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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19:47:48

을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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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대보 및 좌·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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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豆智

(? ~ ?)

고구려 대무신왕 때의 재상직을 지낸 인물.

서기 25년(대무신왕 8)에 우보(右輔)에 임명되어 군국(軍國)의 사무를 맡아보았으며, 27년에는 좌보(左輔)에 임명되었다.[1]

28년, 후한(後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입해왔는데, 그 군세가 막강해서 막기가 힘들었다. 대무신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었는데, 을두지는 당시 좌보 벼슬을 지내던 송옥구와 더불어 성을 지키면서 지구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왕은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한나라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한나라군이 오랫동안 성을 포위한 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을두지는 한나라군이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한나라군이 위나암성이 암석지대에 있어서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여겨 위나암성의 물과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한나라군에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면서 물에서 나는 잉어를 수초에 싸서 맛좋은 술과 함께 보내주면 한나라군이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며 계책을 말해 주었다.

대무신왕은 을두지가 알려준 계책을 따랐다. 당시 한나라군의 장수들은 고구려군이 오랫동안 성안에서 나오지 않고 뻐겨대자(...) 초조해하던 참이었는데, 고구려 사신이 수초에 싼 잉어와 술을 가져오자 성안에 아직도 물과 식량이 풍족하여 성을 빼앗기가 힘들다고 여기고는 화친을 받아들여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2]

삼국사기에 기록된 을두지가 언급한 위나암성의 지형묘사[3]가 오늘날 오녀산성의 모습과 부합해 고구려의 집안지역으로의 천도는 산상왕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서기 209년(산상왕 13년)에 이루어졌으며, 오녀산성과 그 근방의 하고성이 유리왕이 천도했다는 국내 위나암성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에서는 졸본성이 환인댐에 의해 수몰된, 부이강과 혼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나합성으로 비정된다.[4]

[1] 우보와 좌보는 후에 명림답부가 최초의 국상이 되기 전까지 고구려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2] 조선 때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바로 병자호란 때이다. 인조와 대신들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면서 명신 이항복의 서자 이기남을 시켜 청나라 군대에 살찐 소 2마리, 돼지 3마리, 술 10병을 보냈다. 하지만 을두지 때와는 달리 청나라 군대는 “너네 양식 없는거 우린 다 알거든? 오히려 우리가 너네한테 뭐라도 줘야 하는거 아닌가? 이런거 줄 여유 있으면 굶주리는 너네 병사나 백성들에게 나눠 주거라” 라고 실컷 비웃음만 당하고 내쫓겼다고 한다.[3]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있어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란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犒漢軍) 출처는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4]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