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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4 02:02:39

툴루이 가문 내전

몽골 제국의 내전
툴루이 가문 내전
(1260~1264)
주치인 울루스의 제2차 훌레구인 울루스 침공
(1265)
툴루이 가문 내전
拖雷家族內戰 | Toluid Civil War
이명 툴루이가 남북 전쟁, 툴루이가 내전, 몽골제국 제위계승 전쟁, 아리크부카의 난
기간 1260.3~1264.8
장소 몽골 제국 전역
원인 몽케 칸 사후 아리크부카의 기습 대칸 즉위
교전세력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쿠빌라이 세력
-
[[일 칸국|
일 칸국
홀레구인 울루스
]][[틀:국기|
행정구
홀레구인 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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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다이인 울루스
]](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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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 칸국
주치인 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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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차가다이인 울루스
]]→(~1263)
- 파일:220px-Kaidu's_tamga.png외게데이 울루스
지휘관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쿠빌라이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카단

[[일 칸국|]][[틀:국기|]][[틀:국기|]]훌레구 칸

[[차가타이 칸국|]][[틀:국기|]][[틀:국기|]]알루구(1263~)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아리크부카

[[킵차크 칸국|]][[틀:국기|]][[틀:국기|]]베르케 칸

[[차가타이 칸국|]][[틀:국기|]][[틀:국기|]]알루구(~1263)
파일:220px-Kaidu's_tamga.png카이두 칸
결과 쿠빌라이의 승리와 대칸 즉위
영향 몽골 제국의 실질적 분열
원나라 건국
피해 규모
1. 개요2. 배경3. 전개4. 파장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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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제국의 대칸 몽케 칸이 사망한 후 아리크부카쿠빌라이가 대칸 자리를 놓고 벌인 계승전쟁.

몽골 제국의 분열의 화룡점정을 찍은 내전으로 이 내전 이후로 몽골 제국은 과거와 같은 연합된 군사 원정을 치르지 못하고 각각 독립적인 나라로 성장한다.

2. 배경

몽케는 1258년 3월에 성도를 점령하며 사천 지방 일부를 점령했으나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전진을 하지 못했고, 끝내 1259년 8월, 쿠빌라이가 전장에 도착하기 이전, 합주 조어성[1]을 공략하던 도중 병으로 급사하여 붕어했다.[2] 그리고 이때를 노려 형제인 쿠빌라이와 훌레구가 각각 원정에 나선 틈을 타 아리크부카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해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의 지지[3]를 받아 대칸의 자리에 추대되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몽케가 죽었음을 알았는데도 계속 장강 변의 주요 도시였던 악주[4]를 공격했다.(악주 공방전)[5] 그러나 악주성 내의 사상자가 13,000명에 달했는지[6], 비밀리에 독단적으로 쿠빌라이에게 접촉하여 장강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는 대신 매년 남송이 막대한 세폐를 바치는 것을 제안했다. 쿠빌라이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한족 출신 참모인 학경이 몽케 칸의 장례 등 할 일이 많다고 진언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곧 가사도와 평화협정을 맺은 뒤 철군했다.[7][8]

쿠빌라이는 개평부[9]에서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소집해 자기 휘하의 몽골족, 여진족 출신 장수들의 지지를 얻어 대칸에 추대되면서 정통성 문제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다. 또, 배후를 든든히 하기 위해 참모였던 학경을 사신으로 삼아 남송에 보냈다. 하지만 가사도는 협정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학경을 가두었다.[10]

3. 전개

아리크부카는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대칸으로 추대받았을뿐더러 본래 몽골에서는 막내 아들이 세습하는 말자 상속의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에서 앞섰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화북이라는 강력한 배후 기지가 있었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화북 이외 점령지의 몽골군 사령관들과 울루스의 칸들이 아리크부카에게 붙는 바람에 전체적인 전력에서는 약세였다. 하지만 각 칸국들이 자신들끼리 싸우느라 아리크부카에게 충분한 지원을 하지 못했고, 결국 국지적인 전력에서 쿠빌라이 쪽이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1261년에 벌어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 양 군대가 본격적으로 붙었을 때도 카단이 이끄는 쿠빌라이군이 승리했으나 아리크부카는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카단이 수도인 카라코룸의 물자를 끊는 데 성공하면서 판도가 쿠빌라이 쪽으로 기울었다.

1262년 8월, 베르케 칸은 지하드를 선언하고 노가이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약 3만명의 군대를 홀레구인 울루스에 파견한다. 노가이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빠르게 수도까지 노렸지만, 수도 근처에서 격퇴당한다. 이후 훌레구 칸은 반격을 시도해 노가이의 진영을 급습했지만, 그 진영은 이미 비어있었다. 노가이가 버리고 간 진영을 홀레구인 울루스가 약탈하는 사이 노가이가 군사를 이끌고 기습해 홀레구인 울루스의 군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 수천 명이 도망치려다가 익사했으며 많은 수가 아제르바이잔으로 도망친다.(테렉 강 전투, 1262)

1263년, 아리크부카가 차가다이인 울루스에 자기가 임명했던 알루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일전에 아리크부카는 알루구를 차가다이인 울루스 칸에 임명하면서 세수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갖게 해주었다. 알루구는 세수의 일부를 요구하는 사신을 죽인 다음 동맹에서 이탈하고 쿠빌라이의 편에 붙어 아리크부카를 지원하던 우구데이 울루스의 카이두를 침공한다.

주치인 울루스의 칸 베르케 칸카이두 칸에게 동맹군을 파견했고, 이 동맹군에 힘입어 카이두 칸알루구를 우구데이인 울루스에서 몰아낸다. 여기서 카이두는 차가다이인 울루스 본토로 침공까지 했지만, 오트라르에서 알루구에게 패배한다.

아리크부카의 진영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리크부카가 동맹국인 차가타이 칸국의 인물들을 살해하는 등 가혹한 처신을 일삼으면서 몽골인들의 민심까지 떠나게 되었다.

결국 1264년 8월, 보급과 병력이 바닥난 아리크부카는 스스로 상도로 와서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던 인물들은 죽였지만 아리크부카는 용서했다.[11][12] 이후 쿠빌라이는 새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에 올랐다. 아리크부카는 명분과 정통성[13]에서 앞섰지만 결국 중원에 세력을 잡고 있어 풍부한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었던 쿠빌라이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14] 아리크부카를 비롯한 반 쿠빌라이 세력은 제거되고 쿠빌라이는 비로소 정식으로 제5대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인정받게 된다.

원래부터 인정하던 홀레구인 울루스와 함께 주치인 울루스와 차가다이인 울루스는 쿠빌라이 칸을 인정한다. 그러나 제국 내의 갈등은 너무 깊었고 누구나 제국이 이전과 같이 통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전은 계속 이어진다.

애초에 군사력, 정통성에서 앞섰던 아리크부카가 진 것은 그럴 만한 깜냥이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전투에서는 승리했는데 포로들을 잔혹하게 대했고 이 때문에 많은 인망을 잃었을뿐더러[15] 내분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계속 편을 잃었고 끝내 많은 일족들이 싸움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자 아리크부카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리크부카는 배신한 자들을 쫓느라 중앙아시아를 활보했고 안 그래도 세력이 줄어가는데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기까지 했으니 애초에 정치력이나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대칸에 걸맞지 않은 인물이었던 셈이다. 만약 몽골 제국 내전에서 쿠빌라이 칸이 아니라 아리크부카가 승리했다면 몽골 제국의 분열은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 파장

5. 이후

아리크부카는 용서를 받아 몽골 고원 서부를 통치하다가 1266년에 사망했다.[16] 아리크부카가 차지하지 못한 몽골 제국의 대칸 지위는 124년 뒤 명나라에 밀려나 완전히 몰락한 천원제(쿠빌라이 칸의 후손)를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조리그투 칸인 예수데르가 살해하고 차지하게 된다.[17]

아이러니한 것은 몽케 칸은 생전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를 아껴서[18] 자기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가 죽은 후 계승 다툼에서 승리한 것은 생전 그가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던 바로 아랫 동생인 쿠빌라이였다. 그의 아버지인 툴루이가 막내였고, 친 형제인 오고타이에게 제거되었던 것을 생각하면...[19] 심지어 방식도 비슷하게 죽었다.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 오늘날 충칭시 허촨구[2] 단, 이것에 대해서는 훗날을 생각한 쿠빌라이가 일부러 진군을 늦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3] 주로 오고타이 가문, 차가타이 가문 세력이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4] 오늘날 우한(武汉)시 우창(武昌) 구. 양양과 함께 남송 정권에 있어 또 하나의 요충지였다.[5] 이때 그동안 질질 끌면서 진군해왔던 것과는 달리 제법 빠르게 공격을 진행했는데, 이는 쿠빌라이 자신이 원정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으면 훗날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대리 원정을 함께 진행했으며 돌아가지 않고 남송을 공격하다가, 고립되었던 우량카다이의 부대를 구해내 그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우량카다이는 쿠빌라이의 반대파에 속했다.[6] 하지만 몽골군도 역병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7] 악주 화약에 관해서는 가사도가 먼저 화의를 제안했는지, 아니면 쿠빌라이가 철군하는 도중이라도 남송군의 공격을 덜 받기 위해 가사도에게 화의를 제안했는지에 대해 중국 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다고 한다. 진순신의《이야기 중국사》에 따르면, 가사도가 매국적인 거래를 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가사도가 사태 파악이 뛰어나고 두뇌 회전이 빠른 만큼, 매국적인 거래를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8] 악주 화약에 대해서는 중국 측 사학자들도 논쟁이 많은데, 가사도가 화의를 제안하였고 가사도의 재능을 인정했던 쿠빌라이가 이를 수락했던 것인지 아니면 대칸 승계 문제로 철수해야 했던 쿠빌라이가 철군하는 도중이라도 공격을 덜 받기 위해 제시한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고 한다. 진순신의 저서인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가사도가 매국적인 거래를 했을 리가 없고 쿠빌라이가 철군 도중이라도 공격을 덜 받게 하기 위해 수많은 골동품으로 가사도를 매수했다고 주장한다.[9] 훗날 원나라의 상도로 오늘날 중국 내몽골자치구에 위치했음[10] 학경은 진주에 억류되었다. 이때 학경을 실질적으로 억류했던 것은 이정지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극단적인 대몽 강경파였고, 훗날 원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탈출한 문천상을 원나라의 간첩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또한 원나라의 사신을 죽이는 등 양주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부장들의 배신으로, 강재와 함께 사로잡혀 처형되었다.[11] 그러나 아리크부카는 1266년에 사망했다. 독살 의혹이 있는데 여러 정황상 쿠빌라이가 제거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곧바로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안 그래도 정통성이 부족해서 반대파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데 이 와중에 동생까지 살해해서 그들의 신망을 더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2] 훗날 원나라명나라홍무제에게 밀려나 몰락한 이후, 북원의 천원제 토구스 테무르를 아리크부카의 후손이었던 조리그투 칸이 살해하고 대칸에 즉위하여, 결국 100여 년 만에 쿠빌라이 가문은 몰락하고 아리크부카 가문이 몽골 제국의 대칸위를 잇게 되었다.[13] 몽골인들은 막내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어 아리크부카는 몽골 본토를 다스릴 수 있었고 또한 쿠빌라이가 칭기즈 칸이 경계한 한화 정책을 펼치면서 대다수의 몽골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케가 공공연히 자기 후계자로 아리크부카를 찍어둔 것을 가신들도 전부 알았지만 가산과 가권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말도 있으니 참고하자. 링크[14] 이때 고려 원종이 태자 시절에 몽골 제국과의 강화를 위해 카라코룸으로 가던 중 쿠빌라이를 만났는데 이 만남이 몽골과 고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자세한 것은 여몽전쟁 참조[15] 이게 타민족이면 상관없는데 같은 유목민족에게 그랬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아리크부카의 할아버지인 칭기즈 칸자무카를 비롯한 다른 경쟁자를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관대함'이었다.[16] 그의 죽음에 대해 독살 의혹이 있으며 정황상 그럴 가능성도 높다.[17] 다만 이후로 아리크부카 계열이 완전히 대칸 자리를 독점한 것은 아니라서 이후로도 쿠빌라이 계통과 계속 대칸자리 두고 지겹게 싸웠다. 그래서인지 사한국도 그런 면이 강했지만 몽골도 조리그투 칸부터 다얀 칸 이전까지 92년 동안 15명의 대칸이 즉위하는 혼란이 벌어진다.[18]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무척 아꼈다.[19] 원조비사에 따르면 금나라가 멸망한 후 오고타이가 죽을 병에 걸리자 툴루이는 자기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오고타이를 살려 달라고 하늘에 기도했고, 얼마 후 오고타이가 살아나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툴루이가 한때 대칸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어서 사실은 오고타이와 퇴레게네, 테무게 옷치긴에게 모살당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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