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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6:01:45

철종(송)

송철종에서 넘어옴

송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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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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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북송 제7대 황제
철종 | 哲宗
파일:1280px-Zhezong.jpg
출생 1077년 1월 4일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즉위 1085년 4월 1일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사망 1100년 2월 23일 (향년 23세)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복녕전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능묘 영태릉(永泰陵)
재위기간 북송 황태자
1085년 3월 28일 ~ 1085년 4월 1일
북송 황제
1085년 4월 1일 ~ 1100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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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성씨 조(趙)
용(傭) → 후(煦)[1]
부모 부황 신종
모후 흠성황후
형제자매 14남 10녀 중 6남
배우자 소자성헌황후, 소회황후
자녀 1남 4녀
작호 균국공(均國公) → 연안군왕(延安郡王)
묘호 철종(哲宗)
시호 헌원계도현덕정공흠문예무제성소효황제
(憲元繼道顯德定功欽文睿武齊聖昭孝皇帝)
연호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2]
소성(紹聖, 1094년 ~ 1098년)
원부(元符, 1098년 ~ 1100년)
절일 흥룡절(興龍節)
}}}}}}}}} ||
1. 개요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2.2. 원우 연간2.3. 소성, 원부 연간2.4. 후계자 문제
3. 가족 관계4. 송사의 논찬5. 여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북송의 제7대 황제. 묘호는 철종(哲宗), 시호는 헌원계도현덕정공흠문예무제성소효황제(憲元繼道顯德定功欽文睿武齊聖昭孝皇帝). 휘는 후(煦). 신종의 6번째 아들. 그가 죽은 이후 북송 멸망의 원흉이라고 까이는 혼덕공이 즉위하면서 북송은....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송신종의 6남이자 덕비 주씨[3] 소생으로 희녕 9년 12월 7일 기축에 궁 안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용(傭)이었다[4]. 검교태위, 천평군절도사를 부여받았고 균국공에 봉해졌다가 원풍 5년, 개부의동삼사, 창무군절도사로, 이후 1082년 연안군왕으로 진봉되었다.

원래 신종의 6남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는 황제가 되기 힘든 게 사실이었지만, 다섯 형이 모두 요절하면서 살아있던 형제 중 장자가 되었다. 아버지였던 신종이 원풍 8년(1085년) 2월 업무를 못 볼 정도로 위독해지자[5] 서둘러 조정 대신들이 황태자 건저를 올려 신종과 신종의 모후 선인성렬황후 고씨에게 동의를 구했고, 대신들의 주장에 황제와 황태후가 허락하면서 후계건저가 논의됐다.

이때 철종의 할머니 선인성렬황후는 국정 안정을 위해 어린 손자들 대신 성년에 접어든 선황 영종과 자신의 아들[6], 즉 신종의 동복동생 중 한명에게 송 신종의 뒤를 잇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형서, 채학 등 대신들은 예법에 따라 신종의 장남이 있기에 아니된다고 주장했고 선인성렬황후 역시 자신의 주장을 거둠으로써 신종의 장남인 연안군왕 조용이 황태자로 추대되었다.

신종의 동의 이후, 선인성렬황후가 교서를 반포하며 연안군왕을 황태자로 봉했으며[7], 1085년 3월에 연안군왕은 정식으로 황태자가 되었는데 황태자 책봉 때 휘를 용에서 후(煦)로 바꿨다. 그리고 원풍 8년(1085년) 3월 아버지 신종이 붕어하자 불과 9살의 나이에 황태자 조후가 송조의 새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죄를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게 대사면을 내렸으며 요나라에서도 사신이 와서 신종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8]

2.2. 원우 연간

나이가 어렸던 철종 대신 그의 할머니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태황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원래부터 아들이 추진했던 신법을 반대하던 선인성렬황후는 신종 시절 신법을 추진해오던 조정 대신들을 대거 교체하고 황제을 주변에서 모시는 환관들까지 싸그리 바꿨다. 따라서 어린 황제 주변은 선인성렬황후의 입김이 작용하기 알맞게 교체되었고 조정 역시 구법파들이 다시금 자리잡게 되었다.[9] 그리고 철종 즉위 후 태황태후의 신임을 받았던 사마광이 돌아와서 재상으로 임명되고 조정 내 원로이자 노신인 문언박이 돌아온다. 그리고 이 시기 조정의 주요대신들은 이 당시 연호인 원우(元祐)를 따서 원우당파라고도 부른다.

선인성렬황후와 대신들은 원우 연간동안 꾸준히 어린 철종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고, 선인성렬황후도 어린 손자를 친아들 이상으로 돌보면서 제왕과 인간으로서 갖춰야할 부분까지 신경쓰며 늘 손자의 훈육에도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시독 소식, 범저우 등에게 어린 황제의 교육을 담당케 했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서 어린 철종이 성인이 되고 난 뒤, 진종이나 인종처럼 선조들의 전례를 따르고 사대부와 함께 청렴한 태평성대를 이루는 군주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선인성렬황후 역시 손자가 훌륭한 군주가 되도록 힘썼다. 아울러 어린 철종이 늘 다른 곳이 아닌 황제 자신의 침상에서 잠을 자게 하는 등의 규칙을 정해서 엄격하게 훈육했고 철종에게 만약의 불상사가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상당히 신경썼다 .

선인성렬황후는 수렴청정기간동안 국정을 몇몇 신하들과 상의하고 일을 신중히 결정했다. 신종 사후 철종이 즉위한 직후, 태황태후의 신임 속에 재상으로 사마광이 임명되고 조정 원로인 문언박이 돌아온다. 재상으로 임명된 사마광은 신종때 신법 중 가장 문제점이 컸던 모역법(면역법) 폐지, 차역법 부활을 추진했고 이를 5일 이내로 실행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신법 폐지는 워낙 밀어붙이기식으로 급격했고 짧은 기간에 실행하라는 것은 신법파들과 지방관 등의 반발을 초래했다[10]. 이런 가운데 이듬해인 1086년 신법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왕안석이 사망했고, 8개월동안 집권했던 사마광마저 미처 후속대책을 내기도 전에 사망했다.[11]

사실 원우연간의 선인성렬황후의 섭정기간동안, 그녀를 중심으로 조정은 비교적 수월하게 운영되었음에도 철종의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선인성렬황후 본인이 유능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서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끈 것과 송의 관료제가 신종 연간동안 꽃을 피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황제의 할머니와 원우당파 대신들이 ‘황제의 나이가 어리는데 무슨 일이 성사되겠는가’라고 판단했던 이유도 컸다. 물론 철종이 17세가 되어서야 국정에 참여했지만 이때에도 대신들이 10대 철종이 제시한 의견보다는 선인태후의 의견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12]

따라서 철종은 어전회의 중 할머니와 대신들의 행동과 조치에 대해서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반항하였다. 철종이 당시 했던 반항은 ‘황제임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라는 불만이 담긴 퉁명스러운 말과 묵묵부답과 같은 소극적인 방식이었다. 그래서 조정회의 중에 자신의 뒤에 있던 할머니 선인성렬황후가 "왜 의견을 제시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낭랑[13] 할머니께서 일을 처리하셨다"고 말해서 뒤에 있던 선인성렬황후가 "무슨 말이냐"라고 다시 반박하는 일이 생기거나, 할머니의 물음에 입을 닫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하들은 철종과 선인성렬황후에게 아뢸 때 종종 입을 닫고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2.3. 소성, 원부 연간

1093년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병으로 사망하고 철종이 제대로 친정을 시작한다. 원우연간동안의 일에서 언급했듯이 철종은 17세 이후에도 할머니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황제의 어좌 옆에는 늘 할머니 고태후의 자리가 항상 마주하고 있었고, 신하들도 보고를 할때 황제에게 등을 돌려 보고 하기보다는 먼저 태황태후에게 알리는 상황이 계속됐다. 따라서 철종은 자연스레 할머니와원우대신들에게 불만을 가졌는데, 이때 젊은 황제에게 더 큰 원망을 들은 쪽은 신하들이었다.

당시 원우대신들은 선인태후가 손자인 철종의 성품이 안정되어 있다고 먼저 밝혔음에도, 누구도 성년이 된 황제를 위해 태황태후에게 발을 치우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14] 더해서 일부 대신들은 다 큰 철종에게 "일이 진행되기 전 태후마마께 먼저 아뢰시고, 태후마마의 말을 경청하신 뒤에는 그 말씀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연호를 소성(紹聖)으로 바꾼 이때의 모습들을 보면 정책이나 인사 등이 원우연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우대신들의 평이 많이 깎기기도 했다.

할머니 사후, 철종은 원우 연간 동안 함께 하던 환관들을 교체하면서 몇 명은 그 죄의 무거움을 물어 처형시켰다[15]. 또 선인태후 섭정기 동안 밀려나 있던 장돈, 증포 등 옛 신법파들을 다시금 중용했다. 따라서 재상 장돈이 실권을 장악한 철종의 친정 시기는 과거 신종 때의 정책이 되살아난 것으로 보였고 원우 연간 이전으로 회귀되는 조치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집권한 신법파들은 과거 왕안석과 사마광 생전보다 타협점을 찾기 힘든 인물들이 많았고,[16] 정치적 계략이 탁월한 이들도 많았다. 따라서 이때 신법파의 정책들이 추진됨과 함께 원우당인[17]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에서 궁 내 부적 사건 등이 엮이면서 맹황후 폐출 사건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먼저 수도 개봉에 있던 상청저상궁 석비는 원우당인으로 지목된 소식이 썼다는 이유로 훼손되고 다시 채경의 글로 교체되었다. 또 원우 연간[18] 동안 전국 각지에 만들어진 비각 기사들도 죄다 없애버렸고 이미 죽은 사마광 등도 공격 대상에 포함되어 관직이 낮춰지고 부관참시될 뻔했으며 《자치통감》 역시 훼멸될 뻔했다. 그러나 이때 사대부들의 반발을 의식하고 있던 재상 장돈이 사마광, 여공저 등의 공적, 묘비, 위패 훼손 등은 안 된다고 건의해 막고, 젊은 철종에게 외부 명사들을 추천해 그들을 조정에 등용하도록 했다. 따라서 사마광 등 죽은 명신들의 부관참시나 관직 폄직 등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고, 《자치통감》은 서문을 송 신종이 써준 관계로[19] 살아남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 내에서는 채경, 채변, 증포 등이 정적들을 탄핵해 당쟁은 격화되고 서로의 감정도 상하게 되었다. [20]

이 기간 동안 조정에서는 재상 장돈, 증포, 채경, 채변 등이 자신들의 정적들을 원우당인으로 지목해 이들을 탄핵[21]하고 공격했다. 이 결과 엄격한 조사 끝에 구법파 관료 약 7-8백 명이 처벌을 받거나 영원히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조치를 당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하다고 판단된 이들의 경우에는 그 자손들까지 연좌되었다. 따라서 깊숙히 당쟁에 끼어들지 않은 소식, 소철 형제 같은 신하들도 계속 좌천당했고, 구양수의 셋째아들인 구양비의 경우에는 증포와 그의 처남 위태에게 단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모함을 당해, 노주지주로 좌천 후 귀향조치되고 파직당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22] 하지만 철종의 친정 시기는 너무 짦았고, 젊은 철종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건강하지 못했다. 1099년 어린 외아들 조무(趙茂)가 요절하면서 크게 낙심하고 슬퍼하던[23] 젊은 황제는 겨울에 감기를 앓게 된 이후 심한 기침이 끊이지 않았고[24], 지병이 악화되어 1100년 1월 25세 나이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2.4. 후계자 문제

예법에 따라 신종의 아들 중에서 다음 황제를 정해야 했고 당시 황실 최고어른인 흠성헌숙황후 상씨가 재상 장돈 등과 함께 건저회의를 주재하여 누가 철종의 후계자가 되어야 할지를 논했다. 정상대로라면 당연히 재상 장돈의 주장처럼 예법상 ''모제(동복 동생) 간왕 조사를 내세워야 한다"는 말이 받아들여진 뒤 손쉽게 처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회의를 주재하던 흠성헌숙황후 상씨가 "모두 신종의 아들들인데 차별을 받으면 안 된다."라고 말해서 간왕 조사가 제위에 오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5] 그리고 차선책이었던 이복동생 중 가장 연장자인 신왕 조필도 눈병이 있어서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26]

따라서 회의 흐름은 자연스레 후보자가 단왕 조길[27]로 압축되었다. 이때 흠성헌숙황후와 황후를 따르는 대신들[28]은 단왕은 잘생기고 말끔하며 그림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쓸뿐더러, 생전에 신종께서도 나에게 '이 아이는 오래살 수명과 복된 관상이 있고, 인자하고 효행도 있다'고 하셨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단왕을 지지했다. 물론 이런 주장에 장돈은 흠성헌숙황후에게 "이분은 행위가 경박하고 온건하며 묵직하지 못합니다."라며 정치를 해야 되는 인물로 부적합하다고 반대했지만[29] 평소 장돈을 시기했던 증포[30] "장돈은 저와 상의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흠성헌숙황후를 지지했다.

이렇게 송 철종의 유지와 예법상 후계구도는 흠성헌숙황후와 선인성렬황후 사후 선인성렬황후 측근들이 흠성헌숙황후에게 몰려든 상황 속에서 벌어진 궁중 내부의 암투 등이 당쟁과 엮이면서 무시되듯 뒤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간왕 조사와 신왕 조필을 제치고 가장 나이가 많음에도 황제와는 어울리지도 않던 제위계승 서열 3순위 단왕 조길이 송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의 무덤인 영태릉은 북송의 황릉들과 함께 금나라 장군 점한과 금나라의 괴뢰국제나라꼭두각시이자 허수아비 황제인 유예[31]에 의해 도굴되었다. 점한은 송태조의 영창릉에서 옥대와 보기들을 싹쓸이하는 등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며, 유예는 철종의 영태릉에서 옥기와 보물들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때 철종의 시신은 끌려나와 밖에 버려졌는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남송의 태상사소경 방정석이 이를 보고 통곡하여 인근에 손에서 피가 나도록 땅을 파서 시신을 매장하고 돌아와 송고종에게 이를 알리니 송 고종은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정실부인인 황후로는 소자성헌황후 맹씨와 소회황후(昭懷皇后) 유씨(劉氏)가 있었다. 이 중 소자성헌황후와의 사이에서는 복경공주가 있었고, 두번째 황후인 소회황후 유씨(昭懷皇后 劉氏)와의 사이에서는 외아들인 헌민태자 조무가 있었지만 정실부인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아들 모두 요절했다. 그밖에도 다른 후궁들 사이에서도 딸 3명을 더 뒀는데 철종의 자녀 1남 4녀 중 아버지 철종보다 오래 생존한 자녀는 딸 2명 뿐이었다.

소자성헌황후 맹씨는 철종보다 3살 연상으로, 17살이었을 때 선인성렬황후에게 간택되어 궁에 들어와 황후에 책봉되었지만, 자색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남편 철종에게 황후로서 예와 대우는 받아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인성렬황후 사후 원우당인(구법파)들이 조정에서 밀려날 무렵, 맹 황후가 병에 걸린 외동딸 복경공주를 낫게 하기 위해 궁중의 금기사항이자 가법상으로도 금기사항이었던 부적을 쓰는 의식을 한 사건이 첩여 유씨의 모함으로 꼬투리 잡혀서 1099년 폐출되었다[32]. 맹 황후의 친정은 구법파와 끈이 닿아 있었고, 첩여 유씨의 집안은 신법파와 끈이 닿아 있었기에, 맹 황후가 쫓겨난 것은 단순한 궁중 암투의 결과가 아니라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구법파에게 타격을 주려는 철종의 의도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맹 황후는 철종의 명에 따라 요화궁이라고 불리는 몇 칸짜리 낡은 집에서 머물며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니가 되었다가, 남편 철종이 1100년 죽고 시동생인 휘종이 즉위한 이후 1101년 다시 황후의 명예를 회복하고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또 폐출되었다. 그녀는 2번 폐출되고 2번 황실에 복귀한 것과 함께 그 유명한 정강의 변 사건으로 송나라 황실 사람들 중 송고종과 함께 유이하게 황실 사람 중 금나라로 압송될 때 끌려가지 않은 새옹지마 사례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건 소자성헌황후 문서 참조.

맹 황후가 쫓겨난 후, 헌민태자를 낳은 첩여 유씨는 황후가 되었다. 그녀가 바로 소회황후 유씨다. 소회황후는 철종보다 3살 연하였으며, 시와 글을 잘 쓰고 외모가 예뻐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성격이 칼칼했다고 한다. 유씨는 철종이 죽고 휘종이 즉위한 이후 2번째로 맹황후를 내쫓았고 숭은태후로 추앙받았지만, 태후라는 신분을 이용해 정치에 백방으로 관여하려고 했다. 결국 유씨는 이때문에 휘종과 신하들의 불만을 사서 1113년에 죽었다.

4. 송사의 논찬

철종은 어린 나이에 황위를 이어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초년에는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와 같은 여러 어진 이를 불러 등용하고, 청묘법(靑苗法)을 폐지하였고 상평법(常平法)을 부활시켰으며, 준량한 이들을 등용하고 언로를 열어 천하의 인심이 흡연히 치세로 나아갔다. 그래서 원우(元祐) 연간의 정치는 거의 인종(仁宗)의 치세에 가까웠다. 하지만 희령(熙寧)·원풍(元豐) 연간의 옛 간사한 재앙을 구제하는 것이 미진했고 얼마 안 있어 모함이 다시 이루어져 결국 소술(紹述)[33]을 빌미로 이전의 정치를 뒤집었고 선량한 이들에게 보복을 가하고 당적의 재앙이 일어나기에 이르렀으며, 군자들이 모두 내쫓겨 송나라의 정치는 더욱 피폐해졌다. 아아, 안타깝구나!

- 《송사

5. 여담

6. 둘러보기

송사(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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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趙禎) 조서 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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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趙禥) 조현 · 조하(趙昰) · 조병
※ 48권 ~ 209권은 志에 해당. 210권 ~ 241권은 表에 해당. 송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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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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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태후 · 효혜황후 · 효명황후 · 효장황후 · 숙덕황후 · 의덕황후 · 명덕황후 · 원덕황후 · 장회황후 · 장목황후 · 장헌명숙황후 · 장의황후 · 장혜황후 · 소정귀비 · 곽황후 · 자성광헌황후 · 온성황후 · 소절귀비 · 소숙귀비 · 양덕비 · 풍현비 · 선인성렬황후 · 흠성헌숙황후 · 흠성황후 · 흠자황후 · 임현비 · 혜목현비 · 소자성헌황후 · 소회황후 · 현공황후 · 현숙황후 · 의숙귀비 · 현인황후 · 교귀비 · 명달황후 · 인회황후 · 헌절황후 · 헌성자열황후 · 반현비 · 장현비 · 유귀비 · 유완의 · 장귀비 · 성목황후 · 성공황후 · 성숙황후 · 채귀비 · 이현비 · 자의황후 · 황귀비 · 공숙황후 · 공성인열황후 · 사도청 · 전황후 · 양숙비
244·245·246·247권 「종실전(宗室傳)」
조정미 · 조덕소 · 조덕방 · 조원좌 · 조원희 · 조원분 · 조원걸 · 조원악 · 조원칭 · 조원엄 · 조원억 · 조우 · 조윤양 · 조호 · 조군 · 조필 · 조오 · 조사 · 조무 · 조해 · 조추 · 조기(趙杞) · 조허 · 조체 · 조악 · 조식 · 조진(趙榛) · 조심 · 조훈(趙訓) · 조부 · 조거 · 조기(趙愭) · 조개(趙愷) · 조순 · 조횡 · 조자칙 · 조자숭 · 조자력 · 조자지 · 조자주 · 조자숙 · 조사이 · 조희언 · 조희역 · 조사오 · 조사요 · 조사궁 · 조사천 · 조불군 · 조불기 · 조불우 · 조불백 · 조선준 · 조선예 · 조여술 · 조숙근 · 조숙향 · 조언담 · 조언숙 · 조언유
248권 「공주전(公主傳)」
진(秦)국대장공주 · 위(魏)국대장공주 · 노국대장공주 · 진(陳)국대장공주 · 서국대장공주 · 빈국대장공주 · 양국대장공주 · 옹국대장공주 · 위(衛)국대장공주 · 형국대장공주 · 장혜국공주 · 승국대장공주 · 주진국대장공주 · 진로국대장공주 · 곤국대장공주 · 연서국대장공주 · 서국대장공주 · 위초국대장공주 · 위국대장공주 · 한위국대장공주 · 주국장공주 · 당국장공주 · 담국장공주 · 서국장공주 · 진국공주 · 진국장공주 · 가덕제희 · 영덕제희 · 순숙제희 · 안덕제희 · 무덕제희 · 수숙제희 · 안숙제희 · 숭덕제희 · 가국공주 · 문안공주 · 화정공주 · 제안공주 · 안강군주 · 기국공주 · 주한국공주
249권 「범질등전(范質等傳)」 250권 「석수신등전(石守信等傳)」
범질 · 왕부 · 위인포 석수신 · 왕심기 · 고회덕 · 한중윤 · 장령탁 · 나언괴 · 왕언승
251권 「한령곤등전(韓令坤等傳)」 252권 「왕경등전(王景等傳)」
한령곤 · 모용연쇠 · 부언경 왕경 · 왕안 · 곽종의 · 이홍신 · 무행덕 · 양승신 · 후장
253권 「절덕의등전(折德扆等傳)」 254권 「후익등전(侯益等傳)」
절덕의 · 풍계업 · 왕승업 · 이계주 · 손행우 후익 · 장종은 · 호언가 · 설회양 · 조찬 · 이계훈 · 약원복 · 조조
255권 「곽숭등전(郭崇等傳)」
곽숭 · 양정장 · 송악 · 상공 · 왕언초 · 장영덕 · 왕전빈 · 강연택 · 왕계도 · 고언휘
256권 「조보전(趙普傳)」 257권 「오정조등전(吳廷祚等傳)」 258권 「조빈등전(曹彬等傳)」
조보(趙普) 오정조 · 이숭구 · 왕인섬 · 초소보 · 이처운 조빈(曹彬) · 반미 · 이초
259권 「장미등전(張美等傳)」
장미 · 곽수문 · 윤숭가 · 유정양 · 원계충 · 최언진 · 장정한 · 황보계명 · 장경
260권 「조한등전(曹翰等傳)」
조한 · 양사 · 당진(黨進) · 이한경 · 유우(劉遇) · 이회충 · 미신 · 전중진 · 유정한 · 최한
261권 「이경등전(李瓊等傳)」
이경(李瓊) · 곽경 · 진승소 · 이만초 · 백중찬 · 왕인호 · 진사양 · 초계훈 · 유중진 · 원언 · 기정훈 · 장탁 · 이만전 · 전경함 · 왕휘
262권 「이곡등전(李穀等傳)」
이곡 · 잠거윤 · 두정고 · 이도(李濤) · 왕역간 · 조상교 · 장석 · 장주 · 변귀당 · 유온수 · 유도 · 변광범 · 유재(劉載) · 정우(程羽)
263권 「장소등전(張昭等傳)」 264권 「설거정등전(薛居正等傳)」
장소(張昭) · 두의(竇儀) · 여여경 · 유희고 · 석희재 · 이목 설거정 · 심륜 · 노다손 · 송기 · 송웅
265권 「이방등전(李昉等傳)」 266권 「전약수등전(錢若水等傳)」
이방(李昉) · 여몽정 · 장제현 · 가황중 전약수 · 소역간 · 곽지 · 이지 · 신중보 · 왕면 · 온중서 · 왕화기
267권 「장굉등전(張宏等傳)」 268권 「시우석등전(柴禹錫等傳)」
장굉 · 조창언 · 진서 · 유식(劉式) · 유창언 · 장계 · 이유청 시우석 · 장손 · 양수일 · 조용 · 주영 · 왕계영 · 왕현
269권 「도곡등전(陶穀等傳)」
도곡 · 호몽 · 왕저 · 왕우(王祐) · 양소검 · 어숭량 · 장담 · 고석
270권 「안간등전(顏衎等傳)」
안간 · 극가구 · 조봉 · 소요 · 고방 · 풍찬 · 변후 · 왕명 · 허중선 · 양극양 · 단사공 · 후척 · 이부(李符) · 위비 · 동추
271권 「마영종등전(馬令琮等傳)」
마영종 · 두한휘 · 장정한 · 오건유 · 채심정 · 주광 · 장훈 · 석희 · 장장영 · 육만우 · 해휘 · 이도(李韜) · 왕진경 · 곽정위 · 조연진 · 보초
272권 「양업등전(楊業等傳)」
양업 · 형한유 · 조광실 · 장휘 · 사초
273권 「이진경등전(李進卿等傳)」
이진경 · 양미 · 하계균 · 이한초 · 곽진(郭進) ,우사진, · 이겸부 · 요내빈 · 동준회 · 하유충 · 마인우
274권 「왕찬등전(王贊等傳)」
왕찬 · 장보속 · 조빈(趙玭) · 노회충 · 왕계훈 · 정덕유 · 장연통 · 양형 · 사규 · 전흠조 · 후지 · 왕문실 · 적수소 · 왕신(王侁) · 유심경
275권 「유복등전(劉福等傳)」
유복 · 안수충 · 공수정 · 담연미 · 원달 · 상사덕 · 윤계륜 · 설초 ,정한 조도, · 곽밀 ,부사양 이빈(李斌), · 전인랑 · 유겸
276권 「유보훈등전(劉保勳等傳)」
유보훈 · 등중정 · 유반 · 공승공 · 송당 · 원곽 · 번지고 ,곽재, · 장병(臧丙) · 서휴복 · 장관 · 진종신 · 장평 · 왕계승 · 윤헌 · 왕빈(王賓) · 안충
277권 「장감등전(張鑒等傳)」
장감(張鑒) · 요탄 · 삭상 · 송태초 · 노지한 · 정문보 · 왕자여 · 유종 · 변곤 · 허양 · 배장 · 우면 ,장적, · 난숭길 · 원봉길 · 한국화 · 하몽 · 신지례
278권 「마전의등전(馬全義等傳)」
마전의 · 뇌덕양 · 왕초(王超)
279권 「왕계충등전(王繼忠等傳)」
왕계충 · 부잠 · 대흥 · 왕한충 · 왕능 · 장응 · 위능 · 진흥 · 허균 · 장진 · 이중귀 · 호연찬 · 유용 · 경전빈 · 주인미
280권 「전소빈등전(田紹斌等傳)」
전소빈 · 왕영 · 양경(楊瓊) · 전수준 · 서흥 · 왕고 · 이중회 · 백수소 · 장사윤 · 이기 · 왕연범
281권 「여단등전(呂端等傳)」 282권 「이항등전(李沆等傳)」 283권 「왕흠약등전(王欽若等傳)」
여단 · 필사안 · 구준 이항 · 왕단 · 상민중 왕흠약 · 임특 · 정위 · 하송
284권 「진요좌등전(陳堯佐等傳)」 285권 「진집중등전(陳執中等傳)」 286권 「노종도등전(魯宗道等傳)」
진요좌 · 송상 진집중 · 유항 · 가창조 · 양적 · 풍증 노종도 · 설규 · 왕서(王曙) · 채제
287권 「양려등전(楊礪等傳)」 288권 「임중정등전(任中正等傳)」
양려 · 송식 · 양사종 · 이창령 · 조안인 · 진팽년 임중정 · 주기 · 정림 · 강준 · 범옹 · 조진(趙稹) · 임포(任布) · 고약눌 · 손면
289권 「고경등전(髙瓊等傳)」 290권 「조이용등전(曹利用等傳)」
고경 · 범정소 · 갈패 조이용 ,손계엄, · 장기(張耆) · 양숭훈 · 하수은 · 적청 ,장옥 손절, · 곽규
291권 「오육등전(吳育等傳)」
오육 · 송수 · 이약곡 · 왕박문 · 왕종
292권 「이자등전(李諮等傳)」
이자 · 정감 · 하후교 · 성도(盛度) · 정도 · 장관 · 정전 · 명호 · 왕요신 · 손변 · 전황
293권 「전석등전(田錫等傳)」
전석 · 왕우칭 · 장영(張詠)
294권 「장우석등전(掌禹錫等傳)」
장우석 · 소신 · 왕수(王洙) · 서언 · 유식(柳植) · 섭관경 · 풍원 · 조사민 · 장석 · 장규 · 양안국
295권 「윤수등전(尹洙等傳)」
윤수 · 손보 · 사강 · 엽청신 · 양찰
296권 「한비등전(韓丕等傳)」
한비 · 사항 · 장무직 · 양호 · 양휘지 · 여문중 · 왕저 · 여우지 · 반신수 · 두호
297권 「공도보등전(孔道輔等傳)」
공도보 · 국영 · 유수 · 조수고 · 곽권 · 단소련
298권 「팽승등전(彭乘等傳)」
팽승 · 혜영 · 매지 · 사마지 · 이급 · 연숙 · 장당 · 유기(劉夔) · 마량 · 진희량
299권 「적비등전(狄棐等傳)」
적비 · 낭간 · 손조덕 · 장약곡 · 석양휴 · 조사형 · 이수 · 장동 · 이사형 · 이부(李溥) · 호칙 · 설안 · 허원 · 종리근 · 손충 · 최역 · 전유 · 시창언
300권 「양해등전(楊偕等傳)」
양해 · 왕연(王沿) · 두기 · 양전(楊畋) · 주담 · 서적(徐的) · 요중손 · 진태소 ,마심 두증, · 이허기 · 장부 · 유헌경 · 진종역 · 양대아
301권 「변숙등전(邊肅等傳)」
변숙 · 매순 · 마원방 · 설전 · 구감 · 양일엄 · 이행간 · 장빈 · 진염 · 이유 · 장병(張秉) · 장택행 · 정향 · 곽진(郭稹) · 조하(趙賀) · 고적(高覿) · 원항 · 서기 · 장지 · 제곽 · 정양
302권 「왕진등전(王臻等傳)」
왕진 · 어주순 · 가암 · 이경(李京) · 여경초 · 오급 · 범사도 · 이현 · 하중립 · 심막
303권 「장온지등전(張昷之等傳)」
장온지 · 위관 · 등종량 · 이방(李防) · 조상 · 당숙 · 장술 · 황진(黃震) · 호순지 · 진관(陳貫) · 범상 · 전경
304권 「주위등전(周渭等傳)」
주위 · 양정(梁鼎) · 범정사 · 유사도 · 왕제 · 방해 · 조영숙 · 유원유 · 양고 · 조급 · 유식(劉湜) · 왕빈(王彬) · 중간
305권 「양억등전(楊億等傳)」 306권 「사필등전(謝泌等傳)」
양억 · 조형 · 유균 · 설앙 사필 · 손하 · 주태부 · 척륜 · 장거화 · 악황목 · 시성무
307권 「교유악등전(喬維岳等傳)」
교유악 · 왕척 · 장옹 · 동엄 · 위정식 · 노염 · 송단 · 능책 · 양담 · 진세경 · 이약졸 · 진지미
308권 「상관정등전(上官正等傳)」
상관정 · 노빈 · 주심옥 · 배제 · 이계선 · 장단 · 장후 · 장길
309권 「왕연덕등전(王延德等傳)」
왕연덕 · 상연신 · 정덕현 · 우연덕 · 위진(魏震) · 장질 · 양윤공 · 진희 · 사덕권 · 염일신 · 근회덕
310권 「이적등전(李迪等傳)」 311권 「안수등전(晏殊等傳)」
이적 · 왕증 · 장지백 · 두연 안수 · 방적 · 왕수(王隨) · 장득상 · 여이간 · 장사손
312권 「한기등전(韓琦等傳)」 313권 「부필등전(富弼等傳)」 314권 「범중엄등전(范仲淹等傳)」
한기 · 증공량 · 진승지 · 오충 · 왕규 부필 · 문언박 범중엄 · 범순인
315권 「한억전(韓億傳)」 316권 「포증등전(包拯等傳)」 317권 「소항등전(邵亢等傳)」
한억 포증 · 오규 · 조변 · 당개 소항 · 풍경 · 전유연
318권 「장방평등전(張方平等傳)」 319권 「구양수등전(歐陽修等傳)」 320권 「채양등전(蔡襄等傳)」
장방평 · 왕공진 · 장변 · 조개(趙槩) · 호숙 구양수 · 유창(劉敞) · 증공 채양 · 여진 · 왕소(王素) · 여정 · 팽사영 · 장존
321권 「정해등전(鄭獬等傳)」
정해 · 진양(陳襄) · 전공보 · 손수 · 풍직 · 여회 · 유술 · 유기(劉琦) · 전의 · 정협
322권 「하담등전(何郯等傳)」
하담(何郯) · 오중복 · 진천 · 왕렵 · 손사공 · 주맹양 · 제회 · 양회 · 유상 · 주경(朱京)
323권 「울소민등전(蔚昭敏等傳)」
울소민 · 고화 · 주미 · 염수공 · 맹원 · 유겸 · 조진(趙振) · 장충 · 범각 · 마회덕 · 안준 · 상보
324권 「석보등전(石普等傳)」 325권 「유평등전(劉平等傳)」
석보 · 장자 · 허회덕 · 이윤칙 · 장항 · 유문질 · 조자 유평 · 임복 · 왕규 · 무영 · 상역 · 경부 · 왕중보
326권 「경태등전(景泰等傳)」
경태 · 왕신(王信) · 장해 · 장충 · 곽은 · 장절(張岊) · 장군평 · 사방 · 노감 · 이위 · 왕과 · 곽자 · 전민 · 시기서 · 강덕여 · 장소원
327권 「왕안석등전(王安石等傳)」
왕안석 · 왕안례 · 왕안국
328권 「이청신등전(李淸臣等傳)」
이청신 · 안도 · 장조(張璪) · 포종맹 · 황리 · 채정(蔡挺) · 왕소(王韶) · 설향 · 장절(章楶)
329권 「상질등전(常秩等傳)」
상질 · 등관 · 이정(李定) · 서단 · 건주보 · 서탁 · 왕광연 · 왕도 · 왕자소 · 하정신 · 진역
330권 「임전등전(任顓等傳)」
임전 · 이참 · 곽신창 · 부구 · 장경헌 · 두변 · 장괴 · 손유 · 허준 · 노사종 · 전상선 · 두순 · 두상 · 사린 · 왕종망 · 왕길보
331권 「손장경등전(孫長卿等傳)」
손장경 · 주항 · 이중사 · 나증 · 마중보 · 왕거경 · 손구 · 장선 · 소심 · 마종선 · 심구 · 이대림 · 여하경 · 조무택 · 정사맹 · 장문 ,진순유 악경 유몽, · 묘시중 · 한지 · 초건중 · 장힐 · 노혁
332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등원발 · 이사중 · 육선 · 조설 · 손로 · 유사웅 · 목연
333권 「양좌등전(楊佐等傳)」
양좌 · 이태(李兌) · 심립 · 장섬 · 장도 · 유충 · 유근 · 염순 · 갈궁 · 장전 · 영인 · 이재 · 요환 · 주경(朱景) · 이종 · 주수륭 · 노사굉 · 단후 · 양중원 · 여양굉 · 반숙
334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서희 ,이직(李稷), · 고영능 · 심기(沈起) · 유이 · 웅본 · 소주 · 도필 · 임광
335권 「충세형전(种世衡傳)」 336권 「사마광등전(司馬光等傳)」 337권 「범진전(范鎭傳)」
충세형 사마광 · 여공저 범진
338권 「소식전(蘇軾傳)」 339권 「소철전(蘇轍傳)」 340권 「여대방등전(呂大防等傳)」
소식 소철 여대방 · 유지 · 소송
341권 「왕존등전(王存等傳)」 342권 「양도등전(梁燾等傳)」
왕존 · 손고(孫固) · 조첨 · 부요유 양도 · 왕암수 · 정옹 · 손영
343권 「원강등전(元絳等傳)」 344권 「손각등전(孫覺等傳)」
원강 · 허장 · 등윤보 · 임희 · 장지기 · 육전 · 오거후 · 온익 손각 · 이상(李常) · 공문중 · 이주 · 선우신 · 고림 · 이지순 · 왕적 · 마묵
345권 「유안세등전(劉安世等傳)」
유안세 · 추호 ,전주 왕회(王回) 증탄, · 진관(陳瓘) · 임백우
346권 「진차승등전(陳次升等傳)」
진차승 · 진사석 · 팽여려 · 여도 · 장정견 · 공결 · 손악 · 진헌 · 강공망 · 진우 · 상안민
347권 「손고등전(孫鼛等傳)」
손고(孫鼛) · 오시 · 이소기 · 오사례 · 왕한지 · 황렴 · 주복 · 장순민 · 성도(盛陶) · 장형 · 안복 · 손승 · 한천 · 공정신 · 정목 · 석단 · 교집중
348권 「부즙등전(傅楫等傳)」
부즙 · 심기(沈畸) ,소복, · 서적(徐勣) · 장여명 · 황보광 · 석공필 ,장극공, · 모주 · 홍언승 · 종전 · 도절부 · 모잠 · 왕조도 · 장장 · 조휼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학질 · 가규 · 두순경 · 유창조 · 노정 · 연달 · 요시 · 양수 · 유순경 · 송수약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묘수 · 왕군만 · 장수약 · 왕문욱 · 주영청 · 유소능 · 왕광조 · 이호 · 화빈 · 유중무 · 곡진 · 유격 · 곽성 · 가암 · 장정(張整) · 장온 · 왕은 · 양응순 · 조륭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조정지 · 장상영 · 유정부 · 하집중 · 정거중 · 안요신 · 장강국 · 주악 · 유규 · 임터 · 관사인 · 후몽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당각 · 이방언 ,여심 설앙 오민 왕안중 왕양 조야 조보(曹輔) 경남중 왕우(王㝢),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하율 · 손부 · 진과정 · 장숙야 · 섭창 · 장각(張閣) · 장근(張近) · 정근 · 우문창령 · 허기 · 정지소 · 공원 · 최공도 · 포유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심수 · 노창형 · 사문관 · 육온 · 황식 · 요우 · 누이 · 심적중 · 이백종 · 왕해 · 하상 · 엽조흡 · 시언 · 최단우 · 유율 · 채의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가역 · 동돈일 · 상관균 · 내지소 · 엽도 · 양외 · 최태부 · 양급 · 여가문 · 이남공 · 동필 · 우책 · 곽지장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유증 · 전휼 · 석예 · 좌부 · 허돈인 · 오집중 · 오재 · 유병 · 송교년 · 강연명 · 채거후 · 유사명 · 장정(蔣靜) · 가위절 · 최언 · 장근(張根) · 임량 · 주상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하관 · 이희정 · 왕운 · 담세적 · 매집례 · 정진(程振) · 유연경 이강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종택 · 조정(趙鼎) 장준(張浚)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주승비 · 여이호 · 범종윤 · 범치허 · 여호문 이광 · 허한 · 허경형 · 장각(張愨) · 장소(張所) · 진화 · 장유(蔣猷)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한세충 악비 유기(劉錡) · 오개 · 오린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이현충 · 양존중 · 곽호(郭浩) · 양정(楊政) 왕덕 · 왕언 · 위승 · 장헌 · 양재흥 · 우고 · 호굉휴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장준(張俊) · 장종안 · 유광세 · 왕연(王淵) · 해원 · 곡단 왕우직 · 이보 · 성민 · 조밀 · 유자우 · 여지 · 호세장 · 정강중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백시중 · 서처인 · 풍해 · 왕륜(王倫) · 우문허중 · 탕사퇴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주탁 · 왕륜(王綸) · 윤색 · 왕지망 · 서부 · 심여구 · 적여문 · 왕서(王庶) · 신병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주변 · 정망지 · 장소(張邵) · 홍호 장구성 · 호전 · 요강 · 이태(李迨) · 조개(趙開)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등숙 · 이병 · 등강 · 장수 · 부직유 · 풍강국 상동 · 장치원 · 설휘언 · 진연 · 위강 · 반량귀 · 여본중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상자인 · 진규(陳規) · 이릉 · 노지원 · 이구(李璆) · 이박 · 왕상 · 왕의 · 진각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위부민 · 유각 · 호순척 · 심해 · 유일지 · 호교수 · 기숭례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장의 · 한초주 · 진공보 · 장학 · 호송년 · 조훈(曹勛) · 이직(李稙) · 한공예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하주 · 왕차옹 · 범동 · 양원 · 누소 · 구룡여연 · 설필 · 나여즙 · 소진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범여규 · 오표신 · 왕거정 · 안돈복 · 황귀년 · 정우(程瑀) · 장천 · 홍의 · 조규(趙逵)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장도 · 황중 · 손도부 · 증기 · 구도 · 이미손 진준경 · 우윤문 · 신차응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진강백 · 양극가 · 왕철 · 엽의문 · 장패 · 엽옹 · 엽형 갈필 · 전단례 · 위기 · 주규 · 시사점 · 소수 · 공무량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유공 · 왕린 · 황조순 · 왕대보 · 금안절 · 왕강중 · 이언영 · 범성대 황흡 · 왕응진 · 왕십붕 · 오패 · 진량한 · 두신로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주집고 · 왕희여 · 진양우 · 이호 · 진탁 · 호기 · 당문약 · 이도(李燾) 우무 · 사악 · 안사로 · 원추 · 이춘 · 유의봉 · 장효상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이형 · 왕자중 · 가원 · 장강 · 장대경 · 채광 · 막몽 · 주종 · 유장 · 심작빈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주필대 · 유정 · 호진신 조여우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팽귀년 · 황상 · 나점 · 황도 ,주남, 임대중 · 진규(陳騤) · 황보 · 첨체인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호굉 · 하담(何澹) · 임율 · 고문호 · 진자강 · 정병 · 경당 · 사심보 · 허급지 · 양여가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누약 · 이대성 · 임희이 · 서응룡 · 장하 · 왕원 · 왕질 · 육유 · 방신유 · 왕남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사호 · 왕회(王淮) · 조웅 · 권방언 · 정송 · 진겸 · 장암 서의 · 오렵 · 항안세 · 설숙사 · 유갑 · 양보 · 유광조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여단례 · 이벽 · 구화 · 예사 · 우문소절 · 이번(李蘩) 정각 · 왕정수 · 구여 · 고등 · 누인량 · 송여위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왕신(王信) · 왕대유 · 원섭 · 오유승 · 유중홍 · 이상(李祥) · 왕개 · 송덕지 · 양대전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신기질 · 하이 · 유재(劉宰) · 유약(劉爚) · 시중행 · 이맹전 진민 · 장조(張詔) · 필재우 · 안병 · 양거원 · 이호의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조방 · 가섭 · 호재흥 · 맹종정 · 장위 왕약해 · 장운 · 유약(柳約) · 이순신 · 손봉길 · 장영(章穎) · 상비경 · 유영 · 서방헌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이종면 · 원보 · 유불 · 왕안거 최여지 · 홍자기 · 허혁 · 진거인 · 유한필 두범 · 양간 · 전시 · 장복 · 여오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오창예 · 왕강 · 진복 · 왕정 고정자 · 고사득 · 장충서 · 당린 누기 · 심환 · 조언약 · 범응령 · 서경손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탕숙 · 장중진 · 모자재 · 주비손 · 구양수도 맹공 · 두고 · 왕등 · 양섬 · 장유효 · 진함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조여담 · 조여당 · 조희관 · 조언눌 · 조선상 · 조여환 · 조필원 사미원 · 정청지 · 사숭지 · 동괴 · 엽몽정 · 마정란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부백성 · 갈홍 · 증삼복 · 황주약 · 원소 · 위진(危稹) · 정공허 · 나필원 · 왕수(王遂)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오연 · 여개 · 왕입신 · 상사벽 · 호영 · 냉응징 · 조숙원 · 왕만 · 마광조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교행간 · 범종 · 유사 · 조규 · 사방숙 오잠 · 정원봉 · 강만리 · 왕약 · 장감(章鑑) · 진의중 · 문천상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선증 · 설극 · 진귀의 · 증종룡 · 정성지 · 이명복 · 추응룡 · 여천석 · 허응룡 · 임략 · 서영수 · 별지걸 · 유백정 · 김연 · 이성전 · 진위 · 최복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왕백대 · 정채 · 응요 · 서청수 · 이증백 · 왕야 · 채항 · 장반 · 마천기 · 주습 · 요호신 · 대경가 · 피룡영 · 심염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양동 · 요희득 · 포회 · 상정 · 진종례 · 상무 · 가현옹 · 이정지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임훈 · 유재소 · 허흔 · 응맹명 · 증삼빙 · 서교 · 도정 · 정필 · 우대년 · 진중미 · 양성대 · 이지효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오영(吳泳) · 서범 · 이소 · 왕매 · 사미공 · 진훈 · 조여주 · 이대동 · 황순 · 양대이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육지지 · 서록경 · 조봉룡 · 조여등 · 손몽관 · 홍천석 · 황사옹 · 서원걸 · 손자수 · 이백옥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유응룡 · 반방 · 홍근 · 조경위 · 풍거비 · 서림 · 서종인 · 위소덕 · 진개 · 양문중 · 사방득
426권 「순리전(循吏傳)」
진정 · 장륜 · 소엽 · 최립 · 노유개 · 장일 · 오준로 · 조상관 · 고부 · 정사맹 · 한진경 · 엽강직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주돈이 · 정호 · 정이 · 장재 · 소옹 · 유현 · 이유 · 사량좌 · 유초 · 장역 · 소병 · 윤돈 · 양시 · 나종언 · 이동 · 주희 · 장식 · 황간 · 이번(李燔) · 장흡 · 진순 · 이방자 · 황호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섭숭의 · 형병 · 손기 · 왕소소 · 공유 · 공의 · 최송 · 윤졸 · 전민 · 신문열 · 이각 · 최이정 · 이지재 · 호탄 · 가동 · 유안(劉顔) · 고변 · 손복 · 석개 · 호원 · 유희수 · 임개 · 이구(李覯) · 하섭 · 왕회(王回) · 주요경 · 왕당 · 진양(陳暘) · 소백온 · 유저 · 홍흥조 · 고항 · 정대창 · 임지기 · 임광조 · 양만리 · 유자휘 · 여조겸 · 채원정 · 육구령 · 육구연 · 설계선 · 진부량 · 엽적 · 대계 · 채유학 · 양태지 · 범충 · 주진 · 호안국 · 진량 · 정초 · 이도전 · 정형 · 유청지 · 진덕수 · 위료옹 · 요덕명 · 탕한 · 하기 · 왕백 · 서몽신 · 이심전 · 엽미도 · 왕응린 · 황진(黃進)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송백 · 양주한 · 주앙 · 조인기 · 정기 · 곽욱 · 마응 · 화현 · 풍길 · 고적(高頔) · 이도(李度) · 한부 · 국상 · 송준 · 유개 · 하후가정 · 나처약 · 안덕유 · 전희 · 진충 · 오숙 · 황이간 · 서현 · 구중정 · 증치요 · 조간 · 요현 · 이건중 · 홍담 · 노진 · 최준도 · 진월 · 목수 · 석연년 · 소관 · 소순흠 · 윤원 · 황항 · 황감 · 양파 · 안태초 · 곽충서 · 매요신 · 강휴복 · 소순 · 장망지 · 왕봉 · 손당경 · 당경 · 문동 · 양걸 · 하주 · 유경 · 포유 · 황백사 · 황정견 · 조보지 · 진관(秦觀) · 장뢰 · 진사도 · 이치 · 유서 · 왕무구 · 채조 · 이격비 · 여남공 · 곽상정 · 미패 · 유선 · 예도 · 이공린 · 주방언 · 주장문 · 유엄 · 진여의 · 왕조 · 엽몽득 · 정구 · 장얼 · 한구 · 주돈유 · 갈승중 · 웅극 · 장즉지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강보예 · 마수 · 동원형 · 조근 · 소함 · 진전서 · 첨량신 · 이약수 · 유겹 · 부찰 · 양진 · 장극전 · 장확 · 주소 · 사항 · 손익(孫翊) · 곽안국 · 이연 · 이막 · 서규 · 진구 · 조불시 · 조령성 · 당중 · 서휘언 · 상자소 · 양방예 · 증고 · 유급 · 정양 · 여유성 · 곽영 · 한호 · 구양순 · 장충보 · 이언선 · 조립 · 왕충식 · 당기 · 이진 · 진구도 · 최종 · 임충지 · 등무실 · 위행가 · 염진 · 조사가 · 역청 · 호빈 · 범왕 · 마준 · 양진중 · 고가 · 조우문 · 진인 · 허표손 · 진륭지 · 왕익 · 이성지 · 진원규 · 장순 · 범천순 · 우부 · 변거의 · 진소 · 윤옥 · 이불 · 윤곡 · 조묘발 · 당진(唐震) · 조여석 · 조회 · 조양순 · 강재 · 마기 · 밀우 · 장세걸 · 육수부 · 서응표 · 진문룡 · 등득우 · 장각(張珏) · 고민 · 경사충 · 왕기 · 장흥조 · 곽호(郭滸) · 오혁 · 이익 · 조사륭 · 진쉬 · 황우 · 학중련 · 유유보 · 우호 · 위언명 · 유사영 · 적흥 · 주필 · 공즙 · 이긍 · 능당좌 · 양수중 · 강예 · 곽선 · 사마몽구 · 임공재 · 황개 · 손익(孫益) · 왕선 · 오초재 · 이성대 · 도거인 · 고영년 · 국사복 · 손소원 · 증효서 · 조백진 · 왕사언 · 설경 · 손휘 · 송창조 · 이정(李政) · 강수 · 유선 · 굴견 · 정담 · 요흥 · 장기(張玘) · 왕공 · 유태 · 손봉 · 유화원 · 호당로 · 왕주 · 유안(劉晏) · 정진(鄭振) · 맹언경 · 고담 · 연만부 · 설양현 · 당민구 · 왕사도 · 조시상 · 조희계 · 유자천 · 여문신 · 종계옥 · 경세안 · 정보 · 미립 · 후핍 · 왕효충 · 고응송 · 장선옹 · 황신 · 진달 · 소뇌룡 · 추붕 · 유사소 · 진동 · 구양철 · 마신 · 여조검 · 양굉중 · 화악 · 등약수 · 진보 · 모겸지 · 서도명
456권 「효우전(孝友傳)」
이린 · 서승규 · 유효충 · 여승 · 나거통 · 제득일 · 이한징 · 형신류 · 허조 · 호중요 · 진긍 · 홍문무 · 역연경 · 동도명 · 곽종 · 고흔 · 주태 · 성상 · 진사도 · 방강 · 방천우 · 유빈 · 번경온 · 영서민 · 기위 · 하보지 · 이빈(李玭) · 후의 · 왕광제 · 강백 · 구승순 · 상진 · 두의(杜誼) · 요종명 · 등중화 · 모안여 · 이방(李訪) · 주수창 · 후가 · 신적중 · 학인 · 지점 · 등종고 · 심선 · 소경문 · 태형 · 앙흔 · 조백심 · 팽유 · 모순 · 양경(楊慶) · 진종 · 곽의 · 신세녕 · 구여령 · 왕주(王珠) · 안후 · 장백위 · 채정(蔡定) · 정기
457·458·459권 「은일·탁행전(隱逸卓行傳)」
척동문 · 진단 · 충방 · 만적 · 이독 · 위야 · 형돈 · 임포(林逋) · 고역 · 서복 · 공민 · 하군 · 왕초(王樵) · 장유(張愈) · 황희 · 주계명 · 대연 · 진열 · 손모 · 유역 · 강잠 · 연서 · 장찰 · 유여상 · 양효본 · 등고보 · 우문지소 · 오영(吳瑛) · 송강어옹 · 두생 · 순창선인 · 남안옹 · 장여 · 서중행 · 소운경 · 초정 · 왕충민 · 유면지 · 호헌 · 곽옹 · 유우(劉愚) · 위섬지 · 안세통 · 유정식 · 소곡 · 서적(徐積) · 증숙경 · 유영일
460권 「열녀전(列女傳)」
주아 · 학절아 · 진당전 · 여양자 · 동팔나 · 한희맹 · 모석석
461·462권 「방기전(方伎傳)」
조수기 · 왕처눌 · 묘훈 · 마소 · 초지란 · 한현부 · 사서 · 주극명 · 유한 · 왕회은 · 조자화 · 풍문지 · 홍온 · 소징은 · 정소미 · 조자연 · 하란서진 · 시통현 · 견서진 · 초연 · 지언 · 회병 · 허희 · 방안시 · 전을 · 지연 · 곽천신 · 위한진 · 왕노지 · 왕자석 · 임령소 · 황보탄 · 왕극명 · 사의도인 · 손수영
463·464·465권 「외척전(外戚傳)」
두심기 · 하영도 · 왕계훈 · 유지신 · 유문유 · 유미 · 곽숭인 · 양경종 · 부유충 · 시종경 · 장요좌 · 왕이영 · 이소량 · 이용화 · 이준욱 · 조일 · 고준유 · 상전범 · 장돈례 · 임택 · 맹충후 · 위연 · 전침 · 형환 · 반영사 · 오익 · 이도(李道) · 정흥예 · 양차산
466·467·468·469권 「환자전(宦者傳)」
두신보 · 왕인예 · 왕계은 · 이신복 · 유승규 · 염승한 · 진한 · 주회정 · 장귀숭 · 장계능 · 위소흠 · 석지옹 · 등수은 · 양수진 · 한수영 · 남계종 · 장유길 · 감소길 · 노수근 · 왕수규 · 이헌 · 장무칙 · 송용신 · 왕중정 · 이순거 · 석득일 · 양종길 · 유유간 · 이상(李祥) · 진연 · 풍세녕 · 이계화 · 고거간 · 정방 · 소이섭 · 뇌윤공 · 염문응 · 임수충 · 동관 · 양사성 · 양전(楊戩) · 소성장 · 남규 · 풍익 · 마거위 · 진원 · 감변 · 왕덕겸 · 관례 · 동송신
470권 「영행전(佞幸傳)」
미덕초 · 후막진리용 · 조찬 · 왕보 · 주면 · 왕계선 · 증적 · 장설 · 왕변 · 강특립
471·472·473·474권 「간신전(姦臣傳)」
채확 · 형서 · 여혜경 · 장돈 · 증포 · 안돈 · 채경 · 조양사 · 장각(張覺) · 곽약사 · 황잠선 · 왕백언 · 진회 · 묵기설 · 한탁주 · 정대전 · 가사도
475·476·477권 「반신전(叛臣傳)」
장방창 · 유예 · 묘부 · 두충 · 오희 · 이전
478권 「남당세가(南唐世家)」 479권 「서촉세가(西蜀世家)」 480권 「오월세가(吳越世家)」
이경(李景) 맹창 전홍숙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유창(劉鋹) 유계원 주행봉 · 고보융 · 유종효 · 진홍진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한통 · 이균 · 이중진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서하 · 고려 · 교지(정조전여조이조진조) · 대리 · 점성 · 진랍 · 포감 · 막려 · 삼불제 · 도파 · 발니 · 주련 · 단미류 · 천축국 · 우전 · 고창 · 회골 · 대식국 · 층단국 · 구차 · 사주 · 불름국 · 유구국 · 정안국 · 발해 · 일본 · 당항 · 토번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계동만 · 매산동만 · 성주만 · 휘주만 · 남단주만 · 무수주만 · 황원주만 · 여동만 · 환주만 · 서남이 · 여주만 · 공부천 · 풍파만 · 보새만 · 미강만 · 동만 · 석문부 · 남광만 · 보패만 · 무주부 · 유주만 · 검주만 · 시주만 · 고주만 · 육수만 · 준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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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후(煦)로 바꿨다. 참고로 대각국사 의천의 휘도 후(煦)였기에 의천이 송나라에 방문할 당시 피휘했다.[2]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철종을 원우황제라 통칭하기도 한다.[3] 사후 흠성황후로 추존되었다.[4] 송사 본기 철종 1권[5] 송사 본기 철종 1권에 따르면 당시 신종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다고 한다.[6] 신종의 동복동생들은 3명이 있었다. 오영왕(吳榮王) 조호(趙顥), 윤왕(潤王) 조안(趙顔), 익단헌왕(益端獻王) 조군(趙頵). 여기에서 신종의 후계자로 언급된 형제는 오영왕 조호, 익단헌왕 조군이었다.[7] 당시 성인성렬황후는 교서에서 "황자의 성품이 씩씩하고 의젓하며, 배우는 것을 좇음이 영리하다. 스스로 황제에게 약을 먹이고, 손수 불경을 쓰며 황제를 기원했다."고 알렸다. -송사 본기 철종 1권-[8] 송사 본기 철종 1권[9] 이러한 조치는 자연스레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철종의 생모인 주 덕비가 과민반응하도록 만들었다. 주 덕비는 아들 철종의 수라에 독을 탔을까봐 먼저 기미했고 철종의 동태 역시 살피는 등 신경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연스레 철종을 훈육하고 손자를 친모 못지 않게 과보호해 온 선인성렬황후, 과거부터 철종의 친모와 사이가 좋지 않던 신종의 정실 흠성헌숙황후 등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10] 물론 개봉부에서 이 조치들을 시행했던 채경처럼 짧은 기간에 실행하라는 명을 따른 관리들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반발이 더 심했다.[11] 신종 생전 희녕변법 추진기간 동안 논쟁을 펼친 왕안석과 사마광이 죽은 뒤, 철종 친정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신법과 구법의 당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송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2] 할머니와 대신들의 이런 방식과 조정 분위기는 당연히 사춘기에 접어든 철종을 설득시키기 힘들었다고 한다. 즉위 후 할머니와 스승들에게 ‘사대부를 존중하되 함께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 온 젊은 황제는 자연스레 할머니에 대한 반항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13] 娘娘. 귀부인을 높여 부르거나 황후 또는 귀비를 뜻하는 말로 여기에서는 선인성렬황후를 높여 부르는 말[14] 물론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신하 입장에서도 수렴청정 정지를 주장하는 말은 먼저 꺼내기에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명종 때 문정왕후가 명종이 20살까지 수렴청정을 했음에도 신하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먼저 수렴청정 중지를 밝히자 그제서야 찬성의 뜻을 보였다.[15] 이유는 이들이 그동안 선인성렬황후에게 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실과 왜곡해서 과장되게 보고하고 태황태후와 황제 사이를 벌어지게끔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한다.[16] 그나마 왕안석과 사마광은 사적으로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이기라도 했다. 서로 보낸 편지에서는 대체적으로 서로를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지만 방향이 다른 사람' 취급을 한다.[17] 신법당 사람들이 선인성렬태후 고씨 생전의 원우 연간 섭정기 때 구법파들을 부르는 말[18] 선인성렬태후 섭정 기간이자 구법파의 집권시기.[19] 당초 신종의 지시가 있었으니,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쓰라고 명한 책을 훼멸하기란 곤란한 일이었을 것이다.[20] 같은 신법당파 내부에서도 탄핵이 벌어졌다. 따라서 ‘황제폐하께서 엄연히 계시는데 재상 장돈을 무서워하는게 문제다’라는 주장이 증포를 통해 나오면서 일련의 사건들의 포문을 연 장돈마저 공격당했다.[21] 자신의 조부인 영종은 송인종의 조카로서 부필, 문언박, 한기라는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양자가 되어 즉위하였는데 기존 승계 원칙상 황제가 되기 힘들었으나 앞선 대신들이 영종의 즉위를 적극 주장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에 대해 영종은 매우 고마워 하였고 자신의 후계자인 송신종과 송철종도 이 고마움을 늘 간직했다. 이러한 황손들의 고마움이 나타난 사건이 하나 있는데 손자인 송철종이 친정을 시작하고 송휘종 초기까지 정권을 잡은 신법파 출신 재상 채경은 앞서 영종을 추대한 부필, 문언박, 한기를 원우당적인(元祐黨籍人)이라 하여 선인성렬황후 고씨가 수렴청정 시절 정권을 잡은 사마광, 소식등 구법파와 하나로 몰아 척결을 진행하였다. 이로 인해 사마광, 소식을 비롯한 구법파 출신들에 명예를 박탈시켰는데(추후 송휘종 중기 시절 신법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 명예회복 되었다.) 이 때 철종의 후계자 휘종은 직접 채경에게 자신이 속한 대를 황제로 올려준 부필, 문언박, 한기를 원우당적인에서 빼고 명예를 지켜주라 명령하여 이들은 신법파 정권에서도 명예를 잃지않았다.[22] 구양비는 이후 철종 원부(元符) 말에 다시 조정에 복귀해 이부(吏部), 우사(右司)의 낭중(郎中)에 임명되었다.[23] 철종은 아들이 죽자 헌민태자(獻愍太子)라는 시호를 내렸다.[24] 철종과 마찬가지로 그의 할아버지인 영종 역시 호흡기쪽 문제로 인종연간부터 심화된 국내문제 개혁을 추진하려고 준비하던 중에 일찍 사망했다.[25] 여기에는 신종의 정실인 흠성헌숙황후와 철종의 모친 덕비 주씨의 사이가 아주 나빴다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따라서 이런 요인들 때문에 예법과 철종의 유지는 무시되어 간왕 조사가 즉위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법대로 간왕 조사가 즉위하면 덕비 주씨의 아들 2명이 황제가 되고, 흠성헌숙황후 입장에서는 두 번이나 덕비 주씨의 아들이 즉위하면 마치 덕비 주씨가 정비로 여겨진다고 생각한 것이다.[26] 신왕 조필의 눈병(안질)은 상당히 심해서 앞에 있는 사람이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즉 거의 맹인과 다름없을 정도로 심각했던 신왕의 이런 결점은 과거 지능이 모자란 지적장애인이나 사이코패스인 황제들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물론 진나라혜제안제, 유송전폐제후폐제 같은 예외는 있었다.[27] 고모부인 왕선을 어릴 때부터 흠모해왔으며 예술, 시짓기, 회화 그리기, 축첩, 유흥에 능한 왕선과 함께 10대 초반에 어울리며 이미 유흥과 관련해서는 유명했다.[28] 선인성렬황후가 죽자 선인성렬황후를 따르던 관료와 측근들은 흠성헌숙황후 주변으로 몰렸다고 한다. 따라서 철종이 갑자기 요절하면서 벌어진 후계 논의는 구법파와 신법파 간에 벌어진 당쟁이기도 했다.[29] 농담이 아니고 장돈의 우려대로 정말 휘종은 정치하면 안되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황후의 주장은 개소리이다. 인자함과 효행은 그렇다고 쳐도 잘생기고 말끔하고 그림 잘 그리고 시 잘 쓰는 인물이 좋은 지도자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나마 장수는 이해라도 되는 것이 당시 송나라 황제들 중 5대 영종(35세), 6대 신종(37세), 7대 철종(23세)가 줄줄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본격적으로 뭐 좀 해보려다가 죽은 수준이며, 심지어 재위기간도 이 세 황제를 다 더해도 36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보면 당시 오래 살 황제는 많은 이들이 바랄 만한 요소였다. 실제로도 휘종은 18세에 즉위하여 25년간 재위했으니 이 때에 죽었어도 43세인데 그 이후에도 10년은 더 살았다. 아들도 많이 낳은건 덤. 이것만은 확실히 좋은 황제 요소지만 문제는 진짜 황제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 개판이었다. 이 때문에 괜히 흠성헌숙황후가 욕을 먹는 게 아니다.[30] 증포는 장돈을 추천하면서 내심 장돈이 자신을 추천해주길 바랬지만 장돈이 추천해주지 않아 불만을 품고 사이가 나빠졌다.[31] 북송의 관리로 금나라에 항복했으며 제나라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악비에게 연달아 발려 금나라 본국으로 압송되었으며, 유예의 조카가 뒤를 이었지만 남송과 강화 후에 제나라는 폐지되었다.[32] 이 의식은 철종이 허락을 했으나, 의식 이틀 뒤 복경공주가 죽자 맹 황후는 죽은 딸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불당을 만들고 기도를 올렸고 이는 전에 한 의식과 함께 문제가 되었다. 첩여 유씨가 이를 빌미로 철종에게 '황후가 요승을 불러 황제를 저주한다.'고 모함하자 철종이 불같이 화를 내며 직접 친국을 한 뒤, '황후가 법사를 부려 황제를 저주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폐출시켰다.[33] 소술이란 앞사람의 유지나 사업을 계승한다는 뜻인데, 여기서의 계승이란 곧 신종이 추진했던 신법을 다시 추진한다는 뜻이다.[34] 의천은 깊은 공부를 위해 일찍부터 송나라 유학을 가기 원했지만 아버지 문종이 위험한 바닷길로 가야하고 복잡한 국제 정세까지 고려해볼 때 송나라 유학은 안 된다고 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따라서 문종과 큰형 순종 생전에는 송나라 유학을 가지 못했던 의천은 비밀리에 두 사람만 데리고 송나라 상선을 타고 가게 되었다. 아버지와 형과 마찬가지로 동생의 유학을 반대했던 선종은 뒤늦게 동생 의천을 찾으러 군사까지 보내 쫓았지만 이미 의천이 멀리 가버린 탓에 데리고 오지 못했다고 한다.[35] 이 당시 의천의 나이는 30살이었고 철종의 나이는 10살이었다.[36] 의천의 입국을 반대해왔던 소식(소동파)이 고려 국왕의 친동생인 의천대사의 개인 가이드 역할을 했다고 한다.[37] 귀국 직후 의천은 형이자 국왕인 선종에게 걸죄표를 올려 국왕의 명을 어기고 송으로 유학간 것을 사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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