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시기 아크레 기반 군벌 | |||||
자히르 알 우마르 | → | 제자르 파샤 |
1. 개요
아랍어 ظاهر العمر الزيداني자히르 알 우마르 앗 자이다니
생몰 1689/90년 ~ 1775년 8월 21/2일
18세기 중반 갈릴리 지방과 아크레를 중심으로 가자 ~ 시돈에 이르는 레반트 해안을 지배한 아랍계 호족. 17세기 레바논을 통일한 파크르 앗 딘 2세에 이어 오스만 제국의 시리아 지배를 가장 위협한 토착 세력이다. 1735년 나사렛을 점령하며 정복에 나선 그는 1746년 아크레를 무력으로 점령한 후 요새화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몰타 기사단의 해적질로부터 일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해안을 장악한 자히르는 30여년간 사실상 독립 군주로 군림하였고, 1742~43년과 1771년 다마스쿠스 총독의 토벌을 격퇴하였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돌입한 틈에 자립한 이집트의 알리 베이 및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시리아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중세 들어 이집트나 시리아의 정권에 속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처음으로 현 서안 지구를 제외하고 통합되었다. 아크레를 그 중심으로 정한 자히르는 선정을 펼친 결과 현지 주민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그를 따를 정도로 민심을 얻었다. 1775년 자히르가 토벌당하여 전사한 후에도 그의 맘루크 후계자들도 오스만 조의 수복 시도를 물리치며 1832년 메흐메드 알리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자치를 이어갔다. 그러한 82년의 세월동안 아크레는 사실상 팔레스타인 국의 수도로써 번영하게 된다. 한편 순니 무슬림이던 자히르는 기독교 및 유대교에 대한 관용을 넘은 후원과는 달리 레바논의 동료들과 결탁하던 드루즈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억압하였고, 그 결과 갈릴리의 드루즈인들은 골란 고원 너머의 하우란으로 이주해 정착, 현재의 드루즈 산지를 형성하였다.
2. 배경: 자이다니 가문
자이다니 가문은 하산 이븐 알리의 아들 자이드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순니 이슬람을 믿는 카이시 계열 아랍 부족이다. 히자즈에 거주하던 그들은 12세기 말 살라흐 앗 딘 지배 하의 시리아 일대로 이주하였고, 마라트 알 누만에 정착하였다. 알레포 ~ 다마스쿠스 간 교역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한 자이다니 가문은 17세기 무렵 기존에 그들을 보호하던 바누 아사드의 공격을 받아 남쪽의 갈릴리로 이주, 티베리아스 (타바리야)에 정착하였고 레바논 산지를 다스리던 마안 가문에 의해 일대의 물타젬 (세금 징수관)으로 봉해졌다.그후 갈릴리 중앙부의 아라바로 이주한 자이다니 가문은 인근 살라마의 드루즈 셰이크로부터 도시를 방어하였고 1690년 경에는 반격에 나서 살라마와 캄마네 등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가문의 수장 자이단은 아라바, 샤구르 지역의 수조권을 얻었다. 1698년 마안 가문이 끊기고 레바논 산지의 지배권이 시하브 가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사파드의 산작 베이 에미르 만수르는 자이단의 아들 우마르 앗 자이다니를 사파드와 티베리아스의 물타젬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1701년 만수르가 사망하자 우마르는 사파드 총독에 올랐다.
3. 생애
아라바에 현존하는 자히르 알 우마르의 생가
1689년경 아라바에서 우마르의 막내 아들[1]로 태어난 자히르는 남쪽 나자렛 방면의 세포리스 (사푸리야)에서 성장하였다. 1706년 우마르가 사망하자 장남 사드가 셰이크 (당주)로 등극하였는데, 수조권은 아직 10대였던 자히르에게 주어졌다. 이는 세금 체납 시에 오스만 당국이 제대로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하려는 예방 조치였지만, 얼굴마담에 만족할 생각이 없던 자히르는 이를 통해 합법적으로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1707년 자히르는 티베리아스에서 다툼에 휘말린 끝에 튀르크 군인를 죽이고 만다. 이로써 분쟁이 일자 당주인 사드는 바니 사크르의 안전 보장에 따라 다시 아라바로 이주하였다.[2] 그곳에서 자히르는 무슬림 학자 압둘 카디르 알 히프라뉘로부터 고등 교육을 받았고, 전술과 사냥 역시 배웠다. 그러던 1715년 무렵 자이다니 가문은 사파드 산작을 관할하는 시돈 총독의 아라바 북쪽 카르미엘 부근 비이나에 대한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때 자히르는 뛰어난 무공을 드러내며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명망을 얻음과 동시에 민간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자히르는 형 사드와 함께 가업인 시리아 종단 무역에 종사하며 다마스쿠스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자히르는 현지 무슬림 학자 압둘 가파르 앗 슈와키와 교류하며, 그를 통해 현지에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후사이니 가문의 사이드 무함마드와 친교를 맺었다. 후자의 외동딸과 결혼한 자히르는 아라바가 너무 작다고 여겨 나사렛으로 이주하였고, 장인인 사이드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1727년경 자히르와 작은형 유수프는 동맹 바니 사크르와 함께 티베리아스를 점령하고 그 수조권을 장악하였다. 동시에 그는 시돈 총독 쾨프륄뤼 압둘라 파샤에게 서신을 보내 현지 징수관의 학정과 불법 과세를 고발하며 점령을 정당화하였고, 세금의 제때 납부와 공정한 지배를 약속하며 티베리아스 & 알바의 물타짐 임명을 청하였다. 이를 승인한 압둘라 파샤는 예복을 보내었고, 이는 자이다니 가문에 있어 사상 처음으로 레바논 산지의 현지 군주가 아닌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직접 지배권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20년만에 티베리아스로 돌아온 자히르는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사촌 무함마드 이븐 알리를 아크레와 아라바 사이 앗 다문의 물타짐으로 봉하여 서부 방어를 맡겼다. 한편 사드는 데이르 한나를 요새화하고 거점으로 삼았다.
3.1. 갈릴리 장악
초기 거점 티베리아스에 쌓은 성벽과 바다 성채
자히르가 건립한 우마리 모스크 | 자히르의 치세에 복구된 십자군 시절 성채 |
이후 자히르는 나사렛 남쪽의 마르즈 이븐 아메르 평원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나블루스 산작의 자라르 가문과 나사렛을 두고 다투었다. 기존 자이다니 가문의 동맹이던 바니 사크르가 후자에 가담하며 배신하자, 1730년대 중반 자히르는 아흐마드 아가 앗 딘키즐리 휘하의 마그레브 용병대를 고용하였다. 한편 나사렛 주민들 역시 자히르를 지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735년 자히르 휘하 2천 병력은 알 라우하에서 자라르-사크르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8천에 달하는 전사자 중에는 후자의 지도자인 셰이크 이브라힘 알 자라르도 있었고, 승리 후 자히르는 나사렛을 점령하였다. 이에 4천에 달하는 현지 주민들이 자히르의 군대에 가담하였고, 그들 중에는 군대에 식량과 물을 보급하는 나사렛 출신 기독교도 여인들도 있었다. 1720년대 거병 당시 2백, 1730년대 들어서도 1500명 규모의 베두인 병력을 주력으로 삼았던 자히르는 마침내 수천에 달하는 현지 아랍 민병대로 그들을 대체, 더욱 안정적인 병력 운용에 나설 수 있었다. 이로써 사실상 상비군을 마련한 자히르는 나블루스 산지로 진격, 자라르 가문의 거점 사누르를 포위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전선이 고착화되자 양측은 휴전을 맺었는데, 자라르 가문은 지속적으로 자히르의 남진을 막기 위해 세력을 모았다.
1740년경 나사렛에 세운 세라야. 1877년까지 총독 관저, 1991년까지 지역 의회로 쓰였다. 또한 1812년 전까지 시내의 유일한 모스크였다.
1760년대 자히르는 주딘 (짓딘)의 십자군 성채를 재건하였다
지중해 연안으로의 팽창을 꾀하던 자히르는 1738년 아크레 동북쪽 짓딘 일대 소작농들의 탄원에 따라 학정을 일삼던 아흐마드 알 후사인을 축출하고 짓딘 짓딘 성채와 그에 딸린 아부 스난, 타르쉬하를 점령하였다. 시돈 총독 이브라힘 파샤 알 아젬은 그의 점령을 승인하였으나 동시에 아흐마드 역시 지원하여 양측의 대립을 부추겼다. 자히르는 1500의 병력을 거느리고 짓딘 부근에서 아흐마드를 격파였고, 이로써 짓딘의 물타짐으로 임명되었다. 1739년 자히르는 짓딘 남쪽의 비이나 성채를 포위했으나 함락에 실패한다. 다만 이후 자히르는 그 무크타르 (수장)의 딸과 결혼하며 비이나를 얻을 수 있었으며, 수흐마타 역시 협상을 통해 장악하였다. 이로써 북부 갈릴리의 패권을 장악한 자히르는 1740년 인근 베두인들과 협상해 자신의 영지에 대한 그들의 습격을 중단시켰다. 한편 사드와 무함마드 이븐 알리는 각각 데이르 한나와 셰파 아므르를 장악하며 자이다니 가문의 서부 갈릴리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다.
3.2. 동맹과 자립
티베리아스, 아크레, 나사렛, 아라바, 데이르 하난, 사파드, 야룬 등이 표시된 지도 |
그 무렵 자히르는 협상을 통해 사파드의 물타짐 무함마드 앗 나피로부터 도시를 넘겨받았고, 데이르 알 카시의 셰이크 압둘 칼리크 살리흐의 딸과 결혼하여 요새화된 도시를 얻었다. 이로써 레바논 남부 자발 아밀의 쉬아 공동체인 메타왈리 가문들과 접경하게 된 자히르는 그 셰이크인 나시프 앗 나사르에게 변경 지대의 알 바사 및 야룬[3] 성채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이에 나시프는 공격에 나섰고, 양측은 타르비카 일대에서 전초전을 치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전황은 자히르가 고용한 마그레브 기병대가 지원에 나서며 역전되었고, 자히르는 나시프를 그의 거점인 티브닌까지 추격하였다. 결국 사드의 중재로 양측은 휴전하였고, 알 바사와 야룬을 얻어낸 자히르는 나시프와 각각 다마스쿠스 총독과 시돈 총독에 대한 서로의 투쟁을 돕기로 하는 상호 방위조약을 맺었다. 또한 자히르는 포로로 잡은 나시프의 아들들을 석방하였고 시돈 총독에게 내는 세금을 25% 감면시켜 주었다.
점점 강해지는 자히르의 세력에 한세기 이전 파크르 앗 딘 2세의 재림을 우려한 오스만 술탄 마흐무트 1세는 다마스쿠스 총독 술레이만 파샤 알 아즘에게 갈릴리 토벌을 명하였다. 1742년 9월 술레이만 파샤는 자히르의 거점인 티베리아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83일의 공성전은 주력인 핫즈 순례단이 떠나며 와해되었고, 자히르는 티베리아스와 셰파 아므르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1743년 자히르는 시돈 총독 이브라힘 파샤 알 아즘에게 아크레의 수조권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술레이만 파샤는 트리폴리, 예루살렘, 가자, 이브리드 등의 병력을 모아 재차 갈릴리로 진군하였고 직접 대결을 피한 채 티베리아스와 데이르 한나를 봉쇄하여 자히르를 말려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술레이만 파샤는 이듬달 급사하였고, 지휘 체계의 혼란을 틈타 반격에 나선 자히르는 토벌군을 격파하고 그 진영을 점령하였다. 1745년 자히르는 세포리스 부근에 성채를 건립하였다.
3.3. 아크레를 얻다
십자군 시절 외벽을 따라 세워진 아크레 성벽
1758년 건립된 물라크 사원. 1746년까지 람샬 시나고그로 쓰이던 옛 십자군 건물을 자히르가 다른 건물을 내주며 매입, 모스크로 개조했다. 현재까지도 히브리어 명문이 남아있다. 한편 미나렛은 1950년 당국에 의해 '위험하다'는 이유로 철거됐고, 작은 미나렛이 그 터에 세워졌다. |
1730년대 갈릴리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부터 자히르는 지중해 연안으로의 진출을 갈망하였고, 그중에서도 번영하는 항구 아크레를 노렸다. 1731년부터 그는 도시의 기독교도 상인 유수프 알 카시스를 통해 항구에 드나들던 프랑스 상인들과 접촉하였고 형 사드에 대한 그들의 빚 문제를 중재하였다. 한편 사촌 무함마드 이븐 알리 역시 아크레를 노리자 자히르는 1743년 그를 체포해 처형하는 강수를 두며 의지를 보였고, 시돈 총독에 대한 아크레 수조권 요구가 거절되자 1746년 7월 도시를 무력 점령하였다. 그후 자히르는 티베리아스를 떠나 아크레 방면의 요새화된 데이르 한나에 머물다가 1750년경 아크레에 (과거 십자군 성채를 기반으로) 성벽을 두르고 시내에도 여러 방어 시설과 건물을 세우며 이주하였다.
아크레 천도 후, 하이파만 일대의 수도권을 제외한 자히르의 영토는 그의 형제와 아들 등 친족들에게 분배되었다. 맏형 사드는 데이르 한나, 동생 유수프는 이벨린 (이빌린), 다른 동생 살리흐 아부 다니는 아라바가 주어졌다. 자히르의 장남 살리비는 기존 거점이던 티베리아스의 물타짐 직위를 넘겨받았다. 비록 60대에 이르렀지만 자히르는 건강하였고 활동적이었다. 다만 역시 30세 이상이 되어 장성한 아들들의 권력 요구 역시 만만치 않아 후일 내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한편 아크레의 자히르는 다마스쿠스 총독 아사드 파샤 알 아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었는데, 1757년 후자가 해임되고 후세인 파샤 이븐 마키로 대체되자 그와는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3.4. 하이파 점령
1769년 자히르에 의해 세워진 하이파 알 자디다
1757년 자히르는 아크레 남쪽 하이파와 탄투라 (현 나흐숄림) 및 카르멜 산을 장악하였고 이들은 시돈 에얄레트에 속한 그의 기존 영토들과 달리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소속이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북부 해안의 점령에 대해 자히르는몰타 기사단의 해적질로부터 일대를 보호한다며 포르테 (오스만 조정)에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한편 1757년 말엽 자히르와 친선을 유지하던 바니 사크르와 사르디야 부족들이 메카에서 시리아로 귀환하던 핫즈 카라반을 습격하는 일이 있었다. 수천에 달하는 순례객들이 살해되었는데, 그중엔 술탄 오스만 3세의 누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충격에 빠진 포르테는 다마스쿠스 총독이자 아미르 알 핫지인 후세인 파샤를 문책하였고, 그는 자히르가 연관되어 있다며 항변하였다. 자히르는 이를 부인하며 제대로된 수사를 청하는 한편, 무함마드와 술탄을 상징하는 휘장 등 부족들이 약탈한 물품들을 구입하여 신임 술탄 무스타파 3세에게 바쳤다. 이로써 결국 후세인 파샤만 해임되었다.[4]
1760년 신임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부임한 우스만 파샤 알 쿠르지는 하이파를 수복하고자 하였고, 시돈 총독 누만 파샤에게 이를 맡겼다. 명령을 형식적으로 따른 누만 파샤는 30명의 마그레브 병사들을 프랑스 인의 지휘 하에 선박에 태워 보내는데에 그쳤다. (1761년 5월 20일) 이러한 미약한 시도에 대해 자히르는 손쉽게 배를 나포, 병사들을 체포하고 프랑스인 선장에게선 벌금을 받았다. 하이파 영유권 문제는 자히르의 친구이자 포르테의 관료인 야쿱 아가의 개입으로, 우스만 파샤의 주장이 일축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같은해 자히르는 형 사드가 우스만 파샤 및 바니 사크르와 공모해 자신을 죽이고 찬탈하려 한다며 아들 우스만 앗 자히르로 하여금 그를 암살하게 하였다. 우스만은 셰파 아므르 영지를 대가로 이를 수행하였으나 자히르가 현지 주민들이 반발한다며 오리발을 내밀자 분노하였고, 영지 추가 지급 거부에 반감을 품던 친동생 아흐마드 & 사드 앗 딘의 지원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3.5. 자식들이 원수
우스만이 셰파 아므르에 세운 성채
1765년 우스만은 셰파 아므르를 포위하였으나 주민들은 자히르의 지시에 따라 저항하여 그를 격퇴하였다. 이에 형제들은 자히르의 장남이자 가장 충성적이던 살리비에게 중재를 청하였는데, 그 역시 자히르에게 영지 분봉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그후 형제들은 1762년 자히르에게 패배했던 바니 사크르와 동맹하여 맞서려 하였지만 자히르가 선수를 쳐 부족장에게 뇌물을 보내 무마시켰고, 마침내 우스만을 사로잡아 하이파에 6개월간 감금한 후 사파드 근처 마을로 유배보내었다. 한편 같은해 자히르는 기존 하이파를 파괴하였고, 4년 후인 1769년 동남쪽 3km 능선과 해안이 만나는 지점에 요새화된 도시로 재건하였다. 그러던 1766년 5월 우스만은 갈릴리의 드루즈 가문들과 함께 재차 봉기하였지만 연합군은 사파드 부근에서 자히르에게 격파되었다. 싸움은 인접한 레바논으로도 번져 드루즈 산지의 아미르 만수르 시하브는 우스만, 자발 아밀의 쉬아 메타왈리 셰이크 쿠블란은 자히르를 지지하였다. 다만 자히르의 기존 동맹이던 셰이크 나시프는 우스만 편으로 배신하였다. 전쟁이 더 커지기 전에 하스바야의 아미르 이스마일 시하브의 중재로 티레에서 양측 간의 평화 회담이 열렸고, 우스만이 나사렛 지배권을 얻는 것으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한편 자히르에 내전과 외침을 가리지 않고 충성하여 사파드를 얻은 아들 알리는 1767년 9월 데이르 한나 및 데이르 알 카시 양도를 거부당하자 봉기하였다. 이에 자히르의 군대가 사파드를 포위하였고, 그달 말 알리가 항복하자 자히르는 데이르 알 카시를 양도하며 달래었다. 그러나 몇주 후 알리는 동생 사이드, 셰이크 나시프, 아미르 유수프 시하브, 다마스쿠스의 우스만 파샤와 함께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자히르는 우스만, 셰이크 쿠블란, 시돈 총독 무함마드 파샤 알 아즘과 연합해 맞섰고 우선 재정 참모 이브라힘 사바가의 중재로 사이드에게 투란과 히틴 영지를 주며 화해하였다. 그러나 알리는 큰형 살리비를 새로 끌어들인채 협상을 거부하였고, 군대를 해산하고 아크레에서 자원한 민병대만 지니고 있던 자히르를 패배시켰다. 이에 자히르는 아크레에 대기시킨 자신의 마그레브 용병대를 재조직하여 반격, 알리를 패배시켰다. (1767년 10월) 데이르 한나로 도주한 알리에 대해, 성채에서 고생할 그의 아들들 (즉 자신의 손자들)에 동정을 느낀 자히르는 알리에게 데이르 한나를 영유하는 대가로 1만 2500 피아스터 및 아랍말 25필을 지불하는 것으로 알리를 사면하였다.
3.6. vs 우스만 파샤
1769년 자히르의 후원으로 세워진 나사렛의 성 가브리엘 (그리스 정교회 수태고지) 성당
1767년 12월에 이르면 자히르 집안의 내분은 잦아들었고, 우스만의 중재로 자히르와 셰이크 나시프 간의 동맹이 재확립되었다. 1768년 오스만 당국은 자히르에게 '아크레의 셰이크, 나사렛-티베리아스-사페드의 아미르, 전 갈릴리의 셰이크' 칭호를 하사하며 그의 사실상 정치적으로 독립된 지위를 인정 혹은 정당화하였다. 공식적인 지배권의 인정으로 인한 기쁨도 잠시, 얼마후 포르테에서 자히르의 이익을 대변하던 야쿠브 아가가 처형되었고 술레이만 아가 역시 1770년 뒤따랐다. 이로써 자히르는 코스탄티니예의 동맹을 잃어버렸고, 이틈에 그를 멸하기로 마음억은 다마스쿠스의 우스만 파샤는 자신의 아들 다르위쉬 파샤와 무함마드 파샤를 각각 시돈과 트리폴리의 총독으로 봉하며 레바논을 장악하였다. (1770년 11월) 이로써 북, 동 양면으로 포위된 자히르는 아크레의 방어시설을 강화하였고 시내의 모든 성인 남성들에게 각각 장총 및 권총 두 자루와 곡도를 주어 무장시켰다. 또한 그는 갈릴리 각지의 영지를 지닌 아들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였고 자발 아밀의 쉬아 가문들 등 현지 세력들과의 동맹을 강화하였다.
또한 자히르는 새로운 동맹으로, 이집트와 히자즈에 독자적인 맘루크 정권을 세우고 있는 알리 베이 알 카비르를 주목하였다. 시리아로 진출하고자 했던 알리 베이는 자히르와 마찬가지로 다마스쿠스 총독 우스만 파샤와 대립하였고,[5] 공통의 적을 두었기에 둘은 쉽게 동맹에 이르렀다. 1771년 알리 베이는 이스마일 베이 휘하 2만여의 이집트 군을 가자와 자파 (야파) 방면으로 파견하였고, 자히르는 그들과 합세한 후 요단강을 건너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였다. 하지만 목적지에서 70여 km 떨어진 무자이립에 닿을 무렵 이스마일 베이는 핫즈 카라반을 이끌고 행진하는 우스만 파샤를 마주하자, 무슬림 순례객들을 해치게 될 것을 우려하며 돌연 진군을 멈추었다. 순례 기간에 총독을 공격하는 것이 지대한 종교적 위법 행위일 것이라 여긴 이스마일 파샤는 결국 자파로 철군하였고, 갑작스러운 퇴각에 당황과 동시에 분노한 자히르는 단독으로 아들 아흐마드 등의 장교들을 시켜 골란 고원의 쿠네이트라 등지에서 세금을 거두게 하였고 다른 아들 알리를 하우란에 보내 바누 누아임과 싸우게 하는 등 다마스쿠스 에얄레트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자히르의 항의에 이집트의 알리 베이는 압부 다하브 휘하 3만 5천 병력을 다시 파병하였다. (1771년 5월) 자파의 이스마일 베이와 합류한 아부 다하브는 그해 6월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우스만 파샤를 격파한 후 곧 도시를 점령, 수비대가 농성한 시타델을 포위하였다. 동시에 메타왈리 동맹군과 북진한 자히르는 다르위쉬 파샤로부터 시돈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다마스쿠스 점령이 곧 칼리파를 겸한 오스만 술탄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것이고, 곧 악마의 행위에 준한다는 이스마일 베이의 주장에 설득당한 아부 다하브는 종교적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철수하였다. (6월 18일) 갑작스러운 전개에 다마스쿠스 주민들도 놀라 어리둥절하였고, 이러한 기가막힌 소식에 자히르는 역시 전의를 잃고 이틀 후 시돈에서 철수하였다. 홈스로 피신했다가 6월 26일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우스만 파샤는 우선 자히르가 포위한 자라르 가문의 사누르를 구원하고 가자와 라믈라를 회복하였다. 한편 전열을 가다듬은 자히르는 더이상 이집트 측에 기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여 8월 자파를 점령, 물타짐 아흐마드 베이 투칸을 축출하고 요새화함과 동시에 수비대 2천을 주둔시켰다. 이에 우스만 파샤는 자파를 공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고 다마스쿠스로 회군하였다.
3.6.1. 훌라 호수 전투
훌라 호수. 갈릴리 호 북쪽 요단강 상류에 위치한다.
그후 자히르는 8월 말까지 자파에 머물며 기존에 자신과 대립하던 자라르 가문과 나블루스의 투칸 가문[6]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그동안 다마스쿠스의 우스만 파샤는 아들 다르위쉬 파샤 및 무함마드 파샤, 레바논 산지의 유수프 시하브를 소환한 후 1만 대군을 이끌고 8월 말엽 훌라 호수로 진군하였다. 그의 부관들 중에는 포르테에서 파견한 아나톨리아 출신 와지르 2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스만 파샤의 동맹들이 합세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한 자히르는 아들들과 함께 8월 30일 아크레에서 출정하여 셰이크 나시프의 대규모 기병대와 합류한 후, 티베리아스를 향해 진군하여 훌라 호숫가에 당도하였다. 9월 2일 새벽, 전투가 시작되자 4명의 야전 사령관 중 하나인 자히르의 아들 알리가 우스만 파샤의 진영을 맹렬히 공격하였고 나시프의 기병대를 포함한 나머지 병력은 서쪽에서부터 포위해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일격에 당황한 우스만 파샤는 포위를 피하기 위해 동쪽 요단강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무질서한 철수 도중 다마스쿠스 병력 도중 상당수가 강에 빠져 익사하였고, 500명 미만이 생존하였다. 우스만 파샤 역시 익사할 뻔 했다가 한 병사에게 구원되었고 다마스쿠스에 당도하였을 때에 그를 따르는 병사는 고작 3명 뿐이었다. 훌라 호수 전투는 자히르에게 있어 결정적인 승리였고, 그는 전리품과 함께 아크레로 개선하였다. 그 주민들 뿐만 아니라 승리한 자히르의 군대가 티베리아스에서 아크레로 행진하는 동안 여정에 놓인 요새 마을들에서도 축포를 쏘며 축하를 전하였으며, 아크레 항에 정박한 프랑스 상선들로부터도 축하를 받았다. 한편 이에 고무된 이집트의 알리 베이 역시 시리아 원정을 재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7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집중하느라 시리아 지역에 신경쓸 수 없었다.
3.6.2. 나바티예 전투와 시돈 점령
승리 후 자히르는 시돈의 다르위쉬 파샤에게 도시에서 퇴거를 명하였고, 10월 13일 그는 순응하였다. 하지만 이틀 후 다르위쉬 파샤는 레바논 산지의 유수프 시하브의 원군과 함께 돌아왔고, 이에 자히르는 나시프와 함께 유수프에 맞서기 위해 북상하였다. 유수프 역시 3만 7천 대군을 모아 남하하였고, 양측은 10월 20일 시돈 동남쪽 나바티예에서 격돌하였다. 자히르 진영의 메타왈리 기병대는 거짓 패배 전술로 유수프의 군대를 유인하였고, 이내 나머지 군대가 포위해 섬멸하였다. 유수프는 본거지 데이르 알 카마르로 패주하였고, 그가 시돈에 남겨둔 알리 줌블라트 휘하 3천의 드루즈 수비대 역시 패전보를 접하자 다르위쉬 파샤와 함께 철수하였다. 이로써 10월 23일 자히르와 나시프는 시돈에 입성하였다. 한편 그 전날 포르테는 우스만 파샤, 다르위쉬 파샤, 무함마드 파샤 모두를 해임하고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아사드 파샤의 아들 무함마드 파샤 알 아즘을 임명하였다.모든 위험이 제거된 후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 농경 지대의 중심 나블루스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자히르는 자파-나블루스 사이의 목화 지대인 툴크람을 점령, 투칸 가문의 해안 접근을 차단한 후 동진하였다. 이에 투칸 가문의 무스타파 파샤는 나블루스의 방어를 강화하였고 1만 2천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다. 1771년 말엽 나블루스를 포위한 자히르는 9일간의 크고 작은 전투 끝에 소모적인 무승부를 피하기 위해 철수하였고, 도중 다마스쿠스와 나블루스 간의 도로를 차단하고 (소작농 수비대들의 고향인) 인근 마을들과 후자에서 떠난 카라반을 약탈하여 경제적으로 보복하였다. 분노한 투칸 가문은 더욱 오스만 제국에 대한 충성을 강화하며 자히르에 맞섰다. 비록 나블루스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1771년 말엽 자히르는 시돈 ~ 자파에 이르는 해안과 갈릴리를 지배하였고 골란 고원 너머의 하우란 평원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3.7. 러시아와 동맹
러시아 함대의 레반트 개입
자히르의 성공에 고무되어 반란에 박차를 가하기로 한 이집트의 알리 베이는 1771년 12월 2일 러시아와 대 오스만 동맹을 맺고자 그 지중해 함대 제독인 오랄로프에게 아르메니아인 야쿠브를 파견하였다. 러시아 조정은 오스만 제국을 배후에서 흔들 수 있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하지만 그리스인 리조 휘하 15척의 함대가 다미에타에 당도했을 무렵 이미 알리 베이는 오스만 측으로 전향한 부관 아부 다하브와의 내분에서 패하고 아크레의 자히르에게로 망명한 상태였다. (1772년 5월) 그후 리조는 팔레스타인 해안에서 알리 베이를 찾아 나섰고, 6월 3일 아크레에서 그와 조우할 수 있었다. 알리 베이가 이집트에서 축출될 무렵 오스만 제국의 반격 역시 시작되었다. 나블루스의 무함마드 파샤 투칸이 자파를 점령하였고, 유수프 시하브는 이전 총독 다르위쉬 파샤와 함께 3만 대군을 동원하여 6천의 수비대가 배치된 시돈을 포위하였다. 자히르의 요청에 리조의 러시아 함대는 시돈의 포위망을 폭격하였고, 이에 유수프는 곧 철수하였다. 그후 (5월 30일 성사된 휴전에 무지하던) 리조는 유수프의 해안 거점인 베이루트를 5일간 폭격, 6월 23일에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하였다. 러시아 군대는 5일 후 유수프의 배상금 납부 및 4달간 알리 베이-러시아 동맹에 가담하겠다는 약속 후 철수하였다.
베이루트를 되찾은 유수프는 약속과 달리 오스만 조의 시리아 사령관 우스만 파샤 알 와킬에게 베이루트의 방어력 보강을 의뢰하였고, 이에 그는 알리 베이를 배신한 제자르 파샤를 도시의 무하피즈 (수비대장)으로 삼아 마그레브 병력과 함께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내 제자르 파샤가 자립을 시도하며 유수프와 대립하였고, 전자에게 패배한 유수프는 기존의 적수 자히르에 동맹을 청하였다. 흔쾌히 이를 수락한 자히르는 재차 러시아 함대의 도움을 받아 유수프는 베이루트, 자신은 자파를 되찾고자 하였다. 1772년 여름 자히르는 메타왈리 동맹군 및 알리 베이와 함께 자파를 포위하였고, 9월엔 러시아 수송선이 포위망에 당도해 화기를 보급하였다. 하지만 포위는 장기화되었고, 이듬달 수송선은 자히르의 지원 요청과 함께 오랄로프 제독에게 귀환하였다. 따라서 그해 11월 파타이오티 알렉시아노 휘하의 함대가 자파에 당도, 도시를 폭격하였다.[7] 마침내 1773년 봄, 자히르는 9개월간의 포위 끝에 폐허로 변한 자파를 재점령할 수 있었다. 이무렵 자히르는 기존의 베네치아와 프랑스 대신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화기 수입에 나섰다.
한편 이집트 수복에 있어 러시아의 지원 약속을 받아낸 알리 베이는 아부 다하브 정권에 내분이 생겼다는 소문에 고무되었다. 마침내 1773년 4월, 이전 달에 러시아 지원이 곧 당도할 것이라는 다짐에도 알리 베이는 소수의 병력만을 지니고 카이로로 진격하였으나 도시 부근에서 아부 다하브에게 패하고 투옥된 후 며칠 후 독살되었다. 약속했던 16척의 러시아 함대는 6월 아크레에 당도하였고, 알리 베이의 죽음을 접한 제독 미하일 가브릴로비치 코주코프는 대신 자히르와 우호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7월에 코주코프 휘하 러시아 함대는 자히르의 동맹인 유수프의 요청에 따라 베이루트를 재차 공격하였다. 제자르 파샤의 결사 항전으로 포위는 장기화되었고, 8월 자히르와 유수프는 베카 협곡으로 남하하던 트리폴리 총독의 원군을 격퇴하였다. 이듬달 자히르는 유수프를 응징하기 위해 우스만 파샤 알 와킬이 파견한 토벌군 역시 격파하였다. 마침내 협상에 나선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가 자신을 처형할 것을 두려워하였고, 안전을 보장한 자히르에게 항복하였다. (10월 10일) 그와 8백의 마그레브인 수비대는 아크레로 호송되었고, 협상 끝에 러시아 함대가 회군하며 유수프는 베이루트를 되찾았다.
3.8. 힘의 절정 (1774년)
1774년 자히르의 영토. 베이루트는 시하브 가문과 공동 소유 | 신임 오스만 술탄 압뒬하미트 1세 |
나시프에 이어 유수프까지 레바논 내륙의 동맹들을 확보한 자히르는 마침내 성도 예루살렘을 노렸다. 제자르 파샤의 능력을 눈여겨본 자히르는 그에게 자파-예루살렘의 미리 (핫즈 카라반의 세금) 징수를 맡겨 후자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미 오스만 측으로의 전향을 결심한 제자르 파샤는 예루살렘의 산작베이 이브라힘 파샤에게 투항하려 하였고, 그가 의심하며 거절하자 다마스쿠스로 향해 우스만 파샤 알 와킬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로써 예루살렘에 대한 자히르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한편 1774년 오스만령 시리아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우스만 파샤 알 미스리는 자히르와의 충돌을 피하고 우호를 맺고자 하였다. 그는 포르테에 자히르가 세금을 납부하는 한 그를 공식적으로 시돈 총독에 봉하도록 설득하였고 2월엔 그를 '시돈-나블루스-가자-라므라-자파-아즐룬의 총독'으로 선포하였다. (다만 후자는 포르테가 승인하지 않음) 어찌됐든 시돈 총독으로 인정받은 자히르는 베이루트 ~ 가자의 해안과 자발 아밀, 하우란을 영향력 하에 두었다. 한편 같은해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으로 러시아와 휴전한 오스만 제국은 아랍권에 신경 쓸 여력이 생겼다.
앞서 살펴보았듯 1750년대 들어 자히르는 형제들과 아들들 등 친족들에게 갈릴리 일대의 영지를 나누어주었다. 특히 큰형 사드의 암살 이후 자히르의 아들들이 주요 영주들로 부상하였다. 1770년대 초엽 기준 장남 살리비는 티베리아스, 차남 알리는 사파드, 삼남 우스만은 카프르 칸나에 이어 셰파 아므르, 5남 아흐마드는 사푸리야 및 데이르 한나, 막내 (8남) 압바스는 나사렛을 영유하였다. 그들은 갈릴리의 목화를 아크레에 모아 지중해 각지에 판매하는 자이다니 가문의 주요 사업에 있어 안정적인 버팀목이었다. 그러던 1773년 알리 베이의 이집트 수복 시도에 종군한 살리비가 전사하자 막내 아흐마드가 티베리아스를 이어받았고, 뒤이어 요르단의 아즐룬 및 살트를 점령하였다. 그외에 자히르의 조카이자 사위인 카림 알 아이유비는 새로 편입된 자파 및 가자에 봉해졌고, 1735년부터 자히르를 따른 마그레브 용병대 사령관 아흐마드 아가 앗 딘키즐리는 시돈의 물타짐으로 임명되었다. (1774년) 한편 총애하던 살리비의 죽음은 80이 다 되어가던 자히르에게 비통함을 가져다주었다.
자히르는 통치에 있어 무답비르 (조정자)와 와지르 (재상)을 두어 재정과 외교에 있어 보조로 삼았다. 그들은 모두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출신이었는데, 유수프 알 아르카쉬에 이어 1749년에 유수프 카시스가 선임되었다. 한편 수십년간 자히르의 주치의였던 그리스 정교도 술레이만 수완은 1757년 중병 치료에 실패한 후 유수프 카시스에 의해 후자의 친구이자 같은 멜키트파인 이브라힘 사바그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760년대 초엽 유수프 카시스가 몰타와의 밀수 혐의로 체포되자 이브라힘 사바그가 그를 대체하였다.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이브라힘은 자히르의 정치 고문이자 최고 정무관, 유럽 상인들 및 오스만 지방/중앙 관리들에 대한 수석 대표 역할을 맡았고 노쇠해가는 자히르를 대신하여 내각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를 부친과 자신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 장애물로 여긴 자히르의 아들들은 적대감을 드러내었지만, 자히르의 목화 독점을 포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브라힘에 직접적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자히르의 대리인 역할 외에 이브라힘 사바그는 개인적으로도 목화와 다른 상품 작물들을 현지 농부들에게서 구매한 후, 시리아 해안의 유럽 상인들과 다미에타의 멜키트 동지들에게 판매하는 사업을 통해 레반트 해안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3.9. 제국의 역습
자히르에 우호적이던 우마르 파샤 알 미스리는 1774년 여름 해임되었고, 무함마드 파샤 알 아즘이 재차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전임자에 의해 시돈 총독위를 얻은 자히르의 지위는 위태로워졌지만, 다행히 무함마드 파샤 역시 아크레와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1775년 4월 그는 포르테로부터 자히르의 사면을 얻어내었다. 그러나 시돈 총독위는 거부되었고, 1774년 말부터 벌어진 자히르와 사파드 태수인 아들 알리 간의 내분은 자이다니 가문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자히르는 티베리아스 태수인 다른 아들 아흐마드의 도움으로 알리를 격파하였지만, 또다른 아들 사이드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에 맞서기 위해 자히르는 아크레에서 3백의 민병대 조직하였고, 동시에 알리는 뇌물을 통해 자히르 휘하 마그레브 용병들의 이탈을 유도하였다.3.9.1. 아부 다하브의 침공
그러던 1775년 포르테에게서 자히르 토벌의 명령을 받은 이집트의 아부 다하브는 가자를 지나 북상, 5월 20일 자파를 점령하고 그 남성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참극이 전해지자 아크레에선 일대 혼란이 벌어졌고,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칸 알 이프란즈 (프랑스 상관)에 귀중품을 맡기고 도주하였다. 혼란이 이어지자 5월 24일 자히르 역시 아크레를 떠나 시돈으로 향하였고, 그곳에 입성한 후 총독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아부 다하브의 군대가 다가오자 알리에게 매수된 마그레브 군단이 자히르를 버리고 도시를 약탈하였다. 그들이 해상으로 시돈을 점령하려 하자 자히르는 자발 아밀의 메타와니 동맹에게로 피신하였다. 자히르의 아들들은 아부 다하브와 휴전을 맺으려 하였는데, 후자가 병에 걸린 후 6월 10일 아크레에서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주군을 잃고 혼란에 빠진 이집트 군대는 붕괴하여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이틀 후 복귀한 자히르는 부관 앗 딘키즐리의 도움으로 질서를 회복하였다.3.9.2. 하산 파샤의 아크레 봉쇄
포격전이 벌어진 아크레의 해안 성벽
다만 아부 다하브의 죽음도 포르테의 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시돈은 오스만 조의 수중에 남았다. 4월 23일 이미 아크레 봉쇄의 목적으로 오스만 해군 제독 하산 파샤 알 자자이리 휘하의 함대가 파견된 상태였다. 1773년부터 근대화에 들어간 오스만 함대는 8월 7일 하이파에 당도하였고, 자히르의 사위 카림 알 아이유비로부터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자파를 손쉽게 점령하였다. 그후 하산 퍄샤는 자히르에게 최종 권고로써 그가 1768년부터 포르테에 체납한 미리의 납부를 요구하였고, 이에 자히르는 선불 50만 피아스터를 납부하고 '백성들을 살려주는 것으로' 하산 파샤에 개인적으로 5만 피아스터를 추가 제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산 파샤는 이를 수용하였으나 곧 자히르 진영 내의 재무관 이브라힘 사바그와 일선 사령관 앗 딘키즐리 간의 분쟁으로 납부가 진연되었다. 납부에 반대하던 사바그는 국고에 충분한 금액이 없으며, 싸우면 이길 수 있다며 자히르에게 공격을 권하였다. 반면 앗 딘키즐리는 대규모 살상을 면할 수 있다며 자히르에게 납부를 압박하였고, 그가 지불할 수 없다면 사바그에게 강제할 것을 조언하였다.
3.9.3. 협상 결렬과 죽음
협상이 지연된 것에 분노한 하산 파샤는 자히르에게 미리 체납금의 전액 납부를 요구하였고, 지시에 불응할 시에 처형될 것이라며 압박하였다. 모욕에 가까운 요구에 분노한 자히르는 하산 파샤에게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의 전 함대를 파괴하겠다며 협박하였다. 이에 하산 파샤가 아크레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자 자히르 역시 마그레브인 포병들에게 대응 포격을 지시하여 두 척의 오스만 함선을 파손시켰다.[8] 다음날 오스만 함대는 아크레에 대해 약 7천 발의 폭격을 가하였고 아크레 수비대는 앗 딘키즐리의 제지로 반격하지 않았다. 부관의 배신을 알아차린 자히르는 8월 21 혹은 22일에 도주를 시도, 성문을 나섰으나 오스만 군의 총격에 직면하였다. 목에 총알이 관통하여 낙마한 자히르를 한 마그레브 병사가 토막내었고, 그의 잘린 머리는 코스탄티니예로 보내졌다. 아크레는 점령되었고, 사바그와 자히르의 아들 압바스 & 살리흐는 사로잡혔다. 포르테는 자히르 가문과 사바그의 재산을 압류하였는데, 그 가치는 무려 415만 피아스터에 이르렀다고 한다.4. 사후
자이다니 가문의 가계도. | 후손이 그린 상상화. 아크레의 자히르 |
자히르의 사후 그의 일당은 코스탄티니예에 감금되었는데, 그중 명의로 유명했던 자히르의 외과의는 술탄 셀림 3세에게 소환되어 그의 부인을 치료한 후 훈장을 받곤 석방되었다. 자히르의 은혜를 잊지 않은 외과의는 관료들 사이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히르의 자녀들과 손자들의 석방 및 그들의 귀향을 주선하였다. 한편 사바그는 하산 파샤에 의해 처형되었고, 배신한 앗 딘키즐리는 보상으로 가자의 산작베이로 봉해졌으나 임지로 향하던 중 사망하였다. (하산 파샤의 독살로 추정됨) 그의 아들 우스만, 아흐마드, 사이드, 알리는 저항을 이어갔다. 특히 알리는 데이르 한나 성채를 기반으로 가장 오래 버텼으나 결국 성채는 하산 파샤와 제자르 파샤의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1776년 7월 22일) 알리는 도주하였으나 그해 말엽 티베리아스와 사파드 사이의 지역에서 살해되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자히르의 아들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죽었다. 그중 압바스는 셀림 3세에 의해 사파드의 셰이크로 봉해졌으나 1799년 나폴레옹의 팔레스타인 침공 후 동생 살리흐와 사파드를 떠나 철수하는 프랑스 군을 따라갔다. 이로써 한세기에 걸친 갈릴리에 대한 자이다니 가문의 영향력이 종식되었다.
자히르의 통치는 갈릴리 지방의 풍경을 급변시켜 놓았다. 아크레의 재건 및 재요새화와 그 부속 항구 하이파의 설립으로 일대와 지중해권과의 관계는 강화되었다. 자히르의 사후 아크레를 장악한 제자르 파샤는 그의 목화 독점을 이어갔고, 갈릴리의 경제는 거의 그에 의존하였다. 갈릴리 지방은 19세기 전반까지 번영을 이어갔으나, 19세기 초중반 미국 남부의 목화 재재가 본격화 됨과 함께 팔레스타인 해안으로 몰려들던 유럽 상인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상품작물에 특화된 농경지 때문에 정작 곡물이 부족해진 갈릴리의 경제는 급격한 쇠락을 겪었고, 다시 회생하지 못하였다. 목화 작물과 함께 여러 마을들이 버려졌고, 농민들은 영세 농업으로 선회하였다. 19세기 말엽 팔레스타인 탐사 재단의 클라우드 레이니어 콘더는 오스만 제국이 효과적으로 '한때 사실상 그들 스스로가 주인이던' 팔레스타인 토착 호족 가문들을 무너뜨린 끝에 '그들은 너무 피폐해져서 어떠한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그중엔 자부하는 자히르 세력이 있었으며 여전히 큰 존경을 받았지만 무력하고 가난하였다고 한다.
현재 자이다니 가문은 요르단의 방계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스라엘령 나사렛, 하이파 등 갈릴리 일대에 거주하고 있으며 자히르를 기리는 '앗 자와히라' 혹은 '다와흐리'를 성으로 쓰고 있다. 나사렛에서 그들은 파훔, 주비, 오날라스 가문들과 함께 전통적인 엘리트 무슬림 가문들 중 하나에 속한다. 그외에 그들은 비이나와 카프르 만다와 같은 곳에 거주하며, 1948년 중동 전쟁의 참화 전에는 앗 다문에도 집성촌이 있었다. 현재 이스라엘 북부의 여러 마을들에서도 특히 자히르와 그 가문이 건축 유산을 남긴 곳들에서는 자히르를 매우 높게 여긴다. 한편 이브라힘 사바그의 6대손인 칼 사바그는 (시오니스트들을 피해 부친이 이민 간) 영국에서 작가 겸 사학자가 되어 팔레스타인 역사의 진상 규명에 힘쓰고 있다.
여담으로 미국의 유명 패션 모델 지지 하디드와 벨라 하디드 역시 자히르 알 우마르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지 하디드와 벨라 하디드의 아버지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부동산 재벌 무함마드 하디드이다.
5. 정책과 평가
수중에 금을 지닌 노파가 공포나 위협 없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ㅡ 전기 작가 미하일 삽바그, 자히르 통치기의 안정에 대해 서술하며
ㅡ 전기 작가 미하일 삽바그, 자히르 통치기의 안정에 대해 서술하며
전기 작가 아흐마드 하산 주다에 의하면 영토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 자히르가 추구한 정책은 크게 안보와 정의로 요약될 수 있다. 자히르의 통합 이전, 17세기 말엽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갈릴리 지방은 각종 도적들과 베두인들의 약탈과 협박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다. 그렇게 궁핍한 상황에서도 오스만 지방관들은 미리를 부과하는 등 농민들에 대한 배려 대신 가렴주구만 일삼았다. 더이상 세금을 낼 수 없게 된 농민들은 미납 시의 처벌을 피하고 안전을 찾아 농촌 마을을 떠나 대도시나 사막으로 향하였다. 따라서 농지가 버려지는 등 1차 산업이 흔들렸고, 지역 경제 역시 위축되어 물타짐들은 할당량을 부과하지 못하였다. 농업과 함께 상업 역시 베두인들의 위협으로 교통망이 불안해진 탓에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746년까지 일대를 통합한 자히르는 베두인들을 회유, 협박하여 더이상 농촌과 상단을 약탈하지 못하게 하였고 촌락의 셰이크들에게 안전을 약속함과 동시에 도둑질을 당한 사람에 대한 배상을 지시하였다.
18세기 중반의 평화기는 갈릴리 지역 경제의 번영과 안정을 이룩하였고, 이를 전해들은 오스만 제국 내의 타지역 사람들이 이주해 올 정도였다. 비록 자히르와 현지 가문들 및 아들들 간의 분란은 있었지만 짧은 시기에 그쳤고 외부 세력의 침공은 1770년대 전까지 없었다. 역사가 토마스 필립은 그를 '비교적 공정하고 상당히 공평한' 지도자로 묘사하였다. 1737년 갈릴리를 방문한 리처드 포코크는 현지인들이 위대한 행정가 자히르에 대한 큰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고 묘사하여 치세 초반부터 그가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군사력으로 정권을 유지했음에도 현지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자히르의 지배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지지하고 동참하였다. 이는 자히르가 아이유브 왕조의 멸망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거의 500년 만에 등장한 아랍 정체성의 군주라는 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농민들을 파멸 수준으로 착취하지 않고, 경제적 요구를 저강한 수준에서 유지하는 좋은 장사 수완을 지니고 있었다
ㅡ 자히르의 농민 정책에 대한 역사가 토마스 필립의 평가
ㅡ 자히르의 농민 정책에 대한 역사가 토마스 필립의 평가
한편 안정을 제공함과 함께 자히르와 그의 현지 관료들은 소농민들의 경작 및 추수를 도움으로써 농산 수출품의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였다. 자히르는 농민들에 대한 대출이 활성화하였고 종자를 무상 배급했으며, 가뭄이나 흉작 시에는 세금을 감해주었다. 이러한 혜택은 기존 농민들은 물론,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한 이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외에 자히르는 농민들이 상인들과의 교역 시에 제대로 대가를 지불하지 못할 경우 대리로 납부해주는 등 '민초들의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동시에 그는 포르테에서 책정한 세금 역시 정기적으로 납부하며 제국과의 관계에 있어 일정 수준의 안정을 확보하였다. 한편 자히르는 아크레를 얻은 후 도시를 쇠락해 가던 어촌에서 비단, 목화, 담배, 밀, 올리브 기름 등 팔레스타인 물산을 유럽으로 수출하는 요새화된 무역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특히 목화에 있어 그는 이브라힘 사바가의 도움으로 기존 유럽 상인들과 현지 지주들 간의 직거래 교역 체계를 종식시키고 스스로 중개상이 되어 해당 작물의 집산과 수출을 독점하였다.
아흐마드 하산 주다에 의하면 자히르의 가격 지정은 현지 농민들과 상인들에 대한 유럽 상인들의 '가격 기만'으로 인한 착취를 방지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손해를 본 유럽 상인들은 코스탄티니예의 프랑스/영국 대사들을 통해 포르테에 불평을 전달하였고, 그 결과 1753년 양측의 교역을 조정하는 공식적인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한편 자히르는 현지 상인들에게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며 상업을 장려하였고, 18세기 후반 갈릴리 지방의 항구들은 현지산 작물 확보에 있어 상호 경쟁하며 번영하였다. 현지 작물에 대한 유럽의 높은 수요는 자히르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고 그의 자치 국가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목화 독점 덕에 그는 1770년대 전부터 시돈 에얄레트의 농촌 지방에 대한 비공식적인 지배력을 지니게 되었고, 관세 취득을 목적으로 시돈과 티레의 프랑스 상선들을 하이파로 유치하려는 노력도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와의 목화 교역을 통해 아크레는 13세기 십자군 시대 이래로 최대의 경제적 호황을 맞았으며, 자히르의 요새화된 수도로 기능하였다.
대부분의 시기 동안 자히르는 그가 통치한 지역의 사회 정치 체계를 존중하였다. 그와 현지 유력자들간의 동맹은 자신이 속한 자이다니 가문을 포함한 여러 유력 가문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강화되었다. 자히르 본인은 5번 결혼하였고 그 부인들은 각각 사르디야 베두인 출신, 다마스쿠스의 종교인 사이드 무함마드의 딸, 비이나 무크타르의 딸, 데이르 알 카시 무크타르의 딸 등이었다. 이러한 정략 결혼들로 자히르는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통치력 및 특정 베두인들과 현지 가문 혹은 도시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었다. 5명의 아내들과 자히르는 8명의 아들 (살리비, 알리, 우스만, 사이드, 아흐마드, 살리흐, 사드 앗 딘, 압바스) 및 알려지지 않은 수의 딸을 두었다. 그의 딸 중 한명은 자신의 조카인 카림 알 아이유비와 결혼시켰다. 1773년, 80대 초반의 자히르는 자녀, 손자, 증손자를 합쳐 272명의 자손을 둔 상태였다.. ! 한편 자히르의 아들들은 각자의 근거지를 영유하였는데, 이는 대부분 각각의 외가에서 유래한 곳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현지의 다양한 동맹들을 두곤 후계자위를 위해 서로, 혹은 부친과 싸움을 벌였다. 비록 대부분의 경우 자히르는 이 반란들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저항시 제거되었던 다른 친족들과 달리 아들들은 항상 용서되었다. 이러한 내분은 그의 몰락의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1787년 유럽인 중에선 최초로 자히르의 자서전을 집필한 콩스탕틴 볼네이는 그의 실패에 있어 세가지 주된 이유를 제시하였다.
1. 내부 결속 및 원칙의 공정함 결핍
2. 아들들에 대한 이른 분봉
3. 가장 중요하게도, 조언자이자 친구인 이브라힘 사바그의 탐욕
5.1. 종교정책
- 유대교, (멜키트/정교회/마론파) 기독교, 드루즈교의 순서
종교 정책에 있어 자히르는 현지의 비주류 종교들에 대해 관용을 유지하였다. 1742년 갈릴리의 인구 증대를 위해 그는 시리아 일대의 유대인들을 초청해 그들이 성스럽게 여기던 티베리아스에 재정착하게 하였다. 한세기 전의 파크르 앗 딘과 마찬가지로 자히르 역시 유대인들을 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로 여겼고 디아스포라로 지중해 곳곳에 네트워크가 있는 그들을 이용해 일대의 경제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감면하였고 가옥과 학교, 시나고그 (유대 회당) 건설을 후원해주는 등 유대 공동체의 성장을 도왔다.
아크레를 수도로 정한 자히르는 도시의 무역과 제조업 증진을 위해 현지 기독교도들의 아크레 정착을 장려하였고, 그 결과 13세기 이래 처음으로 기독교가 아크레의 다수 종교가 되었다. 자히르의 영토는 멜키트 가톨릭과 정교회 기독교도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오스만령 시리아의 많은 기독교도들이 더 나은 일자리 및 교역 기회를 찾아 이주해왔다. 특히 본래 기독교 도시이던 나사렛은 레바논의 마론파와 요르단의 정교도 인구 유입으로 더 큰 기독교 공동체를 지니게 되었고, 1730년과 1741년 자히르는 나사렛 프란치스코회 공동체의 교회 설립을 허가하였고 1754년 이 조치는 기타 그들이 예수의 삶과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곳들로 확대되었다. 또한 그는 정교도들이 나사렛의 파괴된 십자군 시절 교회 자리에 성 가브리엘 성당을 세우도록 허가한 것을 넘어, 1750년에는 그 증축을 후원하였다. 아크레에서는 1750년 마론파의 회중 예배를 위한 성 마리아 성당이 건립되었고, 시내의 기독교도 중 다수를 차지하는 멜키트 가톨릭교도들은 1764년 아크레에서 가장 큰 교회인 성 안드레아 성당을 세웠으며 1765-68년간 그 총대주교의 거처가 되었다.
유대인들과 함께 기독교도들은 유럽 상인들과의 교역 수월화, 다마스쿠스 및 코스탄티니예와의 네트워크, 서비스업 종사 등을 통해 자히르 '셰이크국'의 경제에 기여하였다. 자히르의 특출한 관용을 증명하듯, 그의 사후에도 몇몇 교회들이 세워지긴 했으나 (그를 계승한) 무슬림 통치자들의 보호 하에 세워진 경우는 전무하였다. 자히르는 또한 자발 아밀의 쉬아 농민들과 그 상업 계층 및 셰이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곳의 법과 질서를 관장하면서도 현지 주민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다. 쉬아 공동체는 지대한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자히르의 목화 산업 독점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혜택을 입었다. 중요하게도 자히르는 물힘 시하브와 줌블라트 가문 휘하의 드루즈 세력과의 갈등에 있어 쉬아 셰이크들의 주요 후원자였다.
5.2. 건축물
아크레의 칸 샤와르다 자히르와 그의 가족은 성채, 감시탑, 창고, 칸 (카라반사라이) 등을 세웠다. 이러한 건물들은 갈릴리 지역의 내치와 전반적 안정 개선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현재 이들 중 다수가 방치된 채로 남아있고 이스라엘 문화 보존법의 시야 밖에 놓여있다. 아크레에서 자히르는 십자군 시기 성벽을 재건하였고 기존 십자군/맘루크 시기 건물들을 증축하였다. 그중엔 십자군 시절 프란치스코회 건물을 기반으로 세운 칸 앗 샤와르다와 그에 딸린 부르즈 앗 술탄, 그리고 칸 앗 슈나흐 등의 카라반사라이가 있다. 1758년 그는 알 물라크 모스크를 세웠고 나사렛에는 세라야 정부 건물을 세웠는데, 후자는 1991년까지 행정 치소로 기능하였다.
또한 그는 하이파에 새 도시를 세우고 4개의 성탑과 2개의 문을 지닌 성벽을 둘렀다. 하이파 시내에는 부르즈 앗 살람 성채, 작은 모스크, 관세 건물, 사라야 (관아)를 세웠으나 현존하는 것은 거의 없다. 티베리아스에는 십자군 시절 성채를 활용한 시타델과 알 아마리 사원을 세웠는데, 후자는 자히르가 선호한 흑백 아블라크 양식이 활용되었고 큰 미나렛이 더해졌다.
사푸리야 (세포리스) 성채
티브닌의 시타델 (십자군기 토론 성채)
자히르 치하의 농촌 마을들에도 방어 시설들과 여타 건물들이 지어졌다. 자히르의 형 사드는 데이르 한나에 거대한 성채와 부속 모스크를 세웠고, 이들은 1776년 제자르 파샤의 포위 동안 심하게 파괴되었다. 짓딘에서 자히르는 파괴된 십자군 성채를 재건하며 모스크와 하맘을 덧붙였는데, 모스는 1948년 1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의 마을 점령 시에 파괴되었다. 셰파 아므르에서 자히르의 아들 우스만은 4개의 성탑을 갖춘 거대한 성채를 지었고, 그중 성탑 하나가 현존한다. 다른 아들 아흐마드는 수프리야의 십자군 성채를 재건하였다. 사파드 (제파트) 성채 둘러보기
티브닌과 사파드에서 자히르 혹은 그의 아들 알리는 십자군 시절 성채를 재건하였다. 자히르는 하르바즈 마을 역시 요새화하였는데, 19세기 말엽 마을과 성채 모두 폐허로 변해 있었다. 갈릴리 해의 앗 타브가에서 자히르는 5개의 분수대를 지었고, 그중 하나가 19세기까지 잔존하였는데 갈릴리의 분수대 중 최대 규모였다. 자히르의 동생 유수프는 이빌린에 성채와 모스크를 세웠다. 이빌린 성채는 후에 19세기 갈릴리의 반자치적인 아랍 셰이크 아킬 아가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그에 따라 자히르와 레바논 산지의 드루즈 세력 간의 관계는 복잡하였다. 자히르와 동맹을 맺은 쇼우프의 셰이크 만수르 시하브와 달리 후자의 조카이자 경쟁자인 유수프 시하브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지지를 이어갔다. 유수프와 자히르 간의 갈등에 따라 갈릴리의 드루즈인들은 자이다니 가문과 적대하였다. 갈릴리 드루즈 공동체의 구전 설화에 따르면 자히르 통치기는 억압과 동의어였고, 실제로도 그동안 많은 드루즈 만을들이 파괴되거나 버려졌다. 따라서 이른바 '드루즈 대탈출' (엑소더스)가 발발, 특히 사파드 일대 마을들의 드루즈 공동체는 요단강 너머의 하우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5.3.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선구자?
셰이크 자히르 알 우마르와 그의 활동들에 있어 그는 동방의 아랍인들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특히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를 자신의 신민들의 안녕을 위해 오스만 권력에 맞서 투쟁한 민족 영웅으로 여긴다. 이러한 찬사는 최근 팔레스타인 사회 내에서의 학술적, 문화적, 문학적 르네상스에 투영되었으며 이는 자히르와 그의 유산을 거의 상징적인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러한 재평가는 항상 역사적 목적성에 기인하다기 보다 대체적으로 현재 진행 중인 나크바의 결과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찌됐든 셰이크 자히르는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에 1/4 세기에 걸쳐 자치적인 국가 혹은 알버트 후라니의 표현대로 '작은 왕국'을 세웠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ㅡ 아흐마드 하산 주다의 평가
ㅡ 아흐마드 하산 주다의 평가
자히르 알 우마르는 중동의 여러 역사가들에 의해 무시되곤 한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그의 통치를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전조로 본다. 그러한 학자들 중 한명인 팔레스타인계 영국인 학자 카를 사바그는 '팔레스타인: 사적인 역사'에서 해당 학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자히르는 점진적으로 팔레스타인 역사 서술에 포함되었다. 팔레스타인사에 관한 무라드 무스타파 다바가의 '빌라두나 필라스틴' (1965년)에서 자히르는 '18세기 등장한 가장 위대한 팔레스타인인'으로 일컫어졌다. 이듬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가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는 자히르에 관한 프로그램을 연재하며 그를 오스만 제국주의에 맞선 팔레스타인인 민족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또한 많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외세 지배로부터 아랍을 해방시킨 선구자로 여긴다. 일각에선 이스라엘 건국 이전 팔레스타인에는 주권 국가가 없었다는 것에 대한 자히르의 자치국을 반례로 들기도 한다.
[1] 형들로 사드, 살리흐 아부 다니, 유수프가 있었다[2] 인근 마을과의 분쟁에 처해 있던 현지 셰이크 무함마드 나세르를 도운 대가였다고 함[3] 현재도 레바논의 이스라엘 국경도시이다[4] 한편 전임 총독 아사드 파샤는 총독직에 해임된 것에 대한 복수로 베두인들의 카라반 습격을 선동한 혐의로 크레타로 유배되었다가 선상에서 살해되었다[5] 이미 1764년 핫즈 카라반을 이끌던 우스만 파샤는 알리 베이와 충돌한 적이 있었고, 2년 후 알리 베이가 이집트 총독에게 쫓겨나 가자로 피신해오자 우스만 파샤는 그를 축출하려 한 바 있다[6] 아흐마드 베이의 형인 무스타파 파샤가 1771년 나블루스 물타짐에 봉해지고 미리 (핫즈 세금) 수조권을 받는 등 우스만 파샤의 총애를 받자 불안해지 자라르 가문은 기존에 대립하던 자히르에게 제닌 일대의 길 내주어 나블루스 공격하게 하였다[7] 오기 전에 다미에타 근해에서 두 척의 바르바리 함선 파괴함[8] 혹은 일부로 제대로 조준하지 않은 결과라 한다[9] 이곳도 자히르의 영향력이 미치긴 했지만 그의 아들 알리의 영지였기에 1740년대 자히르의 직접 지배가 미치던 티베리아스로 이주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