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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14:43:28

서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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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수상

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KBS 사장 중 최단기 재임자로 손꼽힌다.

2. 생애

1937년 10월 8일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출생하여 경기고등학교(52회) 졸업 후 1959년부터 민국일보 외신부 기자로 입사해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홍익대학교에서 신문학 학사를 수료하고 합동통신, 조선일보 등을 거쳐 경향신문에서 외신부장, 편집국장을 각각 지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보도제작 거부운동을 펼치며 신군부의 언론검열에 저항하다 그해 6월에 구속/해직당해 8개월 간 옥살이를 했고, 같은 해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정치활동 규제까지 당하다가 1983년 해금된 후 'BBC영어연구원'을 세워 운영한 바 있고, 1986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사로 일한 바 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언론계에 복귀해 <경향신문> '정동칼럼', 한국언론연구원 기관지 <신문과방송> 등지에 미디어와 국제문제를 주로 다루며 권언분리와 언론인의 윤리/전문성 제고를 역설하였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한국언론연구원 원장에 임명되어 1년 간 재직하다 1999년에 한언연이 프레스센터, 언론인금고와 통합해 '한국언론재단'으로 출범하면서 초대 부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이듬해에 노조와의 갈등으로 신임을 잃어 물러나고 말았다.

퇴임 후 한성대학교 사외이사를 지내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 언론정책고문으로 재직했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3월 22일, KBS 이사회는 박권상의 후임으로 그를 청와대에 임명제청했고,[1] 25일에 정식 임명되었으나 선임 당시 낙하산 인사 등 논란으로 인해 노조와 시민사회단체 등의 사퇴 압력을 받자 4월 2일 사직서를 내고 사퇴 의사를 밝혔고, 이틀 후 노무현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하면서 단명 사장이 되었다.[2] 후임으로는 정연주가 임명되었다.

사퇴 이후 2004년에 차기 언론재단 이사장 후보로 추천됐으나 이사회 표결에서 패했고,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디지털위성방송 대표이사로 지냈다.

3. 수상



[1] 선임 진행 당시 '개혁적 KBS 사장 선임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추천위원회' 측은 이형모 전 부사장, 정연주 당시 한겨레 논설주간, 성유보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 등 3명을 차기 사장 후보로 추천했다.[2] 같은 해 봄 개편 시행이 연기 및 지연되면서 부분 편성조정으로 5월 말에서 6월 말까지 여러 번 연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