아가 정황을 보고했으며, 위나라에서 관구검을 파견해 여러 군대와 선비, 오환의 군사를 통솔해 공격하도록 했고, 공손연이 저항해 관구검은 요하를 넘지 못하고 요수에서 발이 묶였다가 장마철이 되어 요하가 범람하면서 철수했다. 공손연은 관구검의 군사가 물러나자 연왕을 칭했다.

오나라가 주연을 보내 한 차례 강하를 공격했지만 호질이 막아냈으며, 238년에 위나라에서 사마의를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도록 하자 사마의가 요동을 함락해 공손연, 공손수를 비롯해 수천 명을 죽이고 공손연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내 요동군, 대방군, 낙랑군, 현도군을 평정했다.

3. 진행

3.1. 1차 북벌(238년)

238년 겨울 11월에 강유가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했고, 장완이 대사마에 오르면서 강유가 사마에 임명되어 수 차례 군사를 인솔해 서쪽을 공격했다.

장완은 많은 배를 만들어 한수와 면수로부터 위흥과 상용을 습격하려 했지만 장완이 병에 걸려 실행되지 못했으며, 비의가 대장군, 녹상서사에 임명되어 장완을 대신해 군무와 정무를 총감독하도록 했다.

3.2. 2차 북벌(240년)

240년, 강유가 농서로 진격해 나왔고 곽회가 진군해 강중까지 추격하자 강유는 물러났으며, 곽회가 촉에 호응한 미당을 공격했다. 이어서 저족의 3천 부락을 관중으로 옮겼으며, 양주의 휴도, 호양, 원벽 등 종족 부락 2천여 가구를 이끌고 옹주로 귀속시켜 안정의 고평에서 거주하게 했다.

3.3. 번외편 : 위의 반격 시도(2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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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에서는 장완이 북벌을 계획했다가 질병으로 인해 흐지부지되면서 위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촉의 동맹국인 오가 241년에 번성, 작피, 수춘, 242년에는 조중, 243년에는 육안 등 지속적인 공격을 했으며, 위나라에서 새로 즉위한 조방은 출신 성분이 확실치 않아서 정통성이 약한데다가 나이가 어려 위 황실의 상황이 불안정해 탁고 대신인 조상사마의의 보좌를 받았으나, 조상이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해 사마의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상은 제갈량의 북벌을 막은 사마의에 비해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기에 이를 타개하고자 10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촉에 대한 출병을 개시했으나, 왕평이 이끄는 촉군에게 패해 잃고 죽은 자가 많아 관중이 텅 비었다거나 동관 오른편으로는 인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원정을 계획한 조상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정권 유지를 위해 고구려마한을 공격했다.

오는 황실에서 후계자 선정을 두고 파벌끼리의 대립으로 내부가 안정되지 못했고, 촉에서는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오와 연계할 수 없는데다가 앞서 북벌을 한 제갈량보다 역량이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3.4. 3차 북벌(247년)

246년에 장완이 죽고 비의가 상서령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강유는 문산의 평강이를 평정한 후에 농서, 남안, 금성, 서평에서 강족인 아하, 소과, 벌동, 아차새가 위나라에 대항하자 강유는 그들에게 호응해 출병했다. 곽회, 하후패와 도서에서 싸웠고, 강족의 치무대가 위나라에 대항하자 하후패는 위시에 주둔했다.

곽회는 강유가 하후패를 공격할 것을 예측해 풍중으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하후패를 맞이하려 했고, 강유가 위시를 공격했다가 곽회의 군대를 만나자 철수했다. 곽회는 강족을 공격해 아하, 소과 등을 베고 1만여 부락을 얻었다.

248년에 아차새 등이 하관, 백토의 옛 성에 주둔해 황하를 거점으로 위나라의 군사에 대항했고, 곽회가 상류의 형세를 보고 비밀리 하류로 군대를 건너게 해 백토성을 점거하고 공격해 크게 격파시켰다. 치무대가 무위를 포위했지만 가족들은 서해에 남아있어서 곽회가 서해를 공격해 물자와 귀중품을 습격해서 취하려 했다가 돌아온 치무대와 조우해 용이의 북쪽에서 교전해 곽회가 그들을 물리쳤으며, 이어서 영거라는 종족이 석두산의 서쪽에 있어서 큰 길을 끊어 사신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자 돌아가면서 물리쳤다.

백호문, 치무대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강유가 석영으로부터 나와 강천을 따라 서쪽으로 치무대를 맞이해 번현에 거주하게 했으며, 요화를 성중산에 남겨 성을 쌓게 하면서 패배한 강인들을 거두어 인질로 삼았고, 곽회가 군대를 분산시켜 그들을 얻으려 하자 장수들은 강유가 호와 이어져 요화가 요충지를 장악했으니, 군대를 나누는 것은 군대의 힘만 약화시키는 것이라며 아직 강유가 호와 연결되지 않고 끊어졌기에 군을 모두 합쳐 서쪽으로 가는 것만 못하다고 만류했다.

곽회는 지금 가서 요화를 취하면 적이 생각지도 못해서 출동하면 강유는 반드시 낭패할 것이고, 강유는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야 하지만, 요화 쪽을 안정시키기도 부족하고 명을 받아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기에 피곤할 것이며, 병사가 서쪽과 멀지 않아 호와 촉의 연합이 끊어져 하나를 들어 둘을 온전하게 하는 계략이라 했다.

곽회는 따로 하후패를 보내 답중까지 강유를 추격하게 했고, 곽회가 직접 군사들을 인솔해 요화를 공격하자 강유는 달려와서 요화를 구하니 곽회의 말대로 되었다.

3.5. 4차 북벌(249년)

이 때 위나라에서는 사마의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조상의 일파들을 몰살시켰고 하후현이 중앙으로 소환되자 친척인 하후패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 거라 여겨 두려워했고 군사를 이끌고 촉에 투항하러 갔으며, 자오도에서 길을 잃어 아사 직전까지 갔다가 소문을 들은 강유가 군사를 보내 구해줬다.

강유는 국산에 의지해 두 개의 성을 쌓으면서 구안, 이흠에게 두 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강호의 인질을 모아 위나라의 여러 군을 공격했다. 진태가 성은 견고하지만 촉에서 멀리 떨어졌고 길이 험난해 군량미를 꾸준히 수송하고 강족은 강유를 두려워해 징발된 것이니 의지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포위해 빼앗는다면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곽회가 서질, 등애를 인솔하고 성을 포위하자 구안, 이흠은 고립되었으며, 강유는 구원하면서 우두산에서 진태와 대치했다. 진태는 군사들에게 싸우지 말 것을 지시하면서 곽회에게 퇴로를 차단할 것을 이야기하자 곽회가 우두산으로 와서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고, 곽회가 진태의 말에 따라 도수로 진군하자 강유는 군사를 이끌고 도주했다.

구안, 이흠은 구원군이 오지 않자 투항했고 곽회가 서쪽으로 진군해 강족 부락을 공격했으며, 등애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을 우려해 군사를 나눠야 한다고 하자 곽회가 등애를 백수 북쪽에 주둔하게 하자 3일 후에 강유가 요화를 보내 백수 남쪽에서 등애를 압박해 영채를 치게 했다.

등애는 강유가 우리 군사가 적기에 치는 것이 맞지만 부교를 만들지 않아서 요화를 보내 견제케 해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며 동쪽에서 조성을 습격할 것이라 간파했고, 등애가 밤에 몰래 지름길로 가서 조성을 점거했고 강유는 등애가 조성을 점거해 성을 공략하지 못하자 물러났다.

3.6. 5차 북벌(250년)

250년에 강유가 서평을 공격했지만 끝내 이기지 못했고, 곽순을 붙잡아 돌아갔다.

3.7. 6차 북벌(253년)

북벌을 계획하는 비의251년에는 성도로 돌아갔고 252년에 유선으로부터 부를 개설하도록 명받았으며, 오나라에서는 제갈각이 위나라의 사마사에게 동흥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253년 봄에 또 군대를 출정시키려 하면서 이형을 보내 함께 위나라를 치자고 유세했다.

촉나라에서는 정월에 비의가 한수에서 열다가 곽순에게 살해당했고, 강유는 매번 군대를 크게 일으키고자 했지만 비의가 늘 만 명을 넘지 않는 병력을 주어 소규모로 북벌을 했는데, 비의가 암살되자 제재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군대를 크게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유가 오나라의 제안에 응하기로 해 3월에 제갈각이 20만을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자 여름 4월에 강유가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으로 출병해 동정을 거쳐 남안을 포위했으나, 진태가 포위를 풀기 위해 낙문에 도착했고 강유는 군량이 다해 퇴각했다.

3.8. 7차 북벌(254년)

254년 여름 6월에 강유가 농서로 출병하자 이간이 성을 들어 항복했고, 진군해 양무를 포위해 서질과 교전해 위군의 수급을 베고 격파해 패퇴시켜 서질을 전사시켰으며, 촉군은 장억이 전사했다. 강유가 승세를 타 항복시킨 곳이 많았고 하관, 적도, 임조의 백성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진서 천문지, 송서 천문지에 따르면 이 때 곽회가 강유를 격파했고 개원점경에 따르면 만 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글을 올렸다.

3.9. 8차 북벌(255년)

255년에 강유가 하후패와 함께 수만 명을 이끌고 부한에 도착했다가 급하게 적도로 향했고 진태는 그들의 세력이 합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진군해 왕경에게 적도에 주둔시키고 진태의 군사가 도착하면 계획에 따라 그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진태는 진창으로 진군했고 왕경이 고관에서 강유의 군대와 싸우다가 불리해 도수를 건넜고 진태는 왕경이 적도를 굳게 지킬 수 없으면 다른 변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오군영의 병사를 파견해 앞으로 가게 하면서 자신이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그 뒤를 이었다.

강유의 군대가 도서에서 왕경을 크게 물리쳐 수만 명의 군사가 죽었고 왕경은 만여 명만 이끌고 적도성으로 퇴각했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며, 강유가 적도성을 포위했고 진태는 적도성을 구하기 위해 상규에 주둔하면서 병사를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도록 하면서 밤에 앞으로 나아갔다.

등애, 호분, 왕비 등이 도착하면서 등애, 왕비 등과 삼군으로 나누어 농서로 나아갔으며, 등애는 강유의 군사가 왕성한 것을 보고 요충지를 지키고 적이 쇠퇴하기까지 기다리길 권했으나, 진태는 강유의 군대가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식량 보급이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면서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고 적의 뒤를 잡는다면 싸우지 않고도 도주시킬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진태가 군사를 나아가게 해 고성령을 넘어 몰래 행군해 밤에 적도의 동남쪽에 있는 높은 산 위로 가서 많은 봉화를 밝히고 북과 호각을 울리자 적도성에서는 원군이 도착했음을 알고 떨쳐 일어났다.

강유는 최초의 구원병은 군사들을 모아 출발할 것이라 생각했다가 구원병이 벌써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 이전부터 미리 준비한 계책이 있던 것이라 생각해 두려워했으며, 위나라의 군사가 농서를 출발할 때 산길이 매우 험난해서 적이 반드시 복병을 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진태는 거짓으로 남쪽길로부터 진군했고 강유는 3일간 복병을 배치했다.

진태의 군사가 몰래 행군해 적도 남쪽에서 나타나자 강유는 산을 따라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고, 진태는 교전해 강유의 군사를 퇴각시켜 돌아가게 했다. 양주의 군사가 금성을 지나 남쪽으로 옥간판에 도착하자 진태와 왕경은 날짜를 정해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 했으나, 강유는 이 계획을 듣고 즉시 물러나서 종제에 주둔했다.

3.10. 9차 북벌(256년)

256년에 강유는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군대를 정돈했다가 호제와 상규에 모이기로 기약했으며, 위나라에서는 강유의 병력이 이미 다해 병사를 내어 다시 공격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등애가 도서의 패배로 강유가 승세를 타고 올 것이라 여겼고 적도, 농서, 남안, 기산을 지키면서 기산의 곡식이 있어서 유인할 수 있을 거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는 기산으로 향했다가 등애가 이미 방비를 한 것을 알고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했으며,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어서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해 상규로 달려갔다. 강유가 만나기로 약소한 호제는 도착하지 않았고 강유는 단곡에서 등애에게 격파되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아 촉의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자 강유는 스스로 책임을 져서 관직을 깎아 후장군 겸 행대장군사로 강등되었다.

3.11. 10차 북벌(257년)

257년제갈탄회남에서 난을 일으켜 위나라에서 관중의 군대 일부를 동쪽으로 내려보내자 강유가 이 틈을 타 진천으로 향하고자 해서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으로 출병해 침령에 도착했다.

당시 장성에는 곡식이 매우 많았지만 수비병이 매우 적어 위나라의 군사는 당황했는데, 사마망이 강유의 군사를 막고 등애는 농서로부터 와서 장성에 주둔했다.

강유는 전진해 망수에 주둔했고 산에 의지해 영채를 세웠으며, 사마망과 등애는 위를 견고히 해서 강유가 여러 차례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았고, 258년에 제갈탄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으며, 258년 또는 259년 8월에 진지가 사망하면서 황호가 국정을 장악했다.

3.12. 11차 북벌(262년)

261년에는 강유가 매번 나가 패하면서 국력만 소비한다면서 제갈첨, 동궐, 번건염우에게 강유를 대신할 것을 유선에게 건의하기도 했지만 거부당했다.

262년 겨울 10월에 강유가 군사를 이끌고 조양을 침입했고 등애가 이에 응해 후화에서 격파하자 답중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4. 평가

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고 있고, 조예(曹叡)는 교만하고 흉악한 사람이다. 요동의 세 군은 그의 포학함으로 고통 받아 서로 규합하여 그와는 떨어져 거리가 있게 되었다. 조예는 대군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또 서로 공격하여 토벌하도록 했다. 옛날, 진(秦)이 멸망한 것은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러한 변란은 하늘이 내려 준 좋은 기회이다. 그대는 전쟁 준비를 하여 군사들을 통솔해 한중에 주둔하고, 오나라의 행동을 기다렸다가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호응하여 틈을 타서 행동하라.
장완전에서 유선이 장완에게 조서를 내리며
(전략) 예전에 한 무리의 군사가 강으로 들어갔을 때 곽회가 패해 달아난 적이 있습니다. 장단점을 헤아려 양주 점령을 우선으로 해야 되므로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만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하여 가서 하우(河右= 황하의 서쪽지역)를 제압한다면, 신은 군대를 인솔하여 강유의 뒤에서 계속 따라야 합니다. (하략)
장완전에서 장완이 북벌 계획을 설명하며
당시(253년)에 강유 역시 출병해 적도를 포위했다. 사마사우송에게 묻길 "지금 동방과 서방에 일이 있어 두 쪽이 모두 위급한데 여러 장수들은 의지가 꺾였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중략) 강유는 중병을 거느리고 현군으로 제갈각의 군세에 호응하는데 우리 땅에서 식량을 구하는지라 뿌리가 깊은 적이 아닙니다. 또한 말하길 "우리가 동쪽에 힘을 모으고 있어 서쪽은 반드시 텅 비게 될 것이므로 이로써 빨리 진군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관중의 여러 군대에게 빨리 진군하게 해 예상치 못하게 출병하면 아마도 바로 도망칠 것입니다." (중략) 강유는 곽회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 군량이 적자 마침내 퇴각해 농서의 경계에 주둔했다.
한진춘추에서
255년에 위장군 강유와 함께 성도로 돌아왔다. 강유가 다시 출병할 것을 제의할 때 오직 장익만이 조정에서 논쟁해 국가가 작고 백성들은 피곤하므로 병력을 남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중략) 강유가 적도에 도착해 위나라 옹주자사 왕경을 크게 격파시켰다. 왕경의 병사 가운데 도수에서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장익이 말했다. "전쟁을 그칠 만합니다. 다시 전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아가면 아마 이 큰 공로를 훼손시키게 될 것입니다." (중략) 강유는 끝내 적도에서 왕경을 포위했지만, 성은 함락시킬 수 없었다.
장익전에서
강유는 도수 근처에서의 승리를 틈타 가볍게 무장한 병사를 인솔해 깊숙이 침입했지만, 식량이 계속 지원되지 못하므로 군대는 상규에서 좌절되었습니다. 무릇 크게 승리한 후에는 아래 위에서 모두 적군을 경시합니다. 적군을 경시하면 곤란한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왕기전에서
강유가 치중을 기다리지 않고 깊이 들어오니 병사들은 기아에서 시달렸고 상규에서 군사를 돌려야 했습니다. (중략) 이 일들은 모두 최근에 일어난 일로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주석 사마표 전략에서 왕기가
다시 융마를 정돈하고는 진서대장군 호제와 상규에 모이기로 기약했는데 호제가 서약을 어기고 도착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강유는 단곡에서 위의 대장 등애에게 격파되어 별이 흩어지듯이 떠나고 죽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강유를 원망하고 비방해 농서 지역 또한 소동을 일으켜 평안하지 못했다. 강유가 사과하고 책임을 져 스스로 관직을 깎을 것을 청하니 후장군, 행대장군사로 삼았다.
강유전에서
262년에 강유가 군을 이끌고 적도로 출병하자 요화가 말했다.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운다고 하더니, 백약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스스로를 보존하리? 시경에서 말하는 '나보다 먼저 낳던지 나보다 늦게 낳던지 하시지 않고'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로다."
한진춘추에서
사마소는 촉나라의 대장 강유가 변방 지역을 자주 소란하게 하자 촉나라의 국토는 작고 백성들은 피곤에 지쳐 있으며, 자원과 재력은 매우 적어 다 썼을 것이라 추측하고, 병사를 대거 출동시켜 촉나라를 취하려고 했다.
종회전에서
촉은 작은 나라로써 영토는 협소하고 백성이 적은데도 강유는 그 군대를 혹사시키고 잠시도 쉬게 하지 않았다. (하략)
삼소제기에서
(전략) 백성이 피로하면 소요의 조짐이 생기고, 고위 관원이 오만하고 하급 관원이 포악하면 와해의 형세가 일어날 것입니다. (중략) 총명한 사람은 작은 이익 때문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럴싸한 겉모습으만 보고 걸음을 옮기지 않으니, 시기가 무르익은 후에 움직이고, 시운이 부합한 이후에 움직입니다. 과거 탕왕무왕의 군대가 두 번 싸우지 않고 이긴 것은 백성들의 노고를 소중하게 여겨 시기를 잘 살폈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력을 남용해 몇 번이고 정벌해 토지가 무너지듯이 무너지는 상황이 일어날 것이니, 불행히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총명한 사람이라도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겁니다. (하략)
초주전에서 초주가 올린 구국론

5. 기타

5.1. 참전한 사람

5.1.1. 촉한

5.1.2. 조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