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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 عثمان | |
<colbgcolor=#008000><colcolor=#FFF,#FFF> 이름 | 우스만 이븐 아판 عثمان بن عفان |
출생 | 573/576년 |
헤자즈 타이프 | |
사망 | 656년 6월 17일 (향년 80~83세) |
정통 칼리파 시대 헤자즈 메디나 | |
재위 기간 | 정통 칼리파 |
644년 11월 6일 ~ 656년 6월 17일 (12년) | |
전임자 | 우마르 |
후임자 |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
부모 | 아버지 : 아판 이븐 아비 알 아스 어머니 : 아르와 빈 쿠르야즈 |
종교 | 이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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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 시대의 이슬람 제국 영토.
이슬람의 제3대 정통 칼리파. 무함마드의 사위이다.
2. 우울증을 앓는 메카의 대부호
우스만 이븐 아판은 메카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이자, 메카 최고의 권력집단인 쿠라이시 부족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우마이야 가문 출신의 진정한 최상류 계층이었으며, 20세에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뒤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30세 즈음에는 메카 전역에 '우스만 가니'('부자' 우스만)이라고 불릴 정도의 엄청난 재력가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종종 ‘아름답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미남자로 유명할 만큼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등 심리상으로 불안을 품고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 우스만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데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또 다른 사업에서도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막대한 이익을 취해 메카로 돌아오던 우스만은 심리적으로 약했던 사람답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온갖 사색에 잠기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토록 광할한 우주 앞에서 자신의 존재는 하찮기만 하고, 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압도적인 존재가 있으며 그는 엄청나게 위대한 존재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심리상의 혼란과 불안을 겪으며 메카로 돌아온 우스만은 곧바로 절친한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를 찾아가 자신의 정신적 불안에 대해 털어놓았고, 그러자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사상과 가르침에 대해 설파했으며, 이는 우스만이 품고 있던 고민을 단숨에 풀어주어 우스만은 그 즉시 이슬람을 믿을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속해있던 쿠라이시 부족과 우마이야 가문은 맹렬한 이슬람 반대자들이었고, 따라서 우스만의 개종은 가족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그의 삼촌인 아부 수피안[1]은 무함마드를 반대하는 세력의 총사령관이었고, 우스만의 양아버지는 무함마드를 목졸라 죽이려 했으며,[2] 두 아내는 자신들의 특권을 무너트릴 위험이 있는 이슬람을 믿는 남편을 비판했다. 따라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우스만은 두 아내와 이혼하고, 무함하드의 딸 루카이야와 혼인했으며, 그녀가 죽자 다시 한번 무함마드의 딸인 움 쿨툼과 혼인했다.
3. 최초로 강대한 세력을 지닌 무슬림
거의 최초의 부유하고 거대한 세력을 가진 이의 개종[3]에 이슬람 세력은 크게 환호했다. 그런 환호에 응대하듯 우스만은 그가 지닌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최대 한도로 발휘해 그의 동료들을 지원했는데, 특히 그가 막대하게 지닌 부와 탁월한 출신성분, 상업 활동을 통해 다져진 인맥은 이슬람 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다.한편 메카에서 이슬람에 대한 박해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무함마드는 이슬람 세력을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로 이주시키기로 했으며[4] 이에 필요한 자금 협조와 협상은 거의 전적으로 우스만에 의해 행해졌다. 또한 이 시기 이슬람 세력은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본래부터 가난했던 대다수의 신도나 노예 출신 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부 바크르처럼 부호였던 이들조차 모든 재산을 잃는 등 무슬림들은 기를 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5] 그러나 본래부터 뛰어난 사업 수단을 갖춘 데다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과 좋은 가문 출신으로 다져진 인맥을 보유했던[6] 우스만은 대다수의 무슬림이 몰락했던 이 시기에도 새롭게 도착한 지방에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고 인맥을 확충하며 사업을 확장했으며, 메카로 돌아간 후엔 도피 시절 확충한 사업 기반을 토대로 더욱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모스크 건설, 사막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우물의 공사 및 확보, 군자금 등 이슬람 세력 초창기 우스만의 막대한 자금은 이슬람이 자리잡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4. 결함이 많은 제3대 정통 칼리파
4.1. 개인적인 인품
붕어 직전,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권하는 움마 대표자들의 모습에 분노가 터진 우마르가 세속화된 이슬람의 변질을 막아보고자 구축한 슈라 집단은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과 변혁을 주장한 알리(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보다는 그들 입맛에 맞는 전형적인 부유층인 우스만을 차기 칼리파로 선정했다. 이미 상당한 재산과 권력을 장악한 이슬람 상층부에게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과 변혁을 주장하는 알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고, 이에 비해 유력한 우마이야 가문 출신이자 도피 와중에도 재산을 축적하는 데 힘쓰던 상류층인 우스만이 고위층의 세력 유지를 위해서는 더 좋은 선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다만 이 선택은 시작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우스만은 이슬람이 한창 위기에 빠져 있을 무렵, 악전고투한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와 달리 아내의 병을 이유로 전투에 불참한 적이 있었으며, 이슬람 군대가 패배하자 무함마드를 버리고 전쟁터에서 도망가는 추태를 보인 적조차 있었다. 물론 다시 복귀해 이후 무함마드를 위해 공헌했으나, 이런 우스만의 흑역사는 최초의 남자 무슬림이자 무함마드가 위기에 빠졌을 때 끝까지 그를 보호했으며, 초기 이슬람 시기, 전투 이전 사기 진작을 위해 벌어지던 일기토에서 언제나 대표로 참여하고, 우스만이 도망친 전투에서도 암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무함마드를 호위했던 그의 경쟁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모습과는 비교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더구나 우스만은 무함마드를 버리고 도망친 추태 이후 자식이 사망하는 등 악운을 겪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이슬람의 분열을 막고자 노력한 아부 바크르, 거짓을 말하지 말라며 펄펄 날뛰며 민심을 수습한 우마르[7], 침착하게 무함마드의 유해의 정리 및 뒷수습에 힘쓰던 알리와는 달리
“이제 우리는 어떻게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며 혼란과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였다.이런 점들 때문에 다른 무함마드의 측근들과 우스만 사이엔 무언가 넘지 못할 차이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우스만 자신조차 무함마드의 다른 측근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도 나약하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따라서 우스만은 그것을 벌충하고자 필사적일 정도의 자선 행위와 노예 해방, 기도 및 단식을 행하는 중이었다. 이런 심리적인 불안을 품고 있는 자가 이제 막 팽창하기 시작하고, 국가의 체계를 갖추어야 할 이슬람 세력의 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이런 약점 탓인지 우스만 이븐 아판은 제3대 정통 칼리파 취임과 동시에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 시절부터 이어져온 《꾸란》을 집대성하는 일에 열중했다. 수집된 자료에서 모순되거나 중복되는 부분을 삭제해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 이 책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꾸란》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후 우스만은 더욱 열성적으로 기부, 단식, 기도를 하며 필사적으로 칼리파의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우스만의 취임 시기부터 그를 탐탁지 않아한 사람들은 그가 하나의 판본만을 《꾸란》이라 칭하며 다른 기록들을 멋대로 폐기하는 것을 불쾌해했으며, 그가 세속 군주처럼 군림하려 든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특히 《꾸란》 단일화 작업 역시 우마르가 자신의 딸 하프사 본만을 정본으로 삼아 그외의 《꾸란》을 불사르자 압둘라 빈 마수드 등은 자신이 소지하던 《꾸란》이 진본에 더 가깝다며 반발했다.
4.2. 공과 실이 교차한 경제정책
탁월한 사업가적 수완을 지닌 우스만은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지금까지 대단히 어설프고 기초적이었던 이슬람 세력의 재정 문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8]아부 바크르 시절, 국고가 설치되고 재정 운영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수입은 메디나에 도착하는 순간 곧바로 분배되었고, 우마르 시기 대팽창을 통해 막대한 부가 흘러 들어왔지만 대다수는 자선 활동을 위해 분배되고 남는 수입은 병사들의 봉급을 위해 소모되었다. 결국 우스만 이전까지의 이슬람 세력의 재정 정책은 잉여금 축적을 신경쓰지 않는 자선 집단과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넓어진 제국을 관리할 필요성을 절감한 우스만은 이슬람의 어설픈 재정 상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를 위해 각종 부서를 신설했다. 그 결과 이슬람 세력은 잉여금을 축적해 국가 집단에 걸맞은 재정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으며, 각지에서 필요한 경비를 국고에서 조달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우스만의 정책으로 막대한 잉여금을 적립한 이슬람 세력은 무려 5,000개가 넘는 모스크를 신축하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각지에 운하를 만듬과 동시에 도로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필요하다면 신설했다. 또 농업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우물을 파고, 관개수로를 정비하며, 광대한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다.
반면 지금까지 엄격하게 규제되던 토지 구입은 우스만의 치세 기간에 폐지되어, 반대로 무슬림들에게 토지 매입을 촉구했고, 토지 매입을 원하는 자에겐 국가에서 자금을 융통해주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 정책은 훗날 역사가들이 기록한 초기 이슬람 유력자들이 지닌 전설적인 부의 초석이 되었다. 또 태생적으로 부호였던 우스만의 재정 감각은 무척 검소했던 전임자들에 비해 방만할 수밖에 없었으니, 과거 적절하게 통제되던 관료들의 봉급들은 우스만 시대를 거치며 급격히 늘어났다.
특히 우스만은 그가 총애하는 이들에게는 막대한 사사금을 하사하기를 즐겼으며, 자신과 주요 세력을 위한 궁궐 축조에도 열을 올렸다.
4.3. 존경받지 못하는 칼리파
문제는 우스만이 자주 혈족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그의 씨족인 우마이야 가문은 막대한 하사금과 갖은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불렸다. 그 결과 우마이야 가문의 세력은 이슬람 세계의 균형을 무너트릴 만큼 과도하게 팽창했고, 특히 우스만의 총애를 받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본래 그가 소유하던 시리아의 영지 이외에도 유프라테스 강 상류를 비롯한 영지를 하사받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한편 세입이 크게 늘어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수탈이 행해질 수밖에 없었고, 지방 총독들은 점차 민중을 수탈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스만의 경제정책에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특히 이집트의 총독인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우스만의 정책을 가장 단호히 반대했는데, 그러자 우스만은 아므르를 면직시키고, 그의 친족인 압둘라를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했다. 압둘라는 이집트에서의 세수액을 두 배로 증가시키며 우스만을 우쭐거리게 만들었으나 이는 아므르의 말처럼
"어미 낙타의 새끼를 굶겨가며, 어미 낙타에게서 우유를 짜내고 있는 것이다."
였으며,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가 그토록 걱정했던 이슬람의 세속화와 경제적 부패 및 압제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또 우스만의 우마이야 친족 총애 현상 및 방만한 재정 감각은 그의 선임자인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 하다못해 그의 라이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검소한 모습과 큰 차이가 있었고, 그 결과 우스만은 다른 네 명과 달리 이슬람 공동체, 즉 움마 내부에서 타의 모범으로 존경받지 못했다. 이렇듯 칼리파가 모범이 되지 못하자 고위층은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 폭넓게 통용되던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양식을 따르지 않기 시작했고, 반대로 그런 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대다수의 인원들은 이런 차이와 차별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런 불만은 그들에게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칼리파 우스만의 행위가 초기 이슬람이 그토록 비판하고 반대하던 전형적인 세속 군주의 모습을 띠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반대와 혐오, 분노 및 은연히 낮춰보는 시선도 생겨나게 되었다.
5. 예정된 파멸
지나친 세금에 고통받던 이슬람 제국은 우스만 이븐 아판의 치세 말기에 이미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특히 우스만을 우쭐거리게 만들었던 압둘라가 다스리는 이집트에서는 과도한 세금 부담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압둘라 이븐 사바의 영향을 받아 우마이야 친족주의를 비판했다.이집트의 시민들은 압둘라를 해임하고, 새로운 총독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칼리파 우스만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전승에 따라서는 이집트인들의 행동을 칼리파의 직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불쾌해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전승이 진실인가 보다도 우마이야 친족을 우대하던 우스만의 성향상 압둘라의 해임 요구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음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이 요구를 수락하는 것은 그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기에 쉽사리 수락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압둘라의 압제를 견디다 못 한 이집트 시민들은 그들의 대표를 칼리파 우스만에게 보내 직접 청원하기로 했다.
그러자 당황한 우스만은 당시 이슬람 공동체에서 폭넓은 존경과 영향력을 행사하던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부탁했으나, 이전부터 우스만의 행위를 좋게 보지 않은 알리는 우스만의 요청을 거부했다.[9] 결국 우스만은 마지못해 이집트의 사절단을 만나게 되었다.
표면상 이 접견은 우스만이 탄원인들에게 이집트의 총독 교체를 약속하며 화기애애하게 이루어졌지만, 사실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았다고 여겨 은연중에 불쾌해하던 우스만은 남몰래 이집트 총독 압둘라에게 지금 돌아가는 사절단을 모조리 처형할 것을 명령하는 서신을 보냈다.[10] 그러나 서신을 운반하던 노예는 귀향하던 이집트 사절단에게 붙잡혔고, 칼리파 우스만이 자신들을 속였음을 알고 난 이후 크게 격노했다.
분노한 이집트의 사절들은 폭도로 변해 우스만과 대치했으나, 우스만이 사정을 설명하며 혐의를 부인하자 다소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우스만에게 이집트 총독 압둘라에게 서신을 보낸 유력한 후보자인 마르완[11]과의 대면을 요구했다. 그러나 친족을 아끼던 우스만은 마르완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집트 사절단과 마르완의 대면을 거부했고, 이에 분노한 사절들은 우스만은 더 이상 칼리파의 자질이 없다며 더 나은 사람(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에게 칼리파 직위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우스만이 진노해
“나의 의무는 신에 대한 것이니 폭도의 명령으로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라는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서는 회담을 끝내버렸으나, 분노한 이집트 사절단에게 그런 말이 통용될 리도 없어 결국 폭도로 돌변한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5.1. 죽음
무슬림의 손으로 죽음을 맞은 첫 번째 칼리파[12]
656년 6월 18일 한 이집트 주둔 병사가 우스만의 집에 들어가 《쿠란》을 읽고 있던 우스만에게 칼을 휘둘렀다. 곁에 있던 우스만의 부인 나일라가 손으로 막았으나 손가락이 잘렸고, 우스만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이슬람 안식일인 금요일에 벌어진 참극이었으며, 이 사건은 이슬람의 장대한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제1차 피트나의 시발점이 되었다. [1] 훗날 우마이야 왕조를 창설하는 무아위야 (1세) 이븐 아비 수피얀의 아버지이다. 아부 수피안 부자는 무함마드의 메카 입성 이후에야 이슬람으로 개종했다.[2] 이 시도는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에 의해 저지된다.[3] 무함마드의 첫 번째 아내 하디자는 부호였으나 개종 이후 사업상에 어려움을 겪었고, 아부 바크르 역시 부호이긴 했으나 무지막지한 대부호는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이슬람으로 개종한 노예들을 해방하는 데 막대한 재산을 소비했다. 그에 비해 우스만은 메카에서 압도적인 부를 소유한 것으로 유명했다.[4] 이 계획 자체는 실패하게 된다.[5] 메카에서 이주한 세력 대다수는 상업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으나 그들이 이주했던 지역은 농업을 중심으로 했던 것이 그들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6] 다른 이들은 메카와의 연락이 사실상 끊겼지만, 워낙 좋은 우마이야 집안 출신에 막대한 부와 상류층에 탄탄한 인맥을 지녔던 우스만은 여전히 메카의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업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7] 그러나 정말로 무함마드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서는 눈물을 흘렸다.[8] 기본적으로 이슬람이 일어난 아라비아 반도는 오래 전부터 부족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 중앙정부를 지닌 국가가 존재하질 읺았으니 이슬람 세력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까지 쓰러뜨릴 정도로 강력해졌어도 자기가 일으킨 거대 제국을 통치할 역량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9] 다만 이 행위가 차후 제4대 정통 칼리파가 된 알리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알리가 우스만의 요청을 거부한 것은 다 우스만의 암살을 위한 초석이라고 주장한 우마이야 가문과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얀이 알리 반대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10] 혹은 우스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우마이야 친족 중 한 명이 보냈다는 전승도 있다. 이 경우 이미 우스만은 실권을 잃었으며 그가 우대한 쿠라이시 부족, 특히 우마이야 가문이 이미 이슬람 세력을 자신들이 장악한 세속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우스만 이후 쿠라이시 부족이 아닌 누가 칼리파에 선출되더라도 이슬람의 분열은 필연이었다.[11] 칼리파 우스만의 친족이자, 당시 시리아 총독인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얀의 형제였다.[12] 4명의 정통 칼리파 중 자연사한 이는 초대인 아부 바크르 뿐이었다. 제2대 칼리파 우마르 역시 암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기독교도 이란인에 의한 것이었다. 후대인 제4대 칼리파 알리는 우스만과 마찬가지로 카와리지파 무슬림에게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