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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9 17:01:19

6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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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성씨별 고찰4. 6두품 출신 인물

1. 개요

6두품()은 신라 골품제의 구분 중 하나로, 진골 밑 계급 중에서 가장 유력 계층이다.

2. 특징

성골과 진골이 넓은 범위의 왕족들인 것을 감안하면 왕족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서열이 높은 계층이었다. 즉, 금수저나 아무리 못해도 은수저는 되는 계층이란 소리다. 하지만 성골과 진골을 강조하느라 미천한 계층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대체로 6두품에 해당되는 계층은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통합한 경주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던 중소 국가들의 지배층들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로 삼국통일전쟁 후 멸망한 옛 고구려계 지배층도 초기 신라 주변 소국이나 가야 구 지배층 때 그랬던 것처럼 고구려에서의 지위를 인정받아 왕족에 해당하는 안승은 진골, 그 외 고위 귀족들은 6두품으로 편입되었다.

백제계의 경우 멸망 직후에는 일괄적인 기준이 없이 6두품을 내리기도 했다. 백제의 고위 귀족인 좌평 신분으로 신라에 투항한 충상은 6두품 아찬 대우를 받았다. 이 경우는 멸망 직후부터 신라군에 협조했기 때문에 늦게 굽힌 다른 귀족보다 대우가 좋았다. 그러다가 이후 문무왕 13년(673) 신라에서 백제의 살아남은 고위 귀족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는 게 나오는데 나당전쟁을 거치며 상대적으로 협조적으로 응한 고구려계 귀족과 달리 부흥운동과 웅진도독부를 통해 저항을 오래 했기 때문에 백제계 귀족의 골품 기준을 5두품 이하로 낮췄다.

이미 이 단계에선 백제 왕실이 주도하는 부흥운동 따위는 꿈에서나 가능해졌고, 만일 시도했다간 보덕국이 그랬듯 백제인들로 주로 구성된 청금서당, 백금서당 등에게 참혹한 진압을 받을게 뻔했기에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도 관위를 거부한다는 등 행태는 보일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지배층으로서 통일신라에서 백제계 성씨를 대놓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대단히 적어졌다고 본다.

수도 출신들만 상위계급이었던 고대국가의 특성상 신라의 6두품 역시 대대로 왕경인 경주 출신이다. 하지만 진골들과는 달리 출세에 한계가 있었다. 6두품은 신라 17관등의 6등인 아찬까지 올라가는 게 한계였다. 때문에 이래저래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런데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얻기 힘들다는 뜻으로 최치원의 저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文)'에 보이는 말이다. 이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도 신라에서 소수의 특권 계층이었고 엄연히 자부심 넘치는 지배계층이었다. 6두품의 진급 상한선인 아찬이 그리 높지 않은 것처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로 환원하면 종3품 정도로 볼 수 있으니 결코 낮다고 할 수도 없다.

흔히들 진정한 주류에 끼지는 못하나, 비주류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자신을 6두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 설명이 되어 있듯이 신라의 6두품 역시 신라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기득권층에 속한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신라 중대였다. 삼국통일을 전후로 6두품 이하 귀족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진골을 누르기 위해 중위제(重位制)가 전격 시행되었고 이 제도를 통해 6두품은 4중아찬까지 진급할 수 있게 되었다. 신문왕이 6두품을 적극 기용했다는 것은 중위제를 활용하여 이들을 기용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6두품이 가장 많이 빛을 발했던 때가 삼국통일전쟁기부터 신라 중대 전제왕권기로 이 때의 6두품들은 유학을 배운 지식인들로 6두품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일종의 특진제도로 도입된 중위제를 통해 신라의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사실 삼국통일전쟁기 신라의 리더들인 태종 무열왕이나 김유신, 문무왕은 신라 역사에서 비교적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았고 능력 위주로 인사를 단행하거나 논공행상을 벌였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6두품의 중위제는 제 아무리 오래 근무를 하든, 능력이 우수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뭘 해도 진골 출신보다 밑이었고 진골에게 숙여야 했으니 결국 골품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6두품이라는 말이 비유적으로 승진에 한계가 있는 고위직 간부 혹은 권력층의 신하라는 태생적 한계를 자조하는 뉘앙스를 현시대에도 갖게 되어 종종 쓰인다.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면서 중앙 진골끼리의 왕권 다툼이 격화되면서 신라 중대 왕실을 이룬 태종 무열왕계 진골들과 김유신 가문의 진골들도 하대에 이르면 원성왕계 진골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세력을 잃고 6두품으로 격하되었다. 물론 모든 무열왕계 진골들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진골 신분을 유지하면서 왕의 국구로 대단한 권세를 누린 김양 같은 케이스도 존재한다.

이러한 혼란과 한계 때문에 아예 당나라로 건너가 빈공과 과거에 합격해 당나라 관리로 재임하기도 했다. 최치원이 대표적인 케이스. 결국 신라 하대에 6두품은 지방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성씨별 고찰

■ 신라 왕성
■ 신라 6성

4. 6두품 출신 인물

학계에서는 진골이 아닌 것이 명백하나, 유명한 이들을 6두품이라고 뭉뚱그리는 경향이 있는데 급찬 이상 관등을 소지한 게 분명한 몇몇 인물들 말고는 사실 6두품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경우들이 많다. 아래 인물들 중에서도 실제로는 6두품보다 더 미만의 신분인 이들도 섞여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할 것.
[1] 17관등의 제3관등. 1~5등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2] 大阿飡 角干. 17관등제에서 대아찬(大阿飡)은 제5관등, 각간(角干)은 제1관등이다. 제1~5관등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다.[3] 다만 경주 이씨에서 분적한 합천 이씨 족보에서 시조부터 중시조 사이의 35대 실전세계가 발견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중시조 소판공 이거명의 선조들도 대대로 진골이었음을 알 수 있지만, 여러 정황을 볼 때 위작의 가능성이 높아 경주이씨중앙화수회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4] 당초 방송에서는 2008년에 발굴한 것으로 보도되었으나 이후 2007년 12월에 발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5] 당초 방송에서는 500kg으로 보도되었으나 이후 600kg으로 확인되었다.[6] 묘지명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성은 이씨(李氏)이다. 신라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金溥 :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7] 원문의 한자는 裵(배)가 아니라 裴(배)이다. 裵가 본래 글자이다. 중국에서는 성씨로 裴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