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1-20 21:46:12

다얀 칸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대칸
{{{#!wiki style="margin: 0px -10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초대 임시 제2대
칭기즈 칸 툴루이 오고타이 칸
제3대 제4대 제5대
귀위크 칸 몽케 칸 세첸 칸
제6대 제7대 제8대
올제이투 칸 쿨루크 칸 부얀투 칸
제9대 제10대 제11대
게겐 칸 이순테무르 칸 아슈케베 칸
제12대 제13대 복위
자야아투 칸 후투그투 칸 자야아투 칸
제14대 제15대 제16대
린칠반 칸 우카가투 칸 빌레그투 칸
제17대 제18대 제19대
우스칼 칸 조리그투 칸 엥케 칸
제20대 제21대 제22대
니굴세그치 칸 토코칸 칸 오루크테무르 칸
제23대 제24대 제25대
올제이테무르 칸 델베그 칸 에세쿠 칸
제26대 제27대 제28대
아다이 칸 타이순 칸 오케크트 칸
제29대 제30대 제31대
다이온타슨다이 칸 오헤크트 칸 멀런 칸
제32대 제33대 제34대
만돌 칸 다얀 칸 바르스볼라드 칸
제35대 제36대 제37대
알라그 칸 구덴 칸 자삭투 칸
제38대 제39대 -
부얀 세첸 칸 링단 칸 에제이
비정통
아리크부카 · 카이두
· 몽강국 · 복드 칸국 · 몽골 인민공화국 · 몽골국 }}}}}}}}}}}}

<colbgcolor=#004db1> 몽골 제국 제33대 대칸
ᠳᠠᠶᠠᠨ ᠬᠠᠭᠠᠨ | 다얀 칸
파일:다얀 칸.jpg
칸호 다얀 칸(Даян хаан/Dayan Khan)
達延汗(달연한)
ᠳᠠᠶᠠᠨ ᠬᠠᠭᠠᠨ
바투 뭉케(Батмөнх/Batumöngke)
巴圖蒙克(파도몽극)
ᠪᠠᠲᠤᠮᠥᠩᠬᠡ
종교 텡그리교
생몰 기간 1464년 ~ 1517년
재위 기간 1479년 ~ 1517년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대칸 즉위 이후
3. 아내와 자손들4. 기타

[clearfix]

1. 개요

북원의 제33대 대칸(카안).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몽골에 전성기를 가져온 중흥지주이자, 멸족될 뻔한 황금씨족을 다시 번창시킨 중시조였다. 휘는 바투 뭉케[1]였고, 칸호는 다얀(대원)이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다얀 칸 바투 뭉케의 아버지는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후예였던 오르도스 만호의 수장 바얀 뭉케였고[2] 어머니는 우량카이부의 평민 출신이었던 시케르였다. 다얀 칸의 아버지인 바얀 뭉케는 아들이 없었던 만둘 칸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았고[3] '볼후 지농'[4]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궁정 내의 세력 다툼 끝에 바얀 뭉케는 오이라트의 수장이었던 이스마일 타이시에게 살해되었고,(1479년) 아내였던 시케르는 이스마일의 새 아내가 되었으며, 바투 뭉흐(이후 바투 뭉케)는 버림받았다.

만둘 칸이 붕어했을 때,(1478년) 만둘 칸의 후비들 중 한 명이었던 만두카이(만두하이)는 정치력을 발휘해 칸의 세력을 규합하고 통치했으며, 떠돌이 바투 뭉흐[5]를 데려와서, 바투 뭉흐가 14세, 만두카이가 30세가 되던 해 결혼했다.[6] 15살이 되는 해인 1479년 몽골의 국부이자 전설적인 존재인 칭기즈 칸의 가묘가 있는 성지 나이만 차강 게르 앞에서 성대한 취임식이 열렸는데, 여기서 바투 몽케가 제33대 대칸위에 올랐다고 한다. 칸위에 오른 바투 뭉케는 다얀 칸으로 불리게 되었다.[7]

결혼 이후 만두카이 카툰은 어린 남편을 키우며, 친정을 통해 명나라군을 패퇴시키고, 오이라트를 정벌하는 등 섭정으로서 동몽골을 몽골 초원의 패자로 만들었다. 초원의 주도권을 잡은 1487년에 통치권을 남편인 바투 뭉케에게 이양했다.

2.2. 대칸 즉위 이후

1480년부터 중국 명나라에 대한 약탈은 사실상 끊임없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다얀 칸은 약탈을 새로운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다. 다얀 칸은 ‘조공’ 사절을 1488년부터 1498년까지 명나라에 보냈으나, 이 완숙한 군주는 명나라의 조공 체제에 참가할 의도는 없었다. 다얀 칸은 오르도스(Ordos)의 몽골진(Monggoljin) 씨족의 수령, 툴루우겐(Tölöögen)과 그의 아들 호오샤이(Khooshai)와 동맹을 맺었다. 1500년, 다얀 칸과 만두카이 카툰은 오르도스 지역의 8개의 흰색 게르, 즉, 칭기즈 칸의 의장총으로 이동하여 영하(寧夏) 지역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듬해(1501년)에는 예상치 못한 명나라군의 격렬한 반격에서 겨우 탈출하여, 다얀 칸은 케룰렌강 인근으로 다시 이동했다. 그러나 변경 지역을 향한 전방위적인 대규모 원정은 1507년까지 계속되었다.

다얀 칸이 오르도스의 몽골진 씨족의 지지를 계속 받는 동안, 이브라힘 타이시와 만둘라이[8]가 오르도스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1508년, 내몽골의 우익 3투멘[9]의 사절단이 이브라힘 타이시의 권력에 불만을 표하며, 다얀 칸을 지배자로 초빙했다. 다얀 칸은 차남과 3남인 울루스 바이쿠(Ulus-Baikhu)[10]와 바르수 볼로드 사인 알락[11]을 보냈다. 울루스 바이쿠는 지농('친왕')으로 등극했으나, 폭동의 와중에 말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바르수 볼로드는 탈출했고, 다얀 칸은 휘하의 좌익 3투멘[12]을 이끌고 출정했다. 다얀 칸은 처음에는 튀르겐[13]강에서 패배했으나, 1510년, 다얀 칸의 군대는 달란 테리군[14] 전투에서 이브라힘 타이시 휘하 우익 3투멘을 격파했다. 만돌라이는 죽임을 당했고, 이브라힘은 청해로 도주하여 1533년까지 활동했다. 다얀 칸은 우익 3투멘을 노예로 만들라는 조언을 거부하고, 1513년에 3남 바르수 볼로드를 튀메드부의 수장이자 우익 3투멘의 지배자인 지농으로 임명하여 대칸을 보좌하는 2인자로 만들었다. 또한 다얀 칸은 달란 테리군 전투에 참여한 모든 병사들를 '타르칸'[15]으로 임명했다.

1513년부터 명나라에 대한 원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얀 칸은 선화(宣化)와 대동(大同)에 성채를 짓고, 15,000명의 기병을 주둔시켰다. 1514년1517년의 침략때는 70,000명 이상의 기병이 참전했다.

처음에는 이전의 다른 칸들과 마찬가지로 꼭두각시 칸으로 시작했으나, 다얀 칸은 몽골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지배자의 반열에 올랐다.[16] 다얀 칸은 오이라트의 권력을 파괴하고, 오랜 세월 전횡을 일삼은 타이시('태사') 제도를 폐지했으며, 다얀 칸 자신을 그 세기에 들어서 실질적인 통치자의 역할을 겸하는 첫 번째 지배자로 만들었다. 달란 테리군 전투의 승리는 몽골 사람들의 재연합을 이끌어냈고, 몽골 사람들 안에 칭기즈 왕조의 신민이라는 공동의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어 오이라트 사람들과 구분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우익 3투멘을 노예로 만들지 않은 대신, 아들들의 영지로 6투멘을 분할한 것은, 황금씨족 지배의 분산체제를 형성했으며, 내부의 평화와 외부로 향하는 확장을 이루어내는 데 기여했다.

파일:6투멘 지도.png

좌익의 3투멘(할하, 차하르, 우량카이)과 우익의 3투멘(오르도스, 투메드, 융셰드)

3. 아내와 자손들

다얀 칸은 어린 그를 살리고 키운 만두카이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나이는 무려 15살차였다. 만두카이 카툰은 다얀 칸과의 사이에서 7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다(쌍둥이 세 명 포함). 다얀 칸은 만두카이 카툰이 낳은 이 8명과 후비가 낳은 4명의 아들을 합쳐 도합 12명의 자식을 보아 절멸할 뻔한 황금씨족을 다시 번창시키는데 성공했다.

만두카이 카툰은 남편인 다얀 칸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어린 칸을 대신해 외적의 침입을 막았으며, 몽골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오이라트를 무너뜨리고, 장성한 다얀 칸에게 몽골의 통치권을 무난하게 넘겨주었다.

다얀 칸의 자손들 중 유명한 인물로는 그의 손자이며, 경술의 변을 일으켰던 튀메드부의 수장 알탄 칸이 있다.

4. 기타

다얀 칸의 정실 부인이면서, 혼란에 빠진 몽골족을 다시 부흥시킨 여걸이 만두카이 카툰이었다. 이 만두카이는 훌륭한 여인으로 몽골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데, 몽골인 작가인 얀달자빈 나차구도루가 만두카이 카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소설 《만두하이》를 써냈고, 국내에도 1990년에 출판되었다. 다만 지금은 완전히 절판되었고, 인터넷 중고 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

[1] '영원히 강함'이라는 뜻이었다.[2] 바얀 뭉케오이라트의 영웅 에센 타이시의 외손자였다. 에센은 톡토아부카를 제27대 타이순 칸으로 옹립한 뒤 몽골 고원을 통일했다. 이윽고 에센과 타이순 칸이 후계 문제로 대립하게 되자 타이순 칸의 동생이었던 아크바르진(악바르지)은 형을 배신하고 에센의 편을 들었다. 이 때문에 타이순 칸은 패배하고 살해당했다.(1452년)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크바르진 칸(제28대) 또한 에센에게 살해당했고, 마침내 황금씨족이 아니면서 최초로 제29대 대칸위에 오른 에센은 자신에게 대항할 칭기즈 칸의 후예들인 황금씨족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는데, 이때 에센의 조모이자 칭기즈 칸의 자손이었던 사무르 군즈가 에센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 아크바르진 칸의 손자였던 바얀 뭉케를 빼돌렸다. 아크바르진 칸의 아들 하르구축은 대학살때 탈출했으나 결국 살해되었는데, 그의 아내는 에센의 딸 세체크 비자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아들이었던 바얀 뭉케는 외조부인 에센의 살육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3] 만둘 칸은 타이순 칸의 이복동생이었다.[4] 황금 황태자라는 뜻이었다.[5] 버림을 받고, 영양실조와 우울증에 걸려있는걸 데려와 보르지긴 가문에 충성하던 테무르 하닥의 집에 입양을 보내, 죽을 뻔한걸 지극한 간호로 살렸다고 한다. 당시 바투 뭉흐는 칭기즈 칸의 핏줄을 뜻하는 황금씨족 중에 얼마 안남은 생존자였다.[6] 1483년 만두하이의 나이 34세, 다얀 칸 바투 뭉케의 나이 19세 때 결혼했다고 보는 견해도 많지만, 실세와 혈통 명분의 결합을 위해서는 결혼과 칸 취임식의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7] '다얀'이란 바로 '大元'을 의미했는데, 명나라는 숙적인 원나라를 의미하는 '원'이라는 칭호를 못마땅해 하면서 다얀 칸을 소왕자(小王子)라고 불렀다.[8] Mandulai: 오르도스의 장로[9] 오르도스, 튀메드(Tümed), 융셰부(Yüngshiyebü)[10] 대개 울루스 볼로드(Ulus-Bolod)로 표기한다.[11] Barsu-Bolod Sain-Alag: 1521년에 죽음[12] 차하르, 할하(Khalkha), 우량카이(Uriyangkhai).[13] Türgen: 아마도 당시 튀메드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4] Dalan-Terigün: 지금의 인산산맥[15] Darqan: 세금 면제자[16] 재위기간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조리그투 칸부터 이때까지 10년 넘게 재위한 대칸이 없었다. 그러나 다얀 칸은 무려 38년에 달하는 재위기간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