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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0:55:34

왕견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1. 개요

王堅, 1198 ~ 1264
남송의 무장. 맹종정의 수하에서 경력을 쌓았고, 이후 맹공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조세웅과 함께 여개의 휘하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흥원을 수복한 뒤, 조어성 전투에서 장각과 함께 몽골군을 격파한다.

2. 생애

남송(南宋) 영종(寧宗) 시기인 경원(慶元) 4년(1198년)에 태어났다.

가정 12년(1219년) 완안와가가 송을 침략했을 때 맹종정이 장사 2만여 명을 모집하였는데, 이들은 충순군(忠順軍)으로 불렀으며, 왕견은 이 곳에서 둔전을 일구었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소정 원년(1228년), 충순군과 민둔전, 10만 경을 관개하고 그해 15만 섬의 곡식을 거두어 충순군의 각 집에서 말을 기르고, 관가에서 여물을 주고, 충순군 병사는 말을 강하게 하여, 침입하는 몽골 군대에 항상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견은 충순군 내 유능한 장수가 되어 강군통제로 승격되었고 이후 맹공의 수하로 활약한다.

가희 4년(1240년), 몽골군은 순양단강 연안에 주둔해 남침에 필요한 배를 제조할 준비를 했다. 강잠병(强潛兵)은 그 선재(船材)를 불태워 두각을 나타내 남송의 명장(名將)이 되었다. 몽골군이 사천을 공격하자, 왕견은 맹공을 따라 사천에 들어가 적을 막았다.

순우 10년(1250년), 사천 방면 항몽전쟁의 총지휘자인 여개[1]의 밑에서 몽골군의 총수 왕덕신(汪德臣)[2]과 흥원(興元)[3]에서 대치하였다. 이듬해, 명령대로 흥원을 수복한 뒤 군을 이끌고 합주에 주둔하였다.

보우 2년(1254년), 흥원부도통(興元府都統) 겸 지합주(知合州)를 겸하여 조어성(釣魚城)[4] 방무를 주관하였다. 그 뒤 조어성(釣魚城)을 견고히 하여 관할 5현의 군민 수만 명을 모아놓고, 조어성(釣魚城)에 큰 '천지'를 파서 물고기를 기르고, 우물 92개를 파서 성에서 남북의 강변 선착장까지 일자성벽을 쌓고, 성벽과 강물 밖으로 적을 막고, 병사를 훈련시켰다.[5] 조어성은 사천 등 각지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보우 6년(1258년), 몽케와 그의 동생 쿠빌라이 등이 3개 노선으로 출병[6]하여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몽케가 이끄는 군대는 성도를 비롯한 사천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7] 조어성 동5리의 자갈산에 직접 주둔했다. 몽케는 투항한 진국보를 왕견에게 보내 항복하라고 했으나 왕견은 진국보를 죽이고, 부장인 장각[8]과 함께 몽골군과 싸웠다. 왕견이 다섯 달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성을 지키니 몽고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문덕이 이끄는 지원군이 조어성을 지원하려 했으나 사천택의 군대에 가로막혀 중경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왕견 휘하의 송군은 몽골군을 모두 막아내었다. 몽케 휘하의 몽골군은 조어성 동문 고지에 축대를 쌓고 성 안의 정세를 탐지하여 결전을 도모하도록 명하였다. 몽고군이 축대를 쌓는 것을 지켜본 왕견은 몽케가 축대에 오른 것을 보고, 망을 보았을 때 왕견은 명하여 포를 쏘아 중상을 입혔다. 다음날 또 연못의 두 개를 길렀다. 30근 무게의 생선과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성 아래 몽골군에 투척하는 등 몽골군을 조롱하였다. 몽케가 조어성에서 부상당한 뒤 아픔이 분출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금건산 온탕협에서 사망하였다.[9]

몽골군은 북쪽으로 돌아갔고, 합주의 포위가 풀리게 되었다. 9월, 조정에서는 왕견을 견녕원군절도사, 의전좌령군위장군, 흥원에 봉했다. 부(府)가 주둔하고, 어전 제군(御前)이 지합주(知合州, 3품)를 통치하며, 병마를 절제하고, 청수현 개국백(淸水縣開國伯)으로 진봉하였다.

경정 원년(1260년)에 악주 전투의 공로로 재상이 된 가사도가 왕견의 공을 시기하여 임안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그는 가사도의 질시를 받으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경정(景定) 5년(1264)에 죽었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합주의 군민들은 왕견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절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그 공적을 기록하기 위해 비를 세웠는데, '견이어대일주지반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3. 가족관계


[1] 남송의 항몽명장 중 하나로, 사천 지역의 산성방어체계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나 무고를 믿은 조정으로 인해 급사했다.[2] 왕세현의 아들로, 남송의 사천방어 체계에 맞섰고 또 제2차 몽송전쟁 때 몽케 칸의 선봉에서 활약했으나 이후 조어성 전투에서 죽고 만다.[3] 오늘날 섬서 성 한중 시[4] 여개가 염진, 염박형제의 건의를 듣고 성을 쌓게 되었다. 이후 나오듯 왕견에 의해 수비가 강화된다.[5] 조어성 전투 때 조어성의 군민들이 물고기를 던지면서 오래 버틸 수 있다며 몽골군을 조롱했다.[6] 몽케는 사천 방면, 쿠빌라이는 양양 방면, 우량카다이는 대리국 지역을 거쳐 광서를 거치는 등 북쪽으로 진격했다.[7] 왕덕신이 이끄는 군대가 선봉으로 활약하였다.[8] 장각은 조어성 전투 이후 중경 지역에서 몽골군을 모두 막아내나, 1279년 조어성이 함락된 데 이어 중경이 함락되자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지만 주위의 만류로 실패하고, 이후 대도로 압송되던 와중 변소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이를 들은 문천상이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9] 몽케는 죽을 때 조어성을 함락하는 즉시 성 내의 군민을 몰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가한 자리에 오르고 1279년 성을 함락하지만 성내의 군민을 죽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