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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23:54:53

박마리아

박마리아
朴瑪利亞
파일:external/www.inewspeople.co.kr/211-2-148.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06년 4월 19일[1]
강원도 강릉군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사망 1960년 4월 28일 (향년 54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별관
(現 청와대 구본관 터)
본관 밀양 박씨[2]
가족 아버지 박명삼, 어머니 고의대, 배우자 이기붕, 장녀 이강희,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
학력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마운트 홀리요크 칼리지 (철학 / 학사)
밴더빌트 대학교 (영어영문학 / 학사)
밴더빌트 대학교 (교육학 / 석사)
종교 기독교 (개신교)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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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기붕(李起鵬)의 부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엘리트 지식인의 탈을 썼으나 실상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짓밟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마저 파멸시킨 인물이다. 자유당 때 경기도 이천 지역에 돈을 많이 뿌려 아직도 이천 지역에는 그녀를 훌륭한 여성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2. 생애

1906년 4월 19일 강원도 강릉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 박명삼(朴明三)을 잃고 홀어머니 고의대(高義大) 밑에서 힘들게 자랐다[3]. 어려운 환경에서 목사의 도움으로 경기도 개성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해 졸업했는데 이미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부터 공창(公娼)제의 폐지, 금주, 금연 등 계몽적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사회운동가, 신여성, 야망가로서 성향을 드러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32년 테네시내슈빌밴더빌트 대학교[4]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5] 사실 이 시대 해외 유학생의 공통점은 현대의 유학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가문의 재력이 뒷받침[6]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녀의 대학과 대학원 유학은 장학 제도가 아예 없던 일제강점기에 비교해 보면 이미 떡잎부터 다른 능력을 보였다.[7] 이는 '이기붕을 박마리아가 만들었다'는 평가의 방증이다.

귀국한 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고 1935년 이기붕결혼함과 동시에 이때부터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 장남 이강석, 장녀 이강희[8], 차남 이강욱을 낳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박순천 등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라는 친일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이들은 전국을 돌면서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외치면서 정신대 모집과 국방헌금 헌납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 행위 덕에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이승만과 8.15 광복 전에 연을 맺었던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 무렵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과 불화가 있었는데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 관계다, 임영신이 안주인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등 소문이 났다.[9] 그게 해외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킨 틈을 타서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목을 형성해[10]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이기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을 지내면서 탄탄대로를 걸었고 1951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으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나름 깨끗하게 처리하면서 인기를 끌어 자유당 의장 자리에 올랐으며 드디어 권력의 최중심에 안착했다. 박마리아 본인은 남편의 권력을 기반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장과 부총장, YWCA 회장이 되었는데 탄탄대로를 걸으면서 남편을 부통령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이기붕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하며 부통령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1957년 이기붕과 함께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시켜 이승만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1960년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남편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회장을 맡고 있던 '대한부인회'를 비롯한 여성 단체들을 총동원했으며 대한부인회는 전국 대회를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3.15 부정선거를 감행하면서 결국 4.19 혁명이 터지고 1960년 4월 26일에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하면서 다음 날인 4월 27일에 하야하자 이기붕 일가의 최후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1960년 4월 28일 아들이었던 이강석 당시 육군 소위에 의해 일가족이 모조리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이강석도 자살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 책임자인 곽영주 경무대경찰서 서장이 이기붕 일가를 살해해 국민 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거나 이승만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하지만 애당초 타살론 자체가 무풍지대에서 이환경이 지어낸 썰일 뿐이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공교롭게도 그녀의 54번째 생일이 바로 그녀의 생사를 결정지은 운명의 날이다.[2] 참고[3] 얼마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던지, 훗날 박마리아는 자신이 가난한 어린 시절 덕분에 '증오에 가까운 가난 혐오' 성향이 생겼다고 말할 정도였다.[4] 미국 남부의 명문 대학이다. 아이비 리그 급의 수준을 자랑한다.[5] 테네시 스칼렛(Scarlet)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오류도 있는데 정확하게 밴더빌트가 맞다. 스칼렛 대학은 미국 전역에 하나도 없고 테네시의 스칼렛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뿐이다.[6] 이병철, 신격호 이승만, 서재필 등이 그러하다.[7] 조선시대에는 관비유학 제도라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인 김란사가 이 제도를 이용하여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8] 이화여자중학교 재학 중에 요절했다.[9] 보통 해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 시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았다.[10]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어는 한 마디도 못 해서 남편인 이승만과도 영어로만 대화했다. 그러자니 자연히 일반적인 한국인들과는 의사소통이 안 되어서 무척이나 답답했는데, 마침 영어에 능통한 박마리아를 만나자 무척이나 그녀를 가까이 하며 살았다.[11]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95년)[12] 정경모, 《찢겨진 산하:구름 위의 정담》 (기획 출판, 1986년) 170페이지[13] 이 책인 Japan Inside Out은 제2차 세계 대전 전에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되었다.[14]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지금보다 더 팽배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 탓인지 원저자 이승만의 이름은 작게 표시되어 있다.[15]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6년)[16]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6년)[17] 이는 박마리아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활란도 마찬가지로 장례식장에서 개신교 찬송가를 틀어 달라고 유언으로 남겼다.[18] 젊은 나이에 배역을 맡은 탓에 분장을 과하게 한 데다 최근에 서민적인 이미지의 배역을 자주 맡아서인지 싱크로율이 떨어져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19]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친할머니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