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00:27:41

노천명

노천명
盧天命
파일:Noh_CheonMyeong.gif
<colbgcolor=#000><colcolor=#fff> 원명 노기선(盧基善)
출생 1912년 9월 2일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포리#
사망 1957년 6월 16일 (향년 44세)
서울특별시
가족 노계일(부)
2남 2녀 중 차녀[1]
본관 풍천 노씨#
학력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종교 천주교(세례명: 베로니카)
직업 소설가, 시인, 교수, 언론인

1. 개요2. 생애3. 기타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사슴의 시인, 평생을 독신으로 고독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한국 문학에 이름을 남겼다. 뛰어난 시어 사용과 감상적인 작품으로 이름난 문인이자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개명 전 원명은 노기선(盧基善)이며 황해도 장연군(長淵)에서 아버지 노계일(盧啓一)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홍기(金鴻基)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 1930년 3월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4년 봄에 졸업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하면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을 발표하였다. 1938년에 조선중앙일보를 퇴사해 조선일보의 학예부 기자가 되었는데 4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여성(女性) 지의 편집인이 되어 여성지 편집을 맡아 보았다.


사 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2년 친일 문화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에 가입하여 전쟁을 찬양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선동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가 되어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노래하자 이날을',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 다수의 친일 시를 발표했다. 대표적인 친일 시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가 있는데 아래가 그 내용이다.
남아면 군복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2] 등에 강사로 나가 출강하였으며 후에 부녀 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기도 하였는데 1946년까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었다. 1949년에는 몇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녀는 월북임화, 김사량 등이 주도하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 궐기 대회' 등의 행사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국군서울을 수복한 뒤 좌익 분자 혐의를 받아 징역 20년을 선고받으나 여러 문인들의 도움으로 몇 개월 만에 사면되어 풀려났다. 이후 공보실 중앙 방송국(현 한국방송공사) 방송 담당 촉탁에 임명되기도 하고 3차 시집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무리한 집필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1957년 재생 불능성 뇌빈혈로 사망했다.[3]

3. 기타

4. 관련 문서


[1] 언니와 오빠는 동복 형제, 남동생은 이복 형제.[2]중앙대학교 예술대학.[3] 노천명의 시신을 수습한 법관 김홍섭(1915년~1965년)의 회고에 따르면 몇 권의 책과 앉은뱅이 책상 외에 변변한 가재 도구도 없는 손바닥만 한 낡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교회 신자들이 수습해 줬다고 한다.[4] 사실 김동환과도 비교가 불가능한데 김동환은 그나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신의 친일 행위를 자수했고 김동환의 아들이 아버지의 친일 행위를 분명히 사과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데 반해 노천명은 그런 것도 없는 데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터라 실드 받을 일이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5] 일제 때는 친일을 했고 서울북한에 넘어가자 종북을 했다.[6] 다만 한 사내에게는 예외였는데 당대 최고의 미남이자 남녀 불문 조선 문인들의 아이돌이었던 백석. 노천명은 그를 바람직한 시인의 모델이자 자신의 이상형으로 봤으며 대표작 사슴이 백석에게 보내는 연시라는 해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