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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2대 칼리파 야지드 1세 يزيد بن معاوية | |
<colbgcolor=#C0C0C0><colcolor=#FFF,#FFF> 이름 | 야지드 이븐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 يزيد بن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 |
출생 | 646년 |
시리아 | |
사망 | 683년 11월 11일 (향년 37세) |
우마이야 왕조 후와린 | |
재위 기간 | 우마이야 칼리파 |
680년 4월 ~ 683년 11월 11일 (3년) | |
전임자 | 무아위야 1세 |
후임자 | 무아위야 2세 |
부모 | 아버지 : 무아위야 1세 어머니 : 마이순 빈 바흐달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clearfix]
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2대 칼리파.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 후세인 이븐 알리를 제거하기 위해 카르발라 참극을 단행했다가 이슬람 세계를 결정적으로 분열시켜 2차 피트나를 초래했다.2. 생애
642년에서 649년 사이에 다마스쿠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이며, 어머니는 시리아에서 기독교 아랍인 부족인 칼브 부족장의 딸 마이순이다. 661년 아버지가 칼리파로 옹립된 이래, 그는 아버지의 휘하에서 지휘관을 맡아 동로마 제국과의 여러 전투를 이끌었다. 특히 674년부터 678년까지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진두지휘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메카 순례를 이끌었다.675년 또는 676년, 무아위야는 아들의 칼리파 승계를 감행하기로 했다. 모든 지방의 대표단이 소집된 뒤, 무아위야의 최측근 이븐 알 아티르만은 대표단에게 무아위야의 업적, 신민의 의무, 야지드의 탁월한 자질 등을 설명하며 야지드가 칼리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단은 바스라 귀족 알-아흐나프 이븐 카이스를 제외하고 지지를 표명했다. 무아위야는 몇 차례 거절하다가 거듭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아들의 승계를 공인했다. 압두르 라흐만 빈 아부 바크르, 압둘라 이븐 우마르, 후세인 이븐 알리[1], 압둘라 빈 아즈-주바이르, 압둘라 이븐 아바스[2]가 야지드의 승계에 반발하자, 무아위야는 이들을 각각 불러모아서 설교단 아래에 서서 설교 때 군중이 주목하게 했다. 그들은 굴욕을 당할까 봐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수니파의 주장에 따르면, 무아위야는 야지드에게 후세인 이븐 알리를 학대하지 말고 후한 선물을 베풀어서 감화시키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반면 시아파 측은 그가 야지드에게 후세인이 왕조에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경계하라고 주의를 줬다고 주장한다.
680년 4월 무아위야가 사망하면서 정식으로 칼리파에 취임한 그는 곧 시아파의 도전에 직면했다. 시아파는 야지드가 아닌 후세인 이븐 알리야말로 칼리파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특히 후세인의 아버지 알리의 핵심 지지 세력이었던 이라크 쿠파의 많은 무슬림들은 후세인에게 칼리파에 도전한다면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후세인은 이 말에 혹해 메카에서 출발하여 쿠파로 향했다. 그러나 쿠파에 접근했을 때, 야지드의 부관 우마르 이븐 샤가 이끄는 군대가 후세인 일행을 포위했다. 시아파 기록에 따르면, 후세인에게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남자가 72명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680년 10월 10일, 후세인과 전사들, 그리고 친족들은 모두 피살당했다.(카르발라 참극) 그 후 시아파는 10월 10일을 애도일로 기념하며 매년 아르바인(아슈라)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한편 수니파 측은 후세인 일가족의 피살이 불행한 사건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부 자료는 후세인이 야지드의 칼리파 승격에 반대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며, 야지드가 아니라 이라크 총독 우바이둘라 이븐 지야드가 후세인 암살의 배후라고 주장했다. 반면 다수의 사료는 야지드가 사건의 배후에 있는 게 분명하며, 이 일로 알라가 우마이야 왕조를 심판하고 아바스 왕조의 집권을 용인했다고 밝힌다. 그렇지만 대다수 수니파 측은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사건일 뿐 종교적인 의미는 없다고 주장한다.
후세인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자,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당초 야지드의 집권을 받아들였던 압둘라 빈 앗 주바이르는 친척 후세인의 복수를 위해 궐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후세인의 죽음을 거룩한 순교로 승화시키며 지지 세력을 모았고, 자신이 칼리파 자격이 있음을 선포하고 충성 서약을 받았다. 야지드는 일단 대표단에게 상당한 선물을 딸려서 그에게 보내면서 협상을 제안했지만, 압둘라는 끝내 거부했다. 이에 야지드는 압둘라의 형제이지만 사이가 나빴던 암르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압둘라를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암르는 참패하여 체포된 뒤 곧바로 처형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메디나 주민들은 압둘라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이는 야지드가 정부 수입을 늘리기 위해 토지를 몰수한 것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야지드는 메디나의 유력 인사들을 다마스쿠스로 초대해 막대한 선물을 줘서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들은 메디나로 돌아와서 야지드가 지나치게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며 도시에 거주하는 야지드의 지지자들과 사촌 우스만 이븐 무함마드 이븐 아비 수피안을 추방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야지드는 이븐 우크바가 이끄는 12,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메디나를 공략하게 했다. 메디나인들은 이에 맞섰으나 알하라 전투에서 패배했다. 야지드의 군대는 메디나에 주둔한 뒤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하고 약탈을 자행한후 압둘라를 잡기 위해 메카로 향했다. 이븐 우크바는 메카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고,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 알사쿠니가 지휘권을 넘겨받고 683년 9월 메카를 포위했다. 이후 벌어진 공방전에서, 무슬림의 신성한 사원인 카바에 불이 붙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야지드에 대한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렇듯 내전이
683년 11월 11일, 야지드는
3. 평가
부친 무아위야로부터 정권을 세습받아 왕조를 건립하기 위하여 카르발라 참극을 일으켜 역사적으로 이슬람 무슬림 세계의 결정적 분열을 초래한 인물로써 시아파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문에 마땅히 돌아가야 할 칼리프를 찬탈하고 예언자의 손자 후세인을 죽게 만든 원흉으로써 현재까지도 야지드를 악당의 대명사로 쓸만큼 극렬히 증오하고 있으며, 경건한 수니파 대부분에서도 예언자의 손자를 죽여 피트나를 일으키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엄밀히 말하면 무아위야 1세가 칼리프에 즉위하고 우마이야 세습 왕조를 창건하기로 한 이상 이슬람 제국의 분열은 실질적으로 예정된 것이었지만 무아위야 1세는 적어도 1차 피트나를 수습하여 재위 기간 동안 무슬림 제국을 통합시켰던 반면, 야지드는 예언자의 손자 후세인을 끔살시키까지 해서 피트나를 촉발시켰던데다가 내란을 토벌시키지도 못한채 미처 죽어버렸으니 평가가 영 박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야지드로 초래된 피트나는 이후 우마이야 조의 아브드 알 말리크 대에서야 겨우 평정되어 우마이야 왕조의 세습 체제가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미 무아위야 1세로부터 이어진 직계는 끝난 뒤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