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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00:26:42

위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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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7대 국왕
위덕왕 | 威德王
파일:2016012117421002.jpg
위덕왕릉으로 추정되는 부여 왕릉원 전경.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525년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사망
(음력)
598년 12월 (향년 73세)
백제 사비성
(現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묘 능산리 동하총 (추정)
재위기간
(음력)
백제 왕태자
553년 이전 ~ 554년 7월
백제 제27대 국왕
554년 7월[1] ~ 598년 12월 (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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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성씨 부여(扶餘)
창(昌)
부왕 성왕
왕자 부여아좌[2], 부여계[3], 부여선[4]
종교 불교
시호 위덕왕(威德王)
별호 창왕(昌王)[5]
관등 한솔(杆率)[6] }}}}}}}}}
파일:국보288호부여능산리사지석조사리감명문탁본.jpg
창왕명석조사리함

1. 개요2. 생애
2.1. 태자 시절2.2. 즉위2.3. 재위2.4. 최후
3. 유물4. 대중매체에서5. 《삼국사기》 기록6. 《일본서기》기록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성은 같으며[7] 관위는 간솔, 나이는 스물아홉이다."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廿九矣.
일본서기』 권제19 「흠명기(欽明紀)」, 14년 계유(553년) 10월 20일 기유(11월 13일), 백합야 전투에서 고(구)려 장수와 일기토[8]를 벌이기 전 표를 세워 나눈 말. 출처, 출처
백제의 제27대 군주이자 건길지.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의 왕자[9]이자 다음 왕이다. 신라문무왕은 그를 '무덕왕(武德王)'이라고 불렀으며 성은 부여, 휘가 창(昌)으로 당대의 백제 금석문에는 '창왕(昌王)'으로 표기되어 있다.[10]일본서기》에서는 '여창'이라는 축약 표기로 나오는데 아버지 성왕과 함께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 태자 시절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성왕과의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자기 고집으로 인해 아버지가 관산성 전장 한복판에서 참수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고, 그로 인해 평생 아버지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비운의 군주였다.

초기에는 상당히 호전적인 성격이었던 듯하다. 태자 시절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산성 전투를 강행한 것은 물론이고, 이후 어렵게 즉위한 후에도 국력을 모아 561년 음력 7월에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결국 신라 진흥왕과 이사부에게 참패했고, 후속전으로 대가야까지 신라가 완전히 병합하자, 이후에는 철저한 현상 유지로 정책을 완전히 전환하여 거의 40년에 가까운 남은 여생 동안 아무런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덕분에 이 시기에 한반도는 실로 오랫동안 큰 전쟁이 없었던 평화기가 도래했다.

비교적 자세한 기록 덕분에 무령왕과 함께 백제 역대 군주 중 탄생년이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왕인데 553년 백합야 전투에서 스스로 29세였다고 밝혔으므로 525년생이며, 죽은 해가 598년으로 나이가 73세이니 백제의 역대 군주 중에서 그나마 장수한 경우이다.[11] 재위 기간도 554년~598년까지 총 45년으로 긴 편이다. 50년씩 재위한 군주가 많아 기년 조작을 의심받는 제8대 고이왕 이전까지의 대다수 초기 왕들을 제외하고는 가장 길다. 동시대 인물이자 위덕왕의 철천지 원수 진흥왕보다 나이가 9살이나 많다. 그리고 위덕왕은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 치세와 20여 년이나 재위 기간이 겹칠 정도로 장수했다.

2. 생애

2.1. 태자 시절

아버지 성왕을 도와 국정에 참여했고, 수도 사비성에 머무는 성왕을 대신해 한강 유역 탈환의 임무를 부여받은 북벌군을 진두 지휘했다. 그가 역사서에 첫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553년의 백합야 전투다. 태자였던 부여창은 왜군과 가야군까지 이끌고 고구려군과 대치해 고구려 장수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를 거뒀고, 이에 사기가 오른 백제, 가야, 왜국의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밀어붙여 격파했다. 적장을 상대로 일기토를 벌여 전사시켰다는 기록은 한국사 군주 중에서 찾아보기 힘든데, 태자 시절의 부여창은 뛰어난 무력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도 그에 대한 자신감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세가 오른 백제는 554년 신라 정벌론을 펼치기에 이르는데 태자인 부여창이 강경하게 나가자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결국 성왕이 신라 공격을 전격 승인해준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왜국과 가야를 끌여들여 일으킨 바로 오늘날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일어난 관산성 전투다.
(전략)
여창(餘昌)이 신라를 치고자 꾀하였다. 기로(耆老)들이 간하기를,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여창이 말하기를, "늙었도다. 어찌 겁이 많은가? 나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 요새를 세웠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진영에서 고생하고 또 오래도록 잠과 음식을 폐하고 있을 것을 우려하였고, 아버지의 자애는 성글기 쉽고, 자식의 효성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하략)
백제 사서를 인용한 《일본서기》 기록. 일본의 기록이기에 프로파간다를 엿볼 수 있다.

이때까지는 뛰어난 무용과 자신감 넘치는 차세대 유망주로 전성기의 근구수왕처럼 백제판 흑태자로 용명을 떨칠 수도 있었겠지만.[12] 태자 부여창이 직접 선봉에 서서 관산성(管山城)[13] 공략에 나서고 우덕, 탐지가 이끄는 신라군에 승리를 거두며 초반 기세를 잡자, 아버지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를 독려하기 위해 근위대 50명만 대동하고 밤길을 달려가다가, 북쪽 한강 유역에서 내려온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전장 한복판에서 전사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14] 그리고 참수된 채 전달된 왕의 시신을 받은 태자의 백제군 본대도 사기를 잃고, 전투에서 패배, 부여창의 부대 역시 포위되어 성왕 포함 4인의 좌평과 29,600명의 병사가 전사하는 큰 참화를 입었다.[15] 포위당한 태자는 일본 지원군의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筑紫國造)[16]가 뛰어난 궁술로 분전해 신라군의 포위를 겨우 뚫었고, 태자는 샛길로 도망쳐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17]

2.2. 즉위

(555년) 8월 백제 여창(餘昌)이 여러 신하들에게 “소자(少子)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修道) 한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 하십니까. 무릇 도리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늙은 노인(耆老)[18]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을 굳이 하고 싶으시다면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19]라고 하였다.
여창이 “좋다”라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운운하였다.
일본서기》 권 19 <긴메이기>

성왕이 전장 한복판에서 갑작스레 최후를 맞았으니 태자 창이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했으나 창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에 왕위를 포기하며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만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승계하였다. 그리고 대신 백성 100명을 출가시켰다.

부여씨의 왕권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은 위의 기록으로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는데, 선왕이 주도해 일으킨 전쟁에서 왕과 재상을 비롯한 대신들과 연합군 수만 명을 잃고 후계자인 자기는 간신히 살아 돌아온 꼴이다 보니, 즉위 이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선대 동성왕 - 무령왕 - 성왕의 치세에 쌓아왔던 왕권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로 인해 《수서(隨書)》에는 사비 천도 이후 형성된 대성팔족(大姓八族)이 실세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왕권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때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554년 ~ 557년까지 부여창이 태자로 있었던 이른바 공위시대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인정받기도 했으나, 1995년 부여 능산리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 의해 없었던 것으로 판명났다. 애초 《일본서기》의 출가 기사가 권력 대립보단 성왕의 전사에 따른 비감한 분위기가 물씬나는 부분이고, 위덕왕 스스로가 출가하려 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공위설'은 한계가 있다.

2.3. 재위

국정을 맡고 몇개월 후인 554년 9월,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변경 진성(珍城)이라는 곳을 공격해 상당수의 백성과 말을 탈취했지만, 중요한 영토 확장은 실패한 소극적인 성과였다.[20]

혹은 이 진성 공격 기록이 《삼국유사》에만 있는데 진성이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관산성의 다른 이름이거나, 554년 7월에 있었던 관산성 전투가 7월 한 달만에 종결된 짧은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 진성 전투도 관산성 전쟁의 일부가 아니냐는 설이 있다. 아무튼 관산성 전투의 일부라면 이는 위덕왕의 즉위 이전에 벌어진 사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어 바로 고구려가 쳐들어왔다. 성왕이 전사한지 불과 3개월 만에 쳐들어 온 것이다.[21][22] 고구려가 금강 유역 일대인 웅천성(혹은 안성천 일대로 비정됨.)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오자 위덕왕은 이를 방어해냈다.
파일:external/db.kookje.co.kr/115715_LImage1.jpg
연맹설에 근거하여 제작된 가야의 지도
이후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하여 재침할 것을 우려하여, 왜로부터는 계속 선진문물을 지렛대로 해 병장기와 군마 등 군수물품을 제공받는 동시에 대가야[23]에 밀사를 파견, 즉 왜와 가야를 이용해 신라의 후미를 치고 562년 금관가야 지역을 다시 되찾아주면서 신라를 견제하게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백제군이 신라군의 반격에 당하면서 1,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 말 그대로 역관광 당했고, 가야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신라에게 오히려 좋은 명분이 되고 만다. 이에 562년 음력 7월, 장군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의 활약으로 신라는 대가야를 패망시켜 가야 전 지역을 집어삼켰다. 게다가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원군으로 온 왜군도 대장이 신라군에 사로잡혀 아내를 신라 장수에게 노예로 바치고 겨우 풀려날 정도로 대패했다.

그러나 근성가이 위덕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위덕왕 24년과 진지왕 2년의 기사를 보면 577년 백제가 신라 서쪽 주, 군을 쳤는데, 이찬 김세종[24]이 3,7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는 것을 봤을 때 백제군의 대패로 보인다. 위덕왕은 진흥왕에게 반격당해 패배한 후 장장 16년을 준비했을 텐데, 이렇게 또 패배했으니 개인적으로도 원통했을 것이며, 관산성 전투 당시부터 전쟁을 반대했던 '늙은 대신'으로 대표되는 주화파 세력이 대두하고 위덕왕의 왕권은 더욱 추락했을 것이다. 결국 한동안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게 된다.

게다가 577년에는 위덕왕에게 악재가 겹쳤다.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에 의하면, 아좌태자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한 왕자를 잃은 것이다. 위덕왕은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를 세웠다.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다.
與百濟閼也山城.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지왕 3년(578)
그나마 다행이라면 578년(신라 진지왕 3)에 알야산성을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사가 있긴 한데. 이는 백제 위덕왕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알야산성이 전북 익산시 낭산면으로 비정되는 걸 볼 때, 이 시기 신라가 백제 중심부에 가까운 익산까지 진출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맞는지 실존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이 시기 신라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승리해서 백제 중심부와 인접한 아막성(남원시), 내리서성(영동군), 장대리 고분군(금산군), 계족산성(대전광역시 대덕구)[25] 등을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과 50km 정도 떨어진 익산 낭산면 공격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이 사건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보는 측에서는 반면 이 전투 여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측은
아무튼 알야산성 전투는 기록이 굉장히 소략해서 어떻게 보더라도 추정일 뿐이지만, 신라가 수도 사비에서 멀지 않은 익산을 실제로 공격했다고 본다면 백제에게는 멸망이 100여년은 앞당겨질 수 있는 또 한 번의 큰 위기였다. 하지만 위덕왕은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내고 나라를 지켰다.

위덕왕은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남북조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펼쳤다. 남북조와 동시적인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백제 역사상 최초였다. 이는 중국 정세 외에도 위덕왕이 다각도로 위기를 청산해보고자 한 발로로 보인다. 다음해인 579년에는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서 신라 성들을 연결하는 길을 막았다.

이후 남북조가 수나라로 통일되고, 어느 정도 내부가 안정되자 위덕왕은 잠재적인 위협 요소인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수나라를 이용하기로 방침을 정한다. 상황을 주시하던 위덕왕은 598년에 수문제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제1차 고구려-수 전쟁을 벌이자,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 없고 오만한 나라라며 까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길 안내, 군량 보급 등을 협력 하겠다고 제의했다. 허나 수 문제는 그럴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위덕왕의 제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백제가 수나라 뒤를 봐주려고 접촉했다는 사실을 안 고구려는, 백제로 진격하여 보복을 감행한 후 돌아갔다. 전쟁 결과는 나오지 않지만 백제가 방어해 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위덕왕은 얻는 것도 없이 손해만 본 셈이다. 백제가 돕겠다고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 한 이유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훗날 수나라 다음 황제 수양제가 진짜로 백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가긴 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져서 나가떨어지길 바랬던 백제의 생각과는 달리 수나라가 오히려 털렸다.[26]

재위 기간 내에 관산성 전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신라를 침공했으나[27] 별 성과는 없었다. 단지 오래 산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28][29] 그러나 위덕왕이 신라를 침공해서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을지언정 그것이 신라를 충분히 피로하게 했을 가능성은 크다. 신라의 진평왕 재위 기간이 위덕왕 후반부터 무왕 재위 중반기까지인데, 위덕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왕이 즉위해 신라에 파상 공세를 펼치자 신라는 백제, 고구려, 말갈에게 얄짤없이 털리기 시작한다. 물론 왜도 외교적으로 이들의 편을 든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국의 츠쿠시국(현 후쿠오카현)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일라의 팀킬로 실패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북제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인 후주로부터 '사지절 도독 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라는 관직을 받은적도 있었는데 청주(靑州)는 당시 중국의 산둥 지방이었다. 당시에는 남의 영토를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4. 최후

598년 74세의 보령[30]을 일기로 승하했고, 그 묘는 능산리 고분군에 있다고 추정되며, 그의 승하 후 아들인 아좌태자[31]가 왕위를 승계하지 않고 동생인 혜왕이 71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다만 이상한 점은 장성한 나이의 아좌태자가 일본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위덕왕의 뒤를 잇지 않아 동생인 혜왕이 왕위를 이었다는 것이다. 태자가 버젓이 있음에도 늙은 동생이 보위를 이은 것으로 보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위덕왕의 죽음에 귀족 세력이나 혜왕이 깊숙이 관여된 게 아니냐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노년의 나이였다고 해도 자연사가 아니라 횡사한 것이라면... 그 전대의 여러 국왕들이 귀족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으므로, 사서에 나타난 위덕왕과 혜왕의 승계 과정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정황은 위덕왕의 비정상적인 최후를 암시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 이 설의 요지이다.[32] 다만 그 부분에 대한 기록이 나온 게 없어서 정확한 사실 규명은 어려운 상황이다.

한편 《북사》에는 제30대 왕인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즉 위덕왕은 아들이 여럿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조의 사서인 《북사》에 근거한 것인데, 정작 《북사》에는 혜왕, 법왕의 존재에 대한 기록없이 바로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위가 이어진 걸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서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인 것처럼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혜왕, 법왕이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북사》 편찬자들이 이들의 존재를 모른 채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겠거니 여기고 그들을 기록에서 누락시킨 것으로 여겨진다.[33]

거의 유일하게 백제 공주의 기록이 전한다. 능산리사지에서 발굴된 사리감에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에... 누이인 양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百濟昌王十三... 丁亥妹亮公主供養舍利)"라는 기록이 있어, 생전에 백제 왕은 이름으로 불렸고, 형공주라는 누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공주가 아니라 형공주로 볼 경우, 대략 누나 또는 공주 중에서 첫째 공주 등으로 해석되는데, '妹'의 의미가 여동생을 의미하므로 큰여동생일 가능성이 크다.

사망 기사도 묘한 여운을 주는데, 보통 《삼국사기》에서 왕이 죽으면 그냥 "왕이 죽었다. 시호를 뭐라 하고, 어디다가 장사지냈다"는 기록으로 끝맺는 게 대부분이지만, 위덕왕은 "여러 신하들이 논의한 끝에(群臣議) 시호를 위덕이라고 정했다고 적혀 있다." 물론 왕이 죽은 후 시호를 논의하는 것은 당연히 후임 왕이나 신하들이지만, 굳이 이런 표현이 붙어 있는 삼국 시대 왕은 위덕왕이 유일하다. 뭔가 시호를 두고 백제 조정에서 큰 갑론을박이 있었거나, 위덕왕 말년의 불안정했던 백제 정국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동사강목에서 '위덕왕'의 시호를 들어 이렇게 대차게 깠다.
위덕왕의 아버지가 일찍이 신라에게 죽임을 당하여 위덕왕과 신라는 실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34]이다. 왕이 즉위한 이래로 겨우 두 번 침략하였다가 도리어 참패를 당하고는 40여 년 동안 한 번도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어째서였는가? 나라의 세력이 미약하여 자기 생각대로 할 수가 없었다면 이때에 왜와 고구려가 다 신라와 화친을 잃었는데 왕은 마땅히 두 나라에 슬피 호소하여 자기의 복수할 마음을 뚜렷이 드러내 '반드시 같이 죽겠다'고 밝혀서 왜와 고구려를 함께 움직여 삼면에서 합세하여 공격하였다면, 어찌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겠는가? 묘호(廟號)[35]를 '위엄과 덕망(威德)'이라 한 것은 어떠한 뜻을 따른 것인가? 슬프도다!
동사강목 권제3 무오년 신라 진평왕 20년, 고구려 영양왕 9년 백제 위덕왕 45년ㆍ혜왕(惠王) 원년(수 문제 개황 18, 598)

한 줄 요약하면 "아들이 돼서 아버지 복수도 하나 제대로 못한 인간한테 '위엄과 덕망'이라는 시호가 어디 가당키나 하냐?"라는 평. 다만 '힘이 모자라면 고구려도 있고 왜도 있는데 왜 그들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라는 안정복의 지적은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하고[36] 기존의 왜와도 동맹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위덕왕으로써는 좀 억울한 면도 없지 않다. 게다가 그때는 고구려도 북쪽에서 일어나는 수나라와 살벌한 상황이었고 위덕왕이 죽은 그 해에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제1차 고수전쟁이 벌어져서 고구려가 백제에 눈 돌릴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왜국도 불교 수용 문제를 놓고 지들끼리 내전 중이었던지라...

3. 유물

이름이 '부여창(扶餘昌)'인데, 당시 백제는 아직 피휘를 하는 관습이 없어 왕명 표기법이 '이름 + 왕' 이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백제 왕흥사 사리함에 '창왕'이라고 표기했다.[37]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 爲亡[38]王子 立刹 本舍利二枚 葬時神化 爲三
정유년(丁酉年: 577) 2월 15일 백제왕 창(百濟王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백제 시대 왕 중 드물게 한반도에 유물이 다수 존재한다.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옆 절터에서 창왕명석조사리함[39]이 발견되었는데 '창왕 13년'(567)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접 장소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 역시 위덕왕 때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10월 10일에는 충남 부여 규암면 신리 왕흥사지에서 사리장엄구(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가 발견되었다. 이전부터 왕흥사에 대한 기록과 위치는 알고 있었지만, 드디어 구체적인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청동 사리함에는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子, 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이 죽은 왕자(위덕왕의 아들)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창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전까지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사에 따라 무왕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져왔으나, 왕흥사지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어 선왕(先王)인 위덕왕 재위 기간에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발굴한 학자 왈, 자기가 이걸 직접 파낸 게 아니었다면, 《삼국사기》와 내용이 달라 위조품이라고 코웃음쳤을 것이란다(...).

어쨌든 이걸로 정확하다고 정평이 난 《삼국사기》의 위상에 흠집이 났다(...). 이같은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 관련 유적, 유물이 워낙 적은 상황에서 이 사리함은 기존의 기록과 다른 내용을 밝힌 중요 유물이다. 문화재청은 발굴된지 불과 5년 밖에 안 된 2012년에 이 사리함들을 보물 제1767호로 등록시켰다.

4. 대중매체에서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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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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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위덕왕 본기>

一年秋七月 위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하다
六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八年秋七月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다
十四年秋九月 진나라에 조공을 보내다
十七年 제가 왕을 거기 대장군으로 책봉하다
十八年 제가 왕을 다시 책봉하다
十九年 사신을 제에 보내 조공하다
十九年秋九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四年秋七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四年冬十月 신라의 서부 변경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冬十一月 사신을 우문주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五年 사신을 우문씨의 북주에 보내 조공하다
二十六年冬十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六年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八年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八年 수에서 왕을 책봉하다
二十九年春一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一年冬十一月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三年 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六年 수가 진을 평정하다
三十六年 수의 배가 탐모라국으로 표류하다
三十九年秋七月 일식이 일어나다
四十一年冬十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四十五年秋九月 수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四十五年 수의 군도가 되기를 요청하다
四十五年冬十二月 위덕왕이 죽다

6. 《일본서기》기록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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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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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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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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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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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혜왕
(?)
아좌태자
2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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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서기》에는 558년 봄 3월 경자(庚子) 초하루에 즉위했다고 나와있다.[2] 《일본서기》 기록.[3]동국통감》, 《삼국사절요》에 따르면 차남.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의 차남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아들이라고만 나오고, 《일본서기》에서는 위덕왕의 동생이라고만 언급되며, 성왕의 몇 째 아들인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4]수서》. 그러나 이곳에는 혜왕이라고 누락되어 있다.[5]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6] 태자 시절 고구려와 전쟁할 때의 관등이다.[7] 시조인 온조왕이 건국설화에 의하면 부여의 후손 혹은 동명성왕 고주몽의 친아들 혹은 양아들이었기 때문에, 왕가가 같은 후손이란 뜻이다. 아니면 진짜 성이 같을 수도 있다. 고대 중국에서 '성'과 '씨'는 원래 다른 개념이었는데 그때 기준으로 고구려와 백제는 성(해)은 같고, 씨(고씨, 부여씨)가 다른 가문이 된다. 다만 성과 씨의 구분은 이때는 중국에서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고 한국에서도 성씨를 아예 안 쓴 경우에 대한 기록은 많아도 성과 씨를 나눠 쓴 기록이 없기 때문에 보통은 같은 조상을 두었다는 걸 가리켰다고 본다.[8] 고구려는 일기토를 벌일 때 깃발을 높이 세우고 적장의 이름을 묻는 것이 관례인 듯 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9] 《일본서기》에는 태자라고 서술했다.[10] 이는 백제의 다른 군주도 마찬가지로 고대 삼국은 피휘를 하지 않았기에 이름을 그대로 존호에 썼다. 지금 보면 이상하게 보이지만 온조왕, 의자왕 등 대부분이 이름에 왕만 붙인 형태였으며, 신라고구려 역시 비슷하다. 근데 이 때문에 고려 말기의 창왕과 혼동되기도 한다.[11] 백제 초기의 군주들은 생년이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제외.[12] 백합야 전투의 기록을 볼 때 부여창의 관위는 5등 한솔로 전체로 치면 높긴 하지만 태자에게 부여된 관등 치고는 그렇게 높은 관등은 아니다. 전근대의 성년은 만 15세 정도였고 이때부터 군역이 시작되었으므로 부여창 또한 나이에 비춰볼 때 이미 10년은 넘게 복무해온 베테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에도 성왕이 부여창이 병사들과 같이 숙식하며 지내는 걸 걱정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특별대우를 받지 않고 차근차근 실력을 증명하며 진급한 것으로 보인다.[13]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14] 처음에 부여창이 관산성 전투에서 한 번 승전하고,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달려가다가 잡혔다는 기록도 있다.[15] <김유신 열전>에는 장수 4명과 병사 10,000명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시대의 인구규모나 동원된 병력의 평균에 비교해 볼 때 1만까지는 몰라도 3만 가까이가 모두 전사했다는 기사는 과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 말기 국운을 걸고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출병한 신라가 영혼까지 끌어다 뽑은 병력이 5만 정도였다. 이들이 일거에 모두 전사할 정도로 좁은 지역에 군집해 있었겠는가도 의문이지만 실제로 그랬다면 백제는 주력군의 대부분이 증발한 상태므로 이어진 신라군의 진격에 요충지가 자동문처럼 뻥뻥 뚫려서 그대로 멸망하거나 그에 준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외적으로 고구려는 전성기에 중국 왕조의 그 많은 병력에 대적할 정도인 10만 단위의 동원력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말갈족 같이 인구 중 전투병 비중이 높았던 휘하 소수민족에서도 끌어다 쓴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륙에 대한 서북방전선을 유지하느라 불가피했는지 삼국 전투에는 그만한 병력까지는 끌어다 쓴 기록이 없다. 최다로 기록된 게 광개토대왕의 신라 구원 때 파병한 5만이었고 장수왕이 백제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동원한 병력도 그보다 적은 3만이었다.[16] 이 긴 명칭은 본명이 아니고 관직명이다. 《일본서기》에는 이 사람 말고도 또 한 명의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를 역임했던 이와이(磐井)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신라와 내통해 일본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즉 위덕왕을 살린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17] 위덕왕은 탈출한 뒤 자신을 살린 츠쿠시노 쿠니노 미야츠코를 칭찬해 '쿠라지노키미(鞍橋君)'(쿠라지는 고대 한국어로 어떤 존칭을 의미하는 걸로 보인다. 고대 한국에서 흔히 쓰인 ~지 형태의 존칭이기 때문. 뒤의 노는 연결사, 키미는 일본어 존칭이다.)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18] 기로는 60세 이상의 노인을 일컫는 말로 즉 나라의 원로들을 가리킨다.[19] 백제의 신하와 백성들이 하는 말은 일본서기 기록을 긍정한다면 그냥 면전에서 대놓고 까는 것에 가깝다. "제멋대로 하다가 이렇게 다 망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뭐 양위요? 나이 든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 대패를 당했으면 이번에는 제발 나이든 신하들의 말 좀 들으세요, 네?" 이런 식으로.[20]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이때 남녀 36,000명과 말 8,000필을 약취했다고 전한다. 허나 학계에선 과장된 전과로 보며, 실제 성과는 미미했을 것으로 보인다.[21] 하지만 《일본서기》에서 성왕의 사망 시점이 최소 동년 12월 이후인 점과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창왕 13년 정해년(567)에 세워진 점을 보면, 이는 성왕 대에 벌어진 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2]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차지했으니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가 닿지 않는데, 일설에는 신라가 길을 열어줬다고 한다. '가도정명'이 아니라 '가도정백제'. 실제로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 때 한강 유역의 주력군을 남쪽으로 보내 한강 유역의 방비가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고, 마운령비에서도 고구려가 신라의 영토 확장을 오히려 축하하거나 《일본서기》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막기 위해) 손을 잡았다는 말이 있는 것을 봤을 때,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박살내기 위해 밀약을 맺어둔 상태였다고 추정된다. 허나 이 설엔 다른 의견도 많은데, 당시 한강 유역을 막 접수한 신라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틈을 타 일부 소통로를 고구려가 장악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23] 성왕 치세에 신라가 가야 동부 몇몇 나라를 집어삼킨 뒤 남아있던 가야 제국(諸國)은 몇 차례 사비회의 등 조율을 거쳐 친백제 성향으로 기울어있던 상태였고, 관산성 전투에도 참전했다.[24] 김유신의 큰할아버지. 즉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을 죽인 김무력의 형이다.[25] 백제 산성이냐 신라 산성이냐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가 지금은 백제 산성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지만, (통일 이전의) 신라 유물도 어느 정도 출토되었기 때문에 신라가 진출한 시기도 존재했다고 추정되기도 하며, 신라가 통일 이전에 이곳을 점거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가 위덕왕 시기다.[26] 수나라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친 것은 612년인데, 이 때는 위덕왕 이후 무왕의 치세였다. 무왕은 위덕왕과 생각이 달랐던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말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면 돕겠다 했어도, 실제로 전쟁이 났을 때는 돕지 않았다.[27] 삼국사기에 두 번, 일본서기에 한 번.[28] 기록 미비로 알 수 없지만, 그의 재위 기간 내에 줄창 위기에 빠진걸 보면.[29] 백제에서 40년 이상 재위한 왕은 다루왕, 기루왕, 고이왕, 초고왕, 비류왕, 위덕왕, 무왕 이렇게 7명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백제의 전성기(근초고왕~진사왕 초기) 이후 왕은 위덕왕과 무왕 둘뿐이다. 즉 위덕왕의 치세는 무왕과 더불어 매우 긴 편이다. 더욱이 백제 초기의 왕들은 재위기간이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길어 기록이 의심받는걸 생각해보면 위덕왕은 그나마 재위기간이 매우 길었다고 확실하게 말해질 수 있는 왕이다.[30] 왕의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31] 쇼토쿠 태자의 스승, 597년 일본으로 건너감.[32] 다만 실제로 위덕왕 사후 무왕 즉위 사이까지는 꽤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 기간이 2년인데 이 사이에 헤왕과 법왕이라는 두 명이 왕이 있었다. 혜왕이 즉위 당시 70세 정도로 추정된다지만 사실 보통 부자계승으로 이루어지는 국가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듬을 감안하면 애초에 위덕왕-혜왕 계승부터가 비정상적일 가능성이 높고 혜왕은 고령으로 일찍 죽었다 쳐도 법왕까지도 일찍 죽은건 납득하기 힘들다. 이후에 40살 넘어서 즉위한 의자왕도 20년 가까이 했는데 법왕도 40~50대인데 10년도 못한건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대목.[33] 이것도 가능성이 있는데 위덕왕 이후 다시 중국에 사신을 보낸 왕은 무왕이다. 그러니까 혜왕과 법왕은 사신을 보낸 적이 없고 무왕이 혜왕과 법왕의 존재를 말해주지 않았다면 중국에서는 위덕왕 다음에 무왕이 즉위한 것으로 여겼으며 무왕이 위덕왕 다음으로 즉위했으니 그가 위덕왕의 아들일 것이라 짐작하고 그렇게 기술했다면 말이 된다.[34] 이 세상에서 같이 살지 못할 원수[35] 안정복은 '묘호'라고 했지만 사실은 시호이다. 삼국사기에도 시호(諡)라고 되어 있다. 양쪽 모두 죽은 자의 일생을 평가하고 그에 적합한 이름을 붙여 생전의 업을 심판하고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이는 것이긴 하지만.[36] 여제동맹이 실재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설이 나뉜다.[37] 무령왕의 경우에도 '부여사마(扶餘斯麻)'가 이름인데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금석문에 '사마왕(斯麻王)'이라고 기록되었다. 고구려나 신라 역시 마찬가지로 피휘를 하지 않아 추모왕유류왕대주류왕모즉지태왕융기대왕경신태왕 등 이름과 왕 자를 나란히 쓴 경우가 많았다.[38] 三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이 경우 임성태자의 존재가 부정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물론 임성태자가 워낙 기록이 제각각인지라, 성명왕의 아들인지 위덕왕의 아들인지 확실하지 않고, 심지어 무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아니, 애초에 임성태자가 실존하기는 했는지부터 확실하지 않다.[39] 창왕은 위덕왕의 본명인 부여(성) + 창(이름)에서 창 + 왕[40] 김민준의 매력적인 남성미와 연기력이 겹쳐 악역임에도 섹시하다는 반응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