汪德臣, 1222~1259
1. 소개
사명은 전고, 자는 순보(順輔), 공창부(孔昌府) 염천현(鹽川縣, 지금의 감숙성 딩시 시 장 현)사람, 몽골족 왕고부(汪古部) 출신이자 명장 왕세현의 차남으로, 조어성 전투에서 남송군의 반격을 받아 죽게 된다.2. 생애
2.1. 두각을 나타내다
그는 장군 출신으로 전란을 겪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정벌에 나섰고, 어릴 때부터 기사를 익혀 남보다 뛰어난 점이 많았다고 한다.왕세현이 몽골에 투항했을 때 그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몽고 황자는 그 부친과 그 아들을 아는데, 그의 나이 열네 살 때, '전형'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황태자를 모시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다시 활단을 섬겨 몽골 귀족들의 교육·영향을 받았으며, 무예 또한 더욱 능숙하여 자주 찬송을 받았다.
17세 때 공창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따라 사천으로 출정해 전쟁터에서 용맹과 재주를 과시했다. 1243년 왕세현이 병사하자 차남이지만 형제 7명 가운데 문무재략이 뛰어나 그 부친과 그 뜻을 받들어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고 호적(虎籍)을 달아 총수부(總首府) 소관 각 군을 통솔하였는데,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해 가을, 몽골 병사들은 동선주전장의 진격에 맞춰 장강(長江) 중상류에서 남송의 병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천에서 공세를 재개했다. 왕덕신은 병사를 거느리고 노주에 직항했다가 저항에 막혀 다시 철수하였다.
1245년, 몽골이 사천 병력을 증강하여 다시 대거 진격하자, 다시 사천으로 들어가 허를 찔러 충주(忠州, 지금의 충칭 충현), 푸저우(福州, 지금의 충칭)로 직행하였다. 이듬해 봄, 오고타이가 병으로 사망하고 장남 귀유(貴由)가 칸(漢)이 되어 권력 핵심에 이변이 생기자 몽군은 송나라를 공격하고 일부 지방에서 철수했다. 이 틈을 타 남송의 여개는 병력을 모아 왕덕신의 군대와 운산에서 결전하였다. 송 병사의 사기가 높아 전투가 매우 격렬하여, 셋째 동생 왕직신이 죽을 정도였다.
1248년에는 또 명령에 따라 서강을 토벌하여 천북의 황량한 풀밭을 넘어 송판[1]까지 진두지휘하여 강족들을 물리치고 돌아갔다. 몇 년 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공격할 때는 늘 앞장섰고, 후퇴할 때는 직접 끊은 뒤 용감하게 앞장서 몽골군에서 유명한 청년 장수가 되었다. 1251년, 여개는 기회를 틈타 사천 방무를 재정비하고, 몽고병에게 십수 년 동안 점령당한 한중으로 진격하였는데, 왕덕신과 인근 각 군대는 밤낮으로 원조를 했고, 송군은 그 이름을 듣고 물러났다.
2.2. 진둔익창
몽케 즉위 후 왕덕신이 조정에 들어와 새 부인을 하사하고 사직을 유지하였으며, 지방에 진부한 병의 모든 일이 받아들여졌다. 남송이 수비를 강화하고 북진에 나서자 몽골 측도 지속적인 공방 전략을 구사하여 변방에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하여 공송의 전진기지로 삼았다.그는 1252년 전쟁으로 파괴된 면주(지금의 산시 요양)의 성벽과 가옥을 복구하고 관속을 배치해 곧 완성했다.그해 겨울에는 도원수(都元首) 태답아(太應兒)와 함께 출병하여 성도(成都) 등을 공략하고, 가정부(嘉定府, 지금의 사천낙산)를 포위했다가 여개가 보낸 원군에 밀리고, 회군 도중 좌면(左綿)·운정(雲頂) 등을 거쳐 갔다. 융경, 검문 등에서 송군과 역전을 펼쳤다.
1253년 몽케는 왕덕신에게 이주성(利州城, 익창(益昌, 지금의 쓰촨 광위안)을 축조하도록 명했고, 쓰촨 북부 몽골 점령지 곳곳의 둔수(敦守)는 그 절제를 따랐으며, 도원수 태답아(太應兒) 등 합동으로 성을 쌓도록 할 정도로 중시했다.때에 이르러 필열은 대리로 진군하고, 도출은 타오에 이르러 덕거입은 이주의 성건설을 보고하고, 촉을 공격한 것으로 여겼다.대계(大計) 덕신(德臣)은 부역 면제와 감세, 양곡·둔전(敦田)을 이주(利州) 저장 충실화, 지구계(地區計)로 삼아 행호부(行戶部, 재산을 관리하는 기관)를 공창(孔昌)에 두어 조사(曹司)를 면주(面州)에 두게 하고, 지폐·발염(發鹽)을 만들어 통상인(通商人商人), 실군(實軍)저장, 임조원수 조아고판(趙 元) 등 왕덕신 에게 성을 쌓게 하였다. 형인 왕충신의 명으로 총수의 부사를 거느리고 자신은 이주건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에 택주 동보봉산이 성벽을 쌓고 동생인 왕양신을 공창군수로 천거하고, 둔리주 가릉강남을 외위(外衛)로 삼아 백수(白水)에 주둔시켰다. 이주는 본래 송 변방 중진이었고, 사천제치사(四川制治司)가 한때 이곳에 놓였던 요충지로, 몽골이 성을 쌓자 송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수시로 출병하여 습격하는 방법으로 방해하였다. 성을 쌓을 때는 모든 것을 재건해야 하고 후원이 적어 매우 고달팠다.
2.3. 고죽 공략
1254년 봄, 촉중의 큰 가뭄으로 인해 가릉강의 수심이 떨어지고 수송이 어려워 군량이 부족하자 일부 몽골 장수들은 성을 버리고 갈 것을 건의했다. 왕덕신은 자신이 탄 말을 죽이고 군사를 나눠주며 격려했다.나라가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을 규촉대계로 여기고 사생(死生)할 때 어찌 가볍게 버리겠느냐.
그해 4월에는 남송의 제할 최충 등을 사로잡아 고수장 남청을 불러들였다. 투항병들에게 농사를 짓게 해 주는 여비가 고마웠다. 왕 총수의 이름은 인근 주군에 전해졌고, 각 산채는 잇따라 투항했다. 5월, 남송의 신임 사천선무제치사(四川善制治使) 여회(餘晦)가 통치하는 감윤(甘潤)이 수만 명을 자금산(紫金山)에 거느리고 성을 쌓자 왕더신은 정병(精兵)을 뽑아 야진(夜進)하여 자금산(紫金山)을 기습하여 송군을 대파하였다.
1255 이듬해에는 송 장수를 꺾고 고죽으로 압송하던 곡식을 모두 나포했다.
1255년 겨울 10월에 2만 명의 송병과 대량의 군량이 다시 고죽을 증원하였으나, 또 왕덕신에게 격파당하여, 식량선 200여 척을 얻고 개선하여 돌아왔다.
1256년 봄, 다시 궐에 가서 몽케를 만나 금백·명마·금의·옥대를 하사하여 표창하였다. 사천으로 돌아온 후, 더욱 대대적으로 방역을 경영하여 어관부터 면까지 교량을 108개 설치하여 교통 조건이 크게 개선되었다.
쿠빌라이는 1258년 토번을 우회해 대리를 점령하고, 몽케의 본대 남쪽에서 사천을 정벌하는 군사배치를 마쳤다. 송나라를 총공격한다. 원수 뉴린과 송 사천제치사 포택지간은 성도에서 싸웠는데, 뉴린이 불리했다. 뉴린은 왕덕신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왕덕신은 뉴린을 독려했다. 7월 한중에 도착한 몽케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몽고령을 잠시 기록했다가 전국을 통일한 뒤 왕덕신이 논공해 실천했다.10월에 몽케는 이주에 도착한 지 오래지 않아 운행이 더욱 좋아졌다.
하루는 몽케가 왕덕신과 함께 북산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서 군봉(群峰)이 높고 험준한 이 일대의 적과 아군의 형세를 묻자 "짐이 화림에서 남에서 온 자로서 여립리주의 공을 높이 떨쳤는데, 오늘에 와서 보니 몸집이 작고 담이 큰데 적이 보여 성읍이었는지 모르겠다"라며 감탄했다.왕덕신은 "폐하 홍복(洪福)을 탓하며,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답했다. 몽케는 "경위명이를 마다하지 않고 금대 칙륵석을 주어 공적을 기록하도록 하사했다"라고 말했다. 몽케는 가릉강과 백수강이 만나는 지점에 물살이 세서 대군이 건널까 봐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군민들을 모아놓고 며칠 만에 백수강에 부교를 놓았는데, 몽케가 다리 어귀에 와서 "왕은 항상 멋있게 말한다"며 놀라워했다. 백금 30근을 하사하고, 석회를 새기도록 명하여 강가에 공을 세웠다. 고죽의 수장 남청이 왕덕신에게 투항하였다. 후에 남청이 북상하여 조정에 나타나자, 그의 부하가 그 가족을 죽이고 고죽이 송나라로 복귀하여 몽군은 다시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자 몽케는 왕덕신에게 고죽을 빨리 함락해 성도 남하 장애물을 제거하라고 명령했고, 성도를 함락시킨다.
2.4. 조어성에서 죽다
고죽을 함락한 후, 왕덕신이 사람을 보내 남송 용주(龍州, 지금의 강유현 북)의 수장 에게 귀순을 권유하자 항복했고 왕덕신이 이를 상주하였는데, 몽케는 그의 투항을 허락하였다. 11월 초, 몽군은 장녕(지금의 검문관 이북)을 공격하여 산성 거위보를 함락시켰고, 지현 왕중이 항복하여 장수 왕좌는 포로로 잡혀 참수되었다. 이에 대군이 수륙 병진하고 왕덕신이 선봉대장이 되어 낭주(浪州, 지금의 낭중)로 남하하여 크게 득산하였다.몽군은 왕중(王仲)을 보내 수장 양대연(楊大淵)에게 항복을 권하였지만 왕중은 양대연에게 살해당했다. 수일간 격전을 벌이던 중, 몽군은 송군의 수문을 막아 생로를 막았고, 수장은 모두 양대연의 투항을 재촉하였다. 양대연은 아들을 왕덕신의 부로 보내 구걸하게 했다. 그의 초대에 응한 뒤 이튿날 양대연은 성에 있는 관리들의 장병을 이끌고 투항했다. 왕덕신은 그를 "헌종이 주수하고 왕전가가 간언하니 면한다"고 안내했다. 양대연은 천수(天水) 사람으로 원래는 남송 낭주 관할 지역이었다. 투항 후 그를 불러 봉두(鳳州, 지금의 의롱현 남쪽), 광안(廣安, 지금의 광안현) 제군(諸郡)에 투항시켰다. 몇 년 뒤 동천도원수로 승진하면서 왕덕신의 생명의 은을 잊지 않았다.몽케는 제왕과 각 왕을 소집하였다. 낭주에서 군사회의를 열고 벌송군사를 재배치한 후 원수 뉴린의 보병 5만, 전선 200척이 성도에서 출발하여 연극팽(連克彭, 지금의 팽산, 미현 일대), 한(漢, 지금의 광의현), 회(지금의 금당현 남), 제인(지금의 간양현), 융(隆, 지금의 인수현) 각 주에서 충칭의 장커우(江口)를 봉쇄하였다.몽고는 북로군을 이끌고 여전히 왕덕신부를 선봉으로 낭주를 출발하여 산, 청거, 대량 등의 산성들과 상주(지금의 남충시), 수녕(지금의 동남)을 함락하고 연말에 남송의 군사 요충지인 합주[2]에 이르렀다. 이때 합주 수장은 왕견[3], 장각[4]으로, 지용을 겸비하고 병사가 정예하고 양식이 풍부하여 성이 견고하여 폭풍우를 맞으며 침착하게 지휘하고 굳게 지켜 몽골군의 맹렬한 공세에 반년 이상 끌려다녔다. 1259년, 몽케는 대군을 지휘하여 다시 한 번 조어성을 맹공하였으나, 연전 불락으로 큰 손실을 입고 강을 따라 시체가 산더미처럼 되었다. 몽케는 공격이 불가능함을 보고 항장 진국보를 보내 항복을 권하였으나, 진국보는 왕견에 의해 참수되었다. 왕견이 눈물로 병사들의 맹세를 받자 군대의 마음이 크게 고무되었다. 올해는 큰 가뭄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반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질병 유행까지 겸하여 촉중의 6월, 붉은 해가 마치 불처럼 번져 몽골군은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는 성 안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성 밖에 높은 대를 쌓고, 위층에 교루를 세우고, 성을 감시하라고 명했다. 어느 날 몽케가 성 아래까지 내려가서 사람을 보내어 성 안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망을 보던 중 성 안쪽에서 포가 터지자 장대까지 백보 밖으로 밀려나오더니 다시 생선 두 마리가 왔는데, 남송군은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몽골군은 분노가 극에 달한다.
왕덕신은 격노하여 군대를 지휘하여 신속하게 성을 파괴하려 하였다. 하룻밤에 군사를 이끌고 조어성을 급습해 구름다리를 타고 올라가 마군채를 점령하고 수장을 죽였다. 밤늦게까지 격전을 벌이던 중 갑자기 뇌우가 세차게 내려와 사닥다리를 부러뜨리고 후군이 이어지지 않아 타성에서 물러났다. 또 어느 날 혼자 타고 성 아래까지 내려가 싸움을 걸면서 송군에 싸울 것을 요구하나 남송군의 돌 세례에 중상을 입었고, 그 해 진운산의 절에서 서른일곱의 나이로 죽었다.
왕덕신은 죽기 전 몽케 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천자로서 귀하신 데다 혹한의 더위를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저는 원래 군인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몽케도 죽고 몽골군은 퇴각한다.[1] 사천 성 아바티베트족자치주 쑹판 현[2] 오늘날 충칭시 허촨현으로, 가릉강에 위치하며 탕강과 푸강 삼강이 합류한다. 1242년 명장 여개는 병부시랑(兵部侍郞)·사천선무제치사(四川善務制治使)를 맡아 사천 군정을 전담하며 방어체계를 대폭 강화했다. 그는 염박·염진 형제의 의견을 받아들여 샂던(四川)성 방위를 합주(合州)에 중점을 두고 "산이 가장 높고 굽이굽이 용이 서린 듯 이어져 있어 용이 많다"고 성을 쌓았다.산은 주가 동북부를 다스리며 나루터는 십리부터 그 아래에 있다. 그 산은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산봉우리가 아슬아슬하여, 가관이다. 그 동남북 삼면이 강에 인접해 있는데, 모두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로 갑자기 끊어졌다.성을 쌓은 뒤 산을 뚫어 길을 틀어야 오르는데 남서산이 조금 낮습니다."명대의 합주 진사인 풍형의 시구 '삼강송수천참, 천산중배방촉강'은 지세가 험하고 위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준다. 여기에 성을 쌓고, 높은 곳에 위치하여 삼강의 요새를 장악하고, 파촉형호를 방어하였으며, 이에 따라 형세의 험준한 곳을 골라 청거, 대득, 운정, 태생, 대들보 등 10여개의 성을 쌓고, 군사를 사재기하여 식량을 모으고, 서로 호응하여 합주를 중심으로 한 천중방어체계를 갖추었다.[3] 맹공의 수하에서 활약했고, 여개가 사천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였던 때는 여개의 밑에서 활동했다. 여개 사후, 합주의 수비를 더욱 강화한다.[4] 조어성 전투 이후 사천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나, 1279년 중경을 비롯한 사천의 모든 지역이 함락되어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대도로 압송되던 도중 측간에서 활시위로 목을 매 자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