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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282b9><colcolor=#fff> 제12·13대 한국방송공사 사장 박권상 朴權相 | Park Kwon-sang | |||
출생 | 1929년 10월 25일 | ||
전라북도 부안군 | |||
사망 | 2014년 2월 4일 (향년 84세) | ||
서울특별시 | |||
본관 | 태인 박씨 | ||
재임기간 | 제12·13대 한국방송공사 사장 | ||
1998년 4월 20일 ~ 2003년 3월 24일 | |||
제9대 한국방송협회 회장 | |||
1998년 4월 30일 ~ 2003년 3월 1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282b9><colcolor=#fff> 배우자 | 최규엽 | |
자녀 | 1남 3녀 | ||
병역 | 미필 | ||
학력 | 전주북중학교 (졸업) 전주고등학교 (졸업 / 24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영어영문학 / 학사) 노스웨스턴 대학교 (신문학 / 석사)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수료) | ||
신체 | 176㎝, 70㎏, O형 | ||
경력 | 합동통신 기자 관훈클럽 창립회원 세계통신 정치부장 세계통신 출판부장 관훈클럽 5대 총무 한국일보 논설위원 국제언론인협회(IPI) 회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편집국장대리 동아일보 편집국 국장 동아일보 영국특파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겸 안보통일문제조사연구소 소장 동아일보 논설주간 겸 편집인 미국 우드로우윌슨국제학자센터 연구원 미국 캘리포니아 동아세아연구소 연구원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안토니스칼리지 연구원 조지 워싱턴 대학교 객원연구원 최병우 기자 기념사업회 회장 위암 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국제언론문화사(IMI) ‘시사저널’ 주필 국회 제도개선위원회 위원장 동아일보 고문 일민문화재단 이사장 신문윤리강령 개정위원회 위원장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심사위원 한국언론2000년위원회 위원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한국국가기록연구재단 고문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 위원장 제12·13대 한국방송공사 사장 (국민의 정부) 제9대 한국방송협회 회장 문화비전2000위원회 위원 예술의전당 비상임이사 연합통신 비상임이사 한국방송회관 이사 국제방송통신기구 이사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보도·홍보협의회 공동의장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연합뉴스 비상임이사 아시아신문재단(PFA) 한국위원회 이사 2000 남북정상회담 남측대표단 제2기 통일고문회의 고문 전국재해대책협의회 이사 경원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위암 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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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제12·13대 KBS 사장을 역임했으며, 자유언론의 기수로 평가받는 언론인이다.2. 생애
1929년 10월 25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전주북중학교[1]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1948학번)를 1952년에 졸업하였다. 합동통신 기자로 입사하여 언론인 생활을 시작해 1958년 세계통신 정치부장, 196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1962년부터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이직하여 1969년 편집국장대리, 1971년 편집국장을 거쳐 1973년 영국특파원으로 발령나기도 했다.1977년 귀국 후 통일문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돌아왔다가 1980년 1월부터 논설주간까지 지냈으나 그해 8월, 신군부에 굴복한 사측에 의해 강제해직되었다. 그리하여 전두환 정권 동안 영국 옥스퍼드대 세인트안토니스 칼리지, 미국 조지워싱턴대 중소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였다. 1988년 노태우 정부의 KBS 이사직 제안을 거절하고 1989년에 주간지 시사저널이 창간되자 초대 편집인으로 언론계에 복귀했고, 이후에도 중도진보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1989년 관훈클럽 최병우기념사업회 및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현 장지연기념회) 설립에 각각 참여해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94년 동아일보사 비상임고문으로 위촉되어 1997년까지 재직하는 한편, 1994년 일민문화재단 설립 시 초대 이사장을 4년 간 맡았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 후 1998년 1월부터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장을 맡다가 국민의 정부 출범 후인 그해 3월에 경원대학교 법정대학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다. 같은 시기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한국방송공사 사장 제의를 받고 'KBS 사장 수락을 위한 약속'이란 메모를 냈다. 그해 4월부터 홍두표 전 사장의 뒤를 이어 KBS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2001년에 사장 연임에 성공하여 2004년까지 재임했어야 하나, 2003년 초에 정권이 교체된 직후 임기를 1년 앞두고 사임하였다.[2]
퇴임 후인 2003년 9월부터 경원대 신방과 석좌교수를 다시 맡다가 2004년 일본 세이케이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영국 BBC나 일본 NHK를 롤모델로 삼아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만드는 데 매진해 KBS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1998년만 빼면 전 시기에 걸쳐서 흑자를 기록했고 2002년도에 사상 최대액의 흑자액을 기록하면서 경영적인 측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임기 첫 해인 1998년에는 'KBS 방송제작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1999년부터 '시청자께 드리는 약속'을 발표하기 시작한 후 법률자문변호인단 및 의료자문단을 꾸려 뉴스의 정확/공정성을 높였다. 2000년부터 <KBS 연차보고서>[3]를 정기 발간/배포함과 더불어 전년도 경영 실적을 보고하여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같은 해에는 'KBS 방송편성규약'을 제정, 2001년에 시행했다. 아울러 보수측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개혁리포트> 등 군사독재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프로그램들을 적극 편성해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사저널 주필로 지냈을 때와의 인상과는 다르게 예상외로 보수적인 면을 드러내다보니 노조와의 충돌이 꽤나 빈번했다는 후문이다.[4][5] 1년의 임기가 남아있는데도 KBS 사장직에서 물러난 것도 그 간 노조와의 충돌로 인한 스트레스와 신정부 출범에 따른 부담감 때문이라고 세간에서 대체적으로 견해를 드러냈다.
2010년경부터 뇌경색으로 투병해 오다가# 2014년 2월 4일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가 몸담았던 시사저널이 그의 일생을 비중있게 다뤘고, 장례식은 KBS장으로 거행되었다. 2015년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박권상기념회'를 세웠다.
3. 공적과 과오
임기 중반인 1998년에 봄개편 조정으로 인한 가요프로그램이었던 가요톱텐이 종영하여 브라보 신세대를 거쳐 뮤직뱅크를 신설, 바둑기전인 KBS 바둑왕전 대회방식을 축소해서 2년 후에 19기에 방식 규모를 확대했다. 1998년 가을개편 때 역사스페셜, 1999년 가을개편 때 환경스페셜을 신설하여 기존의 KBS 일요스페셜과 함께 '3대 스페셜주의'를 확립시켰으나, 2003년 박 전 사장 퇴임 이후 같은 해 부분 및 정기개편에서 역사스페셜 대신 <인물현대사>가 신설되면서 깨졌다.[6] 그 외에 <KBS 장기왕전>도 신설했으며 <시청자칼럼 우리사는세상>과 <열린채널> 등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 방영도 활성화했다. 2000년 봄개편 이후 <태조 왕건>을 시작으로 '고려사 대하사극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진행했고, 같은 해 북한 조선중앙TV와 공동으로 분단 이래 최초로 서울-백두산-한라산 3원생방송 <백두에서 한라까지> 제작으로 남북 방송교류 활성화에 공헌했다.그러나 그는 위와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특정 고교 출신들을 KBS 상층부에 중용하고 공정방송위원회를 유예시키는가 하면, 차장 승진 고시 및 책임프로듀서제를 도입해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임기 후반에는 홍두표처럼 자사 성우들의 활동까지 점차 줄이기 시작해서 더빙빠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특히 해외 애니메이션 편성이 이때부터 줄기 시작하였고[7] 2001년 11월 가을개편 시행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이 대부분 오후 6시에 고정 방영하였으나 이 이후 부터 매주 월~목 오후 6시에 톡톡 이브닝[8]을 편성하면서 애니메이션 방영이 한동안 잠시 30분 앞당겨(오후 5시 30분) 방영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바스토프 레몬은 종영까지 2회를 남은 상태였는데도 가을개편 때문에 나머지 2회분(25~26화)는 30분 앞당겨 방영되었다.
2001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금요일에 국산 애니메이션을, 월~목 나흘 동안 해외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는데, 2000년 개정된 방송법에 따라 국산 애니메이션 편성이 의무화되었고, 2002년 방송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수입 애니메이션의 편성에 대한 제도(제57조 4항)'가 추가되면서 해외 애니메이션 편성비율 중 특정 1개 국가 애니의 편성 비율을 60% 밑으로 제한시키면서 지상파 애니 편성의 변동에도 변수가 생겼다.
이런 추세 탓인지 마이크로맨이 종영 이후 목요일 시간에 국내 애니메이션 바스토프 레몬이 방영 시작으로 이후 극소수를 제외하곤 목요일에 해외 애니메이션 편성을 중단하고 국내 애니메이션으로 고정 되었고 다음해(2002년)에는 수요일에도 정의의 용사 카봇이 방영 도중 다른 요일로 이동시킨 후 역시 목요일처럼 해외 애니메이션을 중단시키고 그 빈 자리에 스페이스 힙합덕 방영을 시작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이 편성하기 시작했다. 결국 후임 정연주 때는 화요일마저 국내 애니메이션으로 고정되면서 남은 월요일 시간대는 방영 초반에 월~화 2회 연속 방영하던 원피스가 종영할 때까지 편성을 유지하였다. 결국 원피스는 마지막 해외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끝까지 안 하고 조기종영한 애니메이션도 슬슬 나오기 시작했는데, 우선 명탐정 코난이 78화까지만 방영하고 조기종영하였고 디지몬도 디지몬 테이머즈까지만 방영하고 종영하였으며, 이후 디지몬은 애니원, 챔프, 애니박스 등에서, 명탐정 코난은 투니버스에서 방영하고 있다. 2002년에 2002 FIFA 월드컵 특선 애니메이션 스페릭스 종영 후 후속으로 방영한 재키찬 어드벤처는 전체 95화 중에서 52화까지만 하고 조기종영되었고, 동년에 방영한 크러시기어도 전체 68화 중에서 절반이 안 되는 33화(35화이지만 왜색으로 인해 2화가 방영되지 않음.)까지만 하고 조기종영하였으며[9], 다음 해에 방영한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인기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미이라도 역시 끝까지 못하고 조기종영되었고 후임 정연주 임기 때 디즈니 만화동산을 포함한 서양 애니메이션 방영이 끊겼다. 그리고 해외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그의 임기 때 방영된 게 1998년 6월 5일 환경의 날에 특선으로 방영된 마더 최후의 소녀 이브, 1999년 2월 14일 설특선으로 방영된 공룡 타임머신을 타다[10], 2001년 10월 3일 개천절(당시 추석 연휴와 겹침)에 방영한 20세기 폭스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재더빙) 밖에 없었다.
명절 및 공휴일 때 극장용 애니 편성은 거의 없었던 대신 특선영화 편성은 조금 신경을 셨는데 당시 개봉한지 3~4년 밖에 되지 않았던 영화 타이타닉, 니콜라스 케이지의 대표작들인 더 록, 페이스 오프, 콘 에어 등이 방영되었다.
2002년 가을개편에 따라 톡톡 이브닝[11] 폐지 후 애니메이션 방영이 오후 6시로 복귀하였지만 일부 애니메이션의 편성 시간 변동도 있었는데 스페릭스 후속으로 방영한 재키찬 어드벤처가 스페릭스에 이어 매주 화~수 오후 6시에 방영했으나 각각 크러시기어와 정의의 용사 카봇의 방영 시작으로 30분 앞당겨졌고 연말에 52화로 조기종영할 때까지 이 시간대 방영을 유지했으며, 수요일에 방영하던 정의의 용사 카봇도 끝까지 방영했지만 방영 도중 월요일 오후 5시 30분[12]로 변경 되었고 화요일에 방영하던 크러시기어가 조기종영되면서 매주 월요일에 방영하던 요리킹 조리킹이 화요일까지 편성 확대하기도 하였다. 1992년부터 꾸준히 방영하던 디즈니 만화동산을 9년 만에 폐지하였다가 데블파이터[13]와 별나라 요정 코미가 방영한 이후 다시 재개하였으나 얼마 못 가 목요일 오후로 이동시켜버렸다.
결국 이 때부터 드라마 제작편수와 예능 프로를 늘리는 대신 해외 애니메이션 편성이 서서히 줄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편성도 많이 줄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케이블 채널의 경쟁에 어렵게 수입한 해외 애니메이션이라도 끝까지 해야 하는데 일부는 조기종영까지 하는 등 점차 자사 성우들의 활동을 줄이게 만들었다. 결국 이 문제는 후임 정연주 임기에 가서 한꺼번에 터진다. 그렇다고 방송사 탓만 하기에는 무리인 게, 더빙작 편성은 방송사의 의지 이전에 방송법 개정 등 방송 정책 내지 시청자의 수요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다.
4. 저서
- 매스콤론(장용과 공동번역) - 에드윈 에머리 등 3명 공저. 을유문화사. 1963.
- 근대국가와 언론자유(고명식과 공동번역) - 찰스 R. 라이트 저. 범문사. 1965.
- 매스컴 사회학(번역) - 찰스 R. 라이트 저. 범문사. 1967.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저널리스트 11인선(송건호 등 10명과 공저) - 전예원. 1977.
- 영국을 생각한다[14] - 동아일보사. 1979.
- (속)영국을 생각한다[15] - 동아일보사. 1981.
- 대학생과 해외유학(송동준 등과 공저) - 시사영어사. 1981.
- 자유언론의 명제 - 전예원. 1984.
- 미국을 생각한다 - 동아일보사. 1985.
- 웃물이 맑은 사회를: 박권상 사회평론 - 홍성사. 1985.
- 감투의 사회학: 박권상 민주화 논설선 - 지식산업사. 1987.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서독, 오스트리아, 그리스, 스페인 - 나남. 1987.
- 영국을 다시 본다: 여왕의 땅 신사의 나라 - 원음사. 1987.
- 권력과 진실 - 삼성문화개발. 1989.
- 대낮에 등불을 밝히고: 박권상 칼럼집 - 동아. 1990.
- 영국을 본다 - 원음사. 1990.
- 박권상의 시론: <동아시론> 모음집 - 열림원. 1991.
- 저자세, 고자세가 아닌 정자세로: 박권상 정치평론 - 웅진문화. 1991.
- 대권이 없는 나라(전 2권) - 영림카디널. 1992.
- 박권상 칼럼: 예측이 가능한 세상이었으면(전 2권) - 신원문화사. 1994.
- 시사저널 시론 - 시사저널사[16]. 1994.
- 21세기 한국의 발전전략 - 한국정학연구소. 1994.
- 오늘 그리고 내일: 박권상 칼럼(전 2권) - 일요신문사. 1996.
5. 수상 경력
- 독립신문기념상 논설부문 (1970)
- 중앙언론문화상 (1989)
- 인촌문화상 언론부문 (1991)
- 한국언론상 저널리즘 연구부문 (1997)
- 관훈클럽 특별공로상 (1997)
-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3)
6. 참고/관련 자료
- 영원한 저널리스트 박권상을 생각한다 - 박권상기념회 편. 상상나무. 2015.
- 해직 이후 박권상의 언론활동과 언론사상 - 김영희 저. <한국언론학보> 61권 5호(2017년 10월) 수록.
[1] 과거에 전북 최고의 명문고로 통하던 전주고등학교가 명맥을 잇고 있다.[2] 후임 방송협 회장은 SBS 사장 송도균이 맡았다.[3] 보고서 자체는 1998년에 처음 발간되었다.[4] 민주화 이후에도 KBS 사장이 KBS 9시 뉴스 큐시트를 미리보면서 논조를 완화시키거나 하는 등의 이런저런 개입하는 관행이 여전히 남아있었는데 박권상 때까지도 남아있었다. 후임 서동구의 부적격 낙하산 저지 반대로 임명 1주일 만에 사장 사퇴 후 새 사장인 정연주가 사장이 된 이후로 사장이 9시 뉴스 큐시트를 미리 보는 관행이 없어졌다가 김인규 때부터 다시 부활했다고...[5] 1998년 개혁리포트 <조선일보를 해부한다> 에피소드 방영 과정에서 난항이 있었다. 2000년에 추적60분 매향리 미군사격장 관련 에피소드 방영으로 국방부로부터 고소당하자 해당 제작진들을 타 부서로 발령보냈고, '국방군사연구소는 왜 해체되었나' 편 방영도 연기시켰다. 2002년에는 <열린채널>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및 '에바다투쟁 6년-해아래 모든 이의 평등을 위하여' 편도 불방시키도록 했다.[6] 다만 인물현대사가 2005년에 종영된 이후 역사스페셜이 HD 역사스페셜로 다시 부활했고 이후 한국사 전, 역사추적 등으로 바뀌었다가 2009년에 역사스페셜로 환원하여 3대 스페셜주의 편성은 2012년까지 유지되었다.[7] 물론 이때부터 점차 해외 애니 및 영화는 당시 채널 티어링 실시와 중계유선방송사들의 SO전환으로 수요가 확대되기 시작한 케이블 채널로 넘어갔고, 대중들은 TV 시청 대신 인터넷 홈페이지나 P2P를 통해 다운로드해 원어판을 접했다. 대신 예능과 드라마 제작편수가 늘면서 한국은 '드라마 공화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예능과 드라마도 경쟁사 포맷을 베낀 저질 프로까지 양산해내 방송사 재정 상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본격적으로 길환영 임기 때부터는 주말 드라마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이 대부분 시청률이 부진에 빠지게 되고 지금 현재 주말 드라마도 부진에 빠졌다.[8] 지금 기준로 보면 생생정보통과 비슷한 프로그램이다.[9] 이건 당시 주인공 성우인 최덕희가 이민간 것도 크다.[10] 원제는 We're Back! A Dinosaur's Story. 1993년에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11] 2001년 가을개편 당시 도전! 골든벨이 1TV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신설된 프로.[12] 당시 월요일 6시에는 디지몬 테이머즈가 방영.[13] 다만, 데블파이터는 끝까지 하긴 하였으나 마지막회(48화)를 앞두고 47회에서 조기종영하는 희대의 사고가 터졌다. 물론 이후 마지막회(48화)는 별나라 요정 코미 마지막 회가 방영될 때 동시 방영하였으나, 이후 마지막회가 유실이 되어 다른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할 때도 마지막회(48화)를 영구히 볼 수 없게 되면서 사실상 큰 흑역사를 남겼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14] 상권[15] 하권[16] 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