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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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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구 과정3. 마한어와의 차이4. 시대별 변천5. 삼국 언어의 관계6. 일본어와의 관계7. 백제는 정말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나?8. 일본 기록에 남은 삼국시대 단어 목록9. 참고 자료10. 외부 링크

1. 개요

백제어(百濟語)는 고대 한국어 가운데 한반도 중부와 서남부를 다스렸던 국가 백제에서 쓰였던 언어이다.

2. 연구 과정

백제고구려에서 온 집단이 한강 유역에 와서 한(韓)계 및 예(濊)계 주민과 연합해서 건국한 국가로, 그들이 쓰는 언어는 고구려어와는 당연히 연관이 있고, 마한 지역에서 쓰는 언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직접적으로 백제어의 뜻이 전해지는 단어는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 인명, 지명, 관직, 연호등에 전해지는 백제어를 비교언어학과 한자음 재구를 통해 추출하고 있다. 4세기 이후의 양서(梁書) 같은 사료와 기록에는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는 기록[1]이 있어 고구려어와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 '부여어족'에 속한다는 가설도 있다.
성은 같으며 관위는 간솔, 나이는 스물아홉이다.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일본서기》 中 백합야 전투에서 백제의 부여창(위덕왕)이 고구려 장수와[2] 나눈 말.
또한 역시 양서에서 신라에 대해 설명할 때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중국과)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라고 한다.

향가신라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그 중 무왕(백제)이 지었다고 알려진 서동요는 백제어와 관련이 깊다는 주장이 있었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은 서동요가 백제어로 쓰였다는 설을 내놓았다. 서동요에서는 대격 표지로 乙(을, ur)을 사용하는데 고려 광종(고려) 대의 승려 균여가 지은 보현십원가예종(고려)이 지은 도이장가를 제외한 신라에서 만든 다른 모든 향가가 대격 표지로 肸(힐, gur)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빈은 이를 백제어에서는 gur에서 g가 탈락했던 것으로 해석한다. g는 연구개음으로 탈락하기 용이하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백제 고유명사에서 乙은 여러차례 사용되었던데 반해 肸은 사용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에 근거해 이것이 고대 한국어의 방언인 백제어의 음운론적 특성이며 이런 특성이 서동요에도 반영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논문 링크 다만 이후 보빈 교수 본인은 이 가설을 포기하고 서동요가 고려시대에 채록된 향가라는 남풍현 교수의 이론을 채택하게 된다.[3]

2017년 서울대 언어학과의 연구에 의하면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8세기 목간에서 백제어의 수사가 발견되었는데 백제어의 수사가 한국어족과 동일하게 나와서 백제어는 한국어족에 속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이 연구에 따르면 백제어의 수사에서 숫자 1은 가더읍(伽第邑), 2는 의털읍(矣毛邑), 숫자 3은 새태읍(新台邑), 숫자 5는 도스읍(刀士邑), 숫자 7은 일고읍(日古邑)이라 발음하고 숫자 8은 옅털읍(今毛邑)이라 발음한다.[4] 이 연구는 의 나이를 세는 한국어의 수사 체계인 '하릅, 이듭, 사릅, 나릅, 다습, 여습, 이롭, 여듧, 아습, 열릅'과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승재 교수미륵사지 목간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 작성됐지만, 신라의 수사 표기법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백제 문자로 생각된다며 해당 목간이 신라인이 만든 것일 가능성은 낮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신라어의 수사는 '一邑', '二尸', '三邑' 처럼 한자 수사를 그대로 썼지만, 백제는 이두 형태로 수사를 적었다고 설명했다. 이승재 교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며[5] 부여어족을 일본어족과 연관시킨 이기문 교수의 제자이다. 이승재 교수는 저서 ‘목간에 기록된 고대 한국어’에서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두 언어 표기 체계의 차이를 정리했다. 다만 이 교수의 논리는 이기문 교수의 남방한국어란 개념 설정에 근거하기에 여전히 백제어와 신라어를 같이 묶고 고구려어를 제외시키는 방법론에 함몰되어 있어 아쉬운 점이 많다.

3. 마한어와의 차이

간혹 많은 사람들이 백제마한을 같이 묶어서 '백제어'와 '마한어'를 똑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요즘와서 갑자기 백제가 마한과는 다른 실체라는 근거없는 썰이 퍼지고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백제 관련 초기 기록들이 기록된 그대로 취신하면 안 되며 따라서 백제가 온조왕 혹은 근초고왕 때 '충청도와 전라도 전체를 직접 지배화했다고 볼 수 없었던 게 분명해졌을 뿐'이지, 백제가 그 시초부터 토착 세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든 문헌학적으로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있다.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부 지역 즉, 한강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고구려계 유민들로 인해 한성백제로써 나라를 세웠으나, 당시 한성백제의 지배층이 비록 고구려계가 우위를 점했을지언정 엄연히 이원적이었던 것이 판명되어 있으며, 고구려계와 연합해서 지배층을 구성한 또 다른 축은 적어도 기원전 1세기부터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서해안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토돈분구묘제 집단이었다.

말하자면 이미 한성(위례성)에 있을 때부터 토착 세력과 연합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따라서 지배층이 쓰던 언어와 피지배층이 쓰던 언어가 심각하게 차이날 가능성은 고고학 단계에서 이미 부정된다. 물론 자꾸 백제사를 공주·부여 시대로 고정하여 인식하는 대중의 인식은 문제가 있으나, 그렇다고 백제를 한성백제시대로만 한정하는 것도 문제는 있다. 백제가 한강 이남 한성에서 건국했던 것도, 어디까지나 마한 연합의 목지국 아래 있는 거수국으로 출발했던 것이었고, 백제는 적어도 3세기 후반에 목지국을 타도한 이후 마한의 새로운 수장국으로서 다른 모든 나머지 마한 소속 거수국들을 간접적으로 지배하다가 직접 지배화하기 시작한 것이므로 백제는 그 존속 기간 내내 마한과 별도로 존재한 바가 없었다.

굳이 마한의 정치적 통합을 말한다면, 백제의 마한 수장국 자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던 침미다례를 철저하게 짓밟아 다시는 그런 행동을 못하게 하고 다른 나머지 마한 소국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로, 옛 마한 거수국들의 모든 정치외교적 자립도를 완전 박탈해서 직접 지배화한 시기로 본다면 6세기 중엽 무령왕으로 볼 수 있겠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보면 마한 연합은 임진강 및 한강 북쪽 일대는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이 보이는 적석묘계 집단, 강원도 영서 일대에서 충북 북부 일대는 옥저 내지는 부여와 일정 부분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중도 문화 유형,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는 토돈분구묘계, 목지국을 위시한 경기-충청-전라 내륙은 고조선-낙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토광묘계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은 당연히 모두 목지국의 영향 아래 있었던 마한의 일원이었으나, 마한의 '주류'를 굳이 따진다면 목지국이 속한 토광묘계 집단이다. 한편 한성백제를 구성한 지배집단은 고구려계와 토돈분구묘계에 그 피지배층은 중도 문화 유형이므로, 한성백제가 출발 시점엔 상전으로 모시던 마한 목지국, 즉 마한 주류 집단과는 언어가 다소 달랐을 개연성은 높다.

이것은 온조와 비류 등이 각기 나라를 세운 곳의 지명으로 비정되는 곳에서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부리’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홀’(위례홀, 미추홀)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현재의 경기도 하남시 추정)’이라는 이름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데,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6]’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7]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8]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가야어 지역의 ‘(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임병준의 고구려말 어휘 일람(2000)에 따르면 '홀(忽)' 자는 당시 발음이 'kuru'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현대 한국어의 '골'과 대응된다. 당시 백제, 신라어 또한 忽, 屈, 骨로 표현의 차이만 있지 발음은 비슷하다. '벌' 또는 '비리'와 대응되는 어휘인 고구려의 어휘인 不, 別, 平吏도 당시 발음이 'pa, pere, pul'로 추정되며 당시 백제어와 신라어는 夫里, 火, 伐로 표기하였다. 이 또한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발음과 뜻은 통한다. '벌'은 '벌판'을 나타내는 현대 한국어의 어휘이기도 하다. 지명을 표기하는 방법이 골이냐, 벌판이냐의 차이라고 생각될 뿐이지 초기 백제어신라어, 가야어와 확연히 달랐을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예맥계/한계 언어에서 관찰되는 상이한 어휘들의 차이 역시 무시하기는 어렵다. 물론 지명을 재구한 자료를 기반으로 역사언어학을 접근하는게 위험하다는 것은 보빈도 언급한적 있지만, 한반도 중부-북부/남부에서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어휘들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점은, 이들 언어간 무시하기 힘든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를들어, 한반도 중부-북부의 지명 재구에서 '소나무'를 지칭하는 어휘로 '부사','보술' 등이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반면, 마한 지역에서는 '솔'이 보다 보편적으로 관찰되며 현대 한국어에 계승된 어휘는 단연 후자다.[9] 또한, '산'을 지칭하는 어휘로서 부여계 어휘 '달'과 마한계 어휘 '모이'가 서로 달랐다. 물론 남부지방에서도 '달'이 쓰이는 용례가 일부 존재하기는 하지만 마한 지역에서는 '모이'가 좀 더 일반적으로 보인다. 충남대학교 도수희 교수는 이런 경우 원래 한계 언어 사용 지역에 부여계 언어가 침투하는 현상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흙'을 뜻하는 어휘로서 한반도 중-북부에서는 '시루'가 다수 관찰되는 반면 마한 지역에서는 '흙'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어휘가 널리 쓰였던 것을 볼 때 '흙'은 한계 어휘의 계승이라고 보는게 설득력 있다.

別, 平吏 등의 지명어가 확인되는 경기도 파주시는 원래 백제 영역이었기에 이 단어들이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어라 볼 수 있으나 이 지역은 원래 고조선(위만조선)의 영역으로 속했고 4세기 초까지도 진번군, 대방군 같은 중국 군현에 속해있었고 이 지역의 토착민은 주로 예맥족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지금의 한반도의 한강 이북의 경기도 북부 지역은 전부 예(濊)의 영역"이라 나오며 뒤에 마한이 강성해져 북상했을 때도 예성강 유역은 대방군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때문에 이 단어들은 고구려어가 아닐지라도 고구려어와 동계어인 예맥어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특성을 감안하면, 백제어는 고구려어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으나 마한 주류 집단이 주로 쓰던 언어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4. 시대별 변천

신라의 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위례성)⇒한홀(한성)⇒고마나루(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시)⇒소부리(사비, 현재의 충남 부여군)’와 같이 천도를 두 차례나 하였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두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보면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고구려어의 영향이 다소 강했던 언어였을 개연성이 높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였다. 

이후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남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을 개연성은 현재로선 없다고 봐야 한다. 한성백제의 양대 지배층 중 하나는 경기충청전라 서해안을 주름잡은 토돈분구묘제 세력이기 때문. 고조선 직계인 경기·충청·전라 내륙은 굳이 따지면 경기·충청·전라 동부이므로 남북으로 갈라져 달라졌을 가능성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한성백제의 주지배층인 고구려인들은 적어도 고조선이 전국연에게 크게 패해서 요동을 잃기 전에는 고조선의 일부였던 집단의 직계 후신이기에[10] 한성백제의 언어가 과연 초반부터 마한 주류 세력인 경기·충청·전라 동부 및 서부와 언어가 그렇게 달랐을지는 영 미지수다.

한편 마지막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로 옮긴 도읍지인 공주 시대로부터 그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고구려계 언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백제어는 초반에는 마한 주류 집단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옛 마한 연맹 소국들을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재하는 후기에 이르면 당시 충청·호남 내륙 지역에서 주로 쓰이던 언어들까지 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루었다. 이후엔 결국 단일 언어사회에 다시 가깝게 되었다고 본다.

다만 백제 후기인 성왕 대에 백제의 국호가 '백제'에서 '남부여'로 잠깐 바뀌었으나, 남부여라는 국호 자체는 얼마 가지 못했다. 이는 백제가 그 시초부터 고구려계 귀족들로만 건국한 국가가 아니었던데다 다른 옛 마한계열 귀족들이 백제는 몰라도 남부여란 정체성에는 회의적이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백제어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쓰는 언어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적은 편이다. 풍납토성을 건립할 단계부터 아예 지배층이 이원적이었고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권력을 독점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배층의 언어가 고구려계 언어로만 구성될 수는 없었다.

5. 삼국 언어의 관계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拜曳一脚, 行步皆走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부여별종(夫餘別種)이라고 한다. 그래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고 궤배(跪拜-무릎꿇고 엎드려 절함)할 때 다리 하나를 끌고, 행보(行步)할 때 모두 뛰어다닌다.
<후한서> 동이전 中 고구려조
言語 食飮 居處 衣服有似句驪.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전 中 동옥저조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동예의) 노인이 스스로 말하길 (고)구려와 동종이며, 언어와 법속이 비슷하다.
<후한서> 동이전 中 예조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백제의 지금에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言語服章略與高麗同
백제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도수희 충남대 교수에 의하면, 고구려 제 3대 왕인 대무신왕 이전까지 고구려 왕족의 국성은 '해씨(解氏)'이며, 현대 한국어순우리말인 '해(태양)'의 어원이라고 한다.[11]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해(解)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12] 즉, 백제어와 고구려어는 언어적으로 그 연원이 같다는 것이다.

삼국의 언어가 같은 계통이라는 대표적인 근거로는 각국의 관등 및 인명에서 관찰되는 존칭 접미사의 유사성이 있다. 일례로 고구려의 설지(薛支), 어지지(於只支) 등 인명[13]막리지(莫離支)[14], 힐지(纈支), 실지(失支), 처려근지(處閭近支) 등 관직명에 나타나는 접미사 지(支: *ke)는 백제 인명 곤지(昆支), 가야 인명 집지(戢支)·솔지(率支)와 신라·가야의 관직명 간지(干支)/간기(干岐)/한기(旱岐)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고구려의 선도해(先道解), 백제의 막고해(莫古解)·훈해(訓解)·막이해(莫爾解)·고이해(古爾解), 신라의 남해(南解)·탈해(脫解)·나해(奈解)·흘해(訖解)·온군해(溫君解) 등에 보이는 접미사 해(解: *ke)와도 동일한 어휘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알지(閼智), 세리지(世里智), 모즉지(牟卽智) 등 신라 인명 자료에서 자주 발견되는 접미사 지(知/智: *te)[15]는 원삼국시대 시절 삼한의 지배자 칭호 신지(臣智)[16]까지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으며, 고구려의 옥지(屋智)·을두지(乙豆智),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귀지(貴智), 가야의 좌지(坐知)·겸지(鉗知)·탈지(脫知)·흘건지(訖乾智)·도설지(導設智)·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17]처럼 타국의 인명에도 사용되었다. 신라의 문득지(汶得至)와 가야의 백구지(百久至)·아수지(阿首至)·이문지(爾汶至)·기전지(旣殿至)·죽문지(竹汶至)에 보이는 접미사 지(至: *te) 역시 같은 단어로 여겨진다.

한편 부(夫)라는 접미사도 삼국의 인명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고구려의 명림답부(明臨答夫)·상부(相夫)·구부(丘夫), 백제의 사비복부(四比福夫), 신라의 이사부(異斯夫)·사부(徙夫)·거칠부(居柒夫)·노리부(弩里夫)·심맥부(深麥夫)가 대표적이다. 이 부(夫)는 벌판을 뜻하는 지명 접미사 부리(夫里)·벌(伐)과 같은 단어를 축약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상부는 삽부루(歃夫婁), 이사부는 이질부례(伊叱夫禮), 거칠부는 구지포례(久遲布禮)로 표기되기도 했으며, 미질부(彌秩夫)처럼 지명에 부(夫) 자가 쓰이기도 했다.
十二年春正月戊子朔 天皇御大極殿受朝賀 渤海郡使新羅學語等同亦在列 但奉翳美人更着袍袴
12년(740) 봄 정월 무자년 초하루, 천황이 대극전(大極殿)에서 신년 축하 조회를 받았다. 발해(渤海)의 사신과 신라학어(新羅學語)[18] 등이 행렬에 함께 서 있었다. 다만 깃일산을 받드는 미인은 다시 상의와 바지를 입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740년 1월 1일 기사
동북아역사재단 소속 사학자 고광의는 일본 사서 《속일본기》의 위 대목을 발해가 고구려어를 사용한 증거로 보며, 신라학어를 함께 앉힌 이유는 일본 조정과 발해 사신 사이의 통역을 신라학어에게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어발해어, 신라어는 서로 통한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6. 일본어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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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백제어가 일본어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직까지 확정된 가설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연구결과들은 고대에도 백제어와 일본어는 완전히 달랐으며, 백제어는 한국어와 상당히 유사했다는 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만 한자를 백제를 통해 수용한 일본 입장에서는 백제의 음가나 훈독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또 일본어에 한국어와 비슷한 발음의 단어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는 최소한 이런 식으로 백제어가 일본어에 투영됐을 것이다.

일례를 들자면,
가미(신(神)) : ‘ᄀᆞᆷ’이 ‘곰’·‘고마’로 바뀌었으며, 이는 ‘겜’·‘검’·‘곰’·‘금’ 등으로도 쓰일 수 있다. 또한 왕의 옛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곰나루)
등이 있다.

백제어 수사라고 주장되는 밀(3), 옻(5), 나는(7), 덕(10)[19]은 현재의 일본어에서도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인 미츠(3), 이츠츠(5), 나나(7), 토오(10)와 굉장히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중기 시대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수출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다만 반도 일본어족의 잔재일 가능성도 높다. 알렉산더 보빈의 The Origins of Japanese(Vovin 2017)을 보면 고구려어 7과 다른 어휘들 또한 일본어 7 나나와 유사하며 한국조어에선 이런 발음을 가지지 않고 일본조어엔 있는 것을 그 근거로 들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부여사마(扶餘斯麻), 계백(階伯)[20], 서부은솔 귀실복신(西部恩率 鬼室福信), 별부장 사탁상여(別部將 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 등[21] 고대 백제인들과 마찬가지로 두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주로 쓰고 있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백제어도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백제어 자료가 너무 적어 대조하기 힘든 관계로 아직 확정된 학설은 아니다.

이렇듯 위의 가설만으로는 백제어와 일본어의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없는 게, 수사만 보아도 백제어의 수사(數詞)와 관련하여 미륵사지 목간에는 5를 刀士邑(도사읍; 다섭, 다섯), 7을 日古邑(일고읍; 일곱), 8을 今毛邑(훈독하면 옅털읍; 여덟), 2를 矣毛邑(의털읍; 둘), 3을 新台邑(새태읍; 셋)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일본어보다는 한국어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백제어로 앞, 아래, 남쪽은 아리비(アリヒ) 뒤, 북쪽은 디(知), 위는 우(雨)라고 표기하고 있어 방향어 또한 한국어와 더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물론 백제가 이중언어 사회여서 지배계층의 부여계 백제어와 마한 지역의 삼한계 백제어의 수사와 방향어가 서로 달랐다고도 추정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또한 백제식 성씨와 일본식 성씨의 유사성도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며 현대 일본인들의 성씨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나 보급된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고대와 중세 시대 일본 귀족들의 성씨도 백제계 성씨와 유사하므로 아직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다[22].

하지만 일본서기 비다쓰 덴노조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야마토 왕권은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어(韓語)'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따로 구분했다. 때문에 언어적 유사성이 있었다 해도 서로 상당히 달랐을 거로 보인다. 즉, 고대 일본어는 백제어와 다른 계통이었지만 백제어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백제어와 비슷해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23]

언어학적으로 달라도, 몇몇 단어에서 영향력을 끼쳤을 가능성은 크다. 예를 들면 백제에선 고구려를 '박적(狛賊)'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다. 박적(狛賊)의 박(狛)은 외관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을 뜻하는 맥(貊)과 닮아있다. 짐승이라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 맥족인 고구려가 곰을 숭상하는 것을 빗대어 비하한게 아닌가 싶다. 일본어에서도 고구려=고려는 'Koma'라고 읽는데, 이것은 곰 웅()의 일본어 훈독인 'Kuma'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웅진을 백제 훈독으로 'Komanari'라고 부른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에서 유래한 훈독일 가능성도 크다.

7. 백제는 정말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른다. 한국 고대 기록이 전반적으로 전란 등의 이유로 매우 부실하여 남아있는 자료들로 간접적으로만 추측할 뿐이다. 애초에 '마한어'란 것도 실체가 없는 개념임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또 현존하는 그 어떤 역사서도 백제어가 이중 언어 체계라는 기록 자체가 없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백제는 한성에 막 성립된 단계부터 묘제와 문화가 어느 정도 다른 집단이 평화적으로 연합해 지배층을 이뤄 세운 나라였다. 즉 상층은 고구려어, 하층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계층이라는 이중 언어 구조는 아예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한성백제 지배층의 두 주축은 고구려인들과 토돈분구묘인들(침미다례를 이룬 주축과 같다!)인데, 이렇게 보면 백제 지배 집단이 쓰는 언어는 고조선에서 내려온 예맥인들이 주축인 경기·충청·전라 동부의 내륙인들이 쓰는 언어와는 어느 정도 다소 달랐을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한성백제가 오히려 초반에 통합을 쉽게 했던 쪽은 경기·충청·전라 서부 해안이 아닌 내륙 쪽이었으니, 과연 백제의 이중언어 체계가 그렇게나 확고했는지는 또 다시 의문으로 떠오른다. 침미다례가 오히려 초기 한성백제와는 더욱 거리가 가까운 이들이기 때문.[24]

일단 백제의 마한 지역 통합은 아무래도 북부가 대체로 보다 빠른 경향은 있으니 어느 정도는 복수 언어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볼 여지가 아주 없지 않긴 하다. 백제 사람들은 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 일컫고 왕비를 ‘어륙’이라고 불렀다.[25] 그런데 ‘어라하’와 ‘어륙’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반면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여기서 지배층 언어와 피지배층 언어가 다소 달랐음은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의 경우 처럼 단일 언어사회인데도 사대부와 신하들은 주상 혹은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평민, 백성들은 나랏님이나 임금님, 상감마마 같은 식으로 서로 다르게 부른 사례도 있기 때문에 이것 만으로는 당시 백제가 정말 복수 언어사회였는지 확실하게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피신한 백제계 귀족들도 "건길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등에 남아 있다. 위 주장도 이견이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왕'을 나타내는 어휘의 순우리말을 '긔ᄌᆞ'로 표현한 바 있으며, 민요에는 심심찮게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어라 만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건길지라는 표현과 어라(하)라는 표현 모두 조선 시대까지 잘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우석대 역사학과 조법종 교수의 '광개토대왕비 비문' 연구에 의하면 해당 기록에 백제 지역의 한(韓)인과 예맥인들이 둘 다 고구려언어가 통한다는 기록[26]이 있다고 한다.[27][28]

하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 한/예인들과 고구려 맥인들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그저 한/예인들이 고구려의 묘지를 수호하고 관리하는 법칙을 모를까봐 고구려 사람들을 더했다는 말이 나올 뿐이다. 게다가 백제 지배층이 예인이라는 것도 확실치 않다. 예인이라고 정확하게 불렸던 것은 옥저·동예 지역 사람들 뿐이고 막상 백제고구려와 함께 양맥(兩貊)이라고 불렸었다. 한성백제 시절 동예 지역 예인들이 백제에 편입했고, 광개토대왕릉비에 언급된 한예인들은 백제의 피지배계층이었을 것이며, 애초에 고구려가 아무리 백제를 밟았아도 귀족 등의 지배계층한테 묘지관리를 시킨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백제가 이중 언어체계가 맞다면 백제의 지배층은 주류 고구려인 및 침미다례 일대와 언어가 비슷할 것이고, 남쪽 고조선 계통 백제인들은 신라어와 같은 한어를 구사했을것이다.

또한 백제의 마한 정복 이후 고구려어 비슷한 말을 쓰는 백제 지배층이 마한을 언어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동화시켰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광개토대왕릉비는 서기 414년(장수왕 3년), 즉 5세기 초에 세워진 것이다. 5세기면 백제가 마한을 완전히 병합하고 난 뒤의 일이다. (단,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히 백제에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예한인들이 백제 지배층을 가리키는지 마한인을 가리키는지도 확실치 않다. 예한인이 백제 지배층을 가리킨다면 백제 지배층은 고구려에서 나왔기에, 그 둘의 언어는 서로 통하는게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 약탈해 잡아옴)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로 나의 무덤을 수호, 소제하게 하라."는 구절을 두고, 고구려가 한인과 예인을 맥계인 자신들과 분리해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예, 맥, 한이 서로 완전히 다른 별개의 집단이었다고 확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선 이 구절만으로는, 고구려가 한, 예를 자신들과 계통적으로 다르다고 여겨서 따로 명시한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계통으로는 여겼지만 고구려 바깥의 외부인이었기에 따로 구분해 지칭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부여도 예인들과 마찬가지로 '예'계였으며 고구려는 명칭이 다른 '맥'계였으나 현대 사학계에서는 예와 맥을 거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예맥 문서를 참고.[29]

사서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를 건국한 진한의 6촌 유민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동국통감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고조선의 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마한을 정벌하고 스스로 헌왕이 되었다고 한다. 수서 신라전에는 관구검의 침입 당시에 피신한 고구려 유민들이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전란 등의 이유로 북쪽에서 남하하였고, 신라가 건국되기 직전에는 이미 한반도 남부까지 고조선 유민들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로 접어들기 전 한반도는 이미 예맥 계열 민족들의 터전이 되어있었다. 애초에 계통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상황에서 한(韓)과 부여계, 고구려계의 백제를 크게 구별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이는 고대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북방에서 남하하여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몰아내고 지배했다는 알렉산더 보빈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다만 보빈의 주장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삼국시대가 개막할 때까지 일본어족의 잔재가 한반도 남부에 남아있었다는 설과는 달리, 당초에 한국 역사학계가 주장한대로 적어도 신라의 경우는 건국 당시에 이미 그 잔재가 거의 지워진 상태였다고 추정된다는 것이다.

8. 일본 기록에 남은 삼국시대 단어 목록

일본서기 백제어
세마키시(嶋君): 무령왕의 어린 시절 별칭. 세마 = 섬[30]
쿠티(俱知 ; クチ): 매[31]
코무(久麻 ; コム): 곰
수키(須祇 ; スキ): 마을[32]
에파시토(女郞 ; エハシト, *epasto)[33]: 아가씨
키시(王 ; キシ): 왕[34]
오루쿠(王后 ; ヲルク, *əlku): 왕비[35]
시토로(帶 ; シトロ), *stoṛ>ᄯᅴ>ᄯᅵ>띠): 띠
니리무(主 ; ニリム), *niṛm): 님[36]
파시카시(夫人 ; ハシカシ, *paskas)[37]: 부인
페수(倉 ; ヘス, *pesu): 창고
오사(通事 ; ヲサ): 통역가
소쿠(上 ; ソク): 위[38]
시무(中; シン): 가운데[39]
오토(下 ; オト): 아래
세시무(王子 ; セシム, *sesmu): 왕자
아리피시(南 ; アリヒシ, *aṛps>앒>앞)[40]: 남쪽, 앞쪽
오코시(上, 北 ; ヲコシ~ウコヲシ, *okos>웋>위): 북쪽, 위[41]
고구려어
오리코케(王 ; ヲリコケ, *oṛkoke)[42]: 왕
오리쿠쿠(夫人 ; おりくく, *oṛkuku)[43]: 부인[44]
마카리(正, 世, 上 ; マカリ): 우두머리[45]
쿠노(中 ; クノ): 가운데[46]
시무(小 ; シム): 작은[47]
요모 (子 ; よも): 아들
가야어
수나라(須奈羅 ; スナラ)[48]: 쇠나라
아로시 (下 ; アロシ, *aros>알>아래)[49]: 남쪽, 아래
노피(能備, 背 ; ノビ)[50]: 뒤, 북쪽

신라어, 공통어
나리(那利 ; ナリ, *naṛ>ᄂᆞᄅᆞ>나루): 나루[51]
무라(牟羅 ; ムラ): 마을[52]
무레, 모로(山 ;ムレ, モロ): 산[53]
코포리(己富利, 縣, 評 ; コホリ, *kəpəl>*kəbəl>*kəβəl>ᄀᆞ옳>고옳>고욿>고을): 고을[54]
코니, 코(大 ; コニ, コ, *kən): 큰[55]
다로(臣, 陁魯 ; ダロ): 신하[56]
사시(城 ; サシ, *sasi>잣): 성[57]
세마(島 ; セマ): 섬
파토리(波珍 ; ハトリ, *patəṛ>*바ᄃᆞᆯ>바ᄅᆞᆯ/바닿>바다): 바다[58]

목록출처

위 목록의 훈은 석일본기(釋日本紀)등의 사서에 적혀있는것으로 10~14세기에 적혀 변형된 상태다.

단, 그렇더라도 카타카나 음이 실제 해당 단어들의 옛 발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어의 음운 변천 과정 및 역사적인 외국어의 가나 표기법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순음퇴화 및 어말 자음을 '자음+[i]'로 옮기는 것이 그 예이다. 예를 들어, 위 목록에서 '니리무'를 오늘날 일본어의 외국어 표기법처럼 '니림'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들 및 중세 한국어의 어휘를 참조해 추정한 음가가 위 표의 각주 속 재구음이다. 어디까지나 재구음이니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 고마나리
공주의 옛 이름을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적고 ‘고마나리’라 불렀다. 용비어천가(1445)에서는 '고마ᄂᆞᄅᆞ'의 형태로 나오고[59] ‘일본서기’(720)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고마’는 ‘곰’이란 뜻이고 ‘나리’는 현대 한국어 ‘나루’로 변하였다.

● 소부리
소부리(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이름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소부리주>소부리군’으로 쓰이다가 신라 경덕왕이 서기 757년 지금의 부여로 고쳤다. 백제 성왕은 천도하면서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北扶餘)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남에 있는 부여’란 의미로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라 고쳤다. 경덕왕은 남부여에서 ‘부여’만 따다가 소부리를 부여로 바꾼 것이다. 현재도 부소산 기슭 마을은 ‘소부리’라고 불린다. ‘소’는 ‘동쪽’이란 뜻(샛바람의 새)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소부리’는 ‘동쪽 벌판’이란 뜻이 된다[60]. 또 다른 설로 부여군의 다른 옛 이름인 사비(泗沘)가 소(所)와 같은 어형이고, 마한 남부 일대에서 마을, 군(郡), 나라, 성(城) 등을 의미하던 부리가 읍(邑)을 뜻하는 것으로 수읍(首邑, 즉 수도)의 의미를 가진다는 가설이 있다[61].

수읍 가설을 적극적으로 채용할 경우, 소부리는 경북 상주(尙州)의 옛 이름인 ‘사벌국(沙伐國)’의 ‘사벌’과도 같은 말이고, 신라의 서울 ‘셔벌(徐伐)’[62]과도 같은 단어로 해석되곤 한다. 즉, 지역차는 있지만 삼남 지방에서 수도[63]를 의미하는 고대 한국어가 중세를 거치며 셔블[64]로 변하고, 이 셔블이 다시 변해서[65] 오늘의 ‘서울’이 되었다고 한다.[66]

● 구드래나루
고지도에 한자로 ‘龜巖津’(구돌나루)이라 적혀 있다. 소부리에서 은산 및 정산(定山) 방향으로 건너가는 나루를 ‘구드래나루’라 부른다. 백제 시대에는 이곳이 나루라기보다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사신의 배들이 군산포(白江口)를 거쳐 강을 따라 올라와 입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빈을 맞는 항구였다면 ‘구드래나루’는 그에 알맞은 뜻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백제를 ‘구다라’로 불렀다. ‘구드래’와 ‘구다라’는 비슷하다. 따라서 동일어로 믿을 수 있다. ‘구드래’는 ‘굳+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백제어는 유기음이 없기 때문에 ‘大’를 ‘근’(>큰)이라 하였다. 따라서 ‘굳+으래’는 다시 ‘그우+ㄷ+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그우>구’(大)로 변한 것이고 ‘ㄷ’은 사잇소리이다. ‘으래’는 전기 백제어로 왕을 일컫던 ‘어라+하’의 ‘어라’에 해당한다.

‘어라’는 지금까지도 즐겨 불리는 민요의 마지막 대목인 ‘어라 만수’(왕이시여 만수 무강하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구드래’의 본말은 ‘근어라’이며 ‘대왕(大王)’이란 뜻이다. 따라서 ‘굳어라’가 일본어로는 ‘구더라’ ‘구다라’로 변하였고, 우리말로는 ‘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이 말은 ‘근어라(大王津)’란 뜻이다. 백제의 선진 문화가 일본 문화의 밑거름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일본인들이 백제국을 ‘구다라나라(대왕국)’로 높여 불러온 겸손을 이해할 수 있다.

● 부소산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전기 백제어 지역에서 이 ‘부소’가 많이 발견된다. 한 예로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을 들 수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홀에 도착하여 먼저 오른 산이 ‘부아악’(負兒岳=三角山)이었다. 그런데 兒의 고음이 ‘ᅀᆞ’이었으니 부아(負兒)는 당시의 백제어 ‘부ᅀᆞ’를 적은 것이다. 이 ‘부ᅀᆞ’도 솔을 뜻한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가 침투한 것이다. 참고로 이 부소산에 있는 부소산성은 백제의 마지막 '왕성'이며, 당시에는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이라고 불리었다.

● 니리므
……곤지가 왜로 향할 때, 축자도(筑紫嶋)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돌려보냈고 왕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각라(各羅;가카라)의 바다에는 주도(主嶋;니리무세마)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일본서기부레쓰 덴노 4년 백제에서 말다왕이 국인들에 의해 제거되고 무령왕이 즉위함
전기 백제어로 왕을 부를 때 지배층은 ‘어라하’라 하고, 백성은 ‘건길지’[67]라 불렀다. 그러나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68]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무’에 가까운 발음으로 불렀음이 분명하다[69]. 후기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이 됐다는 가설이 있다.[70]

황산벌
황산벌 전투를 백제어로 표현하면 ‘누르리모이부리(黃等也山夫里)’ 전투다. 황산(黃山)은 고려 태조 때 연산(連山)으로 개명되었다(940년). 백제 시대에는 황등야산(黃等也山)으로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으로 개명한 것이다(757). 따라서 서기 757년까지는 ‘황등야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했듯 백제인들은 ‘黃等也山’을 ‘누르리모이’라 불렀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은 ‘누르리모이부리 싸움’이라 불렸을 것이다. 거의 100년 뒤인 서기 757년에 중국식 두 글자 지명인 ‘黃山’으로 개정된 뒤부터 백제식 이름은 점점 약해져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동부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36개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산이 늘어섰다’는 의미로 ‘누르리모이(늘어선 )’라 명명한 것이다.[71]

한자 黃, 等은 음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이 ‘黃等也山’에서 ‘等也’ 두 자를 줄여 ‘누르모이(黃山)’가 됐다. ‘누르’는 곧 ‘느르(連)’와 동음이어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에 ‘느르모이(黃山)’는 ‘連山’으로 다시 한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산벌 싸움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누르기재’(黃嶺), 누르기(마을), 누락골(於谷里 또는 於羅洞), 누르미(마을), 황산리(新良里 동쪽) 등의 지명이 파생되었다.

목록 출처

9. 참고 자료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이 문서의 상당 부분은 이 글을 참고해서 작성되었다. 도수희 교수는 이기문 교수처럼 백제가 '이중 언어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고구려어현대 한국어가 친연성을 가지며 백제어신라어와 유사하다는 결론으로 도달했기 때문에 해당 교수의 주장을 전부 수용하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10. 외부 링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어 항목

[1] 梁書 百濟: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양서 백제전: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 南史 百濟:言語服章略與高麗同 (남사 백제전: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2] 고구려는 단기접전을 벌일 때 깃발을 높이 세우고 적장의 이름을 묻는 것이 관례인 듯 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3] 보빈 교수는 기본적으로 학계 주류에서 별로 다뤄지지 않는 방향의 새롭고 급진적인 학설을 많이 밀었기 때문에 이것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이전에 했던 주장을 번복하고 폐기하는 경우가 많았다.[4] 중세 한국어로 8을 여듧으로 표기하고 여드릅으로 발음한다.[5] 현재 재직하는 학과는 언어학과지만 출신 학과는 국어국문학과이다.[6] 현재의 인천[7] 물론 이들 지명에 붙은 ‘홀’이 고구려 장수왕이 중부지역(황해·경기·충북)을 점령한 서기 475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식으로 새로 붙인 '어미'가 아니라는 가정이 필요하기는 하다.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가 약 77년간 점령한 이후에 신라의 북진으로 경기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되었으므로 반세기 넘게 엄연한 고구려의 영토였던 적이 있었다.[8] 마한어의 특징은 지명 어미 ‘비리’에서 나타난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 ‘점비리’ ‘내비리’ 등 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이 ‘비리’는 후기 백제어에서 ‘부리’(夫里)로 계승된다. ‘고량부리’는 오늘날의 청양군이고, ‘소부리’는 부여다. ‘모량부리’는 고창이고, ‘인부리’는 능성이다. 이 처럼 '부리'가 사용된 지명은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9] 물론 '부사'가 중국어로부터의 차용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다양한 변이형으로 기록되는 걸로 봐서는 고유어의 음차라고 보는것이 더 타당하다.[10] 부여인들이 지배층으로 오기 전이지만 피지배층인 적석묘계 집단이 수적으로 훨씬 우월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11] 혹자는 일본에서 날 일(日)을 '히'로 훈독하는 것과 연관짓기도 하지만, 고대 일본어에서 ‘해’를 뜻하는 ひ는 순음 퇴화 이전인 pi(비)로 읽었기에 일본어와는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12] 해씨 가문은 본래 부여 출신으로, 온조와 함께 한강 유역에 나라를 건국한 개국공신이자 이후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자리잡은 귀족 세력이다.[13]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가 존칭 접미사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14]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라고도 하는데,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라는 관직이 있는 점을 고려하면 막하라지(莫何羅支)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15] 바로 위의 지(支: *ke)와 현대 한국 한자음이 같아서 혼동하기 쉬우나, 삼국시대 당시 한자음으로는 명확히 구별되었다.[16] 여기서 臣의 원삼국시대 당시 음가는 /*gin/으로, 백제의 왕호 '건길지' 및 신라의 왕성 명칭 '건모라'의 '건(健)'과 마찬가지로 존칭 접두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신분고국, 신소도국, 신운신국 등 세력이 컸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 소국들의 명칭에서도 발견된다.[17] 여기서 질지(叱智)는 신라 인명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와 서부질지(西夫叱智)에도 보이는데, 속격 조사 叱(*si)와 존칭 접미사 知/智(*te)가 결합한 형태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때에도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다. #[18]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신라에서 파견된 유학생을 뜻한다.[19] 출처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20] '계백'은 이름으로 성씨는 따로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21] 귀실복신(鬼室福信), 사탁상여(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경우 '귀실', '사탁', '흑치'는 성씨이며 '복신', '상여', '상지'는 이름이다. 역사서에 이들의 성명이 ‘복신, 상여, 상지’로만 빈번히 기록된 것을 보면 생략된 앞부분은 성씨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성씨가 두 자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로 미루어 생각할 때 계백은 성명이 아니라 오로지 이름일 뿐이며 그도 두 자로 된 별도의 성씨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2] 사실 성씨가지고 출신 민족을 운운하는 것부터가 웃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당장 한국의 성씨부터가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접한 삼국시대 각국의 귀족들이 중국물 먹은 티 좀 내려고 중국의 네임드 역사 인물의 성씨를 사칭하거나, 대대로 내려온 이름을 성씨처럼 쓰기 시작한 게 그 기원이다. 당연히 이렇게 했다고 고구려인이나 백제인, 신라인중국인인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에서도 백제로부터 선진 문물을 대거 받아들임에 따라, 백제궁이라는 이름의 궁전이 지어질 만큼, 황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백제빠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다른나라 귀족들이 중국 따라한답시고 중국인들의 성씨를 사칭했듯이, 일본 귀족들이 한국 귀족들의 성씨를 사칭하는 일이 없었을 리도 없다.[23] 이런 현상을 언어동조대라고 하며, 인도 아대륙이나 발칸반도의 언어들, 현대 한국어현대 일본어, 중국어, 스웨덴어핀란드어가 이런 케이스에 속한다.[24] 침미다례를 이룬 토돈분구묘인들은 고조선계 예맥 및 훗날 일본 전방후원분을 이루는 집단과 연합했고, 한성백제 지역에 기존 있었던 토돈분구묘인들은 고구려인들과 연합했다는 차이 밖에는 없다.[25]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이 됐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추정이 맞다면 현대 한국어의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26] 정확히는 백제 지역의 '인'이 '고구려인'과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는 뉘앙스로 서술된 내용이 있다.[27] 조법종, 2005, 「고구려 광개토왕 수묘제 개편 검토」,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 Vol.6,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해당 논문 (기관회원에 한하여 무료)[28] 다음의 동영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29] 고요묘 집안은 진변(辰卞)에서 존귀했고 명성은 순기(珣琪)처럼 두터웠다, 고진 공은 곧 부여의 귀종(貴種)이며, 진한(辰韓)의 영족(令族), 고현 부군(府君)의 휘(諱)는 현(玄)이요 자(字)는 귀주(貴主)로서 요동(遼東) 삼한인(三韓人), 고모 군의 휘는 모요 자는 구이고 안동사람이다. 가문은 진한에서 융성하고 다른 명문의 명예를 모두 압도하였다. 부여융 공은 이름이 융이고 자도 융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다.[30] 같은 기사에 수록된 단어 主島= ‘니리무세마’에서 섬 도(島)에 해당하는 세마도 똑같은 훈독인 것을 보면, 세마키시의 ‘세마’에 해당하는 嶋는 당대 백제어의 섬에 해당하는 단어를 그대로 가져와 훈독 했을 것이다. 이것이 후대에 변형되어 일본어에서는 섬을 ‘시마’라고 훈독한다.[31] 한국어 구지내(새매)에 대응된다. 한국어 ''는 고구려어에서 기원하였다.[32] 한국어 시골(村)에 대응한다. 고구려어 골(忽)의 소리가 바뀐 것으로, 도수희 교수에 따르면 '키'는 백제어에서 '재(城)'를 뜻한다. 일본어도 상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城을 'ki'로 읽는다.[33] '딸'의 중세한국어 형태가 'ᄯᆞᆯ'이었는데, '시토' 부분이 이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故이기문 교수에 의하면 아래아 발음이 고대 한국어에서 좀 더 원순형으로 났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는데, 그렇다면 모음이 '오'와 비슷해지기도 한다.[34] 고구려어에서 왕을 의미하는 皆(ki), 신라어에서 왕을 의미하는 今(kim, kum) 중세 한국어 긔ᄌᆞ(王)에 대응된다.[35] '올케'가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http://kostma.aks.ac.kr/dic/dicViewY.aspx?searchid=DIC_B8_000165 한국어 '얼다, 어르다(여성이 남성에게 시집가다)'에 대응될 가능성이 크다. 이 단어들은 한국어 어른(大人)과도 동원어이다. 참고로 중세국어에서 '남진어르다'는 '여성이 남성에게 시집가다'를 뜻했으며, '겨집어르다'는 '남성이 여성에게 장가들다'를 뜻했다.[36] 삼국사기 만주쪽 고구려어 지명어 'i (ni)', 일본서기 신라어 훈독 'nirin' 에 대응.[37] '부부'를 순우리말로 '가시버시'라고도 하는데,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주쪽 고구려 지명어와 고구려인 인명에서 사내, 남편(夫)는 巴(pa), 矢(sa, si)라고 읽는다. 한국어로 남편을 의미하는 밧(버시)은 어원이 '밖'의 어원인 '바ᇧ'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 단어가 일본서기 백제어 훈독, 삼국사기 만주쪽 고구려 지명어에서 확인된다는 것은 고구려어와 백제어에 한국어 '밖'에 대응되는 단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유어 '벗(친구)'과 연결짓는 의견도 있으나, 이 단어는 중세 한국어 어형이 ':벋'으로 종성이 다르다.[38] 음(音) 속(束)[39] 고구려어에서는 "작다"라는 뜻으로 쓰였다.[40] 현대 한국어의 앞(남쪽)에 대응된다.[41] 중세 한국어의 웋(북쪽), 현대 한국어의 위(북쪽)에 대응된다. 삼국사기 백제어 지명어에는 한국어 뒤(북쪽), 일본어 시로(뒤쪽)에 대응되는 知(di, ti, si)도 존재한다.[42] 한국어 무속어에서 왕을 의미하는 '에라, 어라' 와 일본어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에라이' 에 대응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 단어는 언어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어로 본다.[43] 일련의 '올-' 계열이 오늘날 '올되다', '올벼' 등의 접두사 '올-'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44] 현대어의 부인(婦人)이 아니라, 삼국시대에 왕후를 달리 이르던 표현이다. 영부인(令夫人) 등에 이 호칭이 남아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일본측 문헌을 인용해 이 단어를 오리쿠시라고 읽기도 했다고 적었는데 출처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저 내용이 맞다면 백제어 속격조사 シ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 단어는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어일 가능성이 있다.[45] 한원에서는 태대(太大)로 쓰고 막하하라(莫何何羅)로 읽었다. 대막리지에서 막리(莫離)와도 상통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대 한국어의 '맏', '클(大)'과의 연관성도 제기되고 있다.[46] 한원에서는 대(大)로 쓰고 힐(纈)로 읽었다. 백제어에서는 "크다"라는 뜻으로 쓰였다.[47] 한원에서는 소(小)로 쓰고 실(失)로 읽었다. 백제어에서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쓰였다. 고구려어와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점을 볼 수 있는데, 고구려어로 '중간' 정도인 것이 백제 입장에서는 '높은(큰)' 것이 되고, 그렇기에 자연스레 백제 입장에서 '중간'인 것은 고구려로 가면 '하찮은(작은)' 것이 된다. 같은 뿌리(부여족)를 공유하기에 단어 자체가 달랐다기보다는 사회적 위상 차이가 반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겠고, 이 기록들의 대부분이 일본 측이 백제인의 말을 듣고 적은 것이라 백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관점이 들어간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당대 고구려와 백제의 위상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48] 고구려어로 나라(國)는 na(那), pa, pui(非), ra(良)라고 하고 신라어에선 國惡(NARak)이라 한다.[49] 가야국 국명 아라가야 = 전가야(앞가야)) 다만 이 단어는 백제어의 속격조사 シ가 붙어있어 백제어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서기에 적힌 고대 한국어 훈독은 일부 예외 사례를 빼면 거의 백제측 기록(백제삼서)에 나와있는 것을 인용한 것이라 대부분 백제어 훈독일 가능성이 크다.[50] 백제어로 높다(高)를 의미하는 難(nan), 초기 중세 한국어의 那奔(나분; 높은)과 현대 한국어의 '높다'에 대응된다.[51] 고구려의 지명어에선 이 단어를 한국어 '날래다' 에 대응되는 단어로 썼다. 날래다는 어원이 날개와 연관있으므로 고구려어에 한국어 날개, 날래다 등에 대응되는 단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52] 백제와 신라의 지명어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다만 고구려의 관직명이나 후기 백제어 지명어에선 한국어 마을에 대응되는 어휘가 확인된다.[53] 일반적으로 백제어라 알고있으나 신라의 지명어에도 한국어 '뫼' 에 대응되는 단어가 보이므로 백제어와 신라어에서 공통적으로 썼다고 보는게 맞다. 이 어형은 용비어천가에서도 확인된다.[54] 고대 일본어의 코오리(郡)와 대응.[55] 고구려어에서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쓰였다.[56] 고구려와 신라, 가야의 관직명 또는 인명에서 확인된다.[57] 이 단어는 신라어뿐만이 아니라 백제어, 신라어, 가야어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다. '*sas'라고 재구하는 설도 존재하나, 일본 측 기록대로 '사시'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야 여기서 두 번째 음절의 'ㅅ' 발음이 약해지면서 반치음화를 거쳐 최종적으로 탈락해 '*sai'를 거치며 '재(<자이)'가 되는 과정을 상정할 수 있고, 또한 한편으로 '*sasi'에서 어말의 모음이 탈락하며 '잣'이 되는 것 역시 상정하여 중세 한국어의 '재'와 '잣'을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초성의 's'과 'ㅈ'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이 있는데, 고대 일본어의 サ행이 본래 파찰음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성'을 뜻하는 신라어는 '*자시'로 재구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중세형과 더욱 가까워진다.[58] 미국언어학자알렉산더 보빈은 이 단어를 일본어족 계통 언어의 어휘를 차용한 것으로 보고있다.[59] 용비어천가 주해 속의 우리말 어휘에 대하여 - 조규태(2006)[60] 이를 동경(東京)설이라 부를 수 있다. 부여가 왜 동경이냐 싶지만바로 이 이유로 아래의 수읍설보다 인기가 떨어지고 반발이 심한 것 같다, 굳이 따지고보면 사비성은 금강의 동쪽에 위치하긴 한다.[61] 이를 수읍(首邑)설로 부를 수 있겠다.[62] 사비성과 동경은 안어울리지만,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통일신라 시기때부터 이미 동경(東京)이라 불린 전적이 있다.고려시대 땐 아시다시피 진짜로 동경 중세 한국어 단어 셔블을 "동쪽의 수도"로 해석하는 건 사비성보다는 오히려 서라벌에 어울리는 예시일듯.[63] 사실 (근현대) 한국어 단어 "서울/셔블"도 한자어 "수도"에 대응하는 순우리말 일반명사였는데, 최근에 와서 대한민국의 특정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뜻이 한정되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해도 미국의 '서울'은 워싱턴이다와 같은 표현이 쓰이곤했다.[64] 그냥 비읍(b)가 아니라, v 음가를 갖는 순경음 비읍임을 주의.[65] 단모음화(셔 -> 서) 및 순경음 비읍이 삭제되고, 이응만 남는 음운현상(좀 더 정확히는 v가 w로 약해지는 현상). "춥다"의 동사변화가 "춥어서/추버서"가 아닌 "추워서"로 발음되는 것과 동일하다. 단, 동남방언에선 순경음 비읍이 그대로 보존되어 "추버서"로 발음된다[66] 단 이 수읍가설은 삼한/삼국의 언어가 같은 한국어족 내에서 지역 방언격차 수준의 차이만 보였다는 가정에 의존한다.[67] 중국측 사료에 언급된 한자어를 현대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 일본서기에서는 "콘키시" 또는 "코니키시"의 형태로 등장하는데, 일본서기는 실제 발음을 당대 일본어 음운론에 맞춰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된다.[68] 일본서기 원표기 "니리무"를 한국어 음운론에 맞춰서 바꿔 놓은 것.[69] "니리므"를 "니림"으로 불러선 안된다는 서두의 언급에 의거해 이렇게 단언한 듯 하다. 다만, 위에서 언급된 "건길지(코니키시)"의 경우, 백제 후기를 넘어 백제가 망한 이후에도 사용된 용례가 있어서 전기/후기 백제어 식으로 단언하기는 힘들다. (용례: 쿠다라노코니키시百濟王)[70] 이것도 주의가 필요한게, 당장 동일출처인 일본서기에서 임나가야의 왕칭으로 쿠니노"니림"(国の主:くにのにりん)이 등장한다. "にりむ"를 니림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서두의 언급을 고려하면 니리므는 백제어, 니림은 가야어가 될텐데, 삼한/삼국의 언어가 유사했다고 가정하면 "같은 고대 한국어족 내에서 마한/변한 지역간 방언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71] 그런데 '들'로 읽히는 等과 '라'로 읽히는 也가 어떻게 누르리에 대응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