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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09:32:20

도침

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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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5d2,#ccc4a8> 연대 부흥운동
660 ~ 663년
백제부흥운동 ( 도침 / 귀실복신 / 부여풍 / 흑치상지 & 사타상여 / 지수신 )
664년
사비산성 반란
822년
김헌창의 난*
900 ~ 936년
후백제 ( 견훤 )
1237년
이연년 형제의 난
*백제부흥을 표방하진 않았으나 백제 유민들의 분리주의를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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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영군장군 토진대사 도침
자칭 영군장군(領軍將軍)
별칭 토진대사
스승 묘련(妙蓮)
이름 도침(道琛)
생몰연도 ? ~ ?[1]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의 모습4. 여담

1. 개요

백제 멸망 직후 귀실복신, 흑치상지 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지휘한 장수로 원래는 승려였다.

2. 생애

다른 백제측 인물들처럼 기록이 남은 것이 별로 없어서 자세한 내력을 알 수는 없고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개암사 불복장 유물에서 발견된 별기[2]에는 도침이 개암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묘련(妙蓮) 대사의 제자라고 소개되어 있다.[3]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칭한 귀실복신과 함께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고 불렸다.

661년 2월 백제부흥군이 힘을 모아 옛 수도 사비성을 공격해서 나당연합군을 궁지에 몰았는데 도침은 웅진강 입구에서 목책을 세우고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의 사비성 진입을 막았다.

백제부흥운동의 여파로 사비성에 고립된 유인원에게 "대사께서는 언제쯤 서쪽으로 돌아가시렵니까? 마땅히 사람을 시켜 전별해 드리리다."라고 조롱하는 글을 보낼 정도로 백제 부흥군의 위세는 컸지만 백제부흥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귀실복신과 내분을 일으켜 결국 귀실복신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귀실복신도 풍왕과 불화를 일으켜 풍왕에 의해 처형당하였고 흑치상지도 항복하면서 백제 부흥군의 세력은 위축되었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에서 열리는 은산별신제에서 복신과 함께 모셔지는데 음이 변형돼 '토진대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3. 창작물에서의 모습

파일:도침-삼국기.jpg
삼국기에서의 도침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삼국기 문서
4.3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도침-대왕의꿈.png
대왕의 꿈에서의 도침

이 작품에서는 연개소문의 밀명을 받고 백제에 파견된 고구려 출신 인물로 각색되었다. 그런데 실제 역사상에서의 도침은 백제인이고 승려인데, 이 작품에서는 승려가 아니라 장수로 나왔고, 또한 백제인이 아닌 고구려인으로 나왔는데, 워낙 인지도가 낮은 인물이라 그냥 장수 A 정도로만 묘사되었다.

4. 여담

도침 이외에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사미승 각종(覺從), 태종 무열왕이 함락시킨 왕흥사잠성 등 백제 불교계도 부흥운동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도침을 부흥운동가 부여자신과 동일인물로 보았으나, 도침은 귀실복신에게 살해된 데 비해 일본서기 기록상 부여자신은 백제부흥운동이 패망한 이후로도 살아남아 일본에 망명했기 때문에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없다.


[1] 이 부분은 백제부흥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복신과 내부분열이 일어나 살해된 것은 맞지만 시점이 딱히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다. 대략 661년 4월 반골양 전투 후 ~ 662년 사이에 복신에게 피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 1979년 개암사 대웅전에 모신 불상의 내부 유물이 도난당했는데 도난범들이 불상의 왼손을 잘라내고 안에 든 것을 꺼내다 떨어뜨리고 간 종이. 작성자는 개암사사적기에 1658년 개암사를 재건했다고 나오는 승려 밀영.[3]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서도 이 설을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