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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쿠세이르 암라 |
영어 | Quseir Amra | |
프랑스어 | Qusair Amra | |
아랍어 | قصير عمرة | |
국가·위치 | 요르단 아즈라크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5년 | |
등재기준 | (i)[1], (iii)[2], (iv)[3] | |
지정번호 | 327 |
외부 전경
내부 본당의 비키니 여인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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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르단 동북부의 우마이야 왕조 시기 별궁 유적. 쿠사이르 아므라 등으로도 표기된다. 요르단 북부에 흩어져 있는 10여개의 우마이야 별궁 유적들 중 하나로, 더 크게는 시리아 남부 등 레반트 일대에 남아있는 20여개의 '사막 궁전들'의 일부를 이룬다. 왈리드 2세가 건설했으며[4], 이슬람권 유적이라 믿기 힘든 노출 벽화들로 유명하다.2. 상세
창건자인 왈리드 2세
쿠세이르 암라의 '쿠세이르'는 아랍어로 궁전을 뜻하는 카스르의 축소형이다. 즉, 쿠세이르는 작은 궁전 혹은 별궁이다.[5] 와디 바툼 근처에 지어졌고, 군사 주둔지이기도 했다. 다른 별궁들보다 특별히 쿠세이르 암라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내부에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들 때문이다. 우상 숭배를 금하는 이슬람권의 공식 예술에서 인간은 물론, 하물며 동물 형상까지 묘사를 꺼리는데, 무려 이슬람 최고 지도자인 칼리파의 궁전에서 여성의 반나체 그림이 발견되어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우마이야 조가 아직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깊게 남은 시리아를 중심지로 삼은 영향으로 평가되며, 3차 피트나 당시 압바스 왕가 등이 주장한 우마이야 조의 사치가 어느정도 사실이었음을 증명한다. 물론, 우마이야 조도 공공 종교 건물인 우마이야 모스크의 경우 이슬람적 허용 범위를 지키는 등 대놓고 방탕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쿠세이르 암라는 대중들의 눈을 피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사막 한복판에 지어진, 칼리파의 사적 향락을 위한 사저이다. 칼리프는 이곳에서 조상들처럼 베두인 본래의 생활양식으로 돌아가 휴식하며 현지 부족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유사시에는 군사 활동의 거점으로 쓸 수 있었다.
레반트 지역에 세워진 우마이야 조의 20여 별궁들 중 쿠세이르 암라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유명한 카스르 엘 무샤타 (Qasr el Mushatta)도 있지만, 여긴 베를린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나마 제리코의 히샴 궁전만이 쿠세이르 암라에 비견될만 하다. 우마이야 조의 멸망 후 현지 베두인들만 알고 있던 쿠세이르 암라는 1898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학자 알로이스 무실 (Alois Musil)이 조사하고 1907년에 발표하며 세계에 알려졌다. 70년대 북원 공사 후 요르단 당국은 인근에 식목 사업을 추진, 저수지를 조성하는 등 사막화로 인한 건물의 풍화 방지에 나서고 있다. 현재 4명의 경비원과 고고학자가 상주한다.
매우 예외적인 초기 이슬람 예술[6]의 대표적인 예시로써 쿠세이르 암라는 페트라와 함께 요르단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다만 무슬림이 다수이고, 무함마드의 후손이 다스리는 요르단 '하심' 왕국에서 쿠세이르 암라는 지나치게 이슬람 가치를 위배하는 문화유산이었기에 페트라나 와디럼에 비해 정부 차원의 홍보가 매우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한국에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고, 암만에서 불과 1세간 거리인데도 단기 여행객은 물론, 요르단에 수년 거주한 사람도 가보지 않은 경우도 있을 정도. 따라서 한국어 여행 후기가 전무한 편이다.
3. 구조
궁전과 북쪽의 성채, 우물
내부 구조도. 좌측이 욕탕, 우측이 알현실이다
궁전은 크게 접견실과 함맘 (욕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맘은 다시 탈의실 (apodyterium), 온탕 (tepidarium)과 열탕 (calidarium), 휴식실 같은 목욕 시설들로 구분된다. 함맘의 물은 양동이가 달린 물방아와 수로를 통해 공급되며, 이는 고대 로마의 목욕탕과 유사한 원리이다. 한편 궁전에 이렇게 정교하고 큰 함맘이 지어진 것은 목욕이 체내의 독소를 빼서 치유한다는 당대의 이슬람 의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4. 벽화
온탕 벽화의 나체 여인 묘사
고전기 세속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우마이야기 초기 이슬람권 예술을 대표하는 내부의 벽화에서는 고전적인 이교도적 주제의 영향, 비잔틴 양식의 묘사와 사냥 장면, 동물과 새의 묘사 등이 두드러지며 그리스어와 아랍어 명문도 발견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기독교 제국이던 동로마에서도 인간의 나체 묘사는 4세기 이후 터부시되어 사라진 상태였는데, 뜻밖에도 기독교 이상으로 보수적이라 여겨지는 이슬람권에서 3세기만에 여성의 나체를 그린 벽화가 그려진 것이다. 유럽에서는 (종교화 외의) 나체 묘사는 15세기 르네상스는 되어야 다시 나타나며, 프레스코 벽화의 정밀한 묘사 역시 8세기의 카스르 암라가 15세기 유럽에 못지 않다.
4.1. 세부
- 여섯 왕들의 벽화
우마이야 조에게 패배한 왕들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이 남아있는 4명은 각각 카이사르 (로마 황제), 호스로 (이란 황제), 로데릭 (서고트 왕), 네구스 (악숨 왕)이다. 1898년 알로이스가 때어내어 본국으로 가져가려 할 때에 일부 훼손되었다.
파일:41086020184_1c8bf98e1c_b.jpg
- 목욕하는 귀족 여인
온탕에 묘사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로마 벽화 양식이다.
- 황도 12궁
열탕 돔 지붕에 그려졌다. 돔에 그린 천궁도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파일:JOR_Qusayr_Amr_JPEG_img-03.jpg
- 인간과 동물들
탈의실 천장에 그려졌다. 현지 기독교도들은 위의 남성이 예수를 묘사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외에 그리스 신화의 재현, 사자에게 쫓기는 사냥꾼 등 여러 벽화들이 내부를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