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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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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건국
2.1.1. 명칭2.1.2. 건국 연대 논쟁
2.2. 발전
2.2.1. 마한 통합 과정
2.2.1.1. 온조왕 완전병합설2.2.1.2. 근초고왕 완전통합설2.2.1.3. 6세기 완전통합설 (현재의 정설)2.2.1.4. 백제의 직접통치 범위
2.3. 위기 및 혼란
2.3.1. 끊임 없는 정쟁과 왕들의 시해
2.4. 중흥기
2.4.1. 북위와의 전투
2.5. 대 신라 전쟁2.6. 멸망
2.6.1. 멸망 과정2.6.2. 백제부흥운동2.6.3. 통일신라에서의 백제 유민2.6.4.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2.6.5. 당나라로 압송된 백제 유민2.6.6. 후백제

1. 개요

백제의 역사를 다룬 문서이다.

2. 역사

2.1. 건국

貴須王者, 百濟始興第十六世王也. 夫百濟太祖都慕大王者, 日神降靈, 奄扶餘而開國.
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대 왕입니다. 무릇 백제의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습니다.[1]
속일본기연력 9년(790년) 7월 17일,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들이 올린 표문 中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재취처인 소서노아들, 온조왕이라고 전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의 건국전설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비류와 온조 형제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각각 미추홀위례에 도읍을 세웠는데, 미추홀에서 건국한 비류는 결국 자결하여 그의 나라는 동생 온조에게 병합되었다고 한다.[2]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고구려 왕비였던 소서노가 남하하여 건국했다고도 한다. 《주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 등에는 시조로서 고구려의 주몽이 아닌 "우태" 혹은 "구태"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3]

확실한 것은 백제를 세운 지배 계층이 고구려계였다는 것이다. 한편 문헌 상으로는 백제와 부여의 관계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나, 고고학적 측면에서 백제와 부여의 관계가 희박함은 반론의 여지 없이 점점 정설에 가깝게 굳어지고 있다. 묘제든 유물이든 부여와의 직접적 관계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부여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국한된 것이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들이 한강 유역에 이미 있었던 해양 세력인 토돈 분구묘제 집단과 연합한 다음, 한반도로 남하해서 현지 토착 세력[4]과 융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언어가 달랐다는 떡밥도 있지만 이론도 있었으나 백제는 초창기부터 고고학적 지배층이 토돈분구묘계 및 고구려계가 연합한 국가였음이 밝혀진 요즘 와선 설득력이 크게 떨어졌다. 건길지 항목 참조.

2.1.1. 명칭

고려 시대의 《제왕운기》에 따르면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나중에는 아예 부여로 나라 이름을 바꾸기도 했는데, 백제를 부여의 계승국으로 생각한다면 "남부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 호칭은 성왕 시절에만 잠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의 최대 적국이자 고토 회복 전쟁의 대상이었던 고구려 또한 부여의 일파이므로, 성왕 대의 국명 변경은 백제가 정통 부여이며 고구려는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시대로 접어들 무렵 견훤이 옛 백제 지역에서 부활시킨 나라의 이름은 남부여가 아닌 백제였기에 주된 국호는 역시 백제로 보아야 한다.

일본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는데[5]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공존하고 있다. 웅진(熊津)의 백제식 훈독이었던 '고마나리'[6]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며, 과거 백제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가 출항했을 장소로 여겨지는 하구 지역이 노년층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구드래'[7]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니 이 또한 연관이 있을 공산이 없지는 않다. #

한편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일본의 모 교수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로 '큰 나라'라는 한국말이 '쿠다라'의 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 다만 한나마(韓奈麻)와 대나마(大奈麻)의 대응 등으로 문증되는 옛말 '하다[大]'와 달리 '크다'는 고대 한국어에서 직접적으로 문증되지 않으며, '나라'의 ㄴ 음가가 어떻게 ㄷ으로 변했는지 설명하기도 까다로우므로 확실한 가설은 아니다.[8] 참고로 '나라'는 금관국의 이표기 '소내라(素奈羅)' 및 신라 향가 안민가의 '國惡(*NALak)'으로 문증된다.

참고로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평야(百濟平野)' 등 '구다라'가 붙은 행정 지명이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병합 이후 백제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들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현재 일본에서 '백제'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은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9]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 百濟寺町)'[10] 두 곳뿐이다. 그러나 이 두 곳의 지명 또한 언제까지 존속할지는 알 수 없다. # #

2.1.2. 건국 연대 논쟁

처음으로 사료에서 백제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 〈위지〉 동이전으로, 여기서는 "백제(伯濟)"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외 사료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기록된 왕은 그보다도 10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으로서, 372년에 처음으로 중국동진과의 외교관계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칠지도는 이 시기에 백제에서 열도로 넘어간 것이라는 설이 다수설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 자체가 삼국시대에서 수백 년이 지난 12세기 중엽에 쓰여진 역사서이다 보니 그 긴 기간 동안 사료의 소실이 일어났거나 백제 당대에서부터 여러 이유로 사료가 수정되었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제8대 고이왕 이전 군주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제5대 초고왕 대 이전의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의 경우 즉위 연대 자체도 비현실적으로 길며, 《삼국사기》 내용에서도 초대 온조왕 대의 마한 정벌 기사 등 당대의 사건으로는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이를 후대의 역사가 전대로 소급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백제사의 권위자인 노중국 교수는 그의 《백제 정치사 연구》에서 제5대 초고왕을 현실적인 백제의 첫 번째 왕으로 본 바 있다.

풍납토성몽촌토성의 발굴은 이를 논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발굴로 여겨진다. 2000년대까지는 일단 이러한 건축물이 지어지려면 백제가 상당히 체계화된 국가임이 분명하고, 그 시기가 기원전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보아 제8대 고이왕 이전 백제사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시각이 늘어났다. 2001년의 논문, 2002년의 논문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중국계 유물에 대한 연대관이 정리되면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주요 부분이 축조된 시기가 주로 3세기~4세기에 걸쳐 있다는 의견이 다수가 되면서(2012년의 논문) 백제의 고대 국가로서의 진정한 출발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연대를 그대로 믿긴 어려워졌다. 다만 발견된 중국계 유물을 통해 백제가 3세기 초부터 중국의 국가와 교류했다고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왕통의 시작과 고대 국가로서의 출발이 다소 다를 수 있음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최근 고고학적인 발전에 의한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는 성벽의 일부 누층의 축조 연대를 기원전으로 내릴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축조가 이루어진 구간은 아니다. 따라서 풍납토성의 일부 하층부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층이 백제의 뿌리가 되는 원류 집단의 흔적이었을 것으로 상정하고, 3~4세기에 체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대대적으로 증축되었다고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석촌동 고분군고구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돌무지무덤들은 대강 기원후 3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되어 이 지역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3세기 중반 이전에는 고구려계 돌무지무덤이 한강 유역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고구려계 돌무지무덤들은 2세기 중후반부터 임진강 유역에 나타나는데, 주로 당대 고구려 돌무지무덤 양식 중 압록강 이남에 해당하는 묘제이며[11] 3세기 중반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 것을 기점으로 갑자기 임진강 유역에서 사라진다.

고고학적으로만 보면 온조-초고왕계로 비정되는 고구려계 세력은 기원후 2세기 중후반 즈음에 임진강 유역으로 남하해온 후, 모종의 이유로 3세기 중반에 한강 유역의 위례성 인근으로 넘어와서, 해당 지역의 토돈분구묘제를 쓰는 토착 세력과 연합해 고대 국가 단계를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구려계 세력이 넘어오기 전에 위례성 일대를 이미 차지하다가, 고구려계 세력이 넘어오자 일단 주도권은 넘겨주지만 왕비도 분명히 배출하며 기득권에서 퇴출되진 않았던 토돈분구묘제 집단은 경기·충청·전라 서해안[12]에 분포한다.[13]

이 토돈분구묘제 집단은 고고학적으로 3세기 초에 한강 유역에 나타나 기존에 있었던 고조선계 토광묘 집단 및 옥저계 중도문화 유형을 피지배층으로 아울렀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다 약 반세기 후, 상술한 바와 같이 임진강 유역 일대의 고구려계 주민과 연합하여 고대 국가 백제를 성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실과 기존 문헌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는 여전히 학계의 고민이다. 일단 백제 지배층 자체가 이원적이었음은 이제 문헌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의심할 수 없는 단계가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백제의 건국 년도는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에 발굴 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의 최초 건설 연대는 기원전이고, 이후 대대적으로 증축, 개축, 재건축 등 여러 건설 사업을 벌이면서 4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의 건축물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풍납토성의 건설 이력이 여러 차례 나타나는 것은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학계의 결론은 "백제는 약 250~300년에 국가 단계에 들어서서 대외 교류가 시작되었다"라고 정리할 수 있으며, 이 시기는 형법과 행정법 반포로 유명한 제8대 고이왕의 후기 치세 및 제9대 책계왕의 치세와 일치한다. 즉 2~3세기까지 소국 형태로 존재했던 백제는 3세기 중후반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면서 경기도 일대를 아우르며 목지국이 몰락하기도 전에 이미 마한 내 최강국으로 성장했고, 4세기 들어 대방군과의 교류와 마한 정벌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전라도 남부 마한을 완전히 통합했다는 입장이 정설이었으나, 이후 문헌 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근초고왕 시기 간접 통치설을 주장하는 문헌사학자들이 대두하게 되었다. 다만 근초고왕 대에 간접적으로 마한 지역을 느슨하게 복속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중앙 조정에 의한 직접 지배로의 전환이 늦었을 뿐, 간접 통치까지의 영토로 본다면 교과서 상의 지도도 크게 무리는 없다.[14]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도의 영토까지 직접 통치를 시작한 시기를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으로 보는 편이 대세[15]이며, 고고학자들 역시 대체로 6세기 초엽인 무령왕 대 정도 가서야 백제가 영산강 유역 일대까지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재하게 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사실 백제는 마한 연맹체 구성국들 중 하나로 출발했으니 정벌이라기보다는 기존 목지국 중심 느슨한 체제에서 중국식 군현제로의 발전을 지향하는 백제국 중심으로 재정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2.2. 발전

백제는 초기부터 강성한 국가가 아니었다.[16] 건국 초기에 북쪽으로는 낙랑군에게, 남쪽으로는 마한 연맹의 수장인 목지국에게 휘둘리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긴 했는데, 고구려신라에 비해서는 상당히 짧은 시기에 급성장한 편이라 초기의 어려운 시기는 그닥 길지 않았다. 백제는 고고학적으로 고대 국가가 된 지 불과 50년도 안 되는 시기에 상전인 목지국을 타도함은 물론이요, 기존 마한 연맹 소속 소국들도 꽤 빠른 속도로 넘어뜨리고 있었다. 이는 아무래도 백제를 건국한 주류 지배층인 고구려인들이 당대에 사회적 수준이 삼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전되어 있던 2~3세기 고구려에서 바로 남하해온 부류였던 것이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가 건국된 시기,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유역은 마한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백제 건국기에는 목지국[17]이 마한의 수장국이었다. 목지국 거수는 삼한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서 그 왕이 '진왕'[18]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백제는 마한과의 제휴, 견제, 대립, 경쟁 속에서 성장했으며, 위말갈한군현 등과도 마찰을 빚었다. 백제는 이렇게 시작부터 사생결단으로 전쟁하거나 주변 세력을 회유하면서 병합하는 방법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한강 유역에 머물렀으나, 점차 팽창하며 여러 마한 소국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고이왕(재위 234~286) 때 율령 반포 및 중앙 집권이 이루어졌다. 8대 고이왕 시절부터 낙랑군대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백제는 10대 분서왕(재위 298~304) 때 낙랑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313년~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고 무너진다.

마한 통합 과정은 현재 일치된 설이 없을 정도로 문헌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 문단이 있다. 하여간 고고학적으로 확실한 것은 3세기 말까지 백제가 경기도 지역을 석권했으며, 13대 근초고왕 때인 4세기 중반에 걸쳐 북쪽으로는 황해도 일부 지역과 남쪽으로는 금강 유역까지, 5세기 후반 들어서는 전라도 지역까지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한성백제 시기부터 호남 지방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해석이 있었으나, 이는 현재 고고학적 연구로 부인된다. 200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연구 결과 4세기 초중반까지 충청도에, 6세기 중반까지 전라도 남부에 여전히 자치력을 유지하는 소국 세력들이 온존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를 놓고 고고학자들은 6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마한 자치체가 완전 소멸한다는 입장이고, 문헌사학자들은 대체로 4세기 후반~5세기 이후 간접 통치를 실시하다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직접 지배로 넘어갔다는 입장이다.

이 부분은 문헌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완전히 대립하는 부분은 아니다. 근초고왕 재위기에 영산강 유역 세력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소국이 갑자기 고고학적으로 증발하면서 어느 정도는 성장이 통제되는 현상이 관찰되는데, 이는 역시 문헌사학계에서 제시하는 근거 자료와 어느 정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고학계는 자료만으로 간접 지배의 정도와 시기를 확정하는 게 어려운 반면, 문헌사학계는 일단 내놓을 문헌 자료가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파일:백제의 지도 (4세기, 진출지 표시).png
어쨌든 백제의 강성해진 국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재위 346~375) 시대로, 이 시대의 백제는 동진에 사절을 보냈고,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따르면 왜국과도 국교를 맺고 칠지도와 칠자경을 보내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백제는 이로써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중국 사서인 《송서》와 《양서》에는 근초고왕 때 백제인들이 요서까지 진출했다고 기록했다. 자세한 사항은 요서경략설 문서 참조.

이전까지는 고구려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으나, 근초고왕 대인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2년 후 근초고왕이 고구려평양성까지 진격하여 황해도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불구대천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근구수왕 시기에도 고구려와의 대립은 이어져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 역사상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평양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때까지 백제의 전성기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근초고왕 말년부터는 국력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라의 국력이 점점 강해져 373년에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375년에는 수곡성(현재의 황해도 신계군)을 고구려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빼앗겼음에도 보복하지 못했다.

한편 백제사에서 마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고, 백제국이 마한의 일부로 출발하였으니 마한사와 백제사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 불가능함이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백제의 발전은 그 자체가 마한의 통합 과정인 바, 해당 과정을 밑 문단에서 자세히 논한다.

2.2.1. 마한 통합 과정

마한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의 두 건국 설화에 의하면 부여 혹은 고구려계 유민인 비류와 온조 일행이 마한 지역의 일부였던 한강 하류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했다고 되어 있다. 백제는 지속적으로 전투, 압력, 협상, 설득, 교류 등의 다양한 수단으로 마한 54개국을 점진적으로 복속하면서 영역을 확장해갔다. 백제가 언제 마한 전역을 복속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다. 그동안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369년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마한 전역을 정복했다는 설이 주류였으나, 근초고왕설의 유일한 근거인 《일본서기》 기록은 근초고왕 24년 남쪽 오랑캐를 무찔렀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기록 자체가 애매한 데다가 마한 전체를 모두 정복했다는 이야기도 없기 때문에 근초고왕 정복설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이후 지역적으로 여러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면서 현재는 6세기 초까지 전라도의 일대에 어느 정도 독립적이었던 마한세력[19]이 잔존했고, 백제가 이 지역을 완전 병합하게 되는 것은 6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20]
2.2.1.1. 온조왕 완전병합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마한(왕)'을 거꾸러 뜨린 것이 온조왕 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3세기까지 경기도 ~ 충청도 일대에 걸친 통일적인 정치 세력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온조왕이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만 정복했거나 잠시 군사 활동만 하고 왔을 뿐 대규모적인 정복 활동은 하지 못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설령 기록이 사실이라고 주장해도 '마한 왕' 한 명을 몰아낸 것뿐이 되고 '마한을 정복했다'는 말이 무의미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마한을 정복했다'고 말할 만한 시점은 경기도 지역에 백제 토기가 대대적으로 확산되는 3세기 후반에 근거하여 고이왕 혹은 책계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벽골제 건축 기사 등에 근거하여 비류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근초고왕 대 초기 기사의 공백과 4세기 중반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고분군의 교체 등에 근거하여 근초고왕 대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 등이 갈리고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마한 정복'이라 함이 목지국을 타도한 걸 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고이왕 ~ 비류왕 대가 유력해진다.
2.2.1.2. 근초고왕 완전통합설
고고학적 연구가 부실했던 1990년대 이전까지는 근초고왕 때 백제가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설이 큰 지지를 받아왔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학계를 대표하는 원로 학자가 이러한 주장을 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각 대학 교수로 포진해 있었던 학계에서는 명확한 근거가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이를 정설화했고, 교과서 또한 그렇게 서술되었다. 그러나 이후 고고학적 연구가 활성화됨에 따라 근초고왕이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설은 사실상 폐기되었고,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은 차령산맥 또는 노령산맥 이북 지역까지 한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 정복설은 《일본서기[21]에 근초고왕 24년(369)[22] 남서쪽 오랑캐를 정벌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기사 자체가 사실적인 신뢰성이 없다고 하여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설에 대해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견해도 있어 왔다.[23] 또한 기록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마한 전체를 완전히 정복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게다가 근초고왕 이후에도 동성왕, 무령왕 등이 계속 남쪽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도 근초고왕의 마한 완전 정복설을 부정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한편 그 외에 일부 견해는 근초고왕 대에 마한 세력을 거의 병합했으나, 근초고왕 사후 한성백제가 쇠퇴하면서 마한 세력이 다시 부흥했다고 보는 다소 절충론적인 설도 있었다. 추가적인 고고학적 연구 결과 이러한 절충설은 폐기되었으나, 개로왕 대의 한성 함락 이후, 근초고왕이 복속시켰던 마한 영역 중 간접 지배하던 영역들, 즉 금강 유역권, 영산강 유역권은 백제의 통제를 벗어나면서 잠깐 다시 번영하던 사실은 재확인되었다. 그중 전남 동부 남해안 일대는 아예 가야한테 포섭되어 백제의 영역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24]

2000년대 이후 전라도 남부지역의 고고학 발굴 결과들이 나오면서 6세기 중반까지 전라도 일대에 독자적인 옛 소국 세력들이 존재했음이 사실로 확인되었고, 근초고왕대에 마한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설은 현재 부정된다. 현재 학계에서는 근초고왕 대 백제의 남쪽 경계선에 대해 <차령산맥 이북설>과 <노령산맥 이북설>이 논쟁 중에 있다. 일부는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 지역, 즉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 중 서쪽 해안 지역은 백제에 복속되었고, 동쪽 산악 지역은 마한에 남아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체로 학계 정설은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 당시 백제의 직할지가 된 지역은 노령산맥 이북 지역이고, 노령산맥 이남과 영산강 유역은 공납 혹은 간접 지배 상태로 있다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편입된 것으로 본다. 이런 내용들이 문헌적 근거로 나타나는 건 《일본서기》인데, 《일본서기》 자체가 철저히 백제 왕실과 조정 관점에서 서술되었다는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곤 하지만 그건 가야, 신라를 백제의 부용국 내지 속령으로 서술하는 태도나 아예 가야, 신라, 백제 등을 일본 천황의 부하 나라로 서술하는 내용에 대한 것이다. 마한과 백제의 관계에 대해선 《일본서기》가 서술하는 내용 중 일부가 꽤 들어맞는 부분이 있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마한에 대한 직접 지배 완성은 무령왕 즉위기간인 6세기 초반이라는 입장은 학계 공통 의견이다. 근초고왕 시대 직후인 4세기 후반~5세기 중반 때 금강 하구 지역에 백제식 묘제가 발견되는 것은 이 지역이 미약하게나마 중앙 정부 통제를 받았다는 것을 뜻하며, 이런 고분은 백제로부터 지원을 받는 유력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초고왕 재위기에 영산강 유역의 유력한 소국 하나가 갑자기 그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공중분해되고, 적어도 한성 함락 시기까진 그 세력의 성장이 억제되는 것 또한 드러나는 현황이다. 또한 고이왕의 목지국 타도 후 서진에 백제의 마한 맹주 자격을 부정하는 의미로 마한을 자처하며 서진에 조공했던 바로 그 신미국인 해남 군곡리 세력이 비록 근초고왕 시대에는 침미다례의 주도권을 영암 시종면, 해남 신월리에게 내주었을 망정 여전히 존속해있었다. 그러나 이 해남 군곡리 세력이 동성왕 시기에 초토화되어 영원히 사라지는데, 이는 한성 공함 이전으로 상태를 회복하려는 웅진백제의 조치에 반항하는 침미다례 세력에 대한 본보기성 탄압이 매우 유력하다. 즉 백제 부여씨 왕실이 영산강 유역 전체를 직접 지배 지역으로 전환하진 못했어도, 하나로 뭉쳐서 다른 세력을 향해 엇나가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력과 외교력을 동원했다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다.[25]
2.2.1.3. 6세기 완전통합설 (현재의 정설)
1980년대 이전 학계에서는 당시 한국 사학계의 권위자인 이병도의 의견에 따라 근초고왕 시기를 전후로 목지국 등 마한의 전 지역을 백제가 직접 지배 지역으로 병합한 것으로 추론하는 시각이 우세했다. 명확한 근거가 전혀 부재하다는 비판이 당대에도 있었지만 거의 묵살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전라남도 여러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결과들이 연이어 발표되자 결국 기존 학설이 완전히 뒤집혔다.[26]

근래의 여러 발굴조사 결과, 6세기 초반까지 전라도 남부 일대에는 독자성을 유지하는 세력이 세 부류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침미다례(신미국)였던 영산강 유역 세력이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해상으로 백제, 신라, 가야, 왜, 중국과 교류했고, 그 일대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하나의 분구에 추가장하는 대형 고분이 출현하기도 했다.[27] 나주시 ‘신촌리 9호분’을 만들려면 연인원 5,000명 이상이 동원됐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에, 이들 세력의 권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 가능하다.[28] 다만, 영산강 유역 세력은 흡사 후기 가야 또한 그랬듯 어떤 한 세력이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는 일 없이 서로 어느 정도 자립성을 유지하는 단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거듭 확인되고 있다. 즉 고대 국가 단계에 이르진 못했다는 것이고, 세력도 독자성도 어느 정도 응집성이 있었던 후기 가야 집단만 못하다는 것이다.

백제의 영향력은 전라도 남부지역에 4세기 후반부터 침투하여[29] 6세기 초 무령왕 대 완전히 물리적으로 복속시켰으며, 직접 지배지로 개편되면서 방 - 군 - 성제가 시행되었던 성왕 때인 6세기 초중반이 되면 행정적으로 정비된다. 백제는 6세기 초까지 이곳에 직접 통치를 이룰 여력이 없었다. 지속적으로 강성해지며 남하하는 고구려를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475년 개로왕대 한성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바닥부터 다시 올라와야 했다. 나주 신촌리 고분군 등은 이 시기에 그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백제계 석실분으로 보아 백제 측에서 직접 개입하기도 했지만,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에 부족한 힘을 보탤 세력을 찾아 왜국계 세력을 끌어들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방후원분은 한 지역에 1개, 많아야 2개가 존재하는 정도이고,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하는지라 왜국계 세력은 백제와 협력한 개인이 사망하여 전방후원분을 축조한 이후에는 한반도에서 기반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현지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압력이 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기록상으로 볼 때 백제는 동성왕[30]무령왕 등을 거치면서 6세기 초반에 전라남도 전역의 마한 세력도 완전히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무리 보수적인 시각인 무령왕 정복설로 접근해도 660년 백제 멸망 직전까지 전남이 백제령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절대 성립할 수 없다.

전라도 남부의 아직 통합되지 못한 세력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전쟁과 같은 긴장 관계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전남 옛 마한 거수국들과 백제간에 전쟁이 없었다고 보이며, 고분군의 현지 세력들 또한 對백제 협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남부 지역에 대한 영토화 과정 전체는 백제가 통제하고 있었고,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이었기에, 현지 세력들이 강한 힘을 가진 백제를 인정하며 자발적으로 백제에 순응하며 점차 관료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성백제 시기부터 고흥 길두리 백제 금동관, 풍납토성 출토 영산강 토기 등의 교류관계가 보이지만 6세기까지 독자문화를 유지했던 점이나, 나주 송제리 고분군(왕실과 밀접한 백제 중앙세력)이 인근 나주 복암리 고분군(독자 문화의 재지세력)과 축조시기가 분리되지 않고 겹침 등이 그 근거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군사적 긴장 관계가 존재했다는 의견도 있다. 우선 동성왕[31]의 탐라 정벌기록과 무령왕대의 섬진강 유역(임나4현) 진출기록을 보았을 때 백제가 전남 정벌에 나섰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최근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미루어 볼 때 서남부 영산강 유역 세력은 멸망하기 직전까지 백제와는 어느 정도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했으며, 일본, 신라, 가야와도 독자적인 교류 관계를 가져왔음이 밝혀졌다.[32]

마한의 성곽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마한의 세력이 대규모 성곽을 건설할 만큼 강력한 통일 세력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백제 입장에서 보자면 백제가 주로 공세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만큼 굳이 성곽을 건설한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백제도 성곽을 거의 건설하지 않는 나라였다. 백제의 성곽 유적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무척 희귀하며,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성곽도 토성 위주다.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나중에 신라가 병합하면서 백제의 성곽을 파괴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신라는 나당전쟁을 위해 기존 백제, 고구려의 성곽을 개축하는 경우도 많았고,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 기록 등을 볼 때 수도를 제외하면 별로 성곽을 쌓지 않는 스타일인 것으로 파악된다. 일단 백제군 자체가 귀족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병사들을 돌려보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을 쌓고 이를 유지할 여력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 인근까지도 몇 차례 진출했지만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철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33] 한편 마한이 성곽을 구축하였다 하더라도 백제가 이를 정벌, 병합하면서 당연히 토성을 파괴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의 토성이 현재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위에 서술되어 있듯 백제 자체가 성곽을 잘 구축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신라에 병합되면서 일부가 파괴되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한편 현재 '마한'으로 단순히 지칭하고 있는 전라도 지역을 계속 '마한'으로 부르는 건 잘못되었다는 설이 대두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및 《진서》 〈동이전〉에서 '마한'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지 200년이 넘게 지난 시점까지 남부지역 일대가 어느 정도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34]

때문에 최근 고고학계의 일각에서는 이 지역을 '영산강 지역' 내지 '전라도 남부 지역'이라고 하여 논란을 일으키지 않을 표현을 써서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까지 다수의 학자들과 전라남도 현지 지자체들은 대체로 '마한'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마한'이라는 단어 자체가 단일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 퍼진 수십여 소국들을 통칭하는 용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변한이 가야로 명칭이 변한 것처럼, 영산강 유역 세력 또한 자신들을 지칭하는 별칭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라를 통해 기록이 후세까지 전달된 가야와는 달리 전라남도 마한에 대해서는 남은 문헌 자료가 거의 없고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적 연구에 의존하기에 이를 밝혀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주 오해되는 사실인데, 전라남도 마한으로 자꾸 잘못 통칭되고 있는 영산강 유역 세력은 실상은 오늘날의 전라남도 서남부 1/3밖에 차지하지 못한 군소 세력이었다. 즉,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북 내륙 세력, 나중에 가야한테 포섭되어 잠깐 백제를 꽤나 긴장타게 만든 전라도 동부 섬진강 일대 세력, 요즘 고고학 발굴이 가장 핫한 편인 영산강 유역 세력 등 이 셋은 다 제각기 남이고 이해관계가 달라서 서로 뭉치는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영산강 유역 세력 탓에 주목받지 못하는, 전라도 동부 세력에 대해서 알아보자. 영산강 유역에 비해 경제든 문화든 인구든 분명히 뒤떨어졌던 섬진강 유역권, 즉 오늘날의 전남 동부는 그 역사적 전개가 대단히 특이한 편이었다. 기원전 4세기까진 오히려 영산강 유역권보다도 발전했고 잘 살았으나, 전국시대의 연나라가 고조선을 밀어내던 바로 그 시기에 영산강 유역권에 조선계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영산강 유역권이 섬진강 유역권을 크게 앞지르게 되었다. 이 우열은 섬진강 유역권이 가야의 교역 및 지배를 받아 크게 개발되는 4~6세기까지 무려 1,0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섬진강 유역권은 4세기엔 아라가야, 5세기엔 소가야 등과 거래를 터서 발전하다가 5세기 중후반 들어선 아예 대가야의 영역이 되어 크게 발전하게 된다. 훗날 백제는 대가야로부터 490년~512년 동안의 과정을 거쳐 무력으로 이 지역을 빼앗게 되며, 516년 들어 남원과 임실 일대는 대가야에게 다시 빼앗기지만 이때는 여수, 순천 일대를 굳건하게 고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520년대 초 즈음에 남원과 임실을 완전히 대가야로부터 도로 빼앗아온 다음, 그 후에는 아예 경상남도 함양, 산청, 하동, 남해 등까지 들어가게 된다. 이 이후로 섬진강 유역권은 영산강 유역권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산하로 복귀하게 된다. 이걸 보면 백제가 전쟁없이 마한을 통합했다는 주장은 적어도 영산강 유역에 한해서만 사실로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전남북 동부가 가장 최우선 제휴 대상으로 택한 건 어디까지나 반로국(=대가야) 세력이었고, 백제가 이들을 산하로 데려오려면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로 그걸 관철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만 백제가 그렇다고 섬진강 유역권에 살던 가야인들을 마구 죽이거나 쫓아내진 않은 것 같고, 한동안은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해주었으나, 보장받은 자치나 후대는 영산강 유역권에 비해 명백히 그만 못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시 영산강 유역권에 비해 뒤쳐지게 된다. 백제는 군수는 분명 중앙에서 파견하여 직접 지배를 관철했으나 현령격인 성주 자리는 가급적 토착 세력권에게 양보했고, 물론 영산강 유역 세력가들은 대부분 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섬진강 유역권 유력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지 못했고 군수 밑의 성주까지 죄다 백제 중앙에서 파견된 자들이 도맡게 된다. 우선 이 지역은 신라 및 가야와의 접경지였기에 백제가 토착 세력만 믿을 수가 없었던 데다, 섬진강 유역권 자체가 동성왕에게 순순히 항복한 영산강 유역권과는 달리 대가야 편에 서서 저항을 멈추지 않고 무력으로 평정되었던 것이 이유였다.

다만 이 6세기 통합설이 간과하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고고학적 변화 양상은 정치체적 변화에 맞추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후행한다는 점이다. 일례로 고구려만 보더라도 《삼국사기》 상의 옥저, 한사군 지역에 대한 정벌 시점보다 실제적인 고고학적 변화 양상이 늦게 나타나지만 이를 두고 <고구려본기>의 해당 기사를 의심하진 않는데 이는 정치체가 멸망하거나 바뀌었다고 해서 토착 집단의 생활 양상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고구려본기>와 달리 <백제본기>는 초창기 연대부터가 왜곡되었기 때문에 백제사를 보수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있고, 그렇기에 백제의 마한 정벌 역시 최대한 보수적으로 보는 것이다.[35] 아무튼 서구적 사고관의 영향을 받은 현재의 사학계는 편집자에 의한 왜곡 가능성이 존재하는 문헌 사료보다 실증적인 검증을 거친 고고학적 성과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고, 무령왕대에 가서야 백제가 마한 정복을 완료했다는 설은 분명 고고학적 성과에 기반한 것인데 고고학적 변화 양상이 무조건적으로 정치체 변화와 동일한 시기에 딱 떨어져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마한 전 영역의 백제화 양상이 6세기 초에 발생한다는 사실이 무조건 정치적 복속이 무령왕대 완성되었다는 점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6세기 통합설은 현재까지 과학적 접근에 기반한 가장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설임은 분명하지만 이 역시도 아직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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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4. 백제의 직접통치 범위
6세기 초반 무렵 백제가 옛 마한 일대를 완전한 직접 지배지로 편성해 중앙 조정에 의한 직할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 된 현재는,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의 직접 지배 영역과 간접 지배 영역이 어디어디였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5세기까지 백제는 적어도 경기도 남부, 충청도 북부, 전라도 서북부 지역 및 일본으로의 항로에 중요한 전남의 거점 몇 군데는 직접 지배를 실시했고, 충청도 남부 및 전라도 일부에 대해서는 간접 지배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경기 남부 및 충청 북부지역에서도 마한 재지세력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이 있는 반면 빠르게 백제화되는 지역도 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여주는 유적이 화성 마하리 고분군과 오산 수청동 고분군이다. 화성 마하리와 오산 수청동은 모두 경기 남부지역에 위치하지만 무덤의 변화 양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마하리 고분군은 목관묘(널무덤) 또는 목곽묘(덧널무덤)에서 석곽묘(돌덧널무덤)와 석실분(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 반면 수청동 고분군은 주구토광묘(주구움무덤)라고 하는 마한의 특징적인 무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뿐만 아니라 같은 주구토광묘라고 하더라도 경기 남부지역과 충청 북부 그리고 각각의 지역 내에서도 무덤의 방향, 부장품(껴묻거리)의 위치 등에 차이가 나타난다. 즉, 지역적인 특색이 상당히 강했던 셈이다. 게다가 경기도 김포시, 충청남도 서산시 등 서해안 지역을 따라서는 주구토광묘와 형태는 비슷하지만 축조방법이 다른 '분구묘'라고 하는 특징적인 무덤이 확인되고 있다[36]

간접 지배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이는 충청도 남부 지역과 전라도 일부, 강원도 일부 영서 지역에서는 유력세력 또는 요충지에 위치한 세력에게 수준높은 물품을 하사함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수준높은 물품이란 바로 금동제품.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고창 봉덕리, 익산 입점리, 고흥 길두리에 있는 무덤들에서 백제의 금동관모, 금동신발 등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는데, 간접 지배 지역에 대해서만 금동제품을 하사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 위에서 언급한 직접 지배에 해당하는 충청 북부지역에서도 금동제품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경기 남부지역까지가 직접지배의 한계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금동제품의 성격을 다르게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2014년 경기도 화성시 요리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백제의 세력권과 금동제품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더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남부지역은 지역마다 다르나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까지 어느 정도 자치력을 유지한 세력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37]

전라도 북부 및 금강 하구 지역은 백제의 금동제품이 확인되고 분구묘를 비롯한 마한의 무덤이 확인되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마한•백제 관련 고고학 연구는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을 뿐 상당히 미흡한 실정이다. 때문에 마한•백제 역사 규명을 위해 향후 관련 지역의 본격적인 고고학 연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구는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개발로 대다수의 고분들이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북 초촌리 고분군의 경우 1978년 발굴 조사 당시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분이 211기에 달했으나, 현재는 거의 부서진 상태다.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북쪽의 금강 하구 지역은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5세기에 이미 마한의 분구묘가 백제의 석축묘로 대체되었다. 백제의 웅진 천도 무렵 이미 군산 지역은 백제 영역화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사실 과거부터 군산 대야면 등에서 마한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된 적이 있었다. 군산, 익산 지역은 백제 무왕 시절 <익산 천도설>이 크게 부각되면서 아무래도 백제사가 마한사보다는 문헌적으로 규명하기 쉽고 인지도도 높기에, 마한사 연구는 상대적으로 자제되었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그 일대를 마한 아닌 백제로 언플하려고 일부러 연구를 억제한 건 아니다. 익산 일대가 백제의 제2수도로 자리매김된 건 사비백제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후 지금 시점에 와선 익산 건마국에 대한 연구 또한 크게 진행되어, 건마국과 준왕 사이의 관계 또한 거의 규명된 단계에 있다.[38]

군산 바로 아래인 구 이리시, 미륵산 일원과 완주 지역에서는 5세기 중엽까지도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 이유는 미륵산에서 모악산에 이르는 분지형의 공간적 범위, 곧 만경강을 중심으로 군집을 이루고 축조된 토광묘 집단은 마한 성립의 주체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군산 지역에 비해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주 혁신도시 조성시 발굴된 고분에서는 이미 마한이 백제에 완전히 귀속된 이후인 백제 말기에 건설된 고분임에도 마한 분구묘 양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최근(2018년) 발표된 전라북도 정읍 지역 고고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읍 지역에서는 웅진 시기(475~538년)에 마한계 분구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백제계 석축묘가 소수 분포하고 있었으나, 사비 천도(538년) 이후 백제계 석축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전라남도와 인접한 전라북도 정읍 지역은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에도 간접 지배가 이루어지다 사비 천도 이후 백제에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해석된다. 즉 전라남도 마한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직접 지배 영역이 된 것이다. 정읍 지역의 마한 분구묘는 만경강 지역 분구묘보다 규모가 크고 집단화되어 있어 이 지역에 강성한 재지 세력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삼서》를 인용해 서술한 근초고왕 때 고사부리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사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백제 고사부리성의 축성 시기가 4세기 중반으로 나오고 건축 양식도 백제계 토성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할 영역이 되었다고 하나 계속해서 마한 토호 세력의 존속이 나타나고 있기에, 일부 거점만 직접 지배하며 재지 세력에 의한 느슨한 간접 통치를 이루다 6세기 초반에 완전히 직할 영역이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2.3. 위기 및 혼란

침류왕(재위 384년 ~ 385년) 때 불교를 수용했다(384년).[39] 근초고왕의 사후 이어지는 근구수왕(재위 375년 ~ 384년), 진사왕(재위 385년 ~ 392년), 아신왕(재위 392년 ~ 405년)을 거치면서 국세가 현격히 약화되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으나 국력이 크게 소모된 반면 영역화한 지역이 적었다. 근구수왕 대 평양성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진사왕 원년에 청목령(개성)에 방어성을 축조하고 관미령(한강 또는 임진강 연안)에서 전투하는 등 백제의 방어선은 이미 예성강 선으로 후퇴해 있었다. 예성강 방어선도 진사왕 말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갈려버렸다. 백제는 외부로부터 고구려의 압박뿐만 아니라 내부의 끊임없는 정쟁과 권력 암투로 혼란한 시기를 보냈다.

야심과 집념의 소유자였던 아신왕(재위 392년 ~ 405년)은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왕위를 가로채 간 진사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왜국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후 진사왕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다. 아신왕은 왕위에 오른 후 고구려 땅이 된 관미성을 차지하기 위해 수 차례 고구려를 공격(393년 정월, 394년 7월[40], 395년 8월, 395년 11월)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고구려의 반격으로 영토와 병력을 계속 상실하면서 백제의 국력이 상당히 소진되었다. 아신왕의 계속된 공격에 분노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백제 원정을 단행하여 한강 이북의 58성 700촌을 점령하고 백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41]. 수도가 함략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신왕은 성문 밖으로 나와 광개토대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러나 이같은 굴욕적인 패배 이후 아신왕은 복수에 집착하여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위해 더욱 강도 높은 전쟁 준비에 매진했다. 아신왕은 397년 5월 왜국과 가야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영(전지왕)을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아신왕은 백성들을 수시로 군사 훈련과 축성 공사에 동원했다. 398년 마침내 고구려 정벌을 위한 대규모 징집을 실시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군사 훈련과 징집에 지친 백성들이 이웃나라인 후연, 왜, 가야, 동진, 그리고 적국인 고구려, 신라, 말갈, 전진으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백제의 인구가 감소하면서 결국 고구려 정벌은 취소되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신라로 도망가자 아신왕의 분노는 신라로 향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것은 항복을 펑크내고 광개토대왕을 기만한 것이다.

399년 아신왕은 가야ㆍ왜와 연합해서 대규모로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와 동맹 관계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이 출병하는 바람에 패배했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403년에 가야와 왜를 또 끌여들여 신라를 침공했고, 404년 고구려가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아신왕은 또다시 왜ㆍ가야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의 대방ㆍ평양을 공격했다. 후연과의 전쟁 중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은 급히 친위부대를 이끌고 나타나 왜ㆍ백제ㆍ가야 연합군을 섬멸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경기도 북부와 개성의 주요 군사적 요지는 수복했던 걸로 보인다. 왕에 대한 국내의 불만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405년 아신왕은 정쟁으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나마 한성 포위 때 상대적으로 꽤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준 바 있는 광개토대왕의 고구려를 격분하게 만들었고, 강원도 영서 지방과 충북 일대는 끝내 되찾지 못하여 웅진 시기까지도 그 루트를 통해 침투해 오는 장수왕의 고구려군에게 개로왕 시즌 2를 찍기 일보 직전까지도 갔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개로왕 때까지 더 게겨보는 건 불가능했다.[42]

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던 아신왕은 즉위 후 왜와의 우호 관계에 상당한 공을 들였었다.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할 연합군을 편성하기 위해 왕인, 아직기 같은 석학들을 보내어 백제의 선진 문화를 전파시켜 줌으로써 왜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 아신왕의 대규모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왜국으로 도망친 유민들의 행렬도 왜국이 한 단계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아신왕은 태자(전지왕)[43]를 왜국으로 보내 장기 체류시키기도 했다. 전지왕의 경우 왜국에 있다가 돌아와서 왕이 되었는데, 볼모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진짜 볼모라기보다는 백제의 국제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해외 유학을 보내놓은 것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44] 하지만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노객이 되겠다고 말하는 굴욕을 당한 직후 왜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면서 태자를 보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볼모의 성격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신왕 사후 태자 영(전지왕)이 왜국에 있었던 까닭에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섭정이 되었으나 아신왕의 막내 동생 설례가 정변을 일으켜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폐왕 설례)이 되었다. 왜와 해씨 세력의 도움을 받은 태자가 내분에서 승리하여 왕위(전지왕(재위 405년 9월 ~ 420년))에 올랐지만, 즉위 후 해충, 해수, 해구 등 그를 왕위에 올려준 외척 해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송서》에 의하면 서진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전지왕 때의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땅을 거점삼아 백제군을 두었다고 한다.

전지왕 이후, 고구려가 장수왕(재위 412년 ~ 491년)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맞는 동안 백제는 계속해서 어린 왕이 즉위했다가 젊은 나이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죽는 일이 반복되었다.[45] 이 시기 백제는 잦은 섭정으로 외척 세력인 해씨 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둘러싼 권력 암투 등으로 왕권이 약해지며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구이신왕(재위 420년 ~ 427년)과 비유왕(재위 427년 ~ 455년) 모두 정변으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란으로 선왕이 살해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즉위한 개로왕(재위 455년 ~ 475년)은 즉위 후 내분으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46] 백제 조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456년 12월 고구려 장수왕이 침공해 왔으나 신라의 원군으로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막아내었다. 오랜 내분 끝에 개로왕이 마침내 내분을 수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47]

고구려의 위협에 압박감을 느낀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협공을 가하자고 제안했으나 사신이 고구려에 발각되는 바람에 오히려 장수왕의 분노를 초래하고 말았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선조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 원정을 단행했다. 개국 이래의 수도였던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왕족들이 장수왕의 고구려군에게 비참하게 처형되는 등 거의 파멸상태에 이른다(475년).[48]

이때 나제동맹 관계에 있었던 신라가 보낸 지원군 및 백제 남부 귀족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성이 함략되고 말았다. 그때 신라에서 지원군을 얻어 돌아오던 개로왕의 동생 문주는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들었으나, 포기하지 않고 신라군과 함께 그대로 북상하여 위례성으로 입성한다. 이후로는 약 한 달 동안 한북으로 물러가 동향을 지켜보는 고구려군과 대치하게 된다. 이미 개로왕 때부터 지방 세력 등용과 중시는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한성에 기반을 두는 백제 왕실이 근거지 자체를 남쪽으로 옮기기는 망설여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로 우리 생각같이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었기에 공주 천도는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문주는 결국 결단을 내린 후 신라군과 함께 남하하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는 웅진(공주)에 새로 도읍을 정하고 즉위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문주왕(재위 475년 ~ 477년)이다. 여기서 개로왕이 백제 지방 귀족들에게 지지받지 못해 신라군만 지원왔다는 오해가 있으나, 개로왕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문제는 지나친 지방 귀족 우대로 인한 수도 귀족들의 반감과 불만이었기에 그랬을 개연성은 매우 낮다. 신라군이 의외로 빨리 도착한 건, 당시 신라 왕실이 집중적으로 개척한 충북 및 경북 조령, 추풍령 일대 정예군이 한성에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49]

다행히 문주는 신라군의 도움으로 웅진성을 구축했고, 충청남도 지역 및 전북 서부, 전남 내륙 일대 귀족 세력들의 백제 왕실 지지는 여전히 확고했다. 이 웅진 천도 시기는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멸망한 이후의 동진과 상황이 엇비슷하긴 했다. 북방 세력에게 박살나서 군주가 죽었고, 남쪽으로 피신했으며, 외적의 방어에 좀 더 쉬운 곳에 새로 도읍을 정했다는 것. 하지만 분명히 말하자면 그나마 백제가 동진보다는 형편이 좋았다. 백제에겐 신라라는 강력한 원군이 있었고, 중앙군도 편제가 모조리 다 무너진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성 공함 과정에서 고구려군에게 상당 부분 적지 않은 피해를 준 탓에 고구려 또한 강 건너 코 앞에 있는 신라-백제 연합군에게 감히 정면도전해오진 못했었다.

한편 고구려 장수왕은 문주가 남하한 걸 확인한 후 군대를 재편성하여 내려와 한성을 정식으로 점령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세종시 남성골산성[50] 및 세종시 새롬-나성동 일대, 대전 월평 산성 등을 점령해서 군지휘부 등을 꾸렸다. 세종시 새롬-나성동 일대가 고구려에게 넘어간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이 일대는 한성백제가 옛 마한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대단히 오랫동안 공을 들여 구축했던 특별 행정 타운이었다. 그런데 그 성과를 고구려가 군사력으로 점령하여 냅더적한데다, 그곳은 웅진성과 불과 거리가 15~20km 밖에 되지 않았다! 웅진백제는 새로 꾸린 수도에서 15~20km 앞에 고구려 군세를 두고 십수 년 동안이나 견뎌야 했기에 대혼란의 아노미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다 빼앗긴 아신왕 당시 상태에 거의 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세종시 동쪽 괴산, 동대전, 보은, 청주 문의면 일대를 장악해서 백제를 지원사격해 주던 신라가 고구려에게 괴산, 청주 문의면 일대를 잃어버려 동쪽으로 전선을 물린 정황이 드러나는데, 이는 고구려가 백제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걸 꾸준히 방해하던 신라가 거슬린 나머지, 신라에게도 공세를 퍼부어 밀어내 버렸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백제와 신라가 워낙 우주방어를 잘해냈기에 고구려의 한반도 제패는 좌절되고 말았으나 백제가 이 시기에 느껴야 했던 멸망의 공포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최근 고고학 연구가 더 진행된 현재, 고구려가 생각 외로 남한 지역에 고분을 꽤 남긴 상태이며, 어떻게든 예산 부족을 커버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남긴 군사 유적을 최대한 재활용하려 했다는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즉 삼국통일에 별 의지가 없었다는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한반도 전체 장악을 결코 포기한 바 없다는 얘기다. 고구려 입장에서 마침 물길이 활개치던 북쪽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지만, 몇 발짝만 더 가면 신라는 몰라도 웅진 바로 앞까지 진출한 상황에서 백제 왕실 몰살을 통한 개로왕 시즌2는 확실히 고지가 보이는 입장이라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웅진백제는 부여씨의 왕권이 크게 실추되어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났고, 조정에서는 좌평 해구 등 외척 세력인 해씨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진로 등 진씨 세력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수시로 정변을 일으키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문주왕이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우려고 동생 곤지를 중용했으나 이에 반발한 해구에 의해 문주왕이 암살되고 말았다. 이어 문주왕의 장남 삼근왕(재위 477년 ~ 479년)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어린 왕은 실권이 없었으며, 권신 해구가 섭정을 위임받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479년 해씨 세력과 정쟁을 벌이던 진씨 세력이 마침내 해씨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이때 삼근왕도 죽음을 당했다.

2.3.1. 끊임 없는 정쟁과 왕들의 시해

백제는 왕비족 가문들간의 끊임없는 정쟁과 정변이 연이어 터지며, 이러한 난리통 속에 수많은 왕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제 명에 죽은 왕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역사적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근초고왕 이후를 보면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부여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정변으로 시해되었거나 또는 시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최후를 맞았고, 21대 개로왕과 26대 성왕은 각각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군에게 대놓고 전장에서 참수당했다.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정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시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원래 고대 시대 왕과 귀족은 부족장에서 시작되어 가장 강한 부족이 왕족이 되고, 그 다음으로 강한 부족이 왕비족이 되었다. 왕권이 약한 고대 국가에서 귀족(부족장)들은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나 마찬가지였다. 백제의 경우, 왕비를 독점적으로 배출한 왕비 가문(대성팔족)의 세력은 거의 부여씨 왕족에 근접할 정도로 막강했다. 이들 왕비족의 세력을 얼마나 빨리 억제시키느냐가 진정한 왕권 강화인 동시에 중앙 집권화가 되는 것이었는데[51], 백제 왕족인 부여씨는 왕비족을 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백제의 왕비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반대 파벌 의 왕을 시해한 후, 정권을 차지해 새로운 왕을 앉히는 것을 반복했고, 이렇게 해서 즉위한 왕들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귀족 세력들에게 권력을 내주고 마는 악순환이 백제 시기 내내 반복된다. 백제의 경우 왕족인 부여씨가 고구려로부터 이주해 온 세력이었기 때문에 인구 등 규모에 있어서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고, 이 때문에 한성 토착 세력이었던 '진씨'와 '해씨'의 도움 없이는 국가의 유지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백제에서는 토착 세력인 진씨와 해씨가 오히려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건국 때부터 진씨와 해씨라는 두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등한 세력의 왕비족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어쩌면 이러한 연이은 비극의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는 건국기부터 '해씨', '진씨'가 왕비 가문으로서 왕권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려왔다. 이 두 가문은 정쟁을 통해 자신들끼리 정권 교체를 이루며 권력을 양분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정권 교체란 바로 왕의 시해다. 왕이 죽어야만 자체 가문 출신의 왕비로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웅진 천도 이후 동성왕 시대부터는 충청남도계 토착 세력인 '사씨', '백씨', '사택씨', '목씨' 등이 왕비족으로 가세하면서 왕비 가문은 대성팔족으로 확대, 정사암 회의를 지배하게 된다.

이웃 나라들과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의 경우 왕비족이 절노부 하나여서 왕비족들 간의 정쟁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신라의 경우 건국 초기 왕비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6부 촌장의 6개 성씨(이씨, 정씨, 최씨, 손씨, 배씨, 설씨)가 있었다. 그러나 이 6개 성씨들은 서로 엇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특정 가문이 왕비족으로 부각되지 못했다. 이후 신라 왕족 김씨는 아예 성골끼리 통혼하는 관습을 만들면서 왕비족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대성팔족으로 상징되는 중앙 귀족들과는 별도로 백제는 지방 세력들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마한의 소국들이 순차적으로 백제에 병합되면서 마한의 기존 부족장들이 백제의 지방 귀족이 되었는데, 신라가 현령까지 중앙에서 파견했던 반면 백제는 각 군의 현령 자리 하나는 토착 호족에게 양보해주었다. 물론 백제라고 저항하는 마한 소국들을 마냥 유화적으로 대했던 건 아니었다. 목지국 본류 세력은 3세기 후반에 고이왕의 기습으로 함락되어 복속된 이후에도 계속 저항을 멈추지 않다가 4세기 중반에 완전히 공중분해되어 초토화된 것으로 드러나며, 충청권역에서 이런 식으로 해체당한 소국들이 여럿 있고 당연히 침미다례 권역에서도 싸그리 밀어버린 소국이 최소한 둘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제는 하극상을 일으켜 목지국을 타도한 입장인 이상 어느 일면은 옛 마한 소국의 거수국 후예들을 유화적으로 대우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백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영산강 유역 세력은 일시적으로 이탈했을 가능성이 고고학적으로 제기되며, 호남 동부 일대는 아예 가야에게로 이탈하고 만다. 게다가 한성 및 한강 유역은 백제 왕실이 시작한 지역으로, 역사적 명분 뿐만 아니라 백제 왕권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인 군사,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남하로 이게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이러니 혼란이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웅진백제 초기에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건 오히려 왕권 장악을 노린 현지 토착 귀족이나 남래한 옛 한성 귀족 세력의 다툼이 주 원인이지, 백제에게 복속한 마한 옛 거수국들이 정면도전한 것이 이유는 아니었고, 전남과 전북에 걸쳐 당시 세력을 유지한 마한 시절부터의 거수국 세력은 크게 보아 셋인데 이들은 저마다 정치적 견해나 경제적 이해 관계가 각기 따로인 집단들이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오히려 동성왕 당시 백제가 크게 국력이 신장된 것은 이 지방 세력들의 포섭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백제가 무력을 동원했지만, 이런저런 부분에서 나름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등 회유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백제 중앙 정치가 어지러운 건 지방 세력들의 반란이나 이탈보다는 거꾸로 중앙 귀족들의 왕에 대한 도전이 이유였다.

2.4. 중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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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상징 칠지도

백제의 중흥기는 동성왕(재위 479년 ~ 501년), 무령왕(재위 501년 ~ 523년)과 성왕(재위 523년 ~ 554년)으로 이어지는 5세기 말 ~ 6세기 중반기 시기였다.

개로왕의 죽음과 웅진 천도 이후 부여씨의 왕권이 땅에 떨어졌고, 외척인 해씨 세력이 문주왕과 삼근왕을 거치는 동안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 또다른 유력한 외척 세력인 진씨 세력이 해씨 세력에 대항하면서 정변이 연이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마침내 진씨 세력은 정변을 일으켜 해씨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 삼근왕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고, 진씨 세력은 왜국에 있던 왕족 모대(동성왕, 재위 479년 ~ 501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52] 진씨 세력은 해씨 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동성왕을 허수아비왕으로 앉힌 후 권력을 휘두르려 했으나, 동성왕은 진씨 세력과 권력 투쟁을 벌이며 사씨, 연씨, 백씨 등을 중용하는 등 실추된 왕권을 다시 강화하고 국가의 재건을 시도했다. 정권이 안정된 후 동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의 일부를 다시 수복하고 남쪽으로는 침미다례 세력에게 무력 시위하여 군기를 잡고, 침미다례 일대를 백제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인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도록 직접 지배 세력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침미다례를 제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백제 왕실이 키운 거점이 익산과 광주였다. 또 신라 소지왕과 혼인을 통해 나제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 남조와 국교를 재개했다.

다만 여기서 지나친 토목 공사와 만년으로 갈수록 왕 본인의 사치와 향락으로 인한 불만이 커지면서 해씨 세력 등 반대파의 힘이 커져 좌평 백가가 난을 일으켜 동성왕을 시해하고 말았는데, 동성왕이 재위 기간 동안 했다는 사치는 적어도 웅진 도성이나 사비 도성 규모를 봤을 땐 많은 부분이 의심된다. 그보다는 동성왕이 다소 취약한 지지기반을 도외시한체 여러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게 원인이었다고 봐야 한다. 동성왕이 세운 업적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가야에게 넘어가버린 전남 동부를 무력을 동원해서 되찾고, 전남북 중앙내륙부를 직접 지배령으로 편성하여 광주와 익산 일대를 개발하여 자꾸 백제의 간을 보며 독자 노선을 타려는 침미다례를 압박한 것은 문장으로는 한두 문장으로 요약되지만 정말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었다. 또한 웅진으로부터 사비로의 수도 이전 또한 추진하여 국력 회복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이 모두는 후임 무령왕이 노선을 변경하지 않고 추진했을 정도로 훌륭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너무 많은 과업에 손을 댄 나머지 지지 세력들의 지지는 잃은 반면 반대 세력의 반대는 더욱 날카로워진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전남 일대 옛 마한 거수국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는 웅진 토착 호족과 한성 남래 귀족 모두의 불만을 샀고, 사비성으로의 천도 사업 과정을 진행하는 중에 대고구려 방면 전쟁을 중단하려는 기미를 보여 한성 남래 귀족의 의구심을 샀으며, 신라와의 적극적 화친 정책은 왜와 친분 있는 세력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그간의 성공에 도취한 끝에 불만 세력들의 불만 표시를 아예 차단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그렇게 백가의 난으로 동성왕이 시해된 후 왜국에서 태어난 동성왕의 이복형인 무령왕[53](재위 501년 ~ 523년)이 동성왕 반대파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54] 즉위 후 백가의 난을 진압한 무령왕은 기록상으로 다시 한강 유역, 심지어는 북한강 중상류, 예성강 유역까지 올라가 고구려와 싸웠다고 되어 있으며 무령왕이 한성을 순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다시 학설에 따라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기록이 모두 맞으며 백제가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나마 점령했었지만 안장왕이 일으킨 오곡원 전투 이후 다시 이 지역을 상실했다는 설, 무령왕 대까지 이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는 설, 한성을 잃은 이후 경기도 ~ 황해도의 지명이 옮겨 갔다는 설, 아예 이전 시기의 기록이 잘못 옮겨졌다는 설 등이 모두 있긴 하다. 그러나 이전 시기 기록이 잘못 옮겨졌다는 설이나 지명이 옮겨갔다는 설은 요즘 와선 별로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백제가 일단 적어도 옛 위례성 일대까지 치고 올라갔다는 건 무령왕 시기에 고구려 유민 및 고구려 문화의 충남, 전라남북도 파급이 이뤄졌다는 고고학적 근거로 인해 부정하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 때문에 무령왕 시기 백제가 정말로 개성까지 다시 영유했는지, 아니면 한성까지 일시적으로 군사적 점령을 이루고 훗날 물러갔는지가 현재의 유력한 쟁점이 되겠다.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건 이미 증명된 지 오래다. 일단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앞서 소개했던 세종, 대전 인근에서도 고구려 요새와 토기들이 발견된 상황이다. 참고로 고구려 토기와 백제 토기는 상당히 달라서 원저계가 주류인 백제와 달리 고구려 토기는 평저가 주류를 이루며 대상파수 또는 교상파수라고 불리는 손잡이는 고구려 토기의 특징이다(이 파수는 지금의 항아리에도 남아있다). 다만 사비기 백제 토기의 경우 4세기 ~ 5세기 고구려계 토기와 온돌이 갑자기 6세기 백제 수도에 등장하다가 이후 백제가 영유하는 지역 전역으로 파급되는 양상이 보이는데, 이는 최근 들어 무령왕 또는 성왕 대의 영토 회복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 아래 있었던 주민을 사비 건설을 위해 사민 정책을 펴면서 이런 토기들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남부여라고 국명을 고친 것도 사실 이런 주민들을 전부 그대로 흡수하기 위한 성왕의 계책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한편 이 시기는 앞서 언급했던 영산강 유역의 직접 지배 지역 전환이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5세기 중후반부터 백제계 석실묘와 문제의 한반도 전방후원분이 등장하는데, 전방후원분은 백제 왕실이 끌어들인 게 아닌, 백제에게 대항하기 위해 침미다례가 주로 끌어들였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전방후원분은 특이하게도 침미다례의 기존 중심지가 아닌 중심부 주변에 주로 세워지는 경향을 보이며, 이 일대 호족들이 왜국 세력과 주종 관계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전방후원분 세력은 어디까지나 용병 내지는 기존 호족들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세력이었다는 해석이 주류다.[55] 전방후원분은 1세대가 넘지 않아 사라지기 때문에, 왜국계 세력은 사실상 용병에 가까운 세력이었거나 빠르게 정체성을 잃고 현지 지배 구조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 대 '탐라'가 복속해 왔다는 기술은 제주도[56]의 복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57]

다만 왜계 용병을 활용해서 세력을 부풀린다는 아이디어는 침미다례가 주로 써먹었지만, 나중에는 침미다례 외의 다른 전남의 두 주요 세력(전남북 중부 내륙 및 전남 동부 세력)도 활용하게 되며, 이후에는 다름아닌 백제 또한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황도 있어서 이걸 단순히 침미다례-왜의 관계로만 보는 해석이 옳지 못하다는 것도 염두에는 둬야겠다.

무령왕 대에는 이를 기반으로 섬진강 지역을 정복하여 소위 대가야(반파국)의 해안 출구를 끊었으며, 해외에도 이를 알려 《양서》 <백제전>에 백제에 복속된 소국들이 기록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사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으로, 당시 백제는 신라 사신 파견을 알선해 주기도 했지만 이상의 사실로 보아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령왕 시기에, 3세기 중후반 목지국 타도 이래로 동성왕 시기까지 거의 약 250년 동안이나 백제 왕실을 간보며 지난한 줄타기를 해오던 침미다례를 드디어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재한 건 대단한 업적이었다. 이 일대는 생각보다 생산력이나 경제력, 해로 장악에서 유리한 지역으로, 이 지역의 인력과 물자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게 된 무령왕 시절의 백제는 굳이 신라의 힘을 빌릴 것 없이 독자적으로 고구려와 맞붙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 무령왕 때 오경박사인 단양이(513년)와 고안무(516년)를 일본에 파견하여 한학, 유학 등 각종 문명을 전파하여 왜국의 선진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 때는 오경박사 왕유귀를 비롯하여 역박사, 의박사가 파견되었다.

2.4.1. 북위와의 전투

양나라소자현이 쓴 《남제서》에 의하면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동성왕 12년(490년)에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니 목간나 등을 파견하여 크게 무찔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495년에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린 벼슬을 남제에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도 488년 위나라가 백제에 패했다고 기록했으니(十年魏遣兵來伐爲我所敗) 이를 통해 당시 백제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걸로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고 보기엔 갈 길이 멀다. 일단 요서 지역에서 백제와 연관이 있는 고고학적 유물의 증거가 없는데다, 북위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쳤다고 해석해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기 때문.

때문에 북위가 고구려와의 서신 교환 중 고구려에게 속아 백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나머지 서해를 건너와 백제를 쳤다가 연안 지역에서 크게 패했다는 설, 백제가 흡사 백제 - 왜의 관계가 그러했듯 남조 측에 지원 병력 즉, 용병을 파병했다는 설 등 긍정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북위군이 남조로 가는 백제 사절을 추격하다가 백제에 이르러 작은 충돌이 벌어졌고, 백제가 이 사실을 부풀려 보고했다고 추정한 견해, 백제가 남조와의 교류상 중국 동해안 일대에 중간 기항지를 마련하였으며, 이곳에서 백제와 북위 양국 간에 작은 충돌이 벌어졌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의견 등이 백제와 북위 사이의 교전 자체는 부정하지 않더라도 대규모 교전에 이르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으며, 더 나아가 아예 북위과 백제 사이의 교전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즉 실제 교전 주체는 고구려와 백제인데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비칭으로 험윤, 흉리[58]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소자현이 북위로 오해한 것이라거나, 혹은 백제가 남제에게 신속하면서 일부러 남제로 하여금 북위로 인식할만한 용어를 사용했다는 등 부정설도 제기되고 있어 확고히 결론난 건 현재 시점에선 없다.

일단 백제는 동성왕 때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다가 고구려에게 저지된 적이 있고, 비슷한 시기 왜국에도 '고구려가 자꾸 방해해 자주 올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사료가 존재한다(《송서》 <왜국전>의 -왜왕 무 상표문-). 그러나 이는 반대로 해석하면 백제가 어쨌든 힘든 상황에서도 (아마도 연안 항로를 거쳐) 사절을 보낼 여력이 있었거나 적어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 이외에도 백제가 중국에 사절을 보낸 사료는 충분히 많으며, 백제로부터 항로를 빌렸을 왜국의 경우에도 결국 중국에 도달해서 보고를 올렸기 때문에 저 기록이 남은 것이다.

남조가 정치적으로 백제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록을 날조했다는 가설도 있으나 이 가설은 근거가 좀 미흡하다고 평가되는 <요서경략설>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동서고금 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어떤 관계성을 강조하는 날조나 견강부회는 있어왔지만, 그걸 위해 있지도 않은 정복 기사를 날조해서 자국의 역사서에 끼워넣는다? 물론 정복 기사를 날조하는 짓은 있었으나 그런건 타국을 지배하거나 정복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 남조와 백제 사이에선 성립하지 않는 얘기다. 이런 건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봐도 사례가 없다.

그외 내용은 동성왕 문서도 참고.

2.5. 대 신라 전쟁

성왕(재위 523년 ~ 554년)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현 부여)로 옮겨 왕권 강화와 수도의 방어력 강화를 꾀하였다. 또 동쪽 신라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가야연맹의 재건을 꿈꾸었으나,[59] 결국 신라의 대가야 유화 정책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551년에는 신라 진흥왕과 협력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한강 하류 지역 세력의 반발, 고구려 및 신라의 군사적 압박 등으로 한강 유역에서 철군하고 말았고, 이에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신라 진흥왕이 접수하고 말았다.[60] 이에 성왕은 한강 하류 수복을 위해 귀족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제동맹을 깨고 아신왕처럼 가야를 끌여들여 관산성 전투(554년)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신라군[61]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결국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을 비롯해 30,000명의 군사가 전멸[62]하고, "말 한 마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국왕이 전사하고 주력군이 전멸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태자 창(위덕왕, 재위 557년 ~ 598년)은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것은 귀족들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산성 전투 출병을 주장했던 이가 바로 태자 창이었고, 관산성 전투에서 주력군을 지휘했던 이도 태자 창이었기 때문이었다. 관산성 전투가 참패로 끝나면서 출병을 반대했던 귀족 세력들은 태자 창에게 선왕의 전사와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태자 창은 반성과 자숙의 의미로 절에 들어가는 등의 퍼포먼스를 펼친 끝에 성왕 사후 3년만인 557년에야 가까스로 즉위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부여씨의 왕권은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실권은 대성팔족 귀족 가문들이 행사했다. 위덕왕 재위 초기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정쟁으로 혼란한 정국이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 고구려와 신라의 잇따른 침공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초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위덕왕은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왜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이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몇 차례 쳐들어갔으나 성과없이 국력만 낭비하고 말았고, 오히려 신라 진흥왕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에 562년 위덕왕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또다시 왜와 연합[63]하여 신라를 공격했으나 신라에게 또 패배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진흥왕을 자극하였고, 신라는 가야 전역을 완전히 병합하게 된다.(562년)

위덕왕은 젊은 시절 왜와 가야를 끌여들여 관산성 전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호전적인 강경파였지만 연이은 패배를 겪은 후, 재위 중기 이후에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고 방어에만 치중하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변모했다. 위덕왕은 신라와 고구려로부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왜, 북제, 남진과의 외교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때문에 그의 치세 후반기에는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 하지만 위덕왕의 이성을 잃은 복수전에서 오히려 백제 군사가 더 많이 죽었었기 때문에, 옛 가야 영역 전체를 잃은 것에 더해 무령왕이 대가야로부터 516년에 수복했었던 운봉 고원 및 그 주변 지역, 즉 남원, 임실, 장수, 무주까지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는 백제의 동쪽 국경이 557년 성왕 전사 직후 상황에서 그보다 훨씬 서쪽으로 후퇴하고 만 것으로, 무령왕이 516년에 대가야로부터 반격을 받아 남원, 임실, 장수, 무주를 도로 빼앗겼을 때로 돌아간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라가 대가야의 유산으로서 획득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백제 입장에선 20 몇 년이란 긴 세월을 투자해서 간신히 수복한 영토를 되찾은지 겨우 약 40년 만에 잃어버린 셈이었기에 만만찮은 큰 손실이었다.[64]

하지만 백제가 일단 더 이상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왜, 중국 남북조와의 동맹을 강화하며 전력을 추스르자, 신라도 이를 의식하여 더 이상 대규모 공격은 해오지 않았지만 운봉 고원 일대에서의 접전은 끊이지 않았다. 한편 위덕왕은 589년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백제가 돕겠다고 제안했다. 597년 위덕왕의 병환이 심해지자 그 틈을 타 위덕왕의 동생인 부여계(훗날 혜왕)가 권력을 장악했다. 598년 수문제가 고구려를 침공(1차 고구려-수 전쟁)하자 약조대로 백제도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며 수나라를 도왔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격퇴했고, 보복으로 백제를 침공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처럼 나라가 혼란스러운 와중인 598년 위덕왕과 태자 아좌가 동시에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고[65],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부여계(季)가 왕위에 올라 혜왕(재위 598년 ~ 599년)이 되었다. 혜왕은 즉위한지 1년 만에 죽었고, 법왕이 즉위했다. 《일본서기》와 《수서》에는 법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66], 이 기록이 맞다면 법왕이 정변을 일으켜 혜왕에게 복수하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법왕 역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즉위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죽음을 맞는데, 정변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위기는 7세기 초반의 무왕(재위 600년 ~ 641년) 대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무왕은 내부적으로 부여씨 왕권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대외적으로는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왕은 재위기간 중 신라와 10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고, 대부분 승리하여 616년도에 남원, 임실, 장수를 거의 30년만에 신라로부터 탈환해낸 한편, 하동, 거창, 함양, 사천, 진주 등을 포함한 지역까지 진격하면서 경상남도 서부 절반 가까이를 석권하여 성왕 전사 직전 백제 동부 국경보다도 깊이 동쪽으로 침투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옛 대가야 연맹 영역 상당수가 백제쪽 영역으로 들어간 격이 되었다.[67] 게다가 성왕 때는 각 가야 소국들의 자치권까진 침해하지 못하는 간접 지배 형태였지만, 이때는 군사력으로 직접 지배를 관철하는 형태였다. 한편 무왕은 북쪽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당나라에 계속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공해 줄 것을 요청하며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무왕은 수도를 익산으로 옮기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지만 실현되진 않았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자왕(재위 641 ~ 660년)은 백제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호전적인 군주였다. 그는 즉위 이듬해인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전략 요충지인 대야성(합천)을 함락(대야성 전투)시키는 것을 비롯해 여러 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의자왕은 재위기간 동안 총 10차례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김유신이 활약하는 신라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일진일퇴의 소모적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의자왕의 끊임없는 신라 공격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신라는 백제 말고도 호전적인 연개소문의 고구려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신라가 싸우는 와중에 신라의 배후를 공격하여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외교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선대 무왕 시절부터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던 당에 대한 의리를 깨버렸고, 그 결과 당 태종의 분노를 사서 당과 외교 관계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68]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백제, 신라와 모두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신라와는 몇 가지 분쟁으로 껄끄러웠던 반면[69] 백제와는 무왕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645년 의자왕의 배신으로 당태종은 백제와 단교했고, 대신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648년 나당동맹이 체결된다. 또 의자왕의 지나친 호전성은 신라를 자극했다. 대야성 전투 때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한 대야성주 김품석 일족을 모두 처단했고 그 댓가로 품석의 부하인 검일과 모척을 받게 되는데, 이는 결국 김품석의 장인이었던 김춘추, 그 당시 임금이었던 선덕여왕, 국방 담당 김유신을 매우 폭발하게 했고, 결국 김춘추에 의한 나당동맹이 결성되게 된다. (왜와 고구려한테도 갔으나 이들은 백제 편을 들고 김춘추를 거부한다.) 이에 의자왕은 역대 왕들처럼 왜와도 동맹을 유지하고 신라ㆍ당과 적대 관계인 고구려와도 화친을 맺었다. 그리고 655년에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 북부 33개의 성을 빼앗았다.

2.6. 멸망

백제는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끄는 용감한 나라였지만, 유교를 도입한 이래 사회가 점점 나약해졌다. 그리고 성충과 흥수는 뛰어난 지략가지만 폭군을 제거할 기백이 없었고, 계백과 의직은 자기 몸과 가족을 희생하는 충렬은 있어도 고구려의 연개소문처럼 내부를 숙청하여 나라를 제정비할 수완이 없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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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5년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의자왕이 당나라와의 약조를 깬 후, 648년 나당동맹이 맺어졌고, 660년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660년 7월 9일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총공격하여 그해 7월 13일 백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7월 18일 웅진성으로 도주했던 의자왕이 잡힘으로써 단 9일만에 백제는 멸망한다.
수백년간 전쟁으로 단련된 백제가 이렇게 단기간에 백제가 붕괴되었던것은 바다를 건너 당나라가 백제의 후방을 공격할 것을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공격하는 쪽 보다 수비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고, 공격하는 쪽은 피해가 더욱 크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백제가 4일만에 수도함락이 되었던 것은 수도방위에 소월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멸망 직전 백제는 의자왕의 과도한 전쟁과 향락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심각한 와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의 향락에 대해서는 승자 입장에서 기록된 《삼국사기》에서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있다. 현대 사학계에서 《삼국사기》와 중국 문헌들과 철저한 교차 검증이 이루어지면서 《삼국사기》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정확하고 공정한 사서라는 점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사실상 문헌 자료를 참고할 수 없는 건국시기에 관해 어쩔 수 없이 일부 구전 전설을 참고한 것을 제외하면 역사시대 이후에 대해서는 중국과 당시 한반도에 존재하던 각종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상당히 공정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70][71] 사실 향락은 중국 역대 사서에서도 전왕조가 멸망했을 때마다 주로 첫순위로 꼽히는 원인이기 때문에 다분히 별 근거 없는 트집인 측면이 있고, 이런 유의 되도 않는 트집성 기사는 로마사에서도 자주 발견되므로 그저 웃어넘겨야 할 부분이다.

의자왕의 빈번한 전쟁과 공포정치로 인한 백제 지배층 분열은 일단 멸망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전쟁은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 의자왕은 삼국시대에서도 첫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전쟁을 일으킨 왕이었다.[72] 의자왕의 빈번한 전쟁은 필연적으로 백성들과 귀족층의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문제는 의자왕의 잦은 전쟁의 결과가 성과를 논하기 애매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관산성 전투처럼 아예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면 왕권이 심각하게 제한을 받고, 귀족들이 장악한 조정에 의해 당분간 전쟁 자체가 안 일어났을 것이나,[73] 무왕처럼 가시적인 성과가 보일 경우 오히려 왕권이 강화될 수 있다.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보다 더 많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 성과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조바심을 느낀 의자왕은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과도한 전쟁과 위에 나온 향락의 결과 내부 반발은 심각해져갔다. 이에 의자왕은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의자왕은 조선 시대사화와 비슷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 중신들을 제거한 후 공포정치를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은 656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숙청을 통해 조정의 반대 세력들을 제거했고, 태자 부여융을 폐위한 후, 부여효로 태자를 교체했다. 숙청 과정에서 성충, 흥수충신들까지 제거하자 민심과 귀족 세력의 지지를 크게 잃게 되었으나 의자왕은 오히려 공포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물론 백제 지배층의 분열과 권력 암투는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다. 백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외척 세력 등 권세를 가진 귀족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았고, 그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치른 것이 거의 일상에 가까울 정도로 빈번했다. 정쟁으로 인해 수많은 왕이 암살당했고, 외척 세력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허수아비 왕들도 많았다. 이런 시절들과 비교한다면 의자왕은 백제 시대를 거쳐간 31명의 왕 중 유능한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의자왕 시절의 정쟁과 지배층의 분열이 이전 시대보다 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백제가 멸망한 것은 결국 나당연합군의 규모 자체가 과거의 위협들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74]

2.6.1. 멸망 과정

660년 7월 9일,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 장군의 결사대 5,000명간의 황산벌 전투가 시작되었고, 같은 날 당군이 기벌포[75]에 상륙했다. 흔히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백제의 계백 장군은 남은 군사 5,000명을 전부 이끌고 황산벌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백제 전군이 5,000명이 다였던 것은 아니었다. 《구당서》 등을 참고할 때 기벌포에서 당군을 방어한 병력과 사비성 방어 병력이 별도로 존재한다.[76]

구당서》 <소정방전>(참고 링크)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죽였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10,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더구나 여기에는 백제군의 전멸을 암시하는 말[77]이 없으므로 실제 백제군의 규모가 몇 만 명 수준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의 싸움에 5,000명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은 주력이 당군을 요격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도 동일한 기록이 실려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구당서》의 내용이 신뢰성이 있다고 바라본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흥수는 당군과 신라군을 각각 좁은 길목인 기벌포와 탄현에서 막을 것을 제안했으나 의자왕 및 백제 수뇌부는 당군과 신라군이 좁은 길목을 통과한 직후에 공격해서 섬멸시키자는 작전을 채택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는 신하들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대신들이 이를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당나라 병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해서 강물을 따라 배를 나란히 가도록 할 수 없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때에 병사를 풀어 공격하면, 그것은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20년(660년)조

이러한 작전 내용과 실제로 요격하는 데 동원한 군대의 규모를 고려해 보면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그 이외의 해석도 있을 수 있다.

7월 12일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합류했다.[79] 같은 날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했고, 이어 사비성의 백제 주력군이 궤멸되었다. 이후 백제 최고위층에서 분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일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는 사비성을 탈출하여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도피했으나, 장자 부여융과 차남 부여태는 사비성에 남았다. 사비성에서 부여융과 부여태는 항복할 것이냐 끝까지 저항할 것이냐를 놓고 의견 충돌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부여태는 끝까지 저항하려 했던 것 같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나 부여융, 부여태의 아들 문사, 대좌평 사택천복 등은 상황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것을 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얼마 후 부여태 또한 결국 항복함으로써 7월 13일에 사비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7월 18일에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또한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예식진 묘지명> 및 <예소사 묘지명>에 따르면 웅진 방령으로 있었던 예식진이 의자왕을 당군에게 바치고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간의 갑작스러운 의자왕의 항복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예식진 항목 참조. 예군 항목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의자왕과 장자 부여융[80]을 비롯하여 약 10,000명의 백제인을 당나라로 압송했다(660년).

2.6.2. 백제부흥운동

나당동맹 체결시(648년)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대동강을 경계로 국토를 분할하기로 약조한 바 있었으나,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은 구 백제 영토에 백제도호부를 세워 구백제 영역 전체에 기미주 설치를 기도하면서 신라와의 약속을 대놓고 무시했다.

신라가 제시한 안은 신라가 직접 지배하되 백제 귀족에게도 신라 귀족과 동일한 위치를 보장하는 안이었다. 이는 신라의 전통적인 정복지역 융화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과거 진한, 가야를 복속, 점렴한 후 해당 지역의 부족장, 귀족들을 신라 귀족과 동등하게 편입해 왔었다. 신라 중앙 귀족이 되어 진골까지 오르게 된 김해가야의 김해 김씨 집안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당나라는 신라의 안을 무시하고 행정, 외교, 군사권이 제한되지만 어느 정도 자치력은 유지되는 기미주, 즉 백제도호부[81]을 밀어부쳤다. 당나라는 항상 후방의 껄끄러운 적으로 남아있는 고구려를 멸하는 것이 최대목적이었고, 그를 위해서는 백제 완전소멸로 신라의 세력을 넓혀주기 보다는 오히려 백제가 말 잘듣는 형태로 남아있는게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당의 백제 유지 방향성은 백제의 이른 항복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 백제 지역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한 당나라는 점령 지역에서 강압적인 통치와 전횡을 일삼았고, 이에 백제인들의 불만은 팽배해졌다.

그렇지만 백제인들 대부분은 신라가 제기한 안에도 초반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사비성 함락 당시 나당 연합군이 저지른 참극은 무시무시한 수준이었고, 신라군 또한 그 대목에서는 분명히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무왕, 의자왕 초반에는 백제가 주로 승리하는 쪽이었으니 신라도 할말은 많았겠지만 이때는 그랬다. 때문에 백제의 장수 출신인 귀실복신, 도침 등이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했고, 이들은 국의 대왕(오오키미)에게 요청하여 왜국에 있었던 왕자 부여풍을 귀국(662년 5월)시켜 풍왕으로 추대했다.

한편 당나라는 백제도호부가 백제부흥운동군의 격렬한 저항 탓에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폐지하고, 대신 원래는 백제도호부 아래에 설치되기로 되어 있었던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개 도독부만 설치하여 직접 통치에 나섰다. 한편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태자 부여융은 당으로 귀화하여 당나라 장수 신분으로 돌아와 당군을 이끌고 동생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 부흥 운동을 토벌했다. 다만 당나라의 구상은 당나라 뜻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중에 실제로 그나마 기능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건 웅진도독부 뿐이었으며, 신라 또한 표면적으로는 당나라의 지원 요구에 응하여 백제부흥운동 토벌에 나섰지만, 백제 변방에서부터 천천히 주요 요지를 확고히 굳혀나가면서 동시에 가급적 전력 소모를 줄이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 와중에 백제 부흥군 지도부 내에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복신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663년 9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유인궤, 부여융 등이 이끄는 당군이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포위했고, 당군의 170여 척의 배가 주류성 입구인 백강을 둘러쌌다. 백제 부흥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가 27,000명의 대군과 1,000척의 대함대를 파병하여 백강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궤멸됐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어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이 단계에서 실패가 분명해졌다. 한편 경남 거창 거열산성에서도 이 시기 잔존한 백제군이 저항을 계속했지만 김흠순 등에게 진압된다.

본진인 주류성이 함략된 후에도 아직 임존성에 백제 부흥군 잔여 세력이 있었지만, 그간 부흥 운동을 이끌던 흑치상지가 돌연 부흥군을 배반하고 당군에 투항한 후 당군을 이끌고 나타나 임존성을 공격했다. 결국 임존성의 지수신이 패배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종결되었다(664년). 임존성 함락 직후 664년 4월 사비성 봉기가 일어났지만 진압당했고 이를 끝으로 옛 백제 왕족이 주도하는 백제부흥운동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2.6.3. 통일신라에서의 백제 유민

백제 유민들은[82] 신라와 백제부흥군과의 이런저런 일을 거친 나머지 당나라가 아예 기미주니 뭐니 이전에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화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하자, 신라에게 적극 협조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백제 유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신라는 나당전쟁 개시 2년 후에 옛 백제 영역에서 당군을 모두 축출할 수 있었다. 나당전쟁은 신라만의 전쟁이 아니었으며, 옛 고구려인, 옛 백제인, 옛 가야인 심지어 고구려에 있었던 말갈족까지 함께 대당제국과 맞서 싸운 전쟁이었다. 나당전쟁이 끝난 이후 옛 백제 영역은 평화를 맞이했으며 그 지역의 백제 유민들은 한동안 백제계 신라인으로 만족하며 살게 된다.

한편, 전통적으로 신라는 포용정책을 실시하며 피정복 지역에도 강등조치없이 원래의 지위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관국의 왕족(김해 김씨)과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에게 왕족의 지위를 인정하여 진골에 편입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신라의 이러한 포용 정책은 적어도 백제계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물론 신라가 대국적인 차원에서 백제 유민을 끌어안아야 함을 몰라서 그러진 않았다. 그러나 백제인들이 백제부흥운동 과정에서 신라측의 회유 조치를 거부하고, 지속적으로 비협조한데다, 나당전쟁 때 신라측에 섰다지만 그건 백제인들 또한 다급한 처지에서 할 수 없이 신라를 선택한 측면이 다분했기에 좋은 대우를 바라긴 어려웠음 또한 감안해야 한다.

앞서 백제가 멸망한 직후 신라가 백제 귀족 전체에게 정말로 그 직위에 상응하는 신분을 보장하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백제 귀족은 이런 타협안을 거부했다.[83] 이들 대부분이 백제부흥운동에 나서면서 신라의 구상은 당나라만큼은 아니었어도 상당 부분 차질을 빚었으니, 이 과정에서 신라가 이러한 행태에 구체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진 기록에 없으나 이후의 조치를 보면 대단히 격분했거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백제계에 대한 포용 조치에 회의를 품었음이 분명하다. 이 점은 적어도 보덕국 완전 해체 결정이 이뤄지기 전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일관적으로 반당, 친신라 기조를 보였던 것과는 대조적인 형세였다.

다시 짚어보면 이후 670년 나당전쟁이 발생했고, 백제인들은 이미 당나라가 제시한 안을 전면적으로 거부했기에 신라에 대해선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던데다 그간 실질적으로 받은 인적, 물적 피해는 모두 당나라 군대에 의한 것이었기에 신라측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밖엔 없었다. 673년 웅진도독부가 축출되고, 신라가 한반도 남부를 완전히 점유하면서 구 백제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때(673년) 문무왕이 모든 백제인에게 백제 때와 견주어 이에 상응하지만 훠얼씬 낮은 신라의 벼슬과 관등을 줬다. 백제 부여씨 왕족에게 진골, 백제 좌평에게 6두품을 주었다지만 그건 백제가 망한 직후였고, 실제로 준 건 최고 5두품이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음이 규명되어 있다.[84]

백제 부여씨 왕족과 백제 귀족인 대성팔족이 전부 당과 왜로 갔다는 시각은 학계 어디에서도 제기하고 있지 않으며, 당대 해상 능력의 한계로 봤을 때 의자왕 직계 외에는 거의 가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진골과 6두품을 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그러지 않고 백제에선 대단히 높은 좌평직이나 역시 고위직인 덕솔 등에게도 기껏 4두품까지 주는 게 대세였다면 이건 분명히 말해 격하였음을 잊어선 안 된다.[85][86]

이런 신라의 백제 유민 포용 정책의 수준은 물론 벌어진 일들만 놓고 보면 백제인들이 초반에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던지라 신라 탓만 하기 어렵지만, 세계사를 통틀어 봤을 때, 아니 세계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이전 신라사의 사례의 관점에서도 이례적으로 포용적이지 못한 차별대우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또 백제 최고위 귀족의 성이 남아 있지 못한 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백제 최고위 귀족이 다 증발해서가 아니라,[87] 그 후예들 자체가 아예 성씨를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한국 성씨들은 대부분 후삼국시대~고려 초에 생긴 성씨들인게 1차적 이유지만, 그 이전 시기에 성씨를 쓰는 규칙에 대해 대부분 모르니 생기는 오해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대한민국에 백제계 성씨는 거의 없는 것인가? 성씨가 애초에 6두품 이상에게 주어지는 특권인데 5두품에 이르는 자조차도 극히 적었던 게 이유였다. 또한 6두품이었던 자도 신분 세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도 일각에서는 추론하는 중이다. 개성 왕씨고려 왕조 멸망 후 어떻게 되었나 참조해 보자.

신문왕 때는 지방 제도 정비로 9주 5소경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구 백제 지역에는 3주가 배분되었고, 서원경(현 충주시)과 남원경(현 남원시)이 설치되었다. 특히 남원경에는 주변 지역민들 뿐만 아니라 보덕국에 있었던 고구려계 유민과 금성(현 경주시) 수도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대도시로 성장시켰다.

다만 그럼에도 백제 유민들이 전반적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비해 유민 의식과 신라에 대한 반발이 강했던 이유로는, 고구려계의 경우 패서 지역은 너무 멀어 중앙정부의 힘이 잘 미치지 않아 반쯤은 자치적이었으며 그렇게 큰 황해도·경기도 일대에 주가 겨우 한주 하나로 편성되었고, 그중에서도 현 북한령인 황해도와 임진강 이북의 경기도 일대는 패강진이라는 특수행정구역으로 재편성되어 서라벌의 중앙 조정으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자치와 불간섭을 누린 반면 옛 백제 지역은 원 신라의 본토와 가까운 데다 물자, 인구도 풍족해 행정 구역이 많이 설치되어 도독, 군수, 현령 등 중앙 귀족이 직접 맡은 관리들이 많아[88] 중앙정부의 통제와 압박이 강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신라 정권이 딱히 의도적으로 백제계를 탄압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는 지역 세력의 역량에 비해 대우는 그만하지 못하게 되었고, 끝내는 옛 백제 지역에 불만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지역 세력의 역량이 성장한 통일신라 후기에도 아무리 잘나봐야 백제 지역 토착세력은 주로 겨우 촌주밖에 못 되었고 계속 중앙 귀족의 직접 파견 및 통치가 이어졌다.[89]

다만 그럼에도 신라 왕실은 진골들 반발 탓에 백제계 유민에 대한 전면적인 포용 조치를 실시하지 못했어도, 백제 왕실에서 제사지냈던 산천에 대한 제사를 왕실 차원에서 거의 그대로 행하고, 백제 불교 전통을 통크게 인정하며 백제 부여씨 왕가의 고찰이었던 미륵사도 정성껏 관리하는 등 유구한 백제 문화에 대한 존중을 표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경덕왕 때 다시 큰 규모로 반복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경덕왕 항목 참조. 그나마 이런 조치와 노력이라도 있었기에 그럭저럭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백제계 백성들이 신라인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태종 무열왕계가 밀려나고 열조 원성왕계가 왕통을 차지하면서[90]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열왕계 왕실에서 적극 등용했던 가야계와 6두품 등은 크게 밀려나 버렸고 내물왕계 진골 귀족의 배타적인 독주가 벌어지게 되는데, 이는 무열왕계 왕실이 그나마 가능한 선에서 해보려던 대백제 포용정책이 거의 끝났음을 뜻했다. 물론 그렇다고 원성왕계가 백제계들을 따로 더 탄압한 사실은 없었고, 장보고 같은 경우 혼인 문제 탓에 암살당하긴 하지만 백제계 평민으로선 거의 최초로 장군에 봉해지긴 했다. 그러나 원성왕계 자체가 무열왕계의 정책에 반대한 진골 연합으로 집권한 탓에 백제 유민 융합에 대한 근본적인 시도는 불가능하였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다.

그리고 더 생각해볼 인구 정황도 있다. 통일신라~후삼국의 인구에 대해서, 지리적 특성상 대략 현 충남~전라도 일대에 분포했을 백제계가 상당한 비율을 점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는 있으나, 구 백제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남부의 인구 밀도가 높아 고구려가 장수왕 대부터 이어진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남부 세력들의 연합 때문에 백제와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했었음을 회고하면,[91] 대체로 아무리 대대적인 전란이 벌어져도 인구의 대다수가 그대로 이어졌던 전근대시대의 특성상(ex:페르시아) 옛 백제의 인구와 그 직계 후손의 대다수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와 짧은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선으로 이어졌을 정황은 몹시 충분하다. 특히 영토가 당, 신라, 발해 등에 의해 분할되고 적잖은 수의 유민[92]이 당나라로 압송되는 운명을 맞은 고구려와 달리 백제는 전 국토가 통일신라에 흡수되었고, 비교적 소수의 유민들이 당나라 등지로 압송되거나 일본 등지로 이주한 정황이 포착되기에 백제인의 절대 다수는 현 한국인의 혈연적 직계 조상에 그대로 합류했다고 볼 수 있다.[93]

2.6.4.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

663년 백제부흥운동이 진압된 이후 더이상 여지가 사라져버린 복국운동이 물거품이 되어버리자 대개 부흥운동과 연계했던 백제의 일부 귀족들과 백성들은 당나라의 폭압적인 지배와 약탈을 피해 우호가 깊었던 일본 열도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94]

백제 유민이 왜국으로 건너갔던 당시 백제 남부에서 규슈로 향하는 루트는, 백제와 왜국의 교역이 자주 이뤄졌고 왜국의 사신이 중국에 조공할 때 이용하던 경로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군사[95], 학문[96], 의학[97] 분야의 인사들이 포함된 채로 일본으로 떠났고, 야마토 조정은 이 횡재를 맞아 이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그 능력을 흡수하여 국력과 대왕권을 강화했다.[98]

소수의 고구려 유민[99]도 이러한 길을 걸었다. 이렇게 야마토 조정에서 대우를 받은 부류는 유용한 기술을 갖고 있던 운이 좋은 집단이었고, 굴러들어온 돌을 위해 이미 기반을 잡고 있던 기존 기득권의 세력을 떼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출신을 불문하고 애매한 부류는 대부분 당시로선 미개척지였던 간토(관동) 지방 개척을 위해 이주된다. 지금은 관동이 중심지가 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또한 한문 지식이 풍부했던 백제 유민들은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 백제 멸망 직후인 671년 갑자기 국호를 바꾸고[100] 이어 수도를 새로 건설하며 율령을 반포하는 등 급작스런 변화와 발전을 겪게 되는데 이를 백제 유민들이 몰려온 충격파의 영향인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그래도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들은 백제 본토에 남은 유민들에 비해선 형편이 좋은 편이었고, 평민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별거 없었던 것 같지만 부여씨 왕족이나 귀족 출신 그리고 기술자 출신들은 대단한 우대를 받았다. 일단 보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扶餘豊)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다가 달솔이었던 귀실복신도침에 의해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부흥군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자 보검도 떨어뜨릴 정도로 급박하게 고구려로 도망쳤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 일본에 남았던 부여풍의 동생, 즉 훗날 '백제왕선광'(성이 백제왕이고 이름이 선광이다)으로 개명하게 되는 부여용은 일본 조정에서 우대를 받게 되었고, 그 나머지 백제 왕족이나 귀족은 백제 조정에서 원래 지녔던 관위에 정말로 상응하는 관품을 받고 전반적으로 대단히 우대받았다. 그리고 일부는 천황 가문의 가신이나 후지와라 가문의 가신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거나, 심지어는 백제계인데도 일본의 모든 승려들 중에서 가장 높은 승정 지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차지하기도 했다. 당대 신라 왕의 국사로 임명하고자 했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백제계란 이유로 끝내 국사는 되지 못했던 진표대사의 사례와 정말 대조되는 일면.[101] 또한 일본 황실이 백제가 망한 후 20년 동안은 백제에서 넘어온 도래인들에게 아예 조세도 부역도 면세해준 걸로 봐선 평민 출신들이 혜택을 아예 보지 않았다곤 보기 어렵다. 게다가 왜국에서는 신라처럼 백제인에 대해 일률적으로 관등 한계를 설정한 바도 없다.

백제에서 최고 관품이었어도 실질적으로는 5두품으로 제한되어 상당히 대우가 박했던 통일신라에서의 상황과는 정말 대조된다. 한편 모친이 도래인이었던 간무 덴노는 모계가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았다고 하는데, 이건 망국 유민의 설움으로 보긴 어렵다. 간무 덴노의 친모가 하다못해 백제 직계 왕족이었다면 덜했을 것인데, 이유는 대대로 천황 가문에 후궁이 백제계가 대단히 많았고, 그중에서도 백제왕씨는 일본 최고 귀족 중 하나로 대우받았기 때문이다. 주된 이유는 간무 덴노의 모친이 백제 왕실 직계가 아니었고, 백제왕씨의 도움을 받아 족보 조작으로 순타태자계로 편입된 그저그런 화사씨 계통 여식이었기 때문이다.[102] 간무 덴노의 외가는 그래도 지방 수령 정도는 하는, 하급 귀족 가문이었기에 그렇게까지 천한 가문은 아니었다. 최고위급 귀족들이 보기엔 결격 사유로도 꼽힐 순 있었겠지만.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멸망 이전 도래한 백제인 또는 백제에 파견되어 체류하던 왜국의 관리 등은 높은 벼슬도 한 것으로 보이고, 멸망 이후 도래한 백제인의 직급은 생각보다 꽤 높은 편이었다. 보통 일본 귀족도 쉽사리 하기 힘든 공경 계급에 진입했던 자도 몇 보일 정도. 물론 일본 황족에서 갈라진 최고위급 귀족들의 그것보다는 좀 딸리는 건 사실이지만 정복 직후 통일신라의 백제인 대우와 비교해보면 통일신라가 훨씬 박했음은 또 다시 부정할 수 없게 드러난다.[103]

일단 부여풍의 형제인 부여선광(扶餘善光)의 자손은 쿠다라노코니키시(百済王, 백제왕)씨라는 성을 일본 황실로부터 부여받았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4세기말 백제계로 추정되는 도래인 씨족인 하타(秦)씨의 시조 유즈키노키미(弓月君, 궁월군)가 한반도에서 왜국으로 도래했다고 한다.[104]일본 규슈 미야자키현 미사토정 미카도신사(神門神社)에 백제 왕족 부여정가(扶餘禎嘉)가 숨어살았으나 신라의 자객에게 결국 피살되었다는 <정가왕 전설>이 있다. 한편 세월이 흐르면서 백제왕씨들의 든든한 뒷배인 천황 가문 자체의 권위와 실력이 하락함과 동시에 백제왕씨에도 암운이 찾아오게 되며, 백제왕씨에 대한 기록은 1522년을 끝으로 끝난다. 이후로는 다들 보다 흔한 일본식 성으로 성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2.6.5. 당나라로 압송된 백제 유민

태자 부여융은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가 멸망(660년)한 후 생포되어 신라 태자 김법민에게 굴욕을 당한 후 당나라로 압송(660년)되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압송된 부여융은 당나라로 귀화한 후 당의 장수가 되어 당군을 이끌고 돌아와 동생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 부흥군을 토벌했다. 부여융은 663년 백강 전투에도 참전하여 백제부흥군과 왜군을 궤멸시켰다.

한편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라군이 진압한 영토들이 신라 본토로 직접 귀속되면서 당나라는 기존의 5도독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한 후 나머지 네 개의 도독부를 폐지했다. 부여융은 665년 통합된 웅진도독부 도독에 임명되었고, 괴뢰국 백제의 왕을 자처했다. 그러나 곧 나당전쟁이 발발했고(669년), 전세가 신라 쪽으로 기울자 결국 당나라의 장안성으로 돌아갔다.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고, 백제 전역을 완전히 편입했다.

당으로 돌아간 부여융은 나당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676년 요동의 건안성에 웅진도독부를 세우고, 백제 멸망(660년) 당시 당나라로 압송된 약 10,000명의 백제 유민들을 모아 지배했다. 이를 소백제라고 부른다. 당나라에서 부여융에게 내린 작위는 대방군왕으로 옛 백제 왕들과 같은 동일한 직위였다. 다만 이 웅진도독부 소백제는 엉뚱하게도 대조영발해에게 맹공을 받아 궤멸하고 당으로 압송된 백제인들 가운데 일부는 발해에 합류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웅진도독부 참조.

한편 8세기에 활동한 사타충의, 부여준, 흑치준, 물부순, 부여태비, 예인수나 예인사 정도를 빼면 백제계 유민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105]

당의 역사서 《구당서》는 이 건안성이 발해에게 흡수된 것을 백제 멸망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는 건안성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리고 2009년 괵왕 이옹과 그의 부인 합장묘가 발굴이 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 화제의 이유는 그녀의 성이 '부여씨' 백제 왕족이라는 점이었다. 일명 '부여태비'로 불리는 인물은 의자왕의 증손녀로 밝혀졌다.

2.6.6. 후백제

서기 900년, 견훤이 옛 백제 땅에서 백제의 이름을 빌려 새로 세운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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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1. 후백제와 백제부흥운동과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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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 〈백제본기〉 기준으로는 14대 왕. 《속일본기》와 《제왕운기》에 따르면 근구수왕 이전 백제의 왕계가 2대 정도 누락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태조로 '도모대왕(都慕大王)'이 언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1대는 도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2대에 해당하는 인물은 불확실하다. 이는 주몽비류일 수도 있고, 동명이나 우태(구태)일 수도 있다.[2] 재밌는 것은 로마 건국신화에서도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수도를 어디로 정할지 싸우다가 갈라서는데, 이 경우는 전쟁까지 해서 레무스가 죽는다.[3] 이강래의 《삼국사기》 주석에 따르면 구태는 부여 왕 위구태를 말하는 것으로, 북쪽의 부여와 사비백제의 다른 이름인 '남부여'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기타 의견은 구태우태 문서 참조.[4] 마한이라고 통칭되는데 고대 국가 백제의 이원적 지배층 중 하나는 고구려식 적석총 외에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의 토돈 묘제 사용 세력임이 드러나고 있으므로 마한이라고 하는 건 바르지 않다-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1권 참조. 마한의 주된 묘제는 목지국을 비롯한 경기-충청-전라 내륙 지역에서 드러나는, 고조선 묘제와 일맥상통하는 토광목관 혹은 토광석곽묘 계열이었다.[5] 요즈음은 교과서 등에서 음독하여 햐쿠사이(ひゃくさい) 또는 하쿠사이(はくさい)로 적는 경우도 있으나, 현재까지도 예전부터 쓰여왔던 명칭인 쿠다라(くだら)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사카 쪽 지명에 쿠다라(百濟)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사카 지역에 12세기경까지 백제군(百濟郡)이 존재했기 때문이다.[6]양서》의 표기인 '고마(固麻)'와 《일본서기》의 표기인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바탕으로 본래 음가를 재구성한 것이다. 뜻은 한자 '熊津'과 마찬가지로 '곰나루'이다. 《용비어천가》에서도 공주의 토착 지명을 '고마ᄂᆞᄅᆞ'라고 기록하였다.[7] 현재도 구교리 금강 유역(충남 방언으로는 '백마강')에 구드래 조각 공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부여군에서 출하하는 농산품의 브랜드 '굿뜨래(Good + 뜰에)'의 유래가 바로 이 구드래다. 현재까지도 백제의 마지막 도읍으로서 부여를 대표하는 옛 지명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8] 고대 한국어에서 ㄱ과 ㅎ의 구분이 모호했다는 점을 들어 '하다'와 '크다'의 어원이 같았을 것이라 주장하는 설도 있으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재구형 '*카다'와 '쿠다라'의 모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9] 이곳에는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이 영업 중이다.[10] 이 이름은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샤카산 햐쿠사이지(百濟寺)’라는 유서깊은 사찰에서 비롯했다. 일본에서는 통상적으로 '百濟寺'를 '구다라데라'라고 읽으나, 유독 이 사찰만은 ‘百濟寺’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른다.[11] 때문에 온조왕이 고구려 남부 영역을 담당하던 관노부 소속이었다는 주장도 소수설로 제기되기는 한다.[12] 아이러니하게도 이 중 영산강 유역에 자리한 토돈분구묘 집단이 야요이인 집단 및 위만조선계 토광묘 집단과 융합 후 옹관묘 집단으로 진화해서 침미다례라는 정치체로 번영하다가, 고대 국가를 이룬 지 겨우 50년도 채 안 돼서 목지국을 쓰러뜨리고 힘을 키운 백제국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13] 중국의 옛 오월 지역과 산둥반도 동해안에 있는 분구묘제 및 일본 규슈 북부와 기나이(畿內) 일대에서 유력했던 일본 분구묘 묘제와의 연관성이 유력하게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14] 고구려만 보더라도 한사군의 물리적 복속보다 그 일대의 고고학적 변화가 늦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된다.[15] 장창은, 〈현행 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역사 부도의 삼국시대 지도 검토〉, 《선사와 고대》 제57호, 한국고대학회, 2018.[16] 이는 고구려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강대했던 로마 제국조차 시작은 이탈리아 반도 북쪽에 있던 에트루리아한테 수백 년 간 휘둘리는 신세였다. 그러다 연맹 체제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에트루리아는 종합적인 국력이나 전통에도 불구하고 로마한테 망했고, 마찬가지로 목지국 또한 한때는 부하 소국이었던 백제국한테 타도당하고 말았던 것이다.[17] 현재는 충청남도 천안 청당동이 유력하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간 백제사 시리즈 참조. 한편 익산도 한때 제기되었으나, 익산에는 준왕 남래 당시 고조선계 세력이 갑자기 대규모로 나타남이 규명되어 일단 익산 건마국이 문헌대로 마한의 초기 수장국이었을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18] 진왕이 백제 고이왕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 경우라면 목지국은 백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러나 이는 1970년대에 들어서 지지하는 학자가 사실상 사라진 설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기리영 전투로 인해 '(韓)을 멸망시켰다'고 한 이후 진왕에 대한 기록이 끊어지는 반면, 백제는 이 근처 시기 사로잡았던 군현의 포로를 돌려주고 그 뒤로 성장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다.[19] 특히 일본과 교류가 활발하였는데, 이 지역을 백제가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일본과의 각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20] 고고학계에선 일단 6세기 초반 이후에도 간접 지배했다는 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비주류의 소수설이며, 문헌사학계에서는 전혀 지지받지 못한다. 그나마 문헌사학계에서 물러선 것이 <《삼국사기》 초기 수정론>이 한계고, 적어도 4세기부터는 <백제본기>의 연대와 사건 등에서 그 사실성을 의심받고 있지 않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21] 신공황후 49년조[22] 369년은 일본 학계에서 백제가 칠지도를 일본에 보냈다고 주장하는 해이기도 하다.[23]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이 주장이 백제가 충청 ~ 전라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주장은 연대나 사실 관계 면에서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 실제 백제, 그중에서도 근초고왕 한 명만이 '마한'을 정복하고 확장하는 과정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보며, 아예 관련 기록이 후대에 정치적 목적에 따라 소급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고고학적 사실은 인정하되, 문헌의 사실성은 비판적으로 보는 것. 《일본서기》의 기초적인 신뢰도 자체가 굉장히 의심스럽기에 나올 수 있는 주장이다.[24] 백제 입장에선 배신이자 영역 축소로 받아들여졌겠지만 전남 동부 남해안 소국들 입장에선 보다 조건이 널럴하고 좋은 프랜차이즈로의 변경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소지가 높다. 그 대가로 훗날 백제의 직접적인 군사적 응징을 당하기도 했지만.[25] 다만 이런 완전소거 조치는 백제 입장에서도 매우 부담이어서 남용되진 않았으나, 침미다례 몇몇 소국만 이런 일을 겪은 건 아니었다. 충청도 일대에서도 꽤 사례가 적진 않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름아닌 목지국 본류 세력이 이런 짓을 당했었다.[26] 병합 여부를 떠나서 전남 고흥군 길두리에서 출토된 한성백제 시기의 금동관이나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영산강 토기 표지유물을 보았을 때 한성백제 시기에도 전남 마한 지역과 교류관계가 있었던 것은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한성백제의 직접적인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단순 교류 차원으로 해석된다. 참고로 전남 지역 마한은 삼국을 넘어 왜, 중국 심지어 동남아시아와도 교역을 했다.[27] 백제왕릉의 규모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으나 한 무덤에 1~2명만 매장된 백제 왕릉과 여러 세대에 걸쳐 추가장이 이뤄지며 거대해진 전남 지역 대형 분구묘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또한 백제는 일찍부터 박장이 특징이었으며, 한반도 삼국과 일본 모두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고분 규모는 되려 축소되는 모습을 보인다.[28] 다만 앞서 지적하듯 일반적인 고분들이 특정 시기에 개인 혹은 2명 내외를 매장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과 달리 전남 지역 대형 고분들의 경우, 대체로 한 분구에 여러 매장 시설이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서 여러 세대에 걸쳐 축조되는 것도 목격되는 등 단순히 고분 규모만으로 위세를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29] 최성락,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에 의한 통합과정>, 《지방사와 지방문화》20-1, 2017 및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형성과정 연구》, 주류성, 2018[30] 이쪽은 탐라를 정벌하러 가는 과정에 무진주에서 탐라의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라 전남 지역은 이미 백제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는 지역이었지, 정벌 대상이 아니었다는 견해도 있다.[31] 바로 위에 썼다시피 정벌 대상이 탐라로 적혀 있어 전남 일대 정벌 기사로 볼 수 있는지는 이견이 존재한다.[32] '완전 다른 고유'로 통칭될 수는 없다. 오히려 고분 묘제로 볼 때 한성백제와 가장 거리가 있는 쪽은 마한의 원 수장국이었던 목지국과 그 주변 거수국들, 즉 충청-전북 내륙 일대였다.[33] 심지어 551년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도 병력 부족으로 스스로 철군하기도 했다.[34] 마한의 마지막 조공 기사인 3세기 후반과 '마한' 영역이 완전히 백제에게 정복된 것으로 이견이 없는 6세기 중반 사이 시기에 '마한'이 사료에 뚜렷하게 등장하는 사례는 《송서》에서 야마토 왕권이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 제군사'로 책봉을 요구해 백제만 빼고 받은 사례가 유일하다. 그러나 《송서》 <열전>에서는 이전과 이후의 사서들과 달리 한반도와 일본 열도 여러 국가의 내부 사정에 대한 기사 없이 책봉 기사만 기록하고 있어 책봉을 받은 당사국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무엇보다 저 기사는 소위 임나일본부설 문제에서 언급된 지 오래되어, 한국에서의 연구를 통해 야마토 정권이 뻥카를 던지며 외교를 한 흔적일 뿐 실제 한반도 남부의 사정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반박이 이미 자리잡았다. 다시 말해 사실로 믿을 수 없는 기사에만 '마한'의 이름이 잔존해 있는 것이다.[35]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보다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의 연대적 신뢰성이 많이 떨어져서 고구려사보다 백제, 신라사를 접근할 때 보수적인 설이 지배적 경향이 다소 있다.[36] 연구자에 따라 분구묘를 주구토광묘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37] 영산강 일대에는 6세기까지 거대한 항아리를 무덤으로 사용하는 문화를 가진 재지 세력이 존재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주류 의견은 이들이 백제의 영향력 하에 놓인 반독립 세력이었다는 쪽으로 중론이 모인다. 대체로 과거부터 문헌사학계 및 고고학계 일부에서는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반독립 세력으로 보는 편이지만, 최근 고고학계 일부에서는 현장 발굴 연구를 바탕으로 독립 세력으로 보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다만 후자는 아직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진 못하고 있으며, 주로 이는 한성 공함 직후 이 일대가 잠깐 독자성을 확보한 것으로 해석된다. 섬진강 유역 일대는 별도 세력이니 뭐니 이전에 완전 가야 쪽으로 넘어가버린 쪽으로 해석된다. 단, 직접 지배로 편성된 건 영산강 유역 세력보다 적어도 20~30년 앞서는 것 또한 간과해선 안 되겠다.[38] 익산 일대에 마한사 및 백제사 연구 현황이 복잡하게 얽힌 건, 익산이 초기 마한 중심지이자 백제의 부수도였던 까닭에 전승이 이 두 사실 내에서 분리되지 않고 얽혀, 실은 통일신라 말기 익산 사람들마저 뭐가 뭔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견훤이 후백제 왕으로 취임하면서 한 연설이 뭔가 뒤죽박죽인 건 이것이 이유였다.[39] 이웃 신라에서 불교가 토착 세력의 반발 속에 법흥왕이차돈의 순교로 어렵게 수용된 후 곧바로 호국불교로 급속히 발전했던 것에 비해, 백제에서는 침류왕 때 수용된 이후 한동안 불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만큼 불교가 크게 융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40] 이때는 수곡성을 공격했다.[41] 광개토대왕릉비 2면 5행에 의거. 다만 학계에서는 58성 700촌 중 일부는 이전에 아신왕의 관미성 침략 때 반격으로 빼앗은 것을 일괄 합산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42] 강원도 영서 일대가 없어진 상황에서 개성이라도 확보해놓지 않을 경우 한성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건, 이후 후대에서 여러 차례 증명된다.[43] 재위 405년 ~ 420년[44] 애당초 백제가 보냈다는 볼모에 대해서는 그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하는 게,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라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라는 일본 쪽의 기록만 있지, 볼모를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서도 '볼모'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오직,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표현일 뿐이다. 오히려 이 당시 왜국으로간 태자는 볼모가 아니라 외교관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으니, 지금 현재로서는 볼모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당시 태자를 맡길 만큼 백제 국왕과 왜국 대왕(오오키미)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음을 알 수 있다.[45] 고구려 장수왕 재위 기간(412년 ~ 491년) 동안 백제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을 거쳤을 정도이다.[46] 오랫동안 선왕 비유왕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수년간 개로왕이 제대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정도로 심각한 내분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47] 이 권력 투쟁 과정에서 밀려난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고구려로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는데 475년 장수왕의 백제 원정 때 이들이 선봉에 선 것이다.[48]일본서기》에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국내 역사학자 중에서도 이때 백제가 사실상 멸망했고, 웅진에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즉 한성백제와 웅진사비백제는 별개의 국가라는 이론) 중국사에서도 서진이 멸망한 후, 동진을 다시 세웠고, 북송이 망한 후, 남송을 다시 세우는 등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49] 한성백제박물관 시리즈 11~13권 참조. 아이러니하지만 후삼국시대에 추풍령 일대가 후백제에게 넘어가서 그 지역 신라 옛 부대들이 왕건의 고려를 저지하게 된다![50]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51] 참고로 왕권 버금 세력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처음 시기는 왕비족이 사라지는 신라 태종 무열왕 대부터, 분권의 상징인 사병이 완전히 혁파되는 것은 조선 태종 시기는 되어야 한다.[52] 문주왕의 형제인 곤지의 아들이 무령왕(장남)과 동성왕이다. 동생인 동성왕이 먼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진씨 세력이 더 어리고 고분고분해 보이는 모대를 왕위 계승자로 선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3]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이복형이자, 곤지의 장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의 생몰연대 상으로 동성왕의 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54] 동성왕 생존 당시 무령왕은 동성왕 반대 세력에 가담해 있었다. 때문에 동성왕의 피살에 무령왕이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기록 미비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55] 물론 일본 학자들은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체로 이들은 전남 일대까지 왜가 지배하는 세력이었다는 해석을 구태여 고수하고 싶은 희망을 굳이 숨기지도 않고 있다.[56] 일부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남 지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57]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기록으로 고구려에서 북위에 '우리가 부여산 금이랑 섭라(탐라로 추정)산 패물을 썼는데 부여는 물길한테 쫓겨나고 섭라는 백제가 처묵처묵해서 조공을 못합니다.'라고 변명한 기록이 있다. 북위는 이에 대해 '당신들이 잘하면 되지 왜 우리한테 와서 칭얼대냐, 잘 좀 해봐라'고 깠다.[58] 흉리(匈梨)의 리(梨)는 고(구)려의 려(麗)와 음이 같고, 흉(匈)은 고(高) 대신 흉노를 연상케 하는 용어를 사용한 비칭이라는 의견도 있다.[59] 다만 이는 프로파간다에 가깝고 실제로는 가야 지역에 방 - 군 - 성 조직을 설치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간파한 이 지역 소국들은 사비회의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며 신라에서 관직을 타내는 모습까지 보인다. 당연히 성왕은 피꺼솟.[60] 임용한 등의 해석에 따르면 백제 왕실과 지방 세력 간의 분열로 인해 지방 세력이 왕권을 강화해줄 것이 뻔한 한강 유역을 개발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거절했고, 여기에 북쪽의 고구려와 남한강의 수운을 업은 신라의 양측의 압박을 받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왕이 철군하자, 신라 진흥왕이 '잘 먹겠습니다'하고 한강 유역을 접수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라고 적혀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문서 참조.[61] 성왕의 목을 벤 자는 《삼국사기》에는 비장 고간 도도라고 되어 있다. 도도가 노비라는 설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표현으로, 정확하게는 도도가 노비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성왕이 도도를 꾸짖으면서 천한 노비라고 부른 것이므로, 노비라는 표현이 꼭 도도의 실제 신분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62] 29,600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후에 백제가 보이는 모습을 보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 맞아 보인다. 관산성 전투 항목 참조.[63] 당시 왜는 가야와의 무역을 통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절실한 필요성이 있었다.[64] 그나마 순천, 광양, 여수 등은 어떻게든 지켜내는 데 성공했는데, 이 일대까지 빼앗겼다면 침미다례 일대도 지켜내기 어려워져 아예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지경까지 되었을 것이다.[65] 태자 아좌의 경우 혜왕이 죽인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위덕왕의 경우 나이가 연로했기 때문에 암살인지 자연사인지는 불분명하다.[66] 《삼국사기》에는 법왕이 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백제 왕들의 가족 관계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틀릴 때가 많다.[67] 그러나 관산성 전투 이후 진흥왕의 신라에게 잃었던 무주는 이때도 수복에 실패하여, 백제가 망할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이 일대가 다시 백제의 영역이 되려면 무려 후백제 건국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68] 선왕인 무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당과의 외교에 많은 공을 들였다. 무왕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면 백제가 도와주겠다고 약조하면서 여러 차례 당에 고구려의 침공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작 당이 645년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의자왕은 약속을 깨고 당을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의자왕은 당의 또다른 동맹국인 신라가 당을 도와 고구려 원정에 나섰을 때 신라의 배후를 공격했다. 이에 당 태종은 분노하여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다. 당 태종이 죽고, 당 고종이 즉위하자 의자왕은 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다시 사신을 파견했으나 당 고종 역시 냉담했고(당 태종이 유언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고, 백제 사신도 받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652년 이후 당으로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69] 당나라는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었고, 또 신라 왕이 여왕인 것을 비웃어 신라 조정을 화나게 하는 등 두 나라간의 외교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70] 물론 《삼국사기》에도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건국연대와 관련하여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 주몽의 17세손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12세손으로 기술했다. 이 경우 <광개토대왕비문>은 광개토대왕 때까지 정식 고구려 왕으로 등재된 고구려 군주들의 대수로 세어 17세손이라 한 것이고, 《삼국사기》는 세대수를 엄격하게 재서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 사실 고구려식 왕호는 때에 따라 본명+왕, 장지명+왕, 중국식 시호+왕, 위업을 간략화한 호칭+왕 등등으로 다양하여 후대 한반도 왕조들처럼 중국식 시법을 엄밀하게 지키진 않았기에, 그 17세손이 정말로 중국식으로 엄격해서 대수를 셌다고 보긴 어렵다.[71] 《삼국사기》가 정말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백제사 및 신라사 부분에서 연표와 기년, 사건이 잘 맞지 않는 부분, 고구려의 공백기 중 서술에 문제가 있는 부분 등이지만, 《삼국사기》는 수세기가 흘러서 고려 시대에 쓰여진 역사서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각종 중국 사서와의 교차 검증 결과 오류는 거의 없었고, 차이가 있는 부분은 주로 당대에 한반도에서 쓰여진 1차 사료를 우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72] 물론 사서에 모든 전쟁이 기록된 것이 아니고, 삼국시대 후대에 갈수록 기록이 자세해지기 때문에 의자왕이 삼국시대에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군주인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다.[73] 패전의 책임으로 태자 창, 즉 위덕왕은 하마터면 왕위에 오르지도 못할 뻔 했다.[74] 이 시기가 바로 당태종 - 당고종으로 대표되는 당나라의 전성기로서, 비단 당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강력한 전성기 중 하나였다. 또한 백제는 총동원해도 병력 10만명이 넘을 가능성이 희박한데 비해, 당은 여러 국가와 전쟁을 하면서 한 전선의 원정에만 적어도 수만 명 이상의 군사를 여러 차례 보낼 수 있는 국가였으며 백제 원정 당시 병력은 13만명에 달했다. 기본 체급이 다른 국가와의 싸움이었다.[75] 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 앞바다[76] 5,000명이라는 수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참고한 것인데 사실 <신라본기>에도 5,000명이 백제군의 전부였다고 직접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편에는 의자왕계백에게 5,000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신라군과 싸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뿐 그 후 사비성이 함락될 때까지 백제군의 저항과 병력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으로 볼 때도 계백의 신라군 방어 병력 이외에 최소한 사비성 방어 병력이 별도로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77] '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등.[78] 또 다른 의문점은 당군이 어느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의자왕과 신하들이 작전을 논의할 때는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벌포를 막을 것인가를 논의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기벌포에서 백제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구당서》 및 <백제본기>에는 '웅진강' 입구에서의 상륙작전으로 백제군을 격파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나오며, 상륙한 곳은 강의 동안(東岸)(《신당서》에는 좌안(左岸)으로 표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웅진강과 백강이 같은 강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강인가 하는 점이다. 강 이름의 차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웅진강과 백강을 서로 다른 강으로 생각한다면, 백제 측은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을 예상했는데 당군이 실제로는 웅진강을 선택함으로써 백제군의 의표를 찔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설은 백강과 웅진강은 모두 같은 금강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신라본기>에서 기벌포를 언급하고 있으며, 기벌포는 금강 하구의 장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106] 그런데 통설을 따르는 경우 금강 하구에서 강의 동안은 기벌포와는 반대편인 군산 방면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아직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백강 전투와 관련하여 백강이나 웅진강을 금강이 아닌 동진강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참고로 《일본서기》 <제명기>에는 당군의 상륙 지점이 미자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자진이 곧 기벌포인지 혹은 어디를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79] 신라군이 합류한 것이 백제와의 결전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해서는 《구당서》나 《삼국사기》 모두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한 다음날 사비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황산벌 전투 이후 사비성 함락까지는 백제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백제군과의 결전 부분에 당군만이 언급될 뿐 신라군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신라군의 합류는 백제군과의 결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전이 벌어진 곳이 사비성에서 불과 20 ~ 30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당군이 후퇴하는 백제군을 추격해서 곧 사비성에 입성했다고 기술된 점에서 신라군이 그 전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군의 합류 시점이 백제와의 결전 이후라면, 당군은 백제의 주력을 격파하고 약속한 날짜에 도착했는데 신라군은 계백 별동대의 저항을 처리하지 못해서 날짜를 지키지 못한 셈이 되므로 소정방이 격분해서 신라 독군의 목을 베겠다며 날뛴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80]삼국사기》를 제외하고 중국의 모든 사서와 《삼국유사》는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는 부여융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나중에 부여효로 태자가 교체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단 다수의 사서에서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는 만큼 부여융이 태자였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게 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다면 이는 655년 정월에 발생한 친위 쿠데타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81] 흔히 웅진도독부로 알려져 있으나, 그건 백제부흥군의 격렬한 저항과 신라의 협조를 가장한 견제 탓에 도저히 도독부 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채택한 궁여지책이었다. 당나라의 본디 의도는 백제도호부 설치였다. 물론 이건 신라에 대한 전면적인 배신이었지만[82] 흑치상지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소정방에 의해 수도 사비성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과 학살이 벌어졌다고 한다.[83]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백제 유민》 편 참조[84]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백제 유민》편 참조[85] 제대로 협조도 하지 않고 초반에 좋은 대우했을 때 거부한 망한 나라 상층부한테 이 정도면 양호한 대우였다고, 신라측은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구 백제계에 대한 푸대접이 결과적으로 신라의 재분열을 촉진한 것은 자명하다. 신라가 망할 때도 끝까지 경순왕을 따르던 진골 귀족 대부분이 고려 초에 향리로 격하되고 마는 걸 피할 수 없었음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다.[86] 다만 한때는 신라의 백제 유민에 대한 경계와 차별이 백금서당에서 드러난다는 주장은 요즘 와선 반론받아 배척된 상황이다. 삼국사기에서 백금서당의 장창병이나 기병 부대 군관이 다른 9서당 부대에 비해 다소 빠져 있거나 적은 걸 근거로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간 백제 유민 편에서 차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 부분은 그보다 수 년 후 연구 결과가 반영된 경상북도문화원 발간 신라사 시리즈 및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고대 편에서 반론되었다. 백금서당에 소속된 백제인들보다 신라에게 저항을 더 오래도록 하다가 나중에야 편입된 청금서당은 백금서당보다도 더욱 차별을 받아야 하였으나, 청금서당의 편제는 다른 9서당 부대와 똑같기 때문. 김부식이 수집한 자료 자체에 아무래도 누락과 탈락이 있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87] 왜에 있던 부여풍을 옹립한 이유는 당시 백제에 왕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백제부흥군은 왜의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했고 그 시점에서 왕위 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부여풍이어서지, 백제 왕족이 다 증발해선 아니었다.[88] 토착세력은 주로 촌주를 맡았다.[89] 신형식의 《신라통사》 참조. 《고려 국가와 집단의식》 참조.[90] 원성왕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내물왕 직계가 아니라 지증왕 직계인데 경덕왕과의 촌수 차이는 17촌으로서 조선 철종-고종 사이 촌수와 같았다. 멀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정도까진 아니었다.[91] 물론 고구려는 그때 후연, 북연중국 세력과의 양면전선을 겪었음을 고려해야 한다.[92] 자치통감 기준으로 최소 28,300여 호(戶).[93] 백제인, 신라인과 더불어 고구려인도 한국인의 혈연적 직계 조상에 합류하면서 한 축을 담당하게 건 같지만 백제만큼은 아니었다. 고구려인 다수가 신라, 발해, 고려(발해부흥운동 실패로 계속 유입되었다)를 통해 오늘날 한국인의 직계조상이 된 것과는 별개로, 상당수는 당나라나 북방민족에 귀속되어 현지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94] 규모로 보아 어림잡아 최소 몇천에서 최대 1만까지 추정된다. 이들의 대다수는 백강 전투에서 궤멸하다시피 한 왜군과 함께 일본 열도로 향하였다.[95] 곡나진수, 목소귀자, 억례복류 등.[96] 사택소명, 귀실집사, 각복모, 허솔모 등.[97] 발일비자, 금라금수, 찬파라, 덕정상 등.[98] 물론 이런 루트를 타고 일본으로 갈 수 있었던 백제인들은 소수에 불과한데다 지극히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수뇌부와 잔당의 대부분은 신라군에게, 일부는 흑치상지처럼 당나라군에게 투항한 상태였다. 고로 백제인은 대부분 일본으로 떠났으니 따라서 한국과 백제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하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당대의 기술로는 배를 통해 그것도 해상으로 대규모로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에는 한계가 많고 더더군다나 국가 주도의 원정도 아닌 규모가 미약한 일개 가문들의 해상이동이었다. 이마저도 백강 전투 때 전멸하다시피 한 왜군의 배들을 이용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가는 가장 좋은 루트는 이미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신라에 의해 막혀 있었기에 국가 단위의 대규모 이동이었다면 당연히 신 국토 개간을 위한 노동력이 매우 필요하며, 수군이 건재한 신라가 그것을 보고만 있었을 리도 없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미 농경이 주류산업인 상태에서는 수렵시대와는 달리 인구가 매우 불어나 있기에 부양능력도 없이 대규모로 어딘가로, 그것도 바다를 통해 떠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애초에 백제인이 거의 안 남아 있었다면 백제부흥운동과 후백제의 발흥은 설명 자체가 안 된다.[99] 약광을 비롯한 1,799명.[100]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었다.[101] 물론 일본과 백제는 시종일관 믿음직한 군사동맹이었지만 백제계는 나당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저항하며 나름 포용하려 애썼던 신라의 제안을 메몰차게 뿌리쳤었으니, 신라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는 조치였으나 어쨌든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102] 연민수 교수의 <일본 속의 백제 이주민과 유민> 편 저술 참조. 백제문화연구원 《백제 유민》 편 117~121쪽[103] 충상, 상영은 백제부흥운동 초기의 극히 예외적인 사례므로 여기서 꺼내 비교하면 안 된다.[104] 다만 유즈키노키미는 진시황의 후손을 칭했다. 이는 참칭으로 보인다.[105] 그나마도 《구당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타충의, 부여준, 흑치준을 뺀 나머지 인물들은 금석문에서 그 행방을 알게 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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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백제 부흥 운동 과정에서 마지막 결전이 이루어진 곳은 백강이며, 역시 기벌포가 언급되고 있으므로 백강 = 금강이라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다만 '백강'이라는 이름이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동진강과 금강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는 견해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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