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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10:17:35

김소운

1. 소개2. 생애3. 대표작4. 친일 논란5. 여담

1. 소개

한국의 수필가, 번역가. 1907년 1월 5일 부산에서 태어나 1981년 11월 2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본명은 김교중(金敎重), 호는 삼오당(三誤堂), 소운(巢雲)이다. 1968년에 현재의 김소운(金素雲)으로 개명했는데, 호(巢雲)와는 한자가 다르다. 또한 당호[1]로 '어수원서실'이 있다. 巢雲은 원래 필명 겸 호로 쓴 것인데, 나중에 개명한 素雲과 한자가 달라서 당대에도 독자들이 같은 사람 맞냐고 헷갈려 했다고 한다. 삼오당은 세가지 과오라는 뜻으로 “-지구위에 허다한 나라를 두고 하필이면 이런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제1의 과오가 아닐 수 없고, 이왕 태어났으면 농사나 짓고 장사나 할 것이지, 인간의 운명이니 감정에 관련된 문필작업 같은 이런 고생길을 택했다는 것, 이것이 둘째 과오-, 또 하나 그런 괴롭고 불행한 가시밭길을 택했거든 콜레라, 장티부스, 별의별 병이 다 많은데, 30전후에 죽어서 애석하다는 소리나 들어볼 것이지 죽지 않고 살아서 응시소매(應時小賣)의 잡문 부스러기를 쓰고 앉았다니, 이게 무슨 과오일까 보냐?- 이것이 내 신학설인 삼오당 변이다.(선집 1. 푸른 하늘 은하수, 231p)" 와 같이 스스로 풀이하고 있다. 그의 수필에 잘 나타나 있듯이 물질문명과 황금만능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그를 잘 나타내는 부분.

2. 생애

김소운의 생애와 그의 작품 분석에는 다양한 글들이 있지만, 오하룡 시인이 2014년 진해문학에 기고한 글[2] 에 잘 정리되어 있다. 또한 어문각에서 간행한 신한국문학문고 김소운편 '목근통신,청론탁설' 말미에 나온 수필가 박연구의 작품해설, 범우사의 범우문고 134 '가난한 날의 행복' 말미의 연보를 참고하면 좋다. 김소운의 수필은 아성출판사에서 1978년에 간행한 5권 전집 "김소운 수필선집"이 작가 사망 몇년 전에 발간되어서 작가의 수필을 거의 총망라했다고 한다.

1919년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3년, 시대신조에 시 <신조>를 발표했고, 29년, 매일신보 학예부원이 된 뒤, 아동 교육과 한국 문학 번역에 힘썼다.

1950년대부터는 일본 생활을 바탕으로 한 여러 수필들을 저술했고, 대표작으로는 피딴 문답, 마이동풍첩, 물 한 그릇의 행복, 특급품등 이 있다.

3. 대표작

4. 친일 논란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발표한 예비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까지 발견된 친일 저작물 수는 〈야마모토 원수의 국장일〉(1943.6.8), 〈재장(1943.6.8)〉, 〈부조의 오명을 일소(1943.11.21)〉 의 3편으로 모두 《매일신보》에 발표되었다[4].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제외되었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도 '김소운의 친일 혐의에 대해서는, 친일 작품 발표 시기가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일제강점기 말기에 몰려있고 편수도 적은 점, 평생에 걸친 주요 관심사가 한국 문학의 번역 소개였고 일본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데 일조한 공으로 1980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는 점, 보통학교 재학 중 밀항으로 도일한 김소운에게는 일본이 문학적인 고향이었다는 점 등 여러 요소로 인해 유가족의 부당하다는 항변이 있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사실 친일활동은 80년대부터 논란이 되었는데,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거주하는 번역가 도다 이쿠코는 한국 유학 당시 "김소운 글을 좋아한다"고 하다가 동창생에게 그 색히는 친일파 매국노였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이다.

본인의 생각이 어땠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과거나 현재나 '지일' 지식인들이나 일본 출생자들이 '친일'로 손쉽게 매도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애국 농학자 우장춘이 당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살펴 보자. 김소운의 경우 이런 오해가 더욱 쉬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일본에서 활동한 경력도 많고 1927년 20세 때 斎藤秀三郎라는 일본 학자 문하의 小川静子와 동거를 시작 하였다고 전해지며 이후 1944년 태평양 전쟁에 의한 민족문제 등으로 인해 헤어졌다고 한다. 이 시점이 김소운이 친일 문학을 매일신보에 연재한 시점과도 겹치는 것으로 보아 심경이 복잡하였을 듯. 이후 광복 후에는 김한림과 결혼하였다.

김소운을 일방적인 친일변절자로 매도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으며, 본인도 자신의 수필에 간접적으로 불편함을 표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김소운이 적극적인 항일 활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10대 부터 일본에서 한국의 민요를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1926년 19세에 '지상낙원'이라는 시 관련 잡지에 '조선의 농민가요'를 6회 연재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구전민요를 일본에 소개한 첫 글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1929년 22세에 일어로 '조선민요집'을 간행, 1933년에 순한글판 '조선구전민요집'을 '동경 제일서방'에서, '조선동여선'과 '조선민요선'을 '이와나미 문고'에서 간행하였다. 그의 수필 '목소리'에는 김소운이 1945년 초에 하얼빈을 갔다가 돌아오던 중[5] 평안북도 태천에서 일단의 중학생 대여섯명을 여관에서 만난 일이 실려있는데, 이 때 이 일면식 없는 학생들이 김소운에게 직접적으로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어야 옳습니까?'라고 물어보았고 이에 대해서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눴다고 나온다. 글에 직접적으로 김소운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김소운은 이들 중에 일제 스파이가 있을지도 몰라서 처음에는 긴장했으나 자라나는 청년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고 나온다. 즉, 간접적으로 나마 일제에 순응하지 말라는 얘기를 했을듯. 이러한 이야기 역시 본인만의 주장이 아니라, 1952년 부산의 한 영화관 휴게실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 얘기하던 중 그 중학생 일행 중 한명(수필상에서는 C군이라고 나온다)이 자기한테 자신을 기억하냐고 묻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결정적으로 이 수필 말미에 "여기 사람들은 나를 친일파라고 그러는데- 날 잡으러 오면 나는 C군을 증인으로 내세울 거야-"라는 부분이 실려있다.

목근통신에서는 "나는 貴國(귀국)에서 10數卷(수권)의 著書(저서)를 내고, 貴國(귀국)의 문화인, 예술인들 사이에 약간의 知己(지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중에는 莫逆(막역)이라고 할 信友(신우)가 있고, 恩誼(은의)를 입은 스승이 있었읍니다. 그러한 나로서도 ‘도오꾜오’의 留置場(유치장) 풍속이 몸에 저리도록 배었읍니다. 내 履歷書(이력서), 내 自敍傳(자서전)의 가장 상세한 資料(자료)는 東京(동경) 경시청에 보관된 서류 以上(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關東大震災(관동대진재)에 불타버린 30년 전 하숙집 번지까지도 거기는 밝혀져 있읍니다."라고 밝혀 간접적으로 자신이 '불량선인'임을 암시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 활동이나 잡지 발행등이 단순히 일본에 순응하기 위한 한국학 연구였다면 굳이 일제 감시망에 들지는 않았을 터.

또한 '어수원 잡필'에서는 '소위 황민화 운동에 희생된 국적 불명의 우리 어린이들, 그들의 비뚤어진 정서에 한 방울의 모빌오일이 되려고 시작했던 아동잡지가 산더미 같은 부채만 지고 넘어진 뒤 나는 C동의 일인(일본인) 목욕탕 2층에서 곁방살이를 하면서 살맛 잃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실제로 김소운은 '아동세계', '신아동', '목마'의 소년잡지를 발행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5. 여담

그가 쓴 《목근통신》에는 하가쿠레에 실려 있는 설화라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실어 놓았다.
떡집 이웃에 무사와 어린 아들이 살았다. 어느 날 아이가 가게에서 놀고 간 뒤 떡 한 접시가 없어졌다. 떡집 주인이 아이를 의심하자 무사가 말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내 자식은 사무라이의 아들이다. 남의 가게에서 떡을 훔쳐 먹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떡집 주인이 계속 의심하자 무사는 그 자리에서 아들의 배를 갈라 결백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칼로 떡집 주인을 베어 죽인 뒤 자신도 할복한다.

그러나 실제 하가쿠레 원문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원래 저 이야기는 아카이맘마(赤いまんま)라는 아키타현의 지역 설화를 하가쿠레의 내용으로 착각해 잘못 실어 놓은 것이다.(일본어 원문) 실제 주인공도 무사가 아니라 평범한 농부이며, 떡이 아니고 팥밥을 훔쳐먹었다는 의심 끝에 결백을 증명하려고 아이의 배를 부잣집 주인이 보는 앞에서 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외투》 (1952년 작)에서는 Conklin 만년필을 '스승에게 물려받은 프랑스제 콩쿠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아마도 미국제 콩클링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속 저자의 기억에 따르면 글을 쓴 1952년 시점에서 약 10~15년 전 하얼빈으로 돌아가는 청마 유치환을 역에서 배웅[6]하던 중 마침 자신 품에 있던 16원 짜리 프랑스제 청자색 '콩쿠링'을 유치환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후 5,6 년 후 이 만년필은 고장이나서 하얼빈에서 유치환을 만난[7] 김소운이 수리를 위해 서울로 가져왔는데, 마침 수리 후에 소매치기를 당해 분실되었다고 한다.

[1] 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를 그 사람의 이름 대신으로 쓰는 것. 예를 들어 정약용을 여유당으로 칭하는 것 따위.[2] 다음 카페 경상남도문인협회에 게시글로 찾을 수 있다. 링크[3]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601 | 목근통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교과서와 친일문학. 1988.1.19. 교육출판. 링크[5] 아래 여담에 소개된 또 다른 수필 '외투'를 참고하면 정황상 청마 유치환을 만나고 온 것으로 보인다. 청마 역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친일파 둘이 친했다라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이니 판단은 자유이다. 유치환의 형 유치진 역시 친일파로 분류되어 있다.[6] 저자에 따르면 북만주로 돌아가는 유치환이 한겨울에 외투 한벌 없이 돌아가는데 자신도 마침 벗어줄 외투가 없었고 가진게 그 만년필 하나였다고 한다.[7] 위에 소개된 '목소리'라는 수필에서도 해방 되는 해 2월에 하얼빈을 갔다고 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아마 이 때 일 것으로 보인다. 연보에 1945년 2월 38세 에 도쿄에서 북만주로 가서 하얼빈에서 청마와 재회했다는 것으로 보아 확실한듯. 참고로 김소운은 1943년에도 '조선시집(전기)'와 '조선시집(중기)'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