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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14:44

부르한 샤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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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한 샤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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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러취안 장춘젠 천젠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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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rhan_Shahidi6.jpg
이름부르한 샤히디 (Burhan Shahidi)
Бурхан Шахиди러시아어
Borhan Şähidi타타르어
بۇرھان شەھىدى, برهان شهيدي‎‎위구르어
包尔汉·沙希迪중국어 간체, 包爾漢·沙希迪중국어 번체
출생1894년 10월 3일
러시아 제국 카잔 주
사망1988년 8월 27일 (향년 93세)
신장 위구르 자치구
민족타타르
종교이슬람(수니파)
직업통역사, 교육가, 번역가, 정치가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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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위키백과의 부르한 샤히디 문서

부르한 샤히디는 위구르 현대사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위구르인 조상을 둔 러시아 타타르 무슬림 출신으로 이슬람 모더니즘에 입각하여 중국인들과 위구르인, 러시아인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2. 생애

부르한 샤히디는 오늘날 타타르스탄에 해당하는 러시아 카잔 주의 타타르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 중에는 위구르인의 피도 섞여있었다 한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부르한 샤히디는 어렸을 때 잠깐 학교에 다닌 게 전부였으나 명석한데다가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었다. 1912년 신장성의 디화에서 장사를 하던 다른 타타르족 상인들을 따라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자신의 조상 중에 위구르인이 있다고 주장하여 1914년 중화민국 시민권을 얻었다.[1] 명석했던 부르한 샤히디는 우루무치에서 일하면서 곧 위구르어중국어를 배웠고 신장의 위구르인들을 대상으로 교육 봉사를 하러 온 튀르키예인 교사들과 교류하면서 튀르키예어까지 배웠다고 한다. 러시아어중국어, 튀르키예어, 위구르어가 모두 유창했던 그는 당시 신장성을 지배하던 양쩡신의 군벌정권에서 통역으로 활약했다. 당시 양쩡신 군벌정권은 러시아 제국과 무역이 활발했던 것은 물론 러시아/소련이 쳐들어올까봐 전전긍긍하던 상황이기도 했다.

양쩡신이 암살된 이후 신장성의 지배자로 등극한 진수런위구르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화폐를 일부러 마구 찍어내서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부르한 샤히디의 사업에 차질이 빚어졌다. 샤히디는 재산을 처분한 후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이던 베를린으로 가서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이후 진수런의 폭정에 봉기한 위구르인들이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을 건국하자 신장으로 돌아온 샤히디는 위구르인과 소련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진수런이 실각하고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 건국세력을 포섭한 친소군벌 성스차이는 초반에는 부르한 샤히디를 신임하기도 했으나 1937년 갑자기 부르한 샤히디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매도한 이후 감옥에 감금하였다. 다만 부르한 샤히디가 신장에서 한족과 위구르인 모두에게 인망이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총살만은 면할 수 있었다. 부르한 샤히디 역시 감옥에서 일부러 쑨원의 삼민주의를 위구르어로 번역하면서 자신이 죽으면 아직 당시 공식적으로는 국민당 정권에 속한 성스차이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넣는 수완을 발휘했다.

1944년 성스차이가 신장에서 실각하면서 출소한 부르한 샤히디는 이후 중국국민당에 폭정에 항거하는 카자흐인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위구르인들과 카자흐인들을 대신하여 난징으로 파견된 샤히디는 직접 장개석과 만나 동튀르키스탄 임시 정부의 의견을 직접 전달하였다. 이후 부르한 샤히디는 신장 아카데미와 신장 대학의 총장을 맡으며 위구르인들에게 이슬람 모더니즘에 입각한 현대식 공교육을 보급하는데 힘썼다. 중화민국이 국공내전에서 패전하여 대만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소련은 동튀르키스탄의 공산주의자들을 버리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비교적 중국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던 부르한 샤히디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49년부터 마스우드 사브리로부터 신장 임시정부의 주석 자리를 부르한 샤히디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사실상 항복을 선언하고 신장 성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부주석이던 이사 유수프 알프테킨은 여기에 반발하여 튀르키예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동튀르키스탄 정부 내 여러 소수민족 대표들이 베이징에서 회담을 하기 위해 비행기로 이동하는 와중에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해당 사건과 부르한 샤히디 퇴임 및 또다른 위구르 정치가 율바르스 칸의 대만 망명 이후 사실상 한족들이 신장성의 핵심을 맡게 되었다.

이후 부르한 샤히디는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신장 지역 관련 주요 직책에서 밀려낸 대신 중동 이슬람권과의 외교 임무에 주로 투입되었다. 물론 문화대혁명 당시 이슬람 탄압의 광기에서 부르한 샤히디 역시 자유롭지는 못했다. 외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은 부르한 샤히디는 8년동안 힘든 수감 시기를 보내야 했으며, 출소 이후 명예직과 한직을 전전하며 살았다.

3. 여담

94살까지 살았는데 당시 격변의 현대사를 살던 러시아인이나 중앙아시아인 기준으로 엄청 장수한 편이었다.

중국에 사실상 항복한 일로 논란은 좀 있을지언정 신장 내 다른 타타르인들과 함께 교육 진흥에 노력한 것은 인정받는 분위기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 기준으로 소득 수준은 낮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지역이다.[2]

[1] 당시 중화민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역사왜곡을 통한 소수민족 강제 동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위구르어도 중국어의 방언이라는 억지 주장을 밀어부치던 때였다.[2] 특히 타타르, 우즈베크, 카자흐인들은 중국 내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고 타타르인의 경우 고등교육 통계 자료까지 포함해서 중국 전체에서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