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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송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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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잠선에게 빌붙다2.2. 묘유병변 시기2.3. 사천과 섬서의 득실2.4. 처음으로 폄척당하다2.5. 강좌 안정2.6. 좌천의 연속2.7. 융흥북벌 시기2.8. 은퇴와 한가로운 죽음2.9. 사후
3. 후대의 기념4. 평가
4.1. 긍정적인 평가4.2. 부정적인 평가

1. 개요

張浚, 1097~1164
남송의 명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덕원(德遠)이고, 세칭은 자암선생(紫岩先生)이며, 한주 면주현[1] 출신이다. 당 현종 시기 명재상 장구령의 동생 장구고의 후손이다.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이후 충헌(忠献)으로 바뀐다. 저서로는 《자암역전》 등이 있고, 후세 사람들이《장위공집》을 짓는다.

2. 생애

2.1. 잠선에게 빌붙다

송 철종 소성 4년(1097) 출생으로, 본관은 한주 면죽현 인현향 무도리이다. 그의 아버지 장함은 연거진사, 현량 두 과를 거느리고 선덕랑을 거쳐 검남서천절도판관청공사를 지냈다. 그의 나이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어머니 계씨의 보살핌 아래 어려서부터 행실이 단정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 훗날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후에 태학에 들어가 송 휘종 정화 8년(1118) 진사(進士)에 올랐고, 조산남부사조로참군을 지냈으며 정강 초년에는 태상사 주부에 임명된다. 1127년 초 정강의 변이 일어나자 장방창금나라의 도움을 받아 위초를 세웠으나, 장준은 위초 정권 하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을 거절하고 태학으로 도망친다. 이후 강왕 조구[2]가 남경 응천부[3]에서 황위를 계승하여 남송 정권을 수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응천부로 달려가 추밀원 편수관에 제수되고 우부랑중으로 바뀐다. 7월, 신임 우상 황잠선의 인정을 받아 전중시어사로 승진한다. 8월, 장준은 황잠선에게 부화뇌동하여 좌상 이강이 조정에 독단적이라고 공격하였고 항금을 주장하던 이강은 파상당한 뒤에도 계속 장준의 공격을 받는다.

2.2. 묘유병변 시기

1128년 장준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원은 천하의 근본이니 동경, 관섬, 양 등을 수리하여 순행을 기다리고 싶사옵니다.
그래서 화의를 주장하는 황잠선과 의견이 맞지 않아 따돌림을 받는다. 하지만 이미 집영전 수찬, 흥원지부(興元支府)에 임명되고, 송 고종에 의해 예부시랑으로 유임된다. 고종이 그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다 말할 것이다. 짐이 할 일이 있다. 마치 하늘을 날고 싶어도 날개가 없으니, 그대는 남아서 짐을 돕도록 하라.
같은 해 10월, 장준은 어영사사참찬의 군사를 겸임하면서 항금 군사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장준은 금나라의 군대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을 예상했지만 송 조정은 느긋하고 무방비하여 재상 황잠선과 왕백언에게 권하였다.
급급히 준비하여 군사를 다스려야 하니 늘 적과 같사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장준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비웃는다. 1129년 2월, 금나라 수백 기병이 양주를 급습하여 고종창이 도망치자 장준과 여이호는 고종을 따라 강을 건넌다. 이후 중서시랑 주승비는 오문절제평강부[4]와 수주[5] 군마에 남았고, 장준은 동절제 군마를 맡아 평강을 지키며 금에 저항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승비는 항저우로 소환되어 장준을 평강에 머물게 하한다. 당시 패잔병 수만이 가는 곳마다 약탈을 그치지 않아 장준이 그것을 무마시킨다. 후군은 한세충의 부하를 통제하여 간신을 물에 빠뜨려 죽게 하고, 장준은 한세충의 관찰사직을 빼앗는다. 뒤이어 천관시어사에 임명된다. 그해 3월, 금군 장수 묘부와 유정언이 임안[6]에서 군사를 일으켜 고종이 퇴위하고 세 살 된 황태자 조부가 황제로 서임되어 맹태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장준은 평강에서 여이호에게 연락하고 장준, 한세충, 유광세 등으로 된 근왕군을 조직한다. 4월 병란이 평정되고 고종이 복위한 후 장준은 지추밀원사로 승진한다.

2.3. 사천과 섬서의 득실

장준은 중흥은 관과 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금나라 사람이 먼저 섬으로 들어가 촉을 취한다면 남동쪽을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천 지역과 섬서 지역의 운영을 제안한다. 이후 송 고종은 건염 3년(1129년) 5월에 그를 천합선무처치사로 임명하여 천합지역에서 군정재산의 모든 지배권을 누리게 한다.

같은 해 7월에 부임하여 10월 하순에 흥원부에 도착하여 이곳에 군사를 설치한 후 서북 각지의 군사장관을 조정한다. 11월, 진주에 도착하여 참의군사 유자우의 소개로 장준은 오개, 오린 형제를 접견하고 오개를 통제로 승격시킨다. 섬서에서 금나라에 대항하는 데 공이 있지만 제멋대로인 곡단에 맞서 장준은 12월에 사도통제와 위무대장군을 처치하고 성대한 등단식을 거행한다. 장준은 곡단의 항금 성위를 이용하여 서북의 항금 깃발을 세우려 하였으나 건염 4년(1130년) 정월에 장준이 곡단에게 군사를 이끌고 섬주 포위에 있는 이언선을 구원하라고 명령했을 때 곡단은 출병을 거부하여 마침내 섬주가 금군에 함락된다. 같은 해 2월, 장준은 금군이 이미 강남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알고 즉시 처리사무를 유자우에게 맡기고 자신은 수만 명을 태우고 진주에서 동진하여 구원한다. 3월에 방주에 도착했을 때, 금나라 측 사령관 완안종필이 임안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장준은 군대를 이끌고 서북으로 돌아간다.

그해 가을 초, 장준은 금나라의 좌감군 완안창이 회동에 있고, 이전에 강남을 도강했던 주장 완안종필도 강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장준은 금이 늦가을에 다시 강을 건너려 할 것으로 추측하고 출병하여 금나라의 군사들을 공격하여 남하할 것을 고려한다. 그해 정월, 금나라의 군사들이 환경을 공격하여 곡단이 팽원점[7]에서 방어하도록 오개 등을 보냈고, 곡단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의록[8]에 주둔한다. 오개는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으나 곧 금군의 사기가 회복되었고, 오개는 잠시 후 물러났고, 곡단은 즉시 경주[9]에 주둔했고, 금군은 승승장구하여 빈주를 불태우고 철수한다. 오개는 곡단을 원망하며 증원하지 않았고, 곡단은 오개가 이끄는 전군이 이미 패하여 부득이하게 후퇴하여 적의 충돌을 막기 위해 위험한 곳을 차지했다고 변명했고, 그래서 오윤은 자신의 절제를 어겼다고 탄핵한다.[10]

곡단은 장준이 진격하여 돈을 나누자고 하자 이에 반대한다.
평야와 광야는 적이 왕래하기 편한데 아군은 수전을 연습하지 않았사옵니다.금군은 기세가 맹렬하여 그들과 경쟁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군대를 동원하여 변방을 방어하고 10년을 기다려야만 반격할 수 있습니다.
장준이 더 이상 곡단을 신뢰하지 않자 곡단은 팽원 전투를 핑계로 군권을 빼앗는다.

장준이 사천, 섬서 지역을 경영한 이후 섬서 군대와 백성들은 크게 고무되어 금나라 완안누실이 섬서 성읍으로 내려가면 반드시 배신한다며 병력 증원을 요청해야 했다. 이에 완안종한 등도 송 측 섬서 5로의 병력이 강력하니 함께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염 4년(1130년) 7월, 금 조정은 좌부원수 완안종보를 섬서로 보내 사령관을 맡기고, 완안종필로 하여금 정병 2만을 이끌고 낙양으로 갈 것을 명하여 8월에 섬서로 가서 장준과 싸울 준비를 한다. 이때 고종은 금군이 다시 강남을 건넜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장준에게 동주[11], 부[12], 연[13]에서 출병하여 허를 찌르라고 명한다. 8월, 장준은 완안종보에게 송의 죄를 물었다. 동시에 권영흥군로경략사 오개로 하여금 영흥군(지금의 섬서성 서안)을 공격하게 했고, 환경경략사 조철도 군을 수복한다. 이에 장준은 희하경략사 유석, 진봉경략사 손와, 경원경략사 유우, 영흥군경략사 오개, 환경경략사 조철을 소집하여 각각 부대를 이끌고 동진한다.

완안종보도 곧 경서의 완안종필의 부대에서 2만 명의 병력을 관중에 넣는다. 9월 하순, 장준은 5개 노선의 송군을 모아 기병 6만, 보군 12만을 모아 40만이라고 불렀고, 유석임도제로 부평[14]에 진격했고, 완안종보는 완안종필과 완안누실을 좌우로 하여 송군과 결전을 벌였다. 전투 중 유호는 장병을 인솔하여 적진을 공격하였고, 진시에서 미전까지 많은 사람을 죽였고, 금군의 좌익 사령관 완안종필은 한때 겹겹의 포위에 빠졌고, 금나라의 장수 한상(韓常)은 유시에 의해 눈을 맞았지만 완안종필을 구출한다. 완안누실은 우익군을 이끌고 육합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조철은 무단으로 소부를 떠나 먼저 도망쳐 송군이 공을 잃고 잇따라 패퇴하고, 금군은 승리했지만 사상자도 많았다.

부평전은 송금 양군이 대병단으로 결전을 치렀는데, 송군은 비록 패전했지만 고종이 장준에게 금군의 주력을 강회 전장에서 빼내라고 요구한 목적을 달성한다. 그래서 장준이 조철을 참수하고 유석을 폄하하고 죄를 상소할 때 고종은 장준을 잃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그만두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전에 강남을 건너온 완안종필과 소부의 정병은 그 후 몇 년 동안 사천, 섬서 전장에 머물렀고, 이에 강회 지역에서 송군의 압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부평에서 패한 후, 송은 방서사단의 주력을 모두 잃었고, 섬서 6로는 점차 쇠락하여 장준은 흥주[15]로 퇴각하여 유자우에게 진주로 가라고 명령하고, 송의 패잔병을 10만 명이나 모았다. 이후 금군의 공격으로 장준은 다시 낭주[16]로 후퇴한다. 장준은 왕서를 흥원지부로 임명하여 궤멸된 군대와 의군 2만 명을 모았다. 오개는 패잔병을 모아 봉상의 중원, 대산관을 제압하고 소흥 원년(1131년)의 중원 전투에서 완안종필 등의 부대를 대파한다.

2.4. 처음으로 폄척당하다

장준은 사천, 섬서에서 3년 동안 군사들을 훈련시켰고, 유자우를 상빈으로 삼고, 조개를 도환운사로 임명하고, 오개를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유자우는 이재에 능하고 오개는 매 싸움마다 반드시 이겼다. 서북 지방의 유민들은 일부 대중들에게 복종하였는데, 촉의 안전과 강회 지역의 안녕에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장준도 여러 장수들을 몰아붙이고 곡단을 억울하게 죽이는 등 일련의 처치를 잘못한다.

부평군이 패한 후에도 장준은 서부전장에서 대거 출사할 것을 주장했고, 간도부터 희하까지 취하여 군사를 점거하여 재거를 꾀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여 '삼진'의 고향 수복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촉구를 굳건히 고수하고 금군의 중점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남송 조정과는 전략적으로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

1132년에는 검교소보, 정국군 절도사로 승진했다. 9월 고종은 왕상을 천합선무처치부사로 임명했고, 12월에는 노법원을 선무처치부사로 임명했다. 장준은 파선무처사되어 여전히 밀사를 알고 있었다. 파직 명령이 1133년 2월에 선사의 주둔지인 낭주에 도착했을 때, "군부들이 궤멸했다"라고 말했고, 금나라의 군사들이 흥원을 점령하여 한때 이주에 육박하는 등 상황이 매우 위급했다. 장준은 금에 맞서기 위해 파직 조서를 숨기고 계속 사천, 섬서의 전반적인 상황을 주재한다. 5월 하순에야 송군이 촉구를 탈환하고 영토를 잃고 상황이 완화되자 장준은 정식으로 조서를 받들어 조정으로 돌아간다.

한편, 장준은 신망이 낮은 왕유와 노법원을 등용한 것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워했다. 그는 조정에 사천과 섬서의 고위직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고 사천, 섬서를 운영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유자우와 오개를 선무판관으로 임명하는 등 최소 세 차례의 반대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격렬한 반발은 오히려 송 고종과 재상 여이호의 원성을 샀다.

환조 후 1134년 3월, 태간관의 공격으로 지추밀원사에 임명되고 거동소궁, 복주(福州)로 옮겨 거주한다.

2.5. 강좌 안정

장준이 천섬으로 파견된 후, 소흥 4년(1134년) 6월에야 완안종필은 천섬에서 연산부(지금의 베이징)로 돌아간다. 그 해 9월 유예위제 정권이 금군과 함께 회남을 침범하자 11월에 다시 지추밀원사로 기용된다.

1135년에는 좌상 조정의 지원 하에 우상 겸 추밀원사, 도독제로군마로 승진한다. 전면적인 항금정책을 짊어졌으나, 주로 강회 일대 방어를 맡았다. 그 이후 호상으로 직접 간 뒤 형호남북, 양양부로제치사 악비가 양요의 난을 진압했다.

양요의 난 진압 후 장준은 안내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옮길 수 있었다. 형양을 시찰하였다가 다시 조주사로 소환되자 즉시 제로군마를 이끌어 위제를 벌하고 한세충에게 자승, 초이도회양, 유광세가 합비에 주둔하고 장준이 우이에 진주하여 양기중을 장준 부대의 후익으로 삼고 악비를 양양에 진주시켜 중원 북벌을 준비하게 하여 금에 대한 공격 태세를 취하니 군심이 진작된다. 그해 2월, 한세충은 먼저 초주에서 회양군에 포위되었고, 금과 제의 연합군이 지원하여 송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장준은 5월 우이에 들어간 뒤 6월에는 강을 건너 회남에 이르렀다. 유광세는 7월에 수춘부를 탈환했고, 악비는 8월에 채주(지금의 허난성 루난), 노씨 등지를 공략하여 낙양에 접근하여 조야가 크게 고무된다. 송 고종도 장준의 요청으로 9월 초에 건강으로 출발하여 투지를 북돋우자 장준은 다시 진강독사로 서둘러 갔다.

소흥 6년(1136년) 10월, 위제 30만 대군이 세 갈래로 회서로 진격하자, 조정은 한편으로는 임안에 귀주할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종에게 장준에게 회서를 포기하고 장강을 지키라고 조서를 쓰게 한다. 장준은 위제의 군대가 지원군으로 금군이 없다는 것을 알고 힘주어 군심이 동요하지 않도록 쉽게 회군할 수 없게 되자 고종도 마침내 마음을 돌리게 된다. 한편, 유광세가 황급히 남으로 도망치자 장준은 말을 타고 채석으로 달려가 한 사람에게 도강자참을 명함으로써 유광세의 남탈을 제지했다. 며칠 후 양기중 등이 우당 전투에서 위제군을 대파하고 악가군도 달려와 지원하자 위제군은 회북으로 후퇴했다.

2.6. 좌천의 연속

소흥 7년(1137년) 3월, 유광세가 교만하고 나태하여 적을 두려워하여 파직당하자 고종은 이미 유광세의 소부를 악비로 이속시켜 병력을 확충하여 중원을 회복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먼저 추밀사 진회의 반대에 부딪혔고, 장준도 유광세의 소부를 악비군에 병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자 자신이 겸임하던 도독부의 직접 관할로 거두어 왕덕을 좌호군 도통제로, 여경을 부도통제로 임명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와 도독부 참모군사로써 여지를 절제하게 하였으나 여경은 왕덕에 불복하여 여러 차례 설명하였으나 무시당한다. 8월, 여경은 여지 등을 죽이고 4만 명을 협박하여 위제에 투항한다. 9월, 장준은 처분이 부당하다고 파상하고 관직을 올린다.

소흥 8년(1138년) 2월, 영주(永州)로 좌천되어 거처하게 되었다. 3월에 진회는 우상 겸 추밀사로 부임하여 금과의 의화를 주재한다.

소흥 9년(1139년) 정월, 고종이 금과 화의로 대사하자 장준은 거궁관을 회복하였다. 2월, 지복주에서 복주로안무대사로 임명된다.

1141년 11월, 남송과 금이 소흥화의를 맺었고, 같은 달 장준은 검교태부(校校太傅), 숭신군절도사(崇信軍節度使), 만수관사(萬壽觀使)에 임명된다.

이듬해(1142년)에 국공(國公)에 봉해진다.

소흥 16년(1146년) 7월에는 항금을 준비하라고 상소하자 진회는 크게 노하여 장준을 파직하고 문계관만 특진시켜 연주에 거주하도록 한다.

소흥 20년(1150년), 다시 영주로 이주하여 거주한다.

소흥 25년(1155년) 10월, 진회가 죽자 12월, 장준은 다시 기용되어 관문전대학사직과 화국공 작위를 회복하고 홍주로 출정한다. 얼마 전 장준은 모친이 죽자 관을 받들어 서천으로 귀장하고 강릉에 도착했을 때 고종에게 항금 준비를 청하여 신임 재상 만사설탕사퇴의 원성을 샀고, 송 고종도 장준에게 반감을 품자 소흥 26년(1156년) 10월, 장준은 다시 영주로 좌천되어 거처한다.

2.7. 융흥북벌 시기

소흥 31년(1161년) 정월, 금의 재침으로 인해 송 고종은 저항할 수 밖에 없었고 장준의 거주지 제한을 완화했다. 동년 10월 판담주에 임명된 뒤 판건강부로 임명된다. 12월 하순에 부임했을 때 채석기 전투가 이미 끝났고, 해릉양왕 완안량은 이미 부하들에게 죽자[17] 양회의 금군도 퇴각했다. 그러나 송·금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데 반해 송 고종은 결국 화해했다고 보고 장준을 중용하지 않는다.

1162년 5월 장준은 양회 일대의 사무와 강변 군마를 전담하도록 임명되어 강회 방위를 완전히 책임졌다. 6월, 송 고종이 물러나고 송 효종이 즉위했다.

융흥 원년(1163) 정월에 추밀사로 승진하고 강회동서로군마를 도독하여 위국공에 봉해진다. 이때 송 효종은 북벌을 단행하여 장준에게 먼저 두 성[18]을 도모하고 변방의 재난이 해소된 후 폐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 해 4월에 장준은 이현충추굉연에게 북벌을 명령했고, 이현충은 영벽과 홍현을 연달아 공략했고, 장준이 강을 건너기 전 우이에서 독전하고 이현충이 숙주를 공략했다. 이후 이현충은 회남, 경기, 경동, 하북추토사로 임명되었고 추굉연은 부사로 임명되어 중원 회복 준비를 마친다.

얼마 후 부리에서 송군이 금군의 공격을 받아, 추굉연은 가만히 있다가 아들이 먼저 도망쳤고, 이현충은 강제로 퇴역하고 송군은 궤멸한다.

그러자 곧 주화 세력이 대두하고 탕사퇴는 7월에 물러나 우상 겸 추밀사로 임명되었으며, 의화 활동이 진행되었다. 12월, 탕사퇴는 좌상 겸 추밀사로 물러났고, 장준도 우상 겸 추밀사로 승진하여 여전히 강회동서로로 남게 되었다.

2.8. 은퇴와 한가로운 죽음

1164년 3월, 장준은 조서를 받들어 회상을 관찰하고 양회를 두루 다니며 성루를 쌓고 다스리는 등 항금 조치를 적극적으로 배치한다. 4월, 조정으로 소환되어 강회도독부에서 파면되었고, 태상황 고종의 개입 하에서 탕사퇴는 화의를 더욱 다그쳤고, 장준은 금에 저항할 가망이 없음을 느끼고 여덟 번이나 치사를 청했다.

같은 달 22일 송 효종은 재상에서 멈추고 소사, 보신군 절도사를 증서하고 판복주로 나갈 것을 청했다. 장준은 여러 차례 치사를 간청하여 예천관사로 개서하였다.

그 후 한거하던 장준은 정신이 멀쩡하여 8월 20일 요주의 수호신 왕십붕을 위해 《불괴실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22일이 되자 장준의 병세가 악화되어 같은 달 28일까지 머물게 되었다. 임종을 앞두고 장준은 여전히 조정에서 사군을 포기했느냐고 물었다.

밤이 깊어 장준이 여간에서 병사하자 송 효종은 그 소식을 듣고 '진도'하여 이틀 동안 조정을 중지하고 그를 태보로 추증하였다.

2.9. 사후

그의 아들 장충은 관을 담주로 호송하였고 장준은 11월 형산현 남위에 묻혔다.

건도 4년(1169년), 장준의 문인 진준경이 조에 들어가 배상하고, 이듬해(1170년) 2월에 그의 청으로 송 효종이 장준을 태사로 추증하였다.

처음에는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충헌(忠献)'으로 고쳤다.

3. 후대의 기념

4. 평가

당시 사람들과 후대 사람들은 그 개인의 성격과 사공을 둘러싸고 극명하게 다른 평가를 내렸다. 명예로운 자는 "문무를 겸비한 전재", "중흥 이래 한 사람일 뿐"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이를 제갈량의 등장과 함께 논한다. 비평가들은 그가 명분을 내세워 회복하고, 나라를 그르치고, 어질고, 능력을 해치는 것을 꺼리고, 뜻이 크고, 재주가 적으며, 공로가 없다고 지적한다. 남송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이다.

4.1. 긍정적인 평가


4.2. 부정적인 평가

천하의 충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충성스럽다고 할 수 없고 천하의 현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不知天下之忠臣者 不可謂之忠
(불지천하지충신자 불가위지충)
不知天下之賢臣者 不可謂之賢
(불지천하지현신자 불가위지현)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망우집(忘憂集)』 권2 「장준론(張浚論)」

조선 의병장 곽재우는 송나라가 망한 원인이 모두 장준이 사람 보는 안목이 없는 것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위급한 시기에 여진족들이 두려워하던 이강을 탄핵하여 파직시키고, 악비가 원통하게 죽어도 구해내지 않았으니, 송나라를 망치고 고종을 그릇되게 한 것은 바로 진회가 아니라 장준이며, 악비를 죽인 것도 진회가 아니라 바로 장준이므로, 그 죄가 진회보다 적지 않다고 하였다.


[1] 오늘날 사천성 면주시[2] 송 고종[3] 지금의 허난성 상구[4] 지금의 강소성 소주[5] 지금의 절강성 가흥[6] 지금의 절강성 항주시[7] 섬서성 빈현 남부[8] 지금의 산시성 장무[9] 오늘날 간쑤성[10] 이 전투는 건염 3대전의 하나로 불리며, 사서에서는 백원의 패배로 그 기가 이미 꺾였다고 기록한다.[11] 지금의 섬서성 다리[12] 지금의 섬서성 부현[13] 지금의 섬서성 연안[14] 지금의 산시성 부평북[15] 현재의 섬서성 약양[16] 지금의 사천성 창계 동남쪽[17] 채석기에서 남송 명재상 우윤문에게 가로막혔음에도 완안량은 장강을 넘을 것을 독촉했다. 이에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야율원의가 해릉양왕을 시해했다.[18] 홍현, 영벽[19] 주로 장식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