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마리아 朴瑪利亞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 1906년 4월 19일[1] |
강원도 강릉군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 |
사망 | 1960년 4월 28일 (향년 54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별관 (現 청와대 구본관 터) | |
본관 | 밀양 박씨[2] |
가족 | 아버지 박명삼, 어머니 고의대, 배우자 이기붕, 장녀 이강희,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 |
학력 |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 (철학 / 학사) 밴더빌트 대학교 (영어영문학 / 학사) 밴더빌트 대학교 (교육학 / 석사) |
종교 | 기독교 (개신교)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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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李起鵬)의 부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엘리트 지식인의 탈을 썼으나 실상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짓밟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마저 파멸시킨 인물이다. 자유당 때 경기도 이천 지역에 돈을 많이 뿌려 아직도 이천 지역에는 그녀를 훌륭한 여성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2. 생애
1906년 4월 19일 강원도 강릉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 박명삼(朴明三)을 잃고 홀어머니 고의대(高義大) 밑에서 힘들게 자랐다[3]. 어려운 환경에서 목사의 도움으로 경기도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해 졸업했는데 이미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부터 공창(公娼)제의 폐지, 금주, 금연 등 계몽적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사회운동가, 신여성, 야망가로서 성향을 드러냈다.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32년 테네시 주 내슈빌의 밴더빌트 대학교[4]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5] 사실 이 시대 해외 유학생의 공통점은 현대의 유학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가문의 재력이 뒷받침[6]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녀의 대학과 대학원 유학은 장학 제도가 아예 없던 일제강점기에 비교해 보면 이미 떡잎부터 다른 능력을 보였다.[7] 이는 '이기붕을 박마리아가 만들었다'는 평가의 방증이다.
귀국한 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고 1935년 이기붕과 결혼함과 동시에 이때부터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 장남 이강석, 장녀 이강희[8], 차남 이강욱을 낳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이들은 전국을 돌면서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면서 정신대 모집과 국방헌금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 행위 덕에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이승만과 8.15 광복 전에 연을 맺었던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 무렵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과 불화가 있었는데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 관계다, 임영신이 안주인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등 소문이 났다.[9] 그게 해외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킨 틈을 타서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목을 형성해[10]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이기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을 지내면서 탄탄대로를 걸었고 1951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나름 깨끗하게 처리하면서 인기를 끌어 자유당 의장 자리에 올랐으며 드디어 권력의 최중심에 안착했다. 박마리아 본인은 남편의 권력을 기반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이 되었는데 탄탄대로를 걸으면서 남편을 부통령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이기붕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하며 부통령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1957년 이기붕과 함께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켜 이승만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1960년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남편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들을 총동원했으며 대한부인회는 전국 대회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3.15 부정선거를 감행하면서 결국 4.19 혁명이 터지고 1960년 4월 26일에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하면서 다음 날인 4월 27일에 하야하자 이기붕 일가의 최후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1960년 4월 28일 아들이었던 이강석 당시 육군 소위에 의해 일가족이 모조리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이강석도 자살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 책임자인 곽영주 경무대경찰서 서장이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국민 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거나 이승만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하지만 애당초 타살론 자체가 무풍지대에서 이환경이 지어낸 썰일 뿐이다.
3. 기타
-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혼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니 주의할 것. 김마리아와 박마리아의 공통점은 세례명 '마리아'와 여성 교육 및 운동가라는 점 뿐이다. 그 외에도 한국광복군에 배속되어 직접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한 동명이인의 김마리아(이범석의 아내)가 있는데 이범석과 이기붕이 라이벌이었던 관계로 이 김마리아는 생전에 박마리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 신혼 시절 살던 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에 있는데 현재 1층에는 공구 상가가 들어선 상태이며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외관만 봐서는 거의 폐허 수준이다.
- 성격이 대단히 오만하고 인색했고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직후까지 이승만의 개인 비서와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박용만은 박마리아를 가리켜 "굉장한 에고이스트다. 퍽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했으며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했다. 퍽 인색했었고 그러면서도 콧대는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박용만에 의하면 박마리아는 남에게 자기 것은 쌀 1톨도 주는 법이 없으면서도 남이 주는 것은 주는 대로 받았다고 한다.[11]
- 이화여자대학교 동문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친목 단체인 '이수회'의 회장이었는데 군의 장군과 고위 관료들, 가난한 집에서 성공한 배경 없는 개천에서 난 용들과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여성들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그렇게 해서 승진을 바라는 군의 장군들이 박마리아에게 접근하려고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이수회의 젊은 여성과 재혼을 서두르는 일도 생겨났다.[12]
- 집필한 서적도 충격적인데 그녀가 1955년 쓴 <여성과 교양>이라는 서적을 어느 신촌 헌책방에서 본 마광수 교수가 자신의 에세이에 "누가 이 글만 알고 박마리아가 나쁜 사람인지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
- 이승만의 정치 분석 서적 <일본 내막기>의 번역에도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관여했다.[13] 책을 번역을 의뢰받은 분은 기껏 번역했더니 박마리아가 중간에 가져와서 최덕신 번역으로 먼저 책을 만들어 이승만에게 선물했다. 나중에 이 책은 동일한 번역자의 손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1980년대에 재출간되었다.[14]
- 굉장히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고 권력욕도 강해서 남편인 이기붕을 상대로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다 나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한 자리라도 얻어서 행세하고 사는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자주 부부싸움도 벌였다고 한다.[15] 이는 야인시대에서 이기붕을 닦달하는 바람에 이기붕이 골골대는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 이기붕이 1957년부터 중병을 앓아 혼자서는 대소변도 해결하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자 대리 업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신빙성은 부족하다.
- 열렬한 개신교 신자이기도 했는데[17] 4.19 혁명이 일어나자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험하고 나쁜 일이다."라는 글을 신문에 실었다가 오히려 국민들의 분노만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자신과 남편을 비롯한 일가를 모두 파멸시키고 마는 단초가 되었다.
- 그녀 사후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윤석열의 배우자 김건희가 여러 부정적인 논란을 일으키면서 "제2의 박마리아"라며 욕을 먹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1993년 KBS <다큐멘터리극장>에서도 배우 황정아가 연기했다.
-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남현주가 연기했다. 6.25 전쟁 이후 첫 등장하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나름대로 정상인의 범주에 드는 듯 했지만 이승만의 종신 집권 관련 사사오입 개헌 때 일이 틀어지자 그 때부터 표독스러운 본색을
찰지게드러낸다. 자기 남편에게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화를 낼 정도면 보통 치맛바람이 아니다. 출세욕과 명예욕은 넘쳐나는데 일이 꼬여만 가니 나중에는 등장만 하면 장관이고 뭐고 무작정 까대는 역할로 나온다. 나중에 이기붕이 부통령에 낙선해 내무부 장관이 위로차 방문했다가 박마리아에게 까이자 어이없어서 "내가 정부의 내무부 장관이지, 이기붕의 내무부 장관이냐"라고 반박할 정도였다. 4.19 혁명 이후 이기붕, 이강욱과 함께 시골 집으로 피신해있다가 서울로 돌아왔으며 경무대 별관에서 이강욱에게 "힘들었으니 자라"고 말하는 한편 자신의 죄를 남편 이기붕에게 용서를 청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에 이기붕은 "그런 소리하지 말라. 누가 뭐래도 당신은 내 아내다."라고 말하는데 이후 들어온 이강석에게 역사대로 총을 맞고 최후를 맞이한다.
[1] 공교롭게도 그녀의 54번째 생일이 바로 그녀의 생사를 결정지은 운명의 날이다.[2] 참고[3] 얼마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던지, 훗날 박마리아는 자신이 가난한 어린 시절 덕분에 '증오에 가까운 가난 혐오' 성향이 생겼다고 말할 정도였다.[4] 미국 남부의 명문 대학이다. 아이비 리그 급의 수준을 자랑한다.[5] 테네시 스칼렛(Scarlet)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오류도 있는데 정확하게 밴더빌트가 맞다. 스칼렛 대학은 미국 전역에 하나도 없고 테네시의 스칼렛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뿐이다.[6] 이병철, 신격호 이승만, 서재필 등이 그러하다.[7] 조선시대에는 관비유학 제도라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인 김란사가 이 제도를 이용하여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8] 이화여자중학교 재학 중에 요절했다.[9] 보통 해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 시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았다.[10]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어는 한 마디도 못 해서 남편인 이승만과도 영어로만 대화했다. 그러자니 자연히 일반적인 한국인들과는 의사소통이 안 되어서 무척이나 답답했는데, 마침 영어에 능통한 박마리아를 만나자 무척이나 그녀를 가까이 하며 살았다.[11]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95년)[12] 정경모, 《찢겨진 산하:구름 위의 정담》 (기획 출판, 1986년) 170페이지[13] 이 책인 Japan Inside Out은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되었다.[14]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지금보다 더 팽배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 탓인지 원저자 이승만의 이름은 작게 표시되어 있다.[15]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6년)[16]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6년)[17] 이는 박마리아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활란도 마찬가지로 장례식장에서 개신교 찬송가를 틀어 달라고 유언으로 남겼다.[18] 젊은 나이에 배역을 맡은 탓에 분장을 과하게 한 데다 최근에 서민적인 이미지의 배역을 자주 맡아서인지 싱크로율이 떨어져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19]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친할머니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