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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6:40

니콜라이 2세/재위 기간 러시아 제국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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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5년 ~ 1914년의 전통주의적 관점에서의 러시아 경제
1.1. 농업
1.1.1. 러시아 농업의 성장1.1.2. 부농과 빈농1.1.3. 러시아 농업의 문제점
1.1.3.1. 낮은 농업 생산성과 지나친 수출1.1.3.2. 낮은 농지 이용률과 목초지 부족
1.1.4. 미르
1.1.4.1. 미르의 순기능과 정부의 영향1.1.4.2. 미르의 역기능과 인구 증가
1.2. 스톨리핀 개혁
1.2.1. 개혁의 준비 과정1.2.2. 개혁의 전개
1.2.2.1. 토지 측량 위원회의 활동1.2.2.2. 농민 지원 사업1.2.2.3. 농민 은행 운영과 국유지 매각1.2.2.4. 농업 기술 지원
1.2.3. 개혁의 결과와 성과1.2.4. 개혁의 한계
1.3. 협동조합 운동
1.3.1. 러시아 협동조합의 탄생과 성장1.3.2. 소비자 · 신용 · 생산자 협동조합의 활동
1.4. 공업
1.4.1. 러시아 산업의 성장1.4.2. 러시아 산업화의 한계1.4.3. 지역별 산업화
1.5. 금융
1.5.1. 금본위제 개혁1.5.2. 외국 자본
1.5.2.1. 외자 유치의 부작용과 허실
1.5.3. 러시아의 수공업
1.5.3.1. 전통 문화 부흥 운동이 수공업에 미친 영향1.5.3.2. 수공업의 생존 전략과 변화1.5.3.3. 분야별, 지역별 수공업
1.5.4. 러시아의 독점 자본주의
1.5.4.1. 독점 기업의 형성과 활동1.5.4.2. 각 분야별 독점 기업
1.6. 인프라
1.6.1. 철도
2. 반론3. 참고 문헌 및 자료

1. 1895년 ~ 1914년의 전통주의적 관점에서의 러시아 경제

1.1. 농업

1.1.1. 러시아 농업의 성장

1861년 농노 해방령 이후 30년간, 러시아 제국의 농업은 크게 성장하기 시작해 러시아 서부, 남서부와 우크라이나, 남부[1]는 물론,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사라토프와 같은 중심 지역에서도 개인 영농을 하는 농민 숫자가 증가했다.[2] 또한 러시아령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 프스코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곡물 재배에서 상품 작물 재배와 유제품 생산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곡물 농업의 중심지가 러시아 남동부, 볼가강 하류 지역, 우크라이나의 초원지역으로 이동했다. 랴잔, 오를로프, 툴라, 니제고로드에서는 축산업이 발달했다.

1880 ~ 90년대에는 농업에 시장 경제가 더 깊게 침투했다. 빈부격차와 농민의 계층화가 심화되고 지주들의 경영 방식이 변화했으며 전문적인 농업 생산이 이뤄지는 농가의 숫자와 생산물 판매가 증가했다. 그리고 부농과 중농들이 성장했다. 이들은 농업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많은 생산물을 시장에 판매했으며 농기계와 비료, 종자, 좋은 육종의 가축을 꾸준하게 구입하여 농기계와 비료에 대한 일정한 수요를 만들었다. 이러한 수요 증가는 비료 · 축산업 · 농기계 공업 등, 다양한 분야가 성장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국가의 경제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1890년대 중엽, 세계시장에서 식량가격의 하락으로 농업생산이 여러 번 감소한 뒤, 농업생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러시아는 농업생산에서 세계에서 1위를 차지했다. 러시아는 세계 호밀의 50%, 밀의 20%, 곡물수출의 25%를 점유했으며 전체 곡물 수확량은 573만 3,000톤(35억 푸트)였다. 제국 정부는 이렇게 생산한 막대한 농산물을 해외 시장에 판매해 산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 외화를 축적했다.

그리고 사탕무, 아마, 기술적 재배, 가축의 수를 비롯한 각종 농업 생산이 빠르게 늘어나고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높은 농업 생산성 성장률을 보였다. 러시아의 지주들은 점진적으로 새로운 기계와 농업 기술을 적용하고 농업 노동자를 대량 고용,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에서 이러한 체제를 갖춘 대장원(에코노미야)이라고 부르는 수천 데샤티나 규모의 대규모 농장들이 나타났다.

1.1.2. 부농과 빈농

농노 해방과 시장 경제의 유입은 러시아의 농촌에 빈부 격차를 만들었다. 20세기 초, 농민의 25%는 토지를 구입, 임대하고 노동력을 고용해서 부유해졌지만, 다른 25%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농업 노동자가 되었다.

부농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기본적으로 양자 모두 대가족을 구성해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고 미르에서 토지를 분배할 때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분배지를 받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노동자를 고용했다. 먼저, 전자는 다른 농민들보다 풍족해서 조세와 상환금 납부가 끝난 겨울철만 되면 식량이 다 떨어져 빵조각(Kusochka. 쿠소치카)을 구하러 다녀야 하던 다른 농민들과 달리 햅곡식(Nov‘. 노브)이 나올 때까지 끼니를 이어갈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4월이면 빈농들처럼 지주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해야 하는 형편으로 상대적인 의미에서 잘 사는 농민들이다.

후자는 많은 노동력과 토지를 이용해 높은 수익을 올리고 선진 농법과 비료, 농기구나 농기계를 도입해 막대한 양의 농산물을 시장에 팔아 부유하게 사는 이들이다. 이들은 농업 외에 고리대금업도 하고 토지 임대, 지주에게 빌린 토지를 잘게 쪼개서 농민들에게 재임대하는 방식으로도 부를 쌓았다. 그리고 미르의 직책을 역임하고 공동체 기금을 유용하거나 뇌물을 받고 토지 재분배 과정에 개입했으며 선술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빈농들은 자기 토지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여러 가지 부업을 겸했다. 일부는 국내 여권을 발급받아 도시로 떠나서 이주 노동자(오트호드니키)로 일하거나 농촌에서 농업 노동자로 일했다. 그리고 사회 풍속상 여성이 도시로 일하는 것은 좋지 않게 보아서 이 시기에는 주로 남성 농민들이 도시로 가서 일했으나, 가계 경제 악화로 인해서 점점 도시로 가서 일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났다. 빈농들은 농사로 쓸 말이 없거나, 1필밖에 없어 농사에 어려움을 겪었고 수확기가 되면 볍씨를 줍거나 부농이나 지주들이 추수하는 것을 도와 품삯을 받았다. 일부 부농도 그랬지마는, 빈농들은 춘궁기에 돈이 부족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주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빈농의 증가와 이들의 생활 여건 악화는 곧바로 민심의 동요와 사회 불안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시와 농촌에서 노동 시장이 만들어져서 부농과 자본가들이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수급할 수 있었다.[3] 만약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자기 토지를 일정하게 소유한 소농들만 존재했다면 고용할만한 인력을 확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는 빈농들이 임금을 받아 소비를 하는 것은 생필품, 소비재에 대한 일정한 수요를 창출했다. 구매력이 나쁜 의미로 증가하는 현상이었지만, 어쨌거나 수요는 증가했다.

다만, 이주 노동자(오트호드니키)들은 국내 여권 갱신이나 농촌의 가족 부양, 토지 경작을 위해 파종기가 되면 농촌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러시아의 자본가들은 추수기가 끝나는 성모제부터 부활절 이전까지는[4] 노동력이 풍족하다가 수확기가 되면 이주 노동자들을 집에 보내주어야 했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상주 노동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빈농들이 도시로 가고 부농이나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것은 러시아의 노동 시장 형성과 안정적인 노동력 수급으로 이어졌지만, 역설적으로 러시아의 산업화와 공업 성장을 제한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도시로 이주한 빈농 출신 노동자들이 농촌에 있을 때 자신들을 괴롭힌 곡물 가격 하락의 혜택을 보았다는 점이다. 1900년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곡가가 하락해서 노동자들은 식비를 줄이고 수월하게 빵을 구했으며 도시에서 계속 버티고 살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곡가의 하락은 러시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에게는 비극이지만, 러시아의 산업화를 견인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희극이었다.[5][6]

또한 레프 트로츠키의 회고록에서도 이 당시 러시아의 빈농출신 국내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7]. 도시에 나와 일자리를 구했던 빈농 청년이 파종기가 되어 고향 마을로 돌아오자, 도시에서의 삶에 흥미를 느낀 마을의 다른 청년들이 그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보았고, 이를 통해 도시의 공장에서 받는 임금이 빈농 청년들로써는 놀라울 정도로 큰 액수임을 알게 되면서 자신들도 도시에 나가 일하고 싶어하게 된 것. 하지만 이를 본 마을의 어른들, 특히 마을 내에서 큰 발언권을 가진 부농(자영농)들은[8] 이것이 '젊은이들이 헛바람이 드는 것' 이라고 여겨 몹시 마땅치 않아하고,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도시에서 일하고 온 청년에게 "하지만 도시에서 살면 먹고 자는 것에 모두 돈을 내야 할 테니 높은 임금은 겉보기에만 그럴싸하지 실제로는 전혀 남은 것이 없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몰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청년은 이에 전혀 밀리지 않고 "물론 먹고 자는 것 모두 돈을 내야 하지만 급료 자체가 시골과는 수준이 다르다"면서 자신이 도시에서 일하면서 상당한 돈을 모았다는 증거로 회중시계를 보여주어[9] 마을 어른들을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이를 통해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빈농 출신 이주노동자는 본래 본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때문에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화폐경제가 확고하게 발달한 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임금소득은 당시 빈농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젊은이들에게 도시로 이주하고 싶은 욕구를 충분히 불러올 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기존 농촌 마을의 사회구조를 해체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기존 농촌 사회에서 큰 발언권과 영향력을 가지던 나이 지긋한 부농 및 유지들은 이런 현상을 몹시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이들의 영향력 바깥에서 직업을 가지고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된 젊은이(특히 빈농 젊은이)들은 이들의 통제 범위 밖으로 빠져나가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산업화로 인한 이촌향도 및 농촌 공동체의 해체는 20세기 초의 러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1.1.3. 러시아 농업의 문제점

1.1.3.1. 낮은 농업 생산성과 지나친 수출
가장 후진적인 농업, 가장 원시적인 농촌, 가장 선진적인 산업과 금융자본주의.
블라디미르 레닌
러시아의 농업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러시아 농업의 생산성은 유럽 주요 열강과 비교할 때에 최하위였다. 19세기 말 기준, 1 데샤티나당 밀 수확량은 영국 : 2.03톤(124 푸트), 프랑스 : 1.27톤(77.6 푸트), 독일 : 1.26톤(77 푸트), 러시아 : 461kg(28.2 푸트)였다. 영국과는 약 4.4배, 프랑스, 독일과는 약 2.75배의 생산력 차이가 존재했다.[10]

이렇게 농업 생산력이 낮았던 원인은 자연 재해, 대륙성 기후와 높은 위도로 인한 짧은 식물 생장 기간, 낙후된 교통 환경, 상품 작물 재배가 힘든 점을 [11] 주요 원인으로 제기한다. 그리고 농민들 주변에 보고 배울만한 모범적인 사례가 드문 점, 토지 상환금을 위시한 높은 세율, 미르의 토지 재분배와 공동 경작이 농민들의 생산성 향상을 저해했다.[12]

기술적으로 러시아의 농업 생산성 성장률은 타국에 비해 높은 편이지만, 나무 쟁기를 쓰고 축력과 천연 비료에 의존하는 참담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농촌에는 농기계가 매우 드물고, 광물 비료는 주로 에코노미야를 비롯한 대규모 농장에서만 사용했으며 전체 광물 비료의 90%는 외국에서 수입했다. 대부분의 빈농과 소농, 소지주들은 부족한 자본 · 낮은 의욕 · 미르의 방해 · 비료와 농기구 같은 물품 부족과 같은 이유로 계속해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인구 증가로 토지 부족이 심화되어 점점 농지의 폭과 면적이 줄어들다 보니 일정한 규모의 농지에서만 쓸 수 있는 강철 쟁기나 파종기는 러시아의 농촌에서는 무용지물이고 수십 명이서 하나의 토지를 여러 개의 줄로 쪼개서 사용하는 상황이라서 만약에 농기계나 신형 농기구를 썼다간 옆집 사람이 뛰쳐나와서 자기 밭을 망쳤다며 멱살을 잡거나 미르의 경작 일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회의에 끌려가 모욕을 당할 수 있었다.

탈곡기와 수확기의 도입은 탈곡과 수확에 참여해 품삯을 받는 농촌 노동자들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고 수확 과정에서 땅에 떨어지는 이삭을 줍는 것은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인정이면서 농촌 여성들의 부수입인데, 탈곡기나 수확기를 써서 이삭을 죄다 자루에 집어넣으면 여성과 극빈층들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곡물 가격 하락도 문제였다. 1870년대부터 시작한 미국산 곡물의 유럽 시장 진출은 곡가 하락으로 이어져 곡물 수출에 목숨을 거는 러시아에게 재앙과도 같았으며 선진 기술과 대량 생산에 기초한 미국산 곡물의 생산 비용은 유럽 열강의 것보다 훨씬 낮고 시장에서 곡물의 공급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1900년까지 유럽 시장에서 곡가는 계속 하향 곡선을 그렸다.[13]

이로 인해 서유럽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농업도 타격을 입었다. 가난한 소농들은 세금과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서 수확한 직후에 낮은 가격으로라도 곡물을 팔아야 했고 지주들까지 파산할 지경에 몰렸다. 그런데도 정부는 곡물 수출을 계속 밀어붙였다. 산업화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곡물을 수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농업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은 공업화 이전에도 안 좋은 상황에 놓여 있던 러시아의 농업을 위기로 몰아붙이고 농촌에 기근이 만연하는 결과를 낳았다.
1.1.3.2. 낮은 농지 이용률과 목초지 부족
러시아는 20세기 초까지 윤작을 하는 경지가 적고 대다수가 개방형 삼포제여서 중세 유럽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농민들은 항상 토지의 1/3은 묵히고 봄에 1/3, 가을에 1/3씩 경작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는 애저녁에 극복하고 프랑스와 독일도 19세기 후반에 극복한 삼포제를 러시아는 계속 쓰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들도 오래전에 개량 삼포제 농법을 도입하여 점진적으로 토지 사용량을 늘리고 거의 윤작에 가깝게 운영했기 때문에[14] 완전한 극복과 연작 상경으로의 전환이 느렸을 뿐이지 같은 휴경 농법일지라도 러시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농민들이 토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도 삼포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가 컸다. 항상 토지의 60 ~ 70%를 사용하지 못하니 유럽 전체 평균으로 따져도 매우 많은 토지를 보유한 러시아의 농민들은 항상 토지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각국 농민의 토지 보유량을 비교해볼 때, 러시아는 유럽 최고 수준이고 1860 ~ 80년대 기준, 5 데샤티나 미만의 토지를 보유한 농가의 비율도 10.6%로 다른 나라에 비하면 낮은 편이었다. 물론 18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농민의 토지 보유량이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러시아의 농민들은 타국의 농민들보다 더 많은 토지를 보유했다.[15]

러시아의 농민들에게는 농지 외에도 목초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목초지와 농민들이 부식과 땔감을 조달하는 삼림은 농노 해방 당시에 귀족들이 대부분을 차지해서 농민들은 가축을 기르기 힘들었고, 천연 비료인 가축의 배설물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져서 농지에 비료를 충분히 주지도 못했다. 이러한 목초지의 부족은 가축 사육의 어려움과 농업 경영 악화, 토지 고갈을 초래했다.

1.1.4. 미르

1.1.4.1. 미르의 순기능과 정부의 영향
러시아의 농업 공동체를 일컫는 미르(мир)[16]는 농촌의 행정과 복지, 건물 및 도로 유지 · 보수, 병원과 학교와 같은 시설 건설에도 관여하고 농민들의 파산을 예방해주었으며 취약 계층에 대한 복지도 제공했다. 또한 미르는 정기적으로 가정의 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재분배해서 토지가 적은 빈농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미르가 농민들의 파산을 막아 국가에 대한 불만을 줄이고, 농민들의 평등화를 이뤄 사회 안정을 유지시켜준다고 생각한 제국 정부는 농민 공동체를 보존하고 강화하려 했다. 왜 제국 정부가 미르를 강화하려 했냐면, 정부 입장에서 미르의 해체는 제국이라는 건물을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폭탄의 뇌관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르를 해체하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통제할 수가 없고 만약 농민들이 미르의 통제를 벗어난 뒤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 반란의 소용돌이에 제국 전체가 집어삼켜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세수 측면에서도 미르 해체는 부담이 되었다. 농노 해방 이후에도 농민들은 상환금 납부 문제로 미르의 통제를 받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서 다른 지역이나 도시에 가서 일을 하려면 정부에 수수료를 지불하고 국내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다. 농가 수익이 점점 낮아지면서 국내 여권을 받아서 도시로 가는 농민들의 숫자가 계속 증가했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 국내 여권 발급 수익은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재원이었다.

그래서 1893년, 러시아 정부는 공동체로부터 농민들의 이탈을 제한하는 법을 채택해서 농민 공동체를 이전보다 강화하는 대신, 그간 문제점으로 지적받은 미르의 농지 재분배 문제에 대해서는 규제를 가하고 법을 제정했다. 이제부터 농지 재분배는 농민 회의 참석자 2/3의 찬성과 재분배를 실시한 지 최소 12년이 지나야 시행 가능했다. 그리고 93년 법령은 공동체의 토지를 저당 잡거나 판매하는 것도 금지했다.
1.1.4.2. 미르의 역기능과 인구 증가
러시아의 농민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1861년의 농노 해방령의 결과인 토지 상환금이었다. 과중한 상환금과 세금은 멍에가 되어 농민들의 어깨를 계속 짓눌렀으며, 연대 납부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도시에 정착해도 미르에 상환금을 보내줘야 했다. 1881년에 재무장관 니콜라이 분게가 상환금을 경감시켜 줬지만, 상환금은 여전히 큰 부담이었고 1905년 혁명으로 토지 상환금이 전액 탕감될 때까지 농민들은 총 20억 루블을 지불해야 했다.

미르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공동 경작이었다. 사유지가 아닌 미르 소유 농지는 개인이 함부로 경작하지 못하고 마을 회의의 결정 사항대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래서 진취적인 농민들은 일정한 규모의 토지가 없는 한, 미르의 지시대로 예전 그대로의 원시적인 농사를 지어야 했다.

또한 1893년에 제국 정부가 토지 재분배 제도를 조정하긴 했지만, 토지 재분배 문제는 계속해서 러시아의 농업을 괴롭혔다. 열심히 일하고 농지를 가꿔봐야 미르가 빼앗아가서 다른 농민에게 줘버리니 농민들의 의욕이 꺾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가정에 부양 가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토지를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농민들 입장에서는 노력과 기술 향상보다 자식 생산이 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그래서 러시아의 인구 증가율은 연간 1,000 명당 50명이고, 이 인구 증가율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평균 인구 증가율의 두 배였다. 프랑스가 대략 1,000 명당 20명 초반대로 떨어지고 독일이 1,000명당 30명을 유지하는 동안, 러시아는 혼자 50명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의 농민 인구는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토지 부족 문제를 야기했다. 1861년에 5,000만 명이었던 농민은 1897년에 7,900만 명, 농촌의 남성 인구는 같은 기간 동안 2,400만 명에서 4,400만 명으로 늘어난 반면, 남성 1인당 토지 이용 규모는 평균 5 데샤티나에서 2.7 데샤티나로 감소하고 토지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다. 19세기 말에는 농민 10 가구당 1 가구가 토지를 전혀 보유하지 못했고, 중앙 러시아 지역에서는 5 가구 당 1 가구가 가족을 겨우 부양할 수 있는 1헥타르(약 1 데샤티나)에도 못 미치는 작은 토지를 보유했다.

문제는 이렇게 토지가 적은 빈농들이 계속 늘어났다는 점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경작용 말의 보유량을 기준으로 부유함을 측정하기도 했는데, 말을 1 필도 가지지 못한 극빈층과 1 필만 가진 빈농의 숫자가 계속 증가했다. 19세기 말, 농가 3 가구당 1 가구는 말이 없었다. 결국 수백만의 농민들이 재기불능의 가난에 시달리다 농촌에서 쫓겨났다. 일부는 직공, 도공, 목수와 벌목꾼, 짐꾼 같은 일을 해서 겨우 살아남았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토지는 부족해지니 소작료도 당연히 상승했다. 농노 해방 이전의 러시아에서 소작료는 평균적으로 30 ~ 50%였고 대체로 30%였는데, 농노 해방 이후로 인구가 급증하고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50%가 대세가 되고 그 이상인 경우도 생겨났다. 이 시기의 농민들은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거나 비싼 값을 주고 토지를 매입해야 했다. 선택지는 매우 적었으며 전적으로 지주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농민들이 지나치게 많이 경작하는 바람에 토지가 황폐해졌다. 목초지가 부족해 비료를 생산하는 가축의 숫자가 줄어들다보니 농지에 비료를 충분히 줄 수 없는 데다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휴경지와 목초지를 줄이고 농지를 늘렸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서 휴식을 주어야 하는 땅에 강제로 파종을 하고 경작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더 많은 수확을 가져다 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토지 고갈과 농지가 자연재해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미르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뚜렷한 존재였으며 미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러시아 전체 지식인, 역사학계, 농업학계에 거대한 내전을 일으켰다. 러시아의 전통을 사랑하고 농촌을 이상적으로 바라본 슬라브주의자들과 농민을 미래로 인식한 인민주의자들에게 농촌이 몰락하고 도시에 종속당하는 것은 민족적 재난이었다. 하지만 도시를 근대화의 상징으로 생각한 서구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농민은 후진적이고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이러한 미르 논쟁은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으며 당대 러시아에서는 관료 사회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사상계 전체에서 뜨거운 감자로 다뤄졌다.

러시아의 농업이 가진 모든 문제점을 정리하자면, 삼포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농법, 원시적인 농업 경영, 공동 경작, 농지 하나를 몇 명 ~ 수십 명이 쪼개서 사용하기도 하는 토지 소유 구조, 강철 쟁기를 비롯한 신형 농기구를 사용하기가 어려운 농지 형태와 상황, 천연 비료의 수급 난항과 광물 비료의 부족, 정부의 무관심, 홍수, 가뭄, 서리, 폭설, 폭우, 폭풍, 이상 기온과 같은 자연 재해. 추운 기후로 인한 짧은 작물 생장 기간. 양분이 부족한 포드졸 토양이 많은 국토, 그 수가 지나칠 정도로 적은 농업 학교와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활동이 미진한 농학 협회들, 그 밖에 지면이 부족해서 쓸 수가 없는 온갖 문제들을 러시아 농업의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1.2. 스톨리핀 개혁

1.2.1. 개혁의 준비 과정

상술한대로 러시아의 농업은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정부가 농업 문제에 대해서 손을 놓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세르게이 비테의 전임자인 분게는 토지 상환금을 감면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으며 비테 본인도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구매력이 증대되지 않고서는 러시아의 내수 시장이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테는 이것이 미르의 공동 토지 소유 체제를 개인 토지 소유 체제로 변화시켜야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비테는 농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미르의 연대 보증 제도를 폐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17]

1902년, 제국 정부는 미르 해체를 논의하기 위해 비테를 중심으로 하는 특별 위원회를 만들고 40년 전에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에 만들었던 농민 관련 법률들을 재검토하고 농민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정부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1900년부터 시작한 농민들의 혁명화와 농민들의 납세 능력 저하, 심각한 빈곤, 기아 때문이었다.

위원회는 농촌 지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531개의 지역 위원회를 조직해 농업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게 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또한 위원장인 비테는 젬스트보 의원들과 농민들로 구성된 위원회 대표들과 회의를 진행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양의 민원과 요구 사항들이 비테를 덮쳤다.[18] 다만, 이 회의는 경제적인 사안보다는 지방 자치체 구성, 농민들의 법적 지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위원회가 활동한 결과, 제국 정부는 지방으로부터 농업에 대한 많은 정보와 농민 문제에 대한 현장의 의견을 득하고 각종 개선 사항들을 제안받았다. 위원회에 참여한 비테와 정부 관료들은 미르가 주도하는 공동 경작이 갖는 문제점을 강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정부는 위원회에서 만든 각종 개혁 방안들을 시기상조로 평가하고 미르 유지를 선포했다. 결국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19]

그래서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 이루어졌다. 1905년 11월 3일, 농민들이 가장 증오하던 토지 상환금 문제와 미르의 통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재무장관 비테와 국가재산부장관[20] 니콜라이 쿠틀레르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고 정부가 토지 상환금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1906년, 제국 정부는 토지 상환금의 절반을 탕감하고 1907년에 모든 토지 상환금의 지불을 변제했다. 그리고 비테와 국가재산부장관 알렉산드르 니콜스키(1906 ~ 1908)는 국가 재산부에 토지 측량 위원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 지부를 설치했다. 위원회는 젬스트보 의원과 농민 대표들을 위원으로 임명하고 각 지역의 토지 측량과 분배, 농민들의 농민 은행 이용을 지원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그리고 위원회는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차 그 권한과 업무가 늘어났다.

비테는 여기까지 개혁을 준비하고 사임했다. 비테의 뒤를 이어 개혁을 시작한 사람은 내무장관 스톨리핀인데, 비테는 스톨리핀이 개혁에 자기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 격노했다. 개혁의 준비 과정과 전반적인 추진 계획을 자신이 다 했는데 스톨리핀이 자기 이름을 붙였으니 화가 날 만도 했지만, 비테도 전임자들인 니콜라이 분게와 이반 비시네그라드스키의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 많았다. 토지 상환금 경감과 미르 해체는 분게도 생각해 둔 개혁안이었고 비테가 정력적으로 밀어붙인 대규모 해외 차관 도입, 엄격한 보호 무역은 비시네그라드스키도 실시한 정책이었으며 비테의 금본위제 도입도 비시네그라드스키가 준비한 개혁이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기초 위에 비테가 서 있는 것이다.

농업 개혁에 대한 러시아 각 사회 세력의 입장을 알아보자면, 농민 동맹, 트루도비키, 사회혁명당,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을 위시한 좌파 정당과 러시아 입헌 민주당(카제트)과 같은 자유주의 우파 정당은 정부에 전면적인 토지 개혁을 요구했다. [21] 다만, 세부적으로는 의견이 달랐는데, 사회 혁명당과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농민 동맹과 카제트는 유상 몰수 무상 분배를 주장했다. 그러나 제국 정부로서는 지지 기반인 귀족 지주들의 눈치가 보여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는 형식의 개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귀족들의 토지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토지 개혁을 진행하고 농민들이 미르 토지와 국유지를 분배받는 세부 계획을 입안했다.

개혁의 추진자인 스톨리핀은 농민들의 불만을 낮추고 혁명화를 저지하기 위해서 농민들에게 개인 소유지(오트루프)를 분배하여 자영농과 부농을 육성한 뒤, 이들을 정권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미르를 해체하고 농촌 지역을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독일식 자영농 마을(후토르)로 변화시키려 했다.

1.2.2. 개혁의 전개

1906년, 러시아에는 대략 1,280만 농가가 존재했다. 이 중에서 280만 농가는 농노 해방령이 반포되던 1861년부터 개인 영농을 하던 자영농이고 나머지 1,000만은 미르에 소속된 농가들이었다. 따라서 스톨리핀이 토지 공동 소유 제도를 폐지하고 개인 소유로 전환하려 했던 칙령은 우선적으로 미르에 속했던 농가들을 대상으로 한다.

스톨리핀 개혁의 주요 내용은 첫 번째, 미르에서 탈퇴하고 자기 몫의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자기 토지를 구매하는 식으로 토지를 개인 소유할 수 있다. 두 번째, 미르 소유지는 오로지 농민과 농민 협동조합, 공동 구매를 위해 자본을 모은 농민들에게만 구매권을 부여한다. 세 번째, 이전에 미르 소유지였던 토지를 저당 잡고 담보물로 취급할 수 있는 권리는 농민 은행에게만 부여한다. 즉, 금융 자본이 농촌에 침투하는 것을 제한했다. 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는 토지의 공동 소유를 개인 소유로 바꿔나가는 것이었다.

1906년, 미르 해체를 알리는 개혁을 반포했다. 제국 정부는 24년 이상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지 않은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분배지 일부를 개인 소유로 전환하는 것을 미르에 신청하고 미르에서 탈퇴할 수 있도록 했다. 재분배를 실시한 공동체에서는 마지막으로 재분배를 실시한 방식에 따라 개인 토지를 분배하고 농민의 의향에 따라 추가적으로 미르 소유지를 구매하는 것을 허용했다.[22]

개혁에서 정한 토지 분배와 미르 탈퇴 과정은 다음과 같다. 미르 탈퇴를 원하는 농민은 관련 사실을 미르에 전달하고 미르는 1달 이내에 공동체 총원의 2/3가 참여한 상태에서 탈퇴 가부를 결정해야 한다. 미르의 결정에 불만이 있는 신청자는 젬스키 나찰니크(젬스트보 감독관)에게 항고할 수 있으며 미르와 젬스키 나찰니크의 결정 모두에 불만이 있다면, 최종적으로 군 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 그리고 농지를 여러 줄로 쪼개서 경작하는 경우에는 신청자가 기존에 분배받아서 단일 경작하던 농지를 제공하거나 원래 제공해야 하는 토지의 가치에 상응하는 돈을 지급했다.

스톨리핀 개혁은 농노 해방령이 반포된 뒤, 귀족들이 삼림과 목초지를 독점해 농민들이 목초지와 비료 부족으로 고생했던 문제점을 반면교사해서 미르를 탈퇴한 농민들이 예전처럼 마을 공유지에 속한 목초지 · 삼림 · 황무지 · 가축 통행로 사용을 허용했다. 그리고 개혁이 시작하기 전에(1905 ~ 06년) 80만 명의 부농이 사적으로 미르를 탈퇴한 것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탈퇴 과정에서 확보한 토지의 소유권도 인정해 주었다.

1910년, 추가적인 개혁 조치를 진행했다. 1910년 법령은 1906년 이후로도 토지 분배를 하지 않은 공동체를 대상으로 적용했으며 더 많은 농민들을 공동체에서 탈퇴시키기 위해서 06년 법령에서 명시한 농민의 공동체 탈퇴 기준을 완화하고 각종 규정들을 공동체 탈퇴 희망자에게 더 유리하게 개정했다. 미르 탈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분배지를 가족 명의로 할지, 개인 명의로 할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스톨리핀이 강력하게 개인 명의로 할 것을 주장해 1910년 법령에서는 토지 명의를 개인 명의로 하도록 했다.

스톨리핀이 역점을 두고 시행한 것에는 이주 정책도 있다. 인구압 해소와 지역 개발을 위해 스톨리핀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을 실시했다. 지원자에게는 5년 세금 면제, 가장에게 15 헥타르, 가장을 제외한 가족에게는 45 헥타르의 토지, 20 루블의 현금 보조금, 병역 면제와 같은 좋은 혜택을 주고 이주를 장려했다. 250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시베리아에 정착하고 서부 시베리아,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농지 개간과 지역 개발이 이루어졌다.

행정 · 사법 개혁도 실시했다. 그 동안 제한하던 농민의 교육권, 직업 선택권, 거주 이전의 자유, 재산권 행사, 어음 발행 제한과 연대 보증 제도와 같은 금융과 관련된 제한, 공무원 임용에 대한 차별, 면 법정과 젬스키 나찰니크가 사소한 위법행위를 처벌하고 관습법을 적용하는 것 등, 농민이 받던 법적 제한과 차별을 철폐했다. 그리고 여러 미르에 동시에 가입하는 것, 공유지 사용권을 반납하는 대가로 미르의 동의 없이 탈퇴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지방 총독이 농민 젬스트보 의원 선출에 개입하던 제도를 개선해서 농민 젬스트보 의원직을 완전 선출직으로 만들었다.
1.2.2.1. 토지 측량 위원회의 활동
중앙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법령을 반포하고 개혁을 추진하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토지 측량과 분배를 맡아 개혁을 실현하는 곳은 토지 측량 위원회였다. 위원회는 미르 소유지 분배, 토지 측량 및 공동 경작지 분할, 자영농이 보유한 공동 경작지의 분배 및 조정, 마을 간의 토지 소유권 조정, 농지 면적 확장, 공유지 및 공동체 소유의 부동산 분배와 이용권 조정 등의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각 행정 단위별 지부의 구성과 변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군(우에즈드) 토지 측량 위원회는 군 귀족 위원회 대표, 군 젬스트보 상임위 의장, 군 젬스트보 대표 3명, 면(볼로스트)에서 선발한 농민 대표 3명, 젬스키 나찰니크, 군 법원 대표, 지역 세무 공무원, 기타 관련된 부서의 공무원들이 참여했다. 군 토지 측량 위원회는 1906년에 186개, 1912년에는 유럽 러시아 47개 주의 463개 군에 설치되어 개혁을 수행했다.

주(구베르니야) 토지 측량 위원회는 주 귀족 위원회 대표, 주 젬스트보 상임위 의장, 주 젬스트보 대표 6명(여기서 3명은 무조건 농민 대표) 주 재무관, 농민 은행과 귀족 은행의 지점장, 주 법원 대표로 구성되었다. 군과 주의 위원회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본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개혁의 추진 과정과 애로 사항을 본부에 보고했다.

위원회가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를 알아보자면, 먼저 미르 소유지의 분배는 농민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사업이어서 정부는 이 사업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905 ~ 07년간 44,500개 마을의 180만 농가(전체 농가의 13%)가 개인 토지를 받았다. 두 번째로 공동 경작지 분할은 가장 많은 분쟁이 벌어지고 가장 힘든 사업이었다. 1905 ~ 07년 동안 이 사업을 통해 86만 농가(전체 농가의 6.5%)가 토지를 분배받았다. 그러나 워낙 갈등이 많다보니 위원회는 상당수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르의 동의 없이는 이런 식으로 토지를 가진 이들이 개인 토지 분배를 신청하지 못하도록 했다.[23]

세 번째, 개인 소유지도 있고 미르 분배지도 있는 농민들은 토지 분배를 신청하면 개인 소유지에 더해서 추가로 토지를 받았다. 위원회는 되도록이면 개인 소유지와 인접한 곳의 토지를 분배해 주려고 애썼다.[24] 약 28만의 농가(전체 농가의 2%)가 이 방식의 토지 분배를 신청했다.

네 번째, 마을 간의 토지 소유권 조정 사업은 다행스럽게도 반발이 매우 적었다. 미르 스스로도 관리해야 할 땅이 지나칠 정도로 많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토지의 소유권 분쟁이 빈번했기 때문에 관리 부담과 분쟁을 줄일 수 있는 이 조정은 인기가 좋았다. 1907 ~ 1915년까지 179만 가구(전체 농가의 13%)가 사는 마을에서 이 조정 과정을 신청했다.

다섯 번째, 토지의 면적과 폭을 넓히는 사업은 농민들이 공동 경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려는 목적에서 시행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르에서 탈퇴하는 농민들이 늘어나고 이들의 농지가 곳곳에 생겨나면서 공동 경작지와 개인 토지가 인접해 공동 경작과 개인 영농이 충돌하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위원회는 미르 잔류 농민과 탈퇴 농민 양자를 위해서 토지의 면적과 폭을 넓히고 탈퇴자들이 공동 경작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조정했다. 1907 ~ 1915년 동안 63만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이 조정 과정을 신청했다.

여섯 번째, 위원회는 미르 잔류 농민과 탈퇴 농민 사이에서 통행권, 가축 방목, 삼림과 저수지 사용을 놓고 벌어진 갈등을 조정해 주었다. 이 조정 과정은 13만 가구(전체 농가의 1%)가 사는 마을에서 신청했다.
측량 위원회는 지역의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 분배를 진행했으나, 측량 기사의 숫자가 부족해서 활동이 지지부진했다. 스톨리핀 개혁을 시작한 1906년에는 러시아 전체에서 측량 기사가 200명, 1907년에는 650명 뿐이었으며 1908년에 가서야 1,300명의 측량 기사를 고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측량 기사를 고용해도 위원회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토지 측량 기술을 가진 이들이 없어서 위원회들은 인력 부족에 시달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많은 위원회가 토지 측량 없이 서류 자료만 가지고 측량을 끝내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탁상 행정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탁상공론만으로 토지를 분배하고 서류를 발급해주면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제국 정부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기존에 운영하던 5개의 토지 측량 학교를 지원하고 새로이 9개의 측량 학교를 세웠으며 일부 토지 측량 학교에 속성 강좌를 개설해서 측량 기사를 육성했다. 정부의 조치 덕분에 위원회는 1910년에 1,500명, 1914년에는 7,000명의 측량 기사를 고용하고 작업 속도를 높였다.
1.2.2.2. 농민 지원 사업
단순히 토지를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농업 문제를 해결하고 농민들의 삶을 증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안 스톨리핀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무이자 대출 제도를 운영해서 1914년까지 29만 9천의 농가에게 토지 구매와 개인 영농을 위한 자금 대출을 해주었다. 기본적으로 대출은 최소 150 루블에서 최대 500 루블을 지급했다. 당시 노동자의 평균 연봉이 200 ~ 500 루블 정도이기에 대출금은 수천만원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스톨리핀 개혁은 개혁 과정에서 소요되는 비용을 정부에서 모두 부담했다. 1906년에 정부가 토지 관리 및 측량에 투입한 비용은 230만 루블이며 점점 지출이 증가해 1914년에는 1,400만 루블을 소모했다.
1.2.2.3. 농민 은행 운영과 국유지 매각
스톨리핀은 정부가 소유한 토지를 매각하여 농민들에게 토지를 지급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국유지 매각은 수요가 많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국유지의 대부분이 삼림과 산지거나 농지로 쓰기 힘든 곳인 점, 국유지가 많은 지역에서는 토지가 그렇게까지 부족하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국유지는 지대가 낮아서 구입보다는 임대가 훨씬 더 이익이 되는 편이라 대부분의 농민들은 국유지를 구매하지 않고 임대하는 조건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총 318만 데샤티나의 국유지가 농민들에게 임대되었다.[25]

알렉산드르 3세의 치세부터 운영을 시작한 농민 토지 은행은 스톨리핀 개혁 이전부터 농민들의 토지 구매를 위한 대출 제도를 운영했다. 토지를 담보로 대출을 해주는 이 제도는 금리 5 ~ 6%에 상환 기간은 13년 ~ 55년이며 55년 만기로 대출하면 금리를 인하하고 무담보 대출을 해주었다. 1903년부터 농민 은행은 은행 자금으로 토지를 구매한 뒤, 농민들에게 토지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1900 ~ 1903년 동안 농민 은행은 매년 70 ~ 82만 데샤티나의 사유지의 구매 과정에 자금을 지급하고 9만 ~ 13만 데샤티나의 은행 소유지를 농민들에게 매각했다.

스톨리핀 개혁은 이러한 농민 은행의 대출 제도와 토지 매각 사업을 개선했다. 1906년, 제국 정부는 농민 은행의 대출 금리를 인하하는 칙령을 반포한다. 55년 만기의 무담보 대출의 금리를 4.9 ~ 5.2%에서 4%로 인하하고 13년 만기 대출은 기존에 5.4 ~ 6%를 2.9%로 낮추었다. 그리고 기존에 대출을 받은 이들에게도 인하된 금리를 적용했다. 이러한 금리 인하로 발생하는 은행의 손실은 모두 국고로 보전했다. 예산이 부족했던 탓인지 제국 정부는 5.7% 금리에 8억 7400만 루블의 외채를 발행하고 농민 은행도 각각 5%와 6%의 은행채를 발행했다.

개혁의 성과로 농민 은행의 활동이 이전보다 훨씬 더 활발해지고 농민들이 은행을 통해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구매하기 시작했다.[26] 최종적으로 1906 ~ 1916년까지 농민 은행에서 대출해준 자본은 964만 데샤티나의 토지를 매입하는데 쓰였다.[27] 농민 은행을 이용한 토지 매입자의 70% 이상이 9 데샤티나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중농과 부농들이었다. 이들은 체납액도 적고 대출금을 잘 상환해 농민들의 대출금 체납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28]
1.2.2.4. 농업 기술 지원
1906년부터 제국 정부는 젬스트보에 농가 원조를 위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젬스트보가 자율적으로 농민 지원 사업을 진행하도록 했다. 젬스트보는 보조금을 받아 농민들에게 기술적 지원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원조를 해주고 새로운 사업도 시작했다.[29]

농가에 대한 지원은 농민들에게 선진 농업 기술의 혜택을 주기 위해서 진행했으며 주로 농법 전수, 농기구와 인공 비료의 보급에 초점을 두었다. 젬스트보는 구식 3포제 대신에 4윤작법이나 감자 · 아마 · 사탕무를 심는 개량형 3포제를 도입하고 강철 쟁기와 파종기 같은 신형 농기구와 트랙터와 탈곡기 같은 농기계를 보급했다. 젬스트보가 파견한 전문가들은 농민들에게 새로운 경작법과 파종법, 종자 분류법, 작물별 파종 시기, 목초지 활용법, 가축 사육과 축산품 생산, 작물과 작물 사이의 최적 간격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적은 양일지라도 인공 비료를 쓰도록 교육해 농지에 충분한 양분을 공급할 것을 강조했다. 젬스트보와 농학자들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농민들은 큰 반발 없이 정부와 전문가들의 조언과 지원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지원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같은 마을의 농민들을 도와주던 '진취적이고 계몽된' 농민들과 지역 농학자들이 활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각 지역의 농학자 육성에 노력했다. 개혁 이전인 1904년에는 유럽 러시아 34개 주에 401명의 농학자들이 활동했지만, 1913년에는 3,716명이 농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이 중에서 287명이 주와 군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면으로 내려가 일선 현장에서 농민들을 가르쳤다.

일부 농학자들은 젬스트보의 지원을 받아 아예 시범 농장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단순한 강의나 책보다는 직접 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농민들을 설득하는데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크림 반도의 케르손에서는 1913년에 1,491개소의 시범 농장을 운영했다. 추가적으로 젬스트보는 농기계 홍보 전시회를 열고 각종 농기구와 비료, 종자를 거래하는 도매점을 세웠으며 농학 강의도 진행했다. 농학 강의는 예상외로 호응이 좋아서 1912년에는 11,000회 이상의 농학 강의가 열리고 100만 명이 여기에 참석했다. 스톨리핀 개혁 중에 이뤄진 농업 원조는 선진 농업 기술의 전파 속도를 높이고 농업의 기계화를 촉진시켰다. 1900년에는 2,700만 루블이던 러시아의 농기구 · 기계의 가치가 1913년에는 1억 1,100만 루블로 증가했다.

사라토프 주지사를 지내면서 협동조합에 주목한 스톨리핀은 조합이 부농의 육성과 농촌의 안정화, 농가 수입 증대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 기존의 협동조합들을 지원하고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농민들도 이에 호응했다. 집단주의 정서가 강한 러시아의 농민들은 미르를 대신할 공동체로 협동조합을 선택해 가입하기 시작했으며 개혁을 시작한 뒤로 러시아의 협동조합은 3만 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부농 뿐만 아니라 빈농과 소농들도 협동조합의 도움을 받아 농가 소득을 증대하고 생활을 개선시켜 나갔으며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농축산물을 시장에 판매했다.

1.2.3. 개혁의 결과와 성과

개혁의 결과, 토지 분배를 선택한 농민들은 자영농과 도시 이주 농민으로 나뉘었다. 약 20%에 해당하는 이주 농민들은 토지를 분배받고 2 ~ 3년 안에 토지를 처분한 뒤에 도시로 이주하거나 향촌 지역에서 새로운 직업을 선택했다.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이 농민들의 토지 처분을 놓고 개혁이 실패한 것이 아니냐며 비판했지만, 제국 정부 입장에서 농민의 토지 매각과 농촌 인구 감소는 이미 예상한 사실이고 농민들의 이촌향도는 인구 과잉과 토지 부족 문제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정부는 토지 매각 과정에서 생기는 수익금으로 도시에 정착하는 농민들을 지원하고 도시 이주를 장려했다.

1910년 법령이 강제적인 공유지 분배를 명시하긴 했지만, 토지 분배 신청은 자발적이었고 토지 측량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미르의 허가를 받지 못하는 농민들도 있었지만, 최종적인 토지 분배 허가는 개혁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수족인 젬스키 나찰니크의 권한이기 때문에 미르와의 협상에 실패한 농민들은 젬스키 나찰니크를 찾아가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분배 과정에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스톨리핀 개혁을 진행한 결과, 제국 정부는 1906 ~ 1916년 동안 유럽 러시아 47개 주 1억 1,920만 데샤티나의 토지 중에서 2520만 데샤티나(전체의 21%)의 토지를 개인 소유로 이전했다. 1917년에는 3,700 ~ 3,800만 데샤티나(31%)의 토지를 측량, 개인에게 분배하고 전체 농가의 45.7%인 610만 가구가 정부에서 제안하는 토지 측량 및 개인 토지 분배를 받아들였다.

개혁의 성과가 바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7년 동안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한 결과, 농업 생산성 측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경작지가 10% 증가하고 농민들이 미르를 탈퇴한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성이 150% 상승했다.[30] 곡물 수출은 30% 증가하고 러시아의 곡물 수출은 전세계 곡물 수출량의 25%에 근접했다[31] 비료 사용량은 2배로, 농민들의 농기구 구매량도 3.5배 증가했다.

1916년 기준으로, 러시아의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하거나 임대한 토지의 89.3%를 파종하고 러시아 전체 가축의 94%를 사육했다. 농민들이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지주들은 점점 농업 경제에서 비중을 상실해 나갔다. 이러한 성과는 산업 생산성의 증대에도 영향을 미쳐서 스톨리핀 개혁을 진행한 7년 동안(1906 ~ 1913) 러시아의 산업 생산성 증가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인 8.8%였다.

1.2.4. 개혁의 한계

스톨리핀 개혁으로 미르가 해체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농가가(최소 40% ~ 50% 이상) 미르 소속으로 남았다. 스톨리핀 개혁에서 말하는 미르의 해체는 미르 구성원이 허가를 받으면 자기 토지를 분배받고 탈퇴할 수 있다는 것과 농민에게 가하던 각종 제한을 철폐하고 권리를 신장시켜 준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한꺼번에 모든 미르를 해체해 농민들을 자영농으로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센에서도 농민 공동체 중심의 공동 경작 체제에서 자영농 중심의 개인 영농 체제로 넘어가는데 100년이 소모되었다고 보는 학설도 있기에 러시아처럼 오래도록 농민 공동체와 공동 경작 체제가 뿌리 내린 곳에서 단기간에 개인 영농으로 전환하는 것은 무리였다.

스톨리핀 본인도 개혁의 효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톨리핀은 1909년에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정부에게 20년간의 안정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의 러시아를 알지 못할 겁니다.” 라는 발언을 하여 개혁에 시간과 안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스톨리핀 개혁은 러시아가 고립주의에 가깝게 유럽의 분쟁에서 발을 빼고 지속적으로 내부 단속을 해야 성공이 가능한 개혁이었던 것이다. 농민들은 지주들의 땅을 받지 못하는 것에 실망했다. 사회혁명당을 비롯한 좌파 정당들은 이 점을 노려 농민들을 선동하고 자신들에 대한 농민의 지지를 높였다. 개혁으로 자기 토지가 생기긴 하지만, 토지 부족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2월 혁명 이후에 일부 농민들이 지주 토지를 자기들 마음대로 ‘분배’한 것은 농민들이 토지를 원하는 열망이 매우 강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개혁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도 많았다. 미르의 해체는 농촌의 사회 안전망이 소멸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부농들은 미르 해체를 좋아해도 미르의 보호를 받던 빈농과 극빈층들은 싫어했다. 개혁 이후에 미르 잔류 농민들이 탈퇴 농민들을 질투하여 이들을 공격하고 그 농장을 파괴하는 소요가 많았다. 1909 ~ 1910년 동안 일어난 자영농 농장 방화 사건만 해도 11,000건에 달했다. 미르에서 농민의 탈퇴 요청을 거부해서 젬스키 나찰니크가 개입하는 일이 빈번했다. 토지 측량 과정에서 갈등이 벌어져 측량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는데, 다행히 개혁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불합리한 측량에 대한 반대와 농민의 이익 침해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의 반대 시위는 다른 저항 방식과는 달리 정권 입장에서 그리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개혁의 다른 한계로는 느린 측량 속도가 있다. 측량 위원회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농민이 토지 분배를 신청하고 자신의 토지를 지급받는 데는 평균적으로 1년이 걸리고 땅 문서를 받는데는 또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16년 초에 234만의 농가가 개인 토지 분배를 신청했으나, 위원회는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 토지 측량을 가장 많이 했던 1913년에조차 전체 토지의 3.6%인 430만 데샤티나만 측량하는데 그쳤다. 매년마다 토지 측량이 이렇게 진행되면 1930년에 측량이 끝날 판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고 측량 기사들이 전선으로 끌려감에 따라 전쟁 중에는 위원회의 활동이 매우 둔화되었다. 스톨리핀 개혁을 진행한 10년 동안 전체 토지의 70%는 여전히 미르 소속으로 남았다. 미르 탈퇴를 신청한 610만의 농가(전체 농가의 45.7%) 중에서 143만 가구만 개인 영농으로 전환하고 나머지는 서류 작업과 신청만 겨우 끝냈다.

시베리아 이주 정책은 농민들에게 아주 좋은 조건을 내걸었지만, 본토와는 다른 환경, 추운 기후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농민이 52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이주를 통한 인구압 해결은 그 효과가 약했다. 당시 러시아의 농민은 8,000만 명이 넘는데,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농민들은 250만 명뿐이었다. 그리고 이주 정책과 동시에 실시한 유목민 정주화 정책은 강제성을 띠고 있어서 카자흐를 위시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일으켰으며 반농 - 반목으로의 전환까지는 받아들이려던 카자흐 지식인들까지 불만을 터뜨릴 정도였다.

농민 은행 운영과 대출 사업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지만, 막대한 정부 지출을 견디기 어려워 한 재무부의 강력한 반대, 정부의 잘못된 운영, 의욕적이고 건실한 농가들은 융자를 받지 못하는데 아무 돈도 없는 농가가 융자를 받는 기묘한 현상 등이 벌어지는 한계도 있었다.

1.3. 협동조합 운동

1.3.1. 러시아 협동조합의 탄생과 성장

농노 해방 이후, 화폐 경제가 발전하고 공장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1860년대부터 러시아에도 협동조합이 나타났다. 러시아의 협동조합 결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력은 협동조합을 통해 러시아에 만연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지식인들이었다. 러시아의 협동조합은 1860년대 중반에 탄생해 1870 ~ 80년대 초의 성장기를 거친 뒤, 80년대 중반 ~ 90년대 말까지 침체기를 겪었다. 이후, 1900년대 중반부터 다시 부활해 농업을 비롯한 러시아의 경제와 사회 · 정치 및 문화 영역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성장 과정을 세부적으로 분석해보자면, 러시아 최초의 협동조합은 주택 조합이고 1865년에 설립되었다. 이를 모방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뒤따라 만들어졌고 정부의 허가와 재정 지원, 젬스트보의 지원도 받았다. 다음에 설립한 협동조합은 신용 협동조합이었다. 슐츠식 조합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것이었고 이후부터 생산자 · 판매자 · 소비자 협동조합들이 등장했다. 소비자 협동조합은 인민주의자들과 사회 개혁가, 지식인들이 상호 분배와 공동 구매를 위해 설립한 것이 시초며 1880년대부터 진보적인 지주들이 농촌에 신협을 세우면서 신협도 확장세를 띠었다. 그러나 경험과 지식, 자금 부족, 기금 횡령과 부패, 부채 문제 때문에 많은 숫자의 협동조합들이 망하거나 사업을 철수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가 있었음에도 협동조합의 수는 꾸준하게 늘어갔고 성장해갔다.

제국 정부도 협동조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협동조합과 관련된 법안을 제정하거나 국가 은행의 자금을 이용해 조합을 지원했으며 스톨리핀 개혁 시기에는 농민들에 대한 법적 제약이 사라지고 정부가 개혁의 일환으로 조합을 지원해 협동조합의 성장에 탄력이 붙었다. 1905년 혁명 이후부터는 협동조합과 관련된 연구가 활발해지고 논문, 서적 출판이 늘어났다. 연구는 주로 협동조합에 관한 기술적, 상업적 문제를 다룬 경우가 많았으며 대중 계몽과 조합 설립을 선전하는 책들을 출판했다. 그리고 헤이신과 같은 협동조합 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협동조합의 운영과 성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10년대에는 서유럽의 영향을 받아 학술 활동과 서유럽의 선진적인 조합 운영을 배우고 경험을 습득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들은 협동조합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한 좌파 지식인과 협동조합을 경제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경제학자들이었다.

세기 전환기에 1만을 웃돌던 협동조합들은 1914년까지 32,975개로 증가해 러시아는 전세계 2위의 협동조합 국가가 되었다. 1914년 기준, 신용 협동조합이 13,839개, 소비자 협동조합이 10,000개, 농업 협동조합이 8,576개, 건설, 수리 관련 조합이 500개, 기타 조합이 60개였다. 협동조합은 전쟁 중에도 성장세를 보여 1916년에는 47,000개로 증가했다.

2월 혁명 때는 50,000개의 협동조합이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각 조합의 구성은 소비자 협동조합이 25,000개, 신용 협동조합 16,500개, 농업 협동조합 8,400개, 석유 채굴 조합 3,000개, 1,500 ~ 2,000개의 생산자 협동조합과 수공업 협동조합이었다. 전체 협동조합 회원은 1,500만 명 이상으로 파악하며 신용 협동조합에서 최소 1,050만 명의 조합원들이, 소비자 협동조합에서는 300만 명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918년에는 53,000개로 증가해 양적으로는 세계 최대의 협동조합과 조합원 수를 자랑했다. 정리해보면, 러시아에서는 소비자 협동조합과 신용 협동조합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다. 1918년 기준, 소비자 협동조합이 전체 조합의 50% 이상, 신용 협동조합은 30%를 차지했다.

1.3.2. 소비자 · 신용 · 생산자 협동조합의 활동

러시아에서는 1860 ~ 70년대에 인민주의자를 비롯한 사회개혁가, 지식인들이 모여 개인이 서로 결합해서 상호 분배, 소매용으로 물건을 공동 구매하는 소비자 협동조합들을 설립했다. 농촌이나 도시에 이런 소비자 협동조합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물가가 안정되었다.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그랬던 것처럼 공장 매점과 공장 인근의 상점들이 폭리를 취하고 공장주들이 임금의 일부를 매점 상품권으로 지급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협동조합을 세우는 경우도 많았다. 소비자 협동조합들이 지역 시장에서 소비재를 구매하고 그 규모가 커져감에 따라 협동조합들의 사업이 확장되고 물가 안정과 소득 개선이 이뤄지는 등,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독일의 영향을 받아 도시 상공업자들에게 알맞은 라이파이젠계 신협을 도입하고 농촌에는 슐체계 신용 협동조합을 도입해서 운영했다. 라이파이젠계 신협이 농민들에게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1895년, 제국 정부가 신용협동조합법을 제정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신협의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904년 ~ 1914년까지 10년 동안 신용 협동조합과 저축 은행의 예금액은 4970만 루블에서 7억 880만 루블로 증가하고 대출액은 3,100만 루블에서 4,680만 루블로 증가했다.

신용 협동조합의 성장세는 엄청나서 04 ~ 14년 동안 신협 회원은 44만 명에서 950만 명으로 증가하고 모스크바 조합 인민 은행을 위시한 1,117개의 상호 저축 은행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12년에 창립한 모스크바 조합 인민 은행은 지부들과 소속된 신협 기관들을 통해 농민들에게 농업 기술 지원과 비료, 종자를 제공하고 농업 자금을 대출해주었다. 또한 모스크바 인민 은행은 신용 협동조합들의 본부처럼 기능하여 지방 신협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러시아에는 중세부터 적게는 몇 명, 많게는 수십에서 수백 명 단위로 구성된 아르텔이라 부르는 소규모 길드 또는 조합으로 분석하는 조직이 존재했다. 어업 아르텔, 예술가 아르텔, 광부 아르텔 등 생산자 중심으로 형성되는 이 집단은 협동조합 운동 시기에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진화하거나 협동조합의 영향을 받아 소규모 생산자 협동조합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조합이라 할 수 있는 아르텔 외에도 건설 · 수리업 · 수공업 · 광업 · 경공업 · 식품 가공업 등, 다양한 종류의 전문적 생산자 협동조합들이 나타나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허나, 생산자 협동조합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조합은 농업 협동조합이었다. 대표적인 예시인 시베리아 낙농 단체 연합은 러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생산자 협동조합이며 조합은 제국 전역과 유럽에 우유와 치즈를 공급하고 크게 번창했다. 1913년, 러시아 전체의 버터 수출량이 500만 푸트(82,000톤)인데 시베리아 한 곳에서만 600만 푸트(98,000톤)를 생산했으니 조합의 역량이 아주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낙농 조합 외에도 시베리아의 여러 협동조합들은 밀, 모직물, 모피 등을 생산해 해외에 수출했다.

러시아 전역에서 수천이 넘는 농업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많은 농민들이 농협에 가입했다. 특히 농협은 공동체에서 탈퇴한 농민들에게 다양한 농업 기술을 지원하고 새로운 농법, 경영 방식을 알려주었다. 조합에 가입한 소농과 빈농들은 조합의 도움을 받아 생산량을 늘리고 생활 여건을 개선시킬 수 있었으며 농협에서 농축산물 공급량을 늘려준 것 덕분에 물가도 낮아졌다.

1.4. 공업

1.4.1. 러시아 산업의 성장

1890년대의 러시아는 증기 기관 생산량이 증가하고 증기 기관의 국산화와 국내 수요 충당이 가능해지는 등, 기술력이 높아지고 해외로부터 각종 기계와 설비를 도입해 생산력을 높였다. 그리고 석탄 · 석유 채굴과 석유 정제, 기계 공업, 중화학 공업 등 새로운 산업들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유능한 재무장관들이었던 분게, 비시네그라드스키, 비테는 보호주의에 입각한 관세 정책, 정부의 보증과 지원을 비롯,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공업을 지원하고 175개에 달하는 상공업 학교를 설립하는 등, 기술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조치와 1897년까지 이어진 호황 덕분에 러시아는 공업 부문에서 연간 8 ~ 9%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공업국의 기반을 다졌다. 이 수치는 일본에 비견되는 수준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하는 것이었다.[32]

19세기 말이 되면, 러시아는 광물 채굴, 선철 및 철강 생산, 운송 수단(기차, 선박) 제작, 제조업 면에서 서유럽에 준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면방직 공업도 영국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성장하고 1880년대 ~ 90년대 초와 비교했을 때에 철로의 총 연장은 2배 늘어나고 관련 산업도 크게 성장해 선철 · 철강 생산량도 모두 2배 이상 증가했다. 석탄과 석유의 생산, 주철과 공산품 생산은 3배 증가하고 중공업 생산성 증가율은 2.3배, 경공업도 생산량이 1.6배 증가했다. 러시아는 선철 생산에서 세계 3위, 원유 채굴은 세계 1위로 올랐다.

20세기 초로 접어든 뒤에도 러시아는 꾸준히 산업 사회로의 변화를 이어나갔으나, 1900 ~ 1903년에 세계를 덮친 불경기는 경기 침체와 사회 불안을 일으키고 1905년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원래 러시아는 서유럽과 거리가 멀고 서유럽 경제가 주는 영향을 중유럽 국가들보다 적게 받아서 1870년대의 장기 불황도 늦게 접하고 서유럽, 중유럽 국가들보다 불황의 타격을 적게 받았으나, 차르 정부에게는 불행하게도 1900년대의 러시아는 막대한 양의 외국 자본이 들어와 있고 서유럽 경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00 ~ 1903년의 불황은 금속, 기계, 석유 시추, 정유업 등의 중공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불황으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재정이 부족하고 기술력이 떨어지는 기업들이 연쇄 도산했다. 3년 동안 11만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3,000개 이상의 기업들이 문을 닫고 철도 건설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래서 러시아 경제에서 1900 ~ 08년은 침체기로 평가할 수 있으나, 불황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손실을 만회하고 성장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각 산업의 성장이 불균형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1900년 ~ 1908년간 주철 정련은 3%, 원유 시추는 25% 감소하지만, 강철 생산은 24%, 석탄 채굴은 1.5배 증가했다. 고용 노동자의 수는 21%, 공업 제품 총생산은 37% 증가하고 1890 ~ 1913년 동안 공업 노동 생산성은 4배 증가했다.

1903년, 선철 생산 공정에서 목탄 사용율이 30%로 줄어들고 70%는 코크스를 쓰는 현대적인 기술을 써서 선철을 제련했다. 1905년, 전체 공장 수는 40,000개소로 증가하고 그 생산 가치는 40억 루블이 넘었다. 여러 공장과 기업에서 혁신과 재조직이 이뤄지고 새로운 기업과 산업이 생겨났으며 분야를 가리지 않고 기계화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러시아 전체 기계 설비의 가치는 1870년에 3억 5,000만 루블이었는데, 1913년에는 20억 루블로 증가했다.

1909 ~ 1913년까지 러시아 경제는 새로운 성장 국면을 맞이했다. 1차 산업 혁명을 달성하던 1880년대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생산재보다 소비재를 훨씬 더 많이 생산했는데, 이 시기부터 생산재의 제조 속도가 매우 빨라져서 소비재 생산 속도보다 2배 이상의 속도로 생산재를 제조하고 공장 기계 설비의 63%를 국내 기업에서 생산했다. 공산품 생산 속도 역시 급속도로 빨라져 러시아는 공업 생산 증가율과 노동 생산성 증가율 부문에서 9%를 달성, 세계 최고 수준의 증가율을 보였다. 1909년부터 대전 직전까지 러시아의 선철 생산은 64%, 강철 생산은 82% 증가했다. 국민 소득에서 공업 생산 수입은 농업 생산 수입과 거의 비슷해지고 공업 생산품은 국내 수요의 80%를 충당했다.

러시아의 빠른 성장 요인으로는 러시아가 독일과 마찬가지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늦게 산업화에 뛰어든 후발 주자였다는 점을 제시할 수 있다. 러시아는 선두 주자(영, 프, 독, 미)들의 자본, 과학 기술, 산업화 과정, 경제 정책, 기업 운영 방식 등을 흡수하고 그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피해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이 높은 지대로 공장 확장 및 이전의 어려움을 겪고 높은 신기술 도입 및 설비 교체 비용으로 인해서 서서히 공업에서의 우위를 잃고 있을 때, 러시아는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자원이 풍부한 땅에 국가 주도로 대규모 공업 단지를 건설하여 빠르게 영국을 따라잡으려 했다.[33]

그리고 국가가 산업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국 정부는 서유럽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국가 주도 산업화 정책을 실시하여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외국 투자를 유치했다. 다만,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러시아와 같은 국가 주도 산업화와 국가 자본주의를 밀어붙였기 때문에 러시아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러시아의 산업화는 특수성을 갖는다. 러시아는 주요 열강들보다 산업화가 훨씬 늦었기 때문에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다른 열강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면 그들보다 훨씬 빠르게 산업화를 이뤄야 했다. 그래서 제국 정부는 러시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국력을 총동원하고 그 과정을 통제했다.[34]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민간 경제보다 국가 경제의 비중이 훨씬 더 높았다. 19세기 말, 60% 이상의 산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경작지, 우랄 알타이와 시베리아의 채광 회사들이 국가 소유였다. 1899년에는 모든 금속 제품의 1/3을 국가가 구매했고 1903 ~ 13년 동안 정부 수입의 25%는 세수가 아닌 국영 기업의 지분 수익으로 충당했다. 1912년, 러시아가 세계 5위의 산업국이 되었을 때, 철도의 68%를 국가가 소유했다. 정부의 외자 유치와 국가 주도 산업화는 고도의 기업 집중, 노동 집중 현상으로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대기업의 성장을 낳았다. 공장제 기계 공업은 상트페테르부르크 · 모스크바 · 키예프 · 바르샤바, 등 몇몇 대도시에서 집중적으로 발전했으며 기업 1개당 노동 집중도 지표에서 러시아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 조선소가 12,000명, 발틱 조선소는 5,000명, 오브호프 제철소가 6,000명을 고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지만, 이 3대 기업은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0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 중 일부에 불과했다. 모스크바의 섬유업 같은 경우에도 6,000명을 고용한 프로호롭스카야 트료흐나야 공장 말고도 1,000명 이상을 고용한 기업이 11개나 더 있었다.[35]

1.4.2. 러시아 산업화의 한계

이렇듯, 러시아의 산업화는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졌으며 그 성과도 상당했으나, 러시아의 산업은 많은 지표에서 열강들에게 뒤쳐졌다. 기계 제조업은 전체 공업 총 생산량의 7%만 차지했다. 여러 기계와 장비, 부품의 국산화를 이루었지만, 러시아는 많은 양의 기계와 부품, 공장 설비 및 농기계 수요의 절반을 외국에서 수입했다. 특히 동력 장비 보유량은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적었다.

1880년대부터 중공업 중심의 공업 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졌으나, 중공업 발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13년에도 직물업과 식품 가공업의 생산량이 전체 공업 생산의 절반에 달했다. 에너지 소비량에서도 이 두 업종은 38%인데 반해 금속 공업과 기계 공업은 39%로 1% 더 높을 뿐이었다. 1900년 기준, 면직 · 견직 · 모직 · 마직을 포함한 직물업은 68만 명을 고용해 러시아 최대의 공업이었고, 제철 · 금속 가공 · 기계 제조를 포함한 금속 공업은 약 38만 명을 고용해 2위였다.

노동 생산성이 크게 증가했지만, 러시아의 노동 생산성은 미국보다 10배 낮았다. 이러한 생산성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하게 벌어져서 1차 대전 직전의 러시아 공업 총 생산량은 세계 5위인데, 1인당 공업 생산량은 미국의 1/13에 불과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생산성 증가율은 9%으로 유럽 최고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여러 나라의 성장율도 5 ~ 8%로 러시아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 혼자 빠르게 성장했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시기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마는 그 영국이나 프랑스도 좋을 때는 3 ~ 4% 이상, 미국과 독일도 6 ~ 8%였다. 대기업 중심의 성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심각한 격차를 만들어냈다. 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들이 등장해 시장을 독점하고 신규 기업의 시장 진출과 중소기업의 성장을 제한했다. 그나마 제분업과 같이 작황의 변동이 심하고 일감이 수확기에 집중된 업종은 막대한 설비 투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전 이전까지 중소기업들의 영역으로 남았다. 다행스럽게도 중소기업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는 중에서도 러시아의 중소기업들은 생산량과 생산성을 증대하고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대규모 제조업이 1893 ~ 1914년간 3배 성장하는 동안 중소기업 생산은 2배 증가한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성장은 성장이었다.

지역별, 산업별 불균형도 극심했다. 철도업과 관련 산업은 크게 성장한 반면에 일반 제조업과 기계 제작은 보잘 것 없고, 식료품 등의 소비재 산업도 매우 취약했다. 유럽 러시아의 일부 지역과 소수 공업 중심지는 크게 성장했지만, 이를 둘러싼 광대한 배후지는 낙후된 채로 남아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러시아는 세계 산업 5위의 경제 강국이었지만, 전체 인구 1억 5,000만 명 중에서 공업 종사자는 42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4%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는 농-공업국으로 평가받지만, 농공업국의 탈을 쓴 농업 국가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자본가 계급은 초기부터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정부에 끌려 다녔다. 생산품의 상당 부분을 정부의 주문에 의존하고 국가의 보호 관세 · 보조금 등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탓에, 러시아의 부르주아들은 서유럽의 동료들처럼 봉건정에 투쟁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보다는 정부에 시종 굴종하는 자세를 취하고 정경유착을 통해 불법적인 이익을 편취하려 했다.

1.4.3. 지역별 산업화

대개혁 이후 30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벨 기계 공장,[36] 오부호프 제강과 대포 공장, 페름 기계 공장과 같은 대규모 제조업 공장들이 성장했다. 그리고 기관차(콜롬나), 증기선(소르모보), 농기계(하리코프, 오데사, 베르쟌스크) 생산과 관련된 대규모 제조업 공장들이 출현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공업 지대는 석탄, 철광, 제철, 군수, 제조업이 발전했으며 유조프카, 술린스크, 크리보이로크, 고를롭카, 나르바, 예카테리나슬라보와 같은 철광과 탄광이 풍부한 도시들에서 막대한 양의 금속과 석탄을 생산했다. 특히나 남부 공업 지대는 신도시나 신규 공업 단지가 많아 기술 수준이 높고 선진적인 기술 설비를 갖추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공업 지대들보다 성장 속도가 훨씬 빨랐다.

원래 러시아의 전통적인 금속 생산지는 우랄이지만, 남부 공업 지대가 우랄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890년대 초, 남부 러시아는 전체 선철 생산량의 20%를, 19세기 말에는 62% 이상을 생산해 금속 생산의 중심지를 우랄에서 남부 러시아로 이동시켰다. 러시아 전체 석탄의 65%는 돈바스에서 나왔다. 석탄은 모든 산업과 운송에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기 때문에 돈바스의 경제적 중요도가 올랐다. 석유 시추와 정유업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를 중심으로 한 캅카스에서 가장 크게 발전했다. 1890년, 2억 4,300만 푸트(약 400만 톤)이던 석유 생산량은 19세기 말에 6억 3,300만 푸트(약 1,000만 톤)까지 늘어났고 러시아는 석유 생산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러시아 중부의 중앙 산업 지대는 섬유업을 비롯한 경공업이 핵심 산업이었으나, 철강, 군수, 기계 제조업도 성장했다. 대표적인 도시는 모스크바며 인근의 야로슬라블, 이바노보, 블라디미르, 탐보프, 오레호보주에보와 같은 도시들도 공업 도시로 성장해갔다. 툴라와 칼루가 일대는 철강, 군수, 기계 제조업도 발전한 산업 중심지이고 갈탄광이 있어 석탄 채광업도 성행했다.[37] 러시아의 산업 중심지라 할만한 곳은 중앙 러시아, 북서부 러시아, 우랄, 돈바스, 그리보로쥐예, 발트해, 폴란드로서 이 지역에서 전체 노동자의 80%가 종사하고 공업 총생산의 75%를 차지했다. 여기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발트해 연안, 바르샤바, 블라디미르, 페트로콥스카야(지금의 폴란드 피오트르쿠프 트리부날스키)는 소위 6대 공업 중심지로 불리었다. 장기 불황이 끝난 1909년부터 대전 직전까지 이 산업 중심지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발전해 나가고 러시아의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도시의 공장들이 향촌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일어나 농민들이 향촌 지역에 새로 생긴 공장에 취직하기 시작했다.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지대를 낮출 수 있는데다 일부 공정은 수공업 외주를 주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자본가들은 망설임 없이 향촌 지역으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새로이 공장을 건설했다. 그리고 철도망의 확장으로 원료 및 제품의 수송이 편리해지고 운임료가 낮아지자, 향촌 지역으로의 공장 이전과 건설은 더욱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중앙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오레호보주에보, 파블롭스키 파사드, 구시 흐루스탈리느이 등의 수많은 공장 마을들이 생겨나고 19세기 말에는 마을 구성원의 50%가 공업 노동자인 마을들이 나타날 정도로 향촌 지역에서 공업의 비중이 증가했다. 산업 혁명 이전에 존재한 수백 개 이상의 수공업 마을들도 변화의 바람을 맞이해 공장 마을로 변화하는 곳이 많았으며 일부는 공업 도시로 성장했다. 그대로 수공업을 유지한 곳에서는 향촌 지역에 진출한 공장들로부터 외주를 받고 수공업 단지나 협동조합을 세워 산업화에 대응했다. 대규모 공업 중심지들과 더불어서 러시아의 향촌 지역에서도 분업화가 이루어진 기계 공장과 새로운 유형의 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1.5. 금융

러시아의 금융업은 철도 건설 사업과 공업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1860년대부터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주요 은행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민간 상업 은행1864), 모스크바 상인 은행(1866)이 있다. 러시아의 대형 은행들은 국가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자본의 집중이 이뤄짐에 따라 금융 대기업들이 등장해 12대 거대 은행이 러시아 전체 금융 자본의 75%를 차지했다.[38]

제국 정부가 설립한 국립 은행들은 금 보유량을 유지하고 통화 발행과 주요 현금 결제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러시아의 금융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국립 은행과 민영 은행을 중심으로 금융망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 금융망에 속한 국립 은행과 주식 회사형 민영 은행들은 정부로부터 국가의 모든 경제 조직에 자금을 조달하는 업무를 맡았다. 국립 은행에는 농민 은행과 국립 귀족 토지 은행(1885) 같은 토지 신용 은행들도 존재했는데, 농민 은행은 어느 정도 농민들의 토지 구매를 돕고 상당한 규모의 수익을 만들어냈지만, 귀족 은행은 귀족들로부터 땅을 담보로 받고 그들의 사치를 위한 대출을 해주는 일이 많았다.

19세기 말에는 모스크바 조합 인민 은행과 같은 신용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은행들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농민과 상공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수익성 있는 금융 상품들을 만들어냈다. 특히나 모스크바 인민 은행은 신협 은행의 상징이자, 대표로 기능하고 보유한 자본을 이용해 농민들을 도와주고 농민들을 위한 기술 지원, 토지 구매 자금 대출 사업을 벌였다.

1890년대에는 70년대에 유행한 기업 설립과 주식 열풍이 다시 일어났다.[39] 그러나 금융업과 철도업에 집중한 70년대와는 달리 이번에는 공업으로 자본이 몰리기 시작했다. 1870 ~ 80년대에도 공업 주식 회사들이 있긴 했지만, 그 때는 경공업 분야에서 출현했던 반면 1890년대에는 중공업계에서 주식 회사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몰린 주식 자본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바쿠 같은 신규 산업 지대에서 새로운 기업과 공장, 광산을 세우는데 쓰였다.

1.5.1. 금본위제 개혁

1890년까지 제정 러시아의 재정과 화폐 가치는 혼란과 어려움을 거듭했다. 지폐는 신용이 낮아서 가치가 불안정하고 금화와 은화는 시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인플레이션은 금을 대가로 시장에 곡물을 수출하는 지주들에게는 유리했지만, 러시아의 자본가들에게는 불리했다. 그래서 국내외 자본가들과 외국 투자자들은 기업 활동과 투자에서의 안전함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금본위제 도입을 요청했다. 재무부의 여러 관료들도 러시아의 금융 경제를 발전시키고 루블화의 가치를 안정시키는데는 금본위제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해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특히나 재무장관 비테는 금본위제로의 전환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로서 러시아에는 신용으로 가치를 책정하는 지폐 대신 가치가 안정적인 귀금속 화폐와 금 보유고에 맞춰서 발행하는 지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당대 러시아의 환경을 생각하면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금본위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금을 보유해야 하는데, 당대 러시아 정부는 세계 최고의 금 생산국인데도 금본위제로 전환할 만큼의 금을 보유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비테는 1894년부터 국립 은행의 금 보유고를 늘리기 위해 무역 흑자를 모으고 30억 금화 루블의 외자를 유치하는 등, 외채까지 쏟아부었다. 그리고 소비세를 도입하여 성냥과 등유, 담배, 설탕과 같은 생필품과 소비재에 대한 간접세를 물려 재정 적자를 해소했다.[40]

1895년에는 재원을 모으기 위해 러시아 역사상 4번째로 국가의 주류 독점을 선언했다. 이전과 달리 이번의 주류 독점제는 알콜 정제와 거래 과정에까지 개입했다. 1895년의 주류 독점 제도는 개인 사기업의 주류 생산은 허용하지만, 국가가 전량을 독점 구매하고 각지에 국영 주류 판매점인 모노폴카를 설립해 이곳에서만 주류를 사도록 강제했다. 또한 정부는 스미노프를 비롯한 일부 주류 기업들을 국영화하여 자체적으로도 주류를 생산했다. 다만, 이 조치는 보드카에만 한정하고 와인과 맥주, 수입산 술을 비롯한 여타의 주류들은 세금만 물리고 생산과 판매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와 같은 강력한 조치로 주류세와 알콜 전매 이익은 매년 급격히 성장해 비테의 재임 기간 동안 연간 3억 6,500만 루블, 후임자인 코코프초프의 시기에는 5억 4,300만 루블로 증가했다. 심지어 1913년에는 주류세와 전매 이익으로 창출해낸 세수가 러시아 1년 예산의 26%나 될 정도였다. [41]

비테의 노력 덕분에 루블화의 가치가 안정되고 3억 루블이던 금 보유고는 1897년에 당대 세계 최대 규모인 10억 9,500만 루블로 증가했다.[42] 1897년, 제국 정부는 막대한 금 보유고에 기반해 금본위제를 실시하고 5루블, 10루블 금화인 체르보네츠, 7.5 루블 폴루 임페리알, 15루블 임페리알과 같은 새로운 금화를 발행했다. 이전에 쓰이던 태환 루블은 당시의 실질 환율에 맞춰 금화 66.3 코페이카로 산정해 새로운 화폐로 교환해 주었다. 즉, 기존의 루블을 새로 발행한 금화 루블과 1:1로 교환해준 것이 아니라 기존의 루블을 평가 절하한 것이다.

개혁은 화폐 발행권을 국가 은행에만 부여하고 통화를 증발할 때는 이에 맞는 준비금과 발행권의 50% 이상의 금 보유고를 준비할 것을 요구했다. 제국 정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금본위제로의 전환이 매우 신중하게 진행된 덕분에 개혁으로 인플레나 디플레가 발생하지 않고 소비재나 여러 생필품의 가격이 오르지도 않았다. 자본가들과 해외 투자자, 재무부가 예측한 대로 러시아의 화폐 개혁은 외국 자본의 유입과 국내 투자를 크게 늘렸으며 러일 전쟁과 세계 대전으로 인플레가 급증하고 정부 재정이 악화될 때도 안전망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프랑스 금융의 투자와 경제 성장의 영향 덕분에 러시아는 꾸준히 금을 확보해서 1913년에는 21억 루블의 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

1.5.2. 외국 자본

세기 전환기에는 외국 자본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자본가들은 러시아의 광대한 시장, 저렴한 노동력, 풍부한 천연 자원, 높은 이윤에 매료되어 러시아에 투자했다.

재무장관 비테는 외국인의 투자를 아예 빈곤 퇴치 수단으로 간주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규제와 장애를 철폐했다. 그의 정책으로 20세기 초의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자본 수입국이 되었다. 1890 ~ 1900년까지 10년 동안 러시아의 공업과 금융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 규모는 2억 1,400만 루블에서 9억 1,000만 루블로 증가했다. 또한 비테가 실시한 1897년의 금본위제 개혁은 불확실성을 낮추고 투자 안정성을 높여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비테의 외자 유치 정책은 수많은 정부 기관과 장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국무 회의에서는 비테의 정책으로 러시아가 외국 자본의 노예가 될 것이며 재무장관이 러시아의 국부를 모조리 팔아버리고 있다는 극단적인 비판이 나왔다. 내무장관 플레베를 비롯한 인사들은 비테의 면전에서 심한 비난을 퍼부었고 플레베와 같은 파벌에 속하지 않은 관료들까지도 비테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비판이 나올 때마다 비테는 외자 유치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룬 미국을 거론하면서 반대파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의 정책 덕분에 90년대 내내 많은 양의 자본이 유입되고 20세기 초의 외국인 자본 총액은 공업 자본 총가치의 9 ~ 14%에 달했다.

1900년대부터 90년대의 투자는 우습게 볼 수준의 외국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1888년에 러시아에서 운영하던 외국계 기업은 16개였지만, 1909년에는 그 수가 269개로 증가했다. 서유럽의 자본가들이 돈바스와 크리보로쥐예에 최신 기술 설비를 갖춘 제철 공장을 설립하고 미국의 농기계 기업인 맥코믹은 류베레츠에 공장을 세웠다. 재봉틀로 유명한 싱거는 파돌스크에 시에 공장을 건설했다. 싱거는 AS와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홍보하는 카탈로그를 뿌렸으며 러시아 전역에 자체적인 제품 판매망을 구성하여 서비스, 판매면에서 다른 기업들보다 앞서 나갔다. 그리고 싱거사의 재봉틀은 품질이 압도적이어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고평가 받았고 수요도 아주 많았다.

러시아에 주로 투자한 국가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의 4개국이며 이 국가들이 투자한 자본이 전체 외국 자본의 96%를 차지했다.[43] 재밌는 점은 4개국이 서로 선호하는 산업이 달랐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주로 금융업을 통해 러시아에 진출했으나, 금속 공업과 기계 제조, 돈바스의 석탄 채광, 석유 시추에도 관심을 보였고 벨기에는 금속, 기계 제조, 금융업에 자본을 투자했다. 영국은 주로 돈바스의 석탄 채광업과 바쿠의 석유 시추업, 비철 금속 채굴업에 투자했다. 독일은 화학, 전기, 금속, 무역, 기계 제조업을 선호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제조업에도 자본이 유입되긴 했지만, 1900년대의 외국 자본은 주로 석탄, 석유, 철광과 같은 광산업과 철도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1900년대 러시아 전체 광산업 주식 자본의 70%가 외국 자본일 정도였다.
1.5.2.1. 외자 유치의 부작용과 허실
외자 유치는 러시아의 경제 성장에 좋은 영향을 미쳤지만,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1913년까지 외국 자본 투자액은 러시아 전체에서 투자된 자본의 40 ~ 50%로 증가했으며 이 어마어마한 자본 투자는 부작용을 야기했다. 국부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국외로 유출되고 사회적으로 러시아의 국부가 해외로 유출되어 간다는 우려가 강해졌다. 레닌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외국의 자본주의자들이 러시아의 부를 강탈해 간다고 비판했으며 슬라브주의자와 모스크바의 기업가들은 정부가 자국 기업들은 내버려두고 외국 기업과 외국 자본가들의 배만 불려준다고 비판했다. 사회적으로는 배외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고 러시아의 산업이 창출해낸 이익이 인민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산업계의 투자를 제한한다는 우려가 강해졌다. [44]

그러나, 외국 자본이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러시아의 지식인들과 인민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다. 1914년에 국외로 송금된 외국인 회사의 이윤은 연간 1억 5000만 루블인데, 러시아 정부가 국채 이자로 지불하는 돈이 2억 2000만 루블이었다. 대중들의 우려와 좌파 세력의 비판과는 달리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인한 국부 유출이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외국계 회사들의 평균적인 수익률은 투자 자본의 4 ~ 7%로 러시아의 기업들이 매년 창출해내는 수익과 별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외국계 기업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할 때마다 ‘특별한 조건’을 명시하기를 원하는 러시아의 ‘관료제’와 협상해야 하고 서유럽과는 다른 러시아 경제에 적응하기 위해 평균적으로 5 ~ 15년 이상을 소모했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제가 막대한 외국 자본의 영향을 많이 받고 국부가 유출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대중이나 보수파 관료, 좌파 세력들의 비판과는 달리 그 정도가 아주 컸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국 자본이 산업 총 투자액의 40 ~ 5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단순히 이익 배당금으로 주는 돈이 적다는 이유로 대중과 좌파 세력을 비웃기는 어렵다. 러시아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의 수와 그 규모, 주요 산업과 금융계에 누적된 외국 자본의 양을 생각하면 당시 러시아인들이 외국 자본에게 경제가 종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매우 타당한 추정이었다.

1.5.3. 러시아의 수공업

수공업은 노동 분화가 적어서 기계가 아닌 인간의 손이 주로 생산을 담당하고 노동자는 오랜 도제 훈련을 거친 숙련 기술이 있어야 하며, 기술별로 노동 위계를 갖는다는 3대 특성이 있다. 이 도제 제도는 모든 수공업 직종에 존재하고 도제 훈련을 통한 일정한 기술 수준을 필요로 한다. 19세기 산업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는 급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적 생산이 확대되어 수공업 공정의 일부가 공장으로 옮겨지고 하청제가 확산되었다.

산업화 시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수공업으로는 제화업 · 제지업 · 직조업 · 의류업 · 금속 · 가죽 · 목공예 · 금은 세공 및 보석 세공, 시계 제작 · 가구 · 도요업 · 회화 · 조각 · 뼈공예 · 양조업 등이 있으며 가재 도구나 생필품 · 장식품 · 그릇 · 가구를 비롯한 각종 공예품과 의복, 신발을 생산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수공업은 산업화로 타격을 받긴 했으나, 공장제 수공업과 가내 수공업 모두 발달했으며 농민들은 다양한 수공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산업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공산품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공장제 수공업은 점점 쇠퇴해갔다. 수공업 외주를 주던 공장들은 점점 그 발주량을 줄였고 수공업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철도가 깔리면서 공산품이 더 빨리, 더 많이 지방에 진출해 나가면서 지역의 수공업이 쇠퇴하고 공예 기술이 사라져 갔다.
1.5.3.1. 전통 문화 부흥 운동이 수공업에 미친 영향
하지만, 19세기 말의 러시아는 전통 문화의 부흥이 이뤄지고 러시아적 가치, 러시아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전시회와 시장에서 그동안 잊혀진 전통 공예품과 미술품이 전시되고 그 가치가 높아지던 시대였다. 장인들이 제작한 민속품이 점점 예술품 취급을 받기 시작하고 당구공 · 도자기 · 융단 · 직물 · 금속 · 석재 · 목재 · 가죽 공예 등의 다양한 공예품들이 생산되었다.

각종 전통 공예 협회들이 등장하고 전통 공예에 관심을 가진 예술가들이 협회에 가입해서 공예품을 제작했다. 협회의 예술가들은 러시아의 향촌 지역을 뒤지고 다니면서 전통 건축물과 디자인, 공예에 대한 정보와 유물, 공예품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수집할 수 없는 것들은 스케치했다. 그런 다음, 수집한 것들을 모방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유행하는 스타일과 결합하는 실험을 전개했다. 이러한 협회들의 활동으로 전통 공예가 유지, 보존되고 새로운 기술과 인력이 유입되어 공예 분야가 활기를 띠었다. 그리고 예술가들 중에 일부는 서유럽의 화풍과 예술에서 탈피한 미술을 추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을 적용한 공예품과 회화를 출품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서유럽주의의 상징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근대화 과정에서 민속 예술과 전통 공예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모스크바는 달랐다. 이전부터 러시아 전통과 슬라브주의의 상징이었던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의 전통 판화인 루복화와 이콘을 비롯한 전통 공예, 민속 예술이 여전히 살아 숨쉬었고 덕분에 모스크바의 예술가들은 민속 예술과 현대 예술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과 예술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예술가들은 러시아의 전통 예술과 유럽의 아르누보 스타일을 결합시켜 자신들이 모던 스타일로 부르는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모스크바의 모던 스타일은 20세기 전환기에 지어진 모스크바의 건축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스테판 랴부신스키 같은 재벌들도 모스크바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에게 의뢰하여 모던 스타일의 저택을 짓기도 했다.[45]

이러한 노력 덕분에 러시아 민속 예술과 전통 공예품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러시아의 민속 예술가 쟈길레프가 초빙한 농민 출신 목공 장인들은 러시아 전통 가옥 건물을 건설하고 목공예품을 제작해 전시회에 출품했다. 파리 시민들은 제대로 정리도 안 한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꾀죄죄한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은 채로 어린애 같은 함박 웃음을 짓으면서 '원시적인 행동'을 하는 '야만인' 목수들에게 매료당했다. 어떤 프랑스인 비평가는 만약 진열품이 판매용이었다면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을 하며 러시아의 목공들을 칭찬했다.

파리에서 좋은 평가를 받자, 파리, 런던, 라이프치히, 시카고, 보스턴, 뉴욕에 러시아의 공예품을 취급하는 전문 상점이 개설될 정도로 유럽과 미국에서 러시아 공예품과 민속 예술품 수요가 상승했다. 1900년대에 서유럽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러시아 전통 인형을 사주는 풍경은 익숙한 것이 되었다. 또한 파리 박람회는 유럽인들이 러시아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파리 출신 디자이너인 폴 프와레는 1912년에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의 농민 의상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의상을 제작했다. 소위 블라우스 루시(blouse russe)가 탄생한 것이다. 그의 의상들은 파리 사교계에 퍼져나갔고 러시아 사라판과 러시아식 의복을 입은 모델들이 패션쇼에서 걸어다녔다.

자본가들도 예술과 전통 공예에 관심을 가져서 협회와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철도왕 사바 마몬토프는 아예 모스크바 주 이브람체보에 마을을 만들어 예술가들을 초빙하고 예술 작품을 제작했다. 수공업의 쇠퇴를 야기한 철도업의 대부인 마몬토프가 전통 공예를 후원한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였다. 그리고 서유럽주의자(자파드니키)로서 러시아 지식인과 부유층 사이에서 전통 공예품을 사들이고 열광하는 것을 자주 조롱하던 안톤 체호프조차 아브람체보에서 만든 가구를 여러 점 구입해 썼다.

러시아 민속 예술과 공예품 제작을 하던 예술가들은 주 소비층에 맞춰서 색감과 디자인을 바꾸기도 했다. 중산층과 부유층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판매하던 이들은 그들의 취향에 맞춰서 농민들이 선호하는 화려한 색상의 디자인 대신에 도시민들이 좋아하는 차분한 색상으로 작품을 칠했고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던 이들은 정반대로 했다. 예술가들이 농민들의 문화를 흡수해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들을 전시회에 내놓자, 이를 관람한 농민들은 충격과 놀라움에 빠졌으며 곧 그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1.5.3.2. 수공업의 생존 전략과 변화
산업 혁명이 일어나자, 수공업은 소매 시장을 겨냥한 전략을 세우고 여러 도시에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다. 양복업, 제화업, 보석 세공업, 시계 제조업, 목공예업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업종의 특징은 수공업 장인이 공방을 소유하고 도시의 고급 소비자를 위한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러시아 장인들은 산업 혁명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추구했다. 수공업자들은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것을 노려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공산품의 침투가 적은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예술가나 다른 장인들과 협업하고 기술을 교환하거나 최신 유행에 대한 정보를 취득해서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또한 장인들은 제품을 고급화해서 중산층과 부농,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판매 전략을 세워 가격이 저렴하고 물량이 풍부한 공산품과의 경쟁을 피하면서 매출을 확보하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콘 장인들이다. 이들은 공산품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전문 화가들과 협업하여 최신 회화 기법과 새로운 기술을 터득하고 미술 시장의 유행에 대해 배웠으며 그 대가로 화가들에게 이콘 제작 기법과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콘을 고급화하고 중산층과 부유층에게 어필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는 성공적이었다. 중산층과 부유층들은 재력을 과시하거나 지성과 교양이 있다는 평판을 갖기 위해서 웃돈을 주고서라도 장인과 화가들이 만들어낸 이콘 작품들을 구매했다.

이런 식으로 장인이 생산하는 공예품이 고급화되고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러시아의 중산층과 부농들은 공산품보다 장인이 만든 ‘공예품’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방에 주문하거나 시장에서 공예품을. 예를 들어 모스크바의 중산층 상인 가정에서는 장인이 정성들여 만든 가구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수공업자들은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공방의 규모를 줄이고 임대료가 저렴하며 원료를 구하기 쉬운 곳으로 이주했다. 수입이 높은 장인들은 제자를 들이거나 여러 명의 직원을 고용하기도 하고 주변의 장인들에게 외주를 주거나 서로 합동으로 물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또한 장인들은 서로 기술을 교환하고 노하우를 공유했으며 제자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원동기를 비롯해서 개인이 사용할 수 있거나 규모가 작은 기계 설비와 장비를 도입해서 생산성을 높였다.

수공업의 생존에는 젬스트보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역의 전통 문화와 공예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젬스트보는[46] 예술가들을 초청해 장인들과의 협업을 주선하고 지역의 공예업을 지원했으며 도시와 시장에 상점을 세워서 공예품을 판매했다. 재정 및 기술 지원, 판매 루트 개척을 젬스트보가 해준 것이다. 도시의 시장과 소매점, 젬스트보에서 설립한 상점에서 공예품이 취급되기 시작하자, 이전보다 상품 판매가 편리해지고 수익성도 개선되었다. 러시아 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수공업 마을과 여러 마을에서 농촌 수공업이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갔으며 지역별로 특색 있는 전통 공예들이 젬스트보와 공예 협회의 지원을 받아서 전통을 지켜나가고 발전시켰다.[47]

일부 수공업은 하청제와 선대제를 이용해서 살아남았다. 산업화와 기술 개발의 진전으로 점점 하청 발주량이 적어졌지만, 여전히 일부 공정은 수작업이 필요해서 일부 수공업 공방과 장인들은 공장제 수공업이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 바뀌는 중에도 오랜 기간 버텨냈다. 예컨대 인쇄업의 경우, 1870년대에 인쇄기를 도입하고 1890년대부터 공장에서 인쇄 공정을 시작했지만, 1906년에 문선기를 도입하기 전까지 문선 작업은 여전히 숙련된 식자공들의 수작업을 필요로 했다.

상술한 여러 수공업의 고급화, 각종 생존 전략과는 반대로 의류업과 제화업 분야는 공장의 하청을 받아 중저가 기성품을 대량 생산하는 전략을 취했다. 러시아의 상업 자본가들은 규모가 커지고 수요가 증가하는 내수 시장에 의류와 신발을 공급하기 위해서 여러 의류, 제화 공방에 하청을 주어 중저가의 중질품 기성복, 기성화를 찍어냈다. 이러한 하청제의 확산은 의류업의 성장과 의류 수공업의 유지에 기여해서 의류업은 1897년에 34만 6000명을 고용해 직물업과 금속업에 이어 러시아에서 3번째로 많은 노동자를 고용했으며 수공업에서는 최고였다.[48]

그리고 이전보다 발주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공장에서 수공업 공방에 외주를 주었기 때문에 목재, 가죽, 금속업을 중심으로 하청제가 폭넓게 이뤄지고 하청 공방들이 존속했다. 산업 혁명의 시대가 왔지만, 수공업은 살아남은 것이다. 20세기 초, 기계 공업이 가장 발전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조차 수공업 노동자의 수가 공장 노동자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았다. 게다가 많은 장인들이 세금을 피하려고 센서스나 경찰서의 등록에 응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파악된다. [49]

그러나, 수공업이 이전 시대보다는 성장세를 이뤘어도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감소했다는 점은 사실이고 기계 공장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일도 많았다. 19세기 말에는 대규모 기계 공업의 발전으로 상황이 나빠져서 수공업자들이 주요 산업과 생산 공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수공업자들은 대규모 기계 공업이 침투하지 못한 직종으로 전환하거나 대기업의 하청업자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산업화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었고 공장들은 점점 더 많은 분야에 진출하여 수공업자들의 시장을 잠식해 나갔다. 20세기 초에 금속 공예품 생산에 필요한 철과 원동기를 비롯한 기계의 연료 가격이 상승하여 소규모 공방까지 그 숫자가 감소하고 개인 수공업자의 수가 증가했다. 이는 공방 운영을 그만 두어 인건비 등의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 하락을 감수하겠다는 절망적인 노력이었다.
1.5.3.3. 분야별, 지역별 수공업
금속 공예의 경우, 모스크바의 은 세공 장인과 보석 세공 장인들은 전통 공예를 사랑한 상인 부르주아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은제 식기와 사모바르, 바이킹 롱보트 모양의 접시, 술잔, 고대 러시아 스타일의 장식과 이콘 덮개들을 제작했다.

1870년대부터 가업을 이어 귀금속 공예와 보석 세공 분야의 거장이 된 카를 파베르제는 러시아의 양대 수도간의 취향 차이를 잘 파악한 사업가였다. 파베르제는 슬라브주의와 전통 문화의 중심지인 모스크바에 대상인 출신 자본가와 부르주아들을 공방과 상점을 개설해 중산층과 부르주아들이 구매할 수 있는 가격에 전통 공예품을 판매했다. 반대로 서유럽주의와 귀족 문화의 중심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서유럽의 고전주의 양식이나 로코코 양식으로 고가의 보석 세공품을 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방에서 제작하는 파베르제의 작품은 황제와 대귀족, 황족들이나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비쌌고 그 유명한 파베르제의 달걀은 1885년부터 1917년까지 총 50여점을 제작했다.

파베르제에게 밀리긴 했지만, 모스크바에는 재능 있는 예술가와 거장들이 많았다. 그 중에 한 명인 세르게이 바쉬코프는 모스크바의 공방에서 기독교 공예품을 제작하는 금, 은 세공 장인이었다. 바쉬코프는 러시아의 전통 예술과 자신이 독특하게 변형시킨 모던 스타일을 결합하여 예술적 가치가 높고 아름다운 성물을 제작했으며 교회 미술을 주류 문화와 결합시켰다.

19세기 말, 모스크바 젬스트보의 지원을 받는 세르기예프 수공업 단지가 생겼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공예품을 생산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농부 인형이었다. 러시아 농부 인형 공예의 거장인 말류틴과 즈베즈도츠킨은 성모상과 농부 인형 제작의 전통을 이어나갔고 세르기예프에서 생산한 러시아 농부 인형은 급속도로 인기를 얻었다.

러시아 향촌 지역의 소규모 개인 공방을 운영하던 장인들은 이러한 인기를 노려 러시아 민속풍 인형들을 주문 제작했으며 그들은 50가지 디자인을 가진 인형을 아주 훌륭하게 제작해냈다. 1900년에 러시아 농부 인형이 파리 만국 박람회에 전시되어 좋은 평가를 받자, 해외 각지에서 러시아 인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서 장인들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해외 각국에 인형을 수출했다.

뱌트카 주의 딤키이 마을에서는 예전부터 여성들이 화려한 색깔로 채색한 말, 기마병, 새 모양의 점토로 만든 장난감을 제작했다. 19세기 말에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든 석회 재질의 인형들이 시장에 풀리면서 이들이 만들던 점토 장난감들은 시장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갔지만, 화려한 스커트를 입은 <장사꾼>, <감시인들>, <물을 나르는 사람들> 등의 인형 작품들은 향촌과 도시의 시장, 그리고 민속품 수집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으며 해외에 수출되기도 했다.

러시아하면 떠오르는 마트료시카는 인형 장인 말류틴의 작품이 1891년에 세르기예프에서 창조한 것이다. 다만, 창조라고 하기에는 모방의 영향이 짙었는데, 사실 마트료시카는 일본 인형에 영감을 받은 마몬토프가 러시아 버전의 일본 인형을 만들어보라는 의뢰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말류틴이 디자인한 마트료시카는 출품 직후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어 1890년대 말까지 매년 수백만 개를 생산했다. 그리고 말류틴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가구, 도자기, 책의 삽화, 무대 디자인, 건축물 등을 제작하고 새로운 기법도 개발했다.

므스쵸라와 팔레흐 마을의 이콘 장인들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이콘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존에 만들던 이콘 대신에 광택이 나는 작은 삽화와 석고를 섞고 종이를 이겨 만든 액자로 이콘을 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추구함으로서 이콘 장인들은 선조들로부터 배운 정교하고 뛰어난 기술과 지역의 독특한 미술 전통을 보존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그줼 도자기도 꾸준히 성장하고 해외에 수출했으며 기술력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로모노소프 도자기는 70년대까지 침체를 겪었으나, 알렉산드르 3세의 지원과 혁신, 디자인 개발 덕분에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성공해서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고 100년이 넘는 역사에 걸맞은 명성을 누렸다.[50]

유목민적, 이슬람적 전통을 가진 중앙아시아와 볼가 강 유역에서는 비단 및 융단 직조, 금실 자수, 가죽 세공, 보석 세공, 도자기와 구리 그릇 생산 등의 실용적인 제품을 제작하는 전통 공예가 유지, 발전했다.

1.5.4. 러시아의 독점 자본주의

자본주의 무한 경쟁으로 발생한 위기와 시기별로 터진 불황은 생산을 집중시키고 독점을 만들었다. 독점 기업의 설립자들은 상품 판매 조건, 대금 지불 기간, 제품의 품질, 가격을 결정했다. 그리고 판로와 원료를 서로에게 분배하고 이익을 기업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독점 기업은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카르텔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지만, 러시아의 독점 기업은 대다수가 신디케이트(기업 연합)였다. 해외 자본도 독점 자본주의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일부 카르텔의 배후에는 프랑스와 영국 자본. 독일 자본이 있었다. 독점 기업 간의 경쟁도 치열해서 이들은 시장 독점을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시장을 지배하려 했다.

독점 기업들은 생산량을 억제하고 제품 가격을 인상했다. 예를 들어 금속 공업 신디케이트인 프로다메트가 처음 체결한 협정은 가격 인상 담합이었다. 이후에 프로다메트는 자신들이 정한 생산 기준을 지키지 않는 가맹 기업들에게 벌금을 물리는 규칙을 제정했다. 1911년, 프로다메트는 레일 생산을 20% 줄이고 가격은 40% 인상했다. 프로다메트는 자기들 외에 다른 기업이 금속 시장에 진출하는 것까지 막았다. 프로다메트의 출범 이후, 단 한 개의 대규모 금속 기업도 설립되지 못했으며 가입하지 않은 공장들까지 문을 닫게 만들었다.

석유 독점 기업들도 프로다메트와 같은 방법을 썼다. 그들은 담합을 해서 1902 ~ 12년 동안 원유 시추량을 줄이고 석유 1푸트당 가격을 6 코페이카에서 38 코페이카까지 인상해서 석유 기업들의 이윤을 크게 늘렸다. 그들은 불황의 여파인 것처럼 석유 시추량을 줄이고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다.
1.5.4.1. 독점 기업의 형성과 활동
러시아 최초의 신디케이트는 1875년, 8개 보험 회사들이 체결한 공동 요금 협정이며 이 협정을 체결한 8개 기업은 자신들이 만든 조건을 시장에 강요하기 위해 협정에 가입하지 않는 다른 보험 회사들과 경쟁을 벌였다. 러시아 최초의 카르텔은 188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 은행과 러시아 대외 무역 은행이 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신디케이트와 카르텔, 트러스트 같은 독점 자본주의는 세기말에 더욱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공업 분야에서는 1882년에 5개의 강철 철도 레일 생산 공장들이 5년 기한으로 레일 제조 기업 연합을 결성한 것을 최초의 신디케이트로 간주한다.

독점 기업들은 자기가 속한 산업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레일 제조 기업 연합은 철도 레일 제조업 전체를 통제했다. 이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철로 주문과 공급이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서 여러 공장과 기업들이 철도 레일 부설 도구 제조 공장 연합(1884년), 철교 건설 연합(1887), 철도 장비 생산 연합(1889)을 결성했다.

러시아 산업계에서 철도업이 가장 빨리 독점 자본주의로 나아간 것은 철도 건설이 러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산업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철도업은 대부분의 공장이 새로 건설한 것들이고 숫자도 많지 않아서 제품 생산, 시장 분할, 가격, 판매 조건에 대한 담합이 용이했다. 이런 식으로 공급자의 수가 적고 수요는 많은 분야는 담합이 용이해서 독점 기업들의 형성이 다른 분야에 비해서 빠른 편이었다.

1888년, 철도업에 이어서 여러 철압연 공장, 철사 제조 공장, 푸틸로프 금속 공장이 가격과 시장 분할에 대한 카르텔 협정을 체결했다. 석유 산업에서는 브라노벨사와 로트쉴드(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업들이 모여 신디케이트를 형성하고 1897년에 국제 석유 협정에 참여했다.

1901년, 러시아 최대 규모의 신디케이트인 <러시아 금속 공장 제품 판매 협회>, 즉 <프로다메트>가 탄생했다. 프로다메트는 압연 제품 분야에도 진출하고 철도 레일 공장을 포함한 30개 공장을 합병해 시장을 독점하려 했다. 1904년에 프로다메트는 러시아 남부에서 생산하는 금속의 60%를 장악하고 점차 그 양을 늘려나가서 거의 80 ~ 90%를 독점했다.

1903년, <증기 기관차 제조 공장 협의회. 프로드파로보즈>가 설립되어 증기 기관차 시장을 장악했다. 1904년, <프로드바곤>과 <그보즈드>가 설립되어 철도 차량 전체 주문량의 90 ~ 97%를 장악했다. 1909년에 설립한 <프로두골>은 돈바스 지역 석탄 채굴의 60%를 장악하고 나중에는 거의 모든 석탄 산업을 통제했다. 1912년,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 생산하는 주철의 75%를 9개 금속 공장에서 생산했다. 이 9개 공장은 남부 지역 금속 노동자들의 대부분을 고용하고 남부에 존재하는 증기 기관의 80%를 가동했다.

석유 가공 제품의 65%를 6개 대기업에서 생산했다. 1912년, 러시아에는 8개의 증기 기관차 생산 공장과 15개의 차량 생산 공장이 가동 중이었다. 1900년부터 1910년간 이러한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카르텔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여러 농산물 가공 회사와 대기업의 소유주들이 황족들이었다. 이들은 여러 은행들과 선박 트러스트인 로피트, 조선업 협회 <루스수드>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대주주였다, 주요 산업 분야에서 황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막강했던 것이다.
1.5.4.2. 각 분야별 독점 기업
석유 산업의 대표적인 독점 기업 형태는 트러스트였다. 이들 중에 브라노벨사가 참여한 <노벨 - 마주트>는 석유 산업을 상당 부분 지배해서 시추, 정제, 운송, 판매 과정을 통제했다. 1912년, 러시아 - 아시아 은행과 국제 상업 은행의 주도하에 브라노벨사에 대항하는 <러시아 총 석유 회사>가 설립되었는데, 이 회사는 러시아 석유의 27%를 장악했다. 그리고 외국계 석유 기업 트러스트인 영국 - 네덜란드 트러스트도 러시아 석유 시장의 지분을 이들과 나눠 가졌다.

경공업의 경우, 석유나 철도, 금속 공업 같은 중공업과 달리 경공업은 독점 기업의 형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허나, 경공업 분야에서도 점차 카르텔과 신디케이트들이 생겨나고 면방적 공장들을 합병한 <크노파> 그룹과 같은 트러스트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경공업 독점 기업체들은 다른 분야의 독점 기업들과는 달리 자기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식료품 공업에서는 신디케이트 <드로쥐>, 제분 공장 소유주들의 가격 협정, 증기선 회사 <오키안>의 주도로 설립한 소금 독점 기업들이 경공업 분야를 대표하는 독점 기업들이다. 1913년에는 담배 트러스트도 설립되었는데, 시장을 독점하지 못한 다른 경공업계 독점 기업과 달리 담배 트러스트는 담배 산업의 80%를 통제했다. 그리고 담배 트러스트의 설립에는 러시아 - 아시아 은행이 관여했다. 하천 운송, 해운업 분야에서는 20개의 독점 기업들이 설립되었고 그 중에서 <로피트>는 아조프 해와 흑해의 물류를 지배했다.

제당업 신디케이트(1887년)는 자본가들이 중심이 된 다른 신디케이트와 달리 연합에 참여한 제당 공장 소유주들의 대다수가 대지주들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대지주들이 사탕무를 대량으로 재배해서 자체적으로 원료를 조달하고 설탕을 제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7년, 러시아 전체 제당 공장 226개 중에서 206개 공장이 연합해서 제당 산업 협회를 설립했는데, 협회는 국가의 설탕 생산을 완전히 통제하고 정부의 공개적인 비호를 받았다.

1895년, 정부는 제당업 자본가들을 위한 법령을 반포했다. 재무부는 제당 공장주들과 함께 러시아 국민 1인당 연간 설탕 소비 기준량을 10.5 파운드로 결정하고 이 기준을 초과해서 생산한 설탕은 국외로 수출해서 러시아의 시장 가격보다 낮은 덤핑 가격으로 판매할 것을 강제했다. 국내 설탕 가격이 1 푸트당 6 루블 15 코페이카라면, 런던에서는 2 루블 38 코페이카이고 영국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은 92 파운드였다. 이 법령의 제정은 제정 러시아 정부가 제당 카르텔의 생산 독점과 가격 담합, 공급 조정을 합법적으로 허가해준 것이었으며 만약 카르텔의 명령을 거부하고 생산량을 늘리거나 몰래 자기 몫 이상으로 생산하는 기업의 설탕을 시장에서 퇴출시킬 수 있게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융업에서도 독점 기업들이 나타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은행들은 전국에 지점을 두고 확장해 나갔으며 소위 3대 은행이라 불리는 <러시아 - 아시아 은행>, <페테르부르크 국제 은행>, <아조프 - 돈 은행>은 특히나 확장에 적극적이었고 국내 은행 전체 자산의 절반을 이들이 소유했다. 1914년, 러시아에는 주식회사 형태의 47개 상업 은행이 운영 중이었고 13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8개는 모스크바, 나머지 26개는 지방에 소재했다.

은행 독점체들은 기업 합병과 투자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했다. 러시아 - 아시아 은행은 여러 군수 기업, 모스크바 - 카잔 노선을 포함한 철도 노선, 담배 트러스트, 러시아 총 석유 회사 등의 기업들을 통제했다. 페테르부르크 국제 은행은 조선업의 루스수드, 금속, 광산, 유리, 섬유, 철도 기업들, 소금 독점 기업체 <오키얀>을 통제했다. 그리고 국제 은행은 브라노벨사가 주도한 트러스트, 영국 – 네덜란드 석유 트러스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아조프 - 돈 은행은 프로다메트와 프로드우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우랄의 일부 금속 기업들, 술린스크 금속 공장, 돈바스의 수은 채굴 기업, 철도 회사, 섬유 기업에 자본을 투자했다.

1.6. 인프라

1.6.1. 철도

1880년대 중반부터 제국 정부는 철도 기업들로부터 철도를 매입하는 한편[51], 국가 재정을 소모해 새로운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철도는 금속, 석탄, 목재, 석유 등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유발하고 다양한 산업의 발전에 기여하여 국내에서 채굴되는 석탄의 36%, 석유의 40%, 철의 40%를 철도업이 소비했다.[52] 그리고 철도를 유지하려면 기관사, 차고와 철도 선로 운영 노동자 등 숙련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철도업은 노동 시장의 확대에도 기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러시아의 철도는 수도권과 지방을 하나의 경제망으로 연결하고 시장 경제를 형성했으며 인구 이동을 촉진시켰다. 1891년, 러시아의 총 철도 길이는 28,000 베르스타[53]였으며 1899년에는 철도의 길이가 58,000 베르스타로 증가했다.[54] 러시아의 철도 건설 사업은 나날이 그 규모가 커져서 80년대 초에는 연간 1500 베르스타, 1895 ~ 1899년에는 연간 3,000 베르스타, 1900년 ~ 1905년 동안에는 연간 2,000 베르스타를 부설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영국과 독일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철도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또한 제국 정부는 오데사, 리가, 리예파야를 비롯한 발트해와 흑해의 항구들로 이어지는 새로운 노선들을 부설하고 농산물을 국외로 수출했다. 1870년대 말부터 가설하기 시작한 산업용 철도망은 돈바스와 크리보로쥐예, 우랄, 캅카스, 사마르칸트까지 이어졌으며 이렇게 가설한 철도망을 통해 러시아는 석유와 금속, 광물, 목화와 같은 원료와 재화를 공업 중심지와 수출 항구로 수송하고 각 지역의 경제 성장을 촉진시켰다.[55]

그러나 러시아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철도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1895년 기준, 러시아의 철도화율은 독일과는 53배, 영국에 비해서는 66배나 낮았다. 전체 철도 길이는 60,000km지만, 영토에서 철도가 차지하는 비율은 심각하게 낮았던 것이다. 운임도 서유럽 국가들보다 높았고 사마르칸트에서 오는 목화는 영 · 미의 화물선이 싣고 오는 목화보다 훨씬 비쌌다.

2. 반론

제정 말기에 농노해방 이후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러시아 농민 및 노동자를 포함한 하층민들의 전체적인 생활수준이 극도로 감소했다는 주장은 80년대에 이미 주류에서 벗어났고, 해당 문서 일부분은 논쟁 중인 구 사관의 내용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정 러시아의 노동자 및 농민 빈곤, 농업 위기에 대한 전통주의적 관점은 20세기 초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소수의 부농과 다수의 빈농으로 양극화와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있는 대다수의 '농민 프롤레타리아'가 도시 노동자 계급에 합류하여 전위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56] 이러한 이론은 초기 소련 역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서방의 반공주의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57] 즉 농민과 노동자 계급은 수동적이고 후진적인 피착취계급이자 미래의 혁명계층이어야만 했고 그 이외의 해석은 존재할 수 없었다.

서구학계의 경우도 초기 소련 학자들의 이론을 접했고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게르센크론은 "러시아 농민들이 농노제 시절에는 귀족과 국가에 의해서 가혹하게 수탈당했으며, 농노제 폐지 이후에는 턱없이 적은 토지와 그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토지상환금 지불 의무를 지게되었으며, 또한 차르 정부가 공업화를 위해 곡물을 수출하면서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했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이는 리처드 파이프스 등이 발전시켜 나가면서 (구체적인 정도나 규모는 같은 노선의 학자들끼리도 큰 논쟁이 있지만) 제정 러시아사에 대한 전통주의적 사관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올랜도 파이지스 정도를 제외하면 제정 말기 동안 전체 농민의 생활수준의 지속적인 감소를 주장하는 전통주의자들도 기존 주장의 정도나 규모가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인정하는 편이고 기존의 착취관계나 후진성 논란에서 벗어나 맬서스 트랩과 이것이 유발하는 사회 갈등을 강조하는 신맬서스주의쪽으로 다수 넘어간 추세다.

문제는 주장한 당사자들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결과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자료가 바로 그 제정 시대 러시아 중앙통계위원회, 귀족원, 지방자치단체[58], 민간학술기관 등에서 만들거나 이것들과 주지사의 정기보고서 자료를 기반으로 후대 학자들이 재구성한거라서 기본적인 신뢰성이 낮고 정치적 이유로 제작 과정에서부터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념적, 정치적 이유로 무시돼서 그렇지 반증하는 통계자료들도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많다.

통계자료를 제외하더라도 인텔리겐치아를 비롯한 당대의 엘리트들은 농민들을 수동적이고 후진적인 존재로 보았고 냉전기의 학자들도 이를 계승했지만, 그 대부분이 제대로 된 연구와 증거가 없는 이념적, 정치적 이유로 만들어진 프레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서 상기 내용에도 언급되어있는 나무 쟁기는 러시아 농민들의 '후진성'의 상징으로 바로 그 제정 시대때부터 오랫동안 조롱받아왔지만 현실은 나무쟁기가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토양, 가축, 농작물에 가장 적합했다로 결론이 난 상태다.

이것은 러시아 농민공동체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농민공동체가 '평등하고' '사회주의적'인 기구라던가 사유재산권과 개인의 이니셔티브를 막아서 농업향상을 저해했다던가 하는 식의 묘사는 이념적 이유[59]로 지나치게 프레임화가 되었다. 실제로는 농민공동체도 유능해서 농업개선 및 농민의 비농업 활동에 도움이 된 쪽도 있고 반대로 무능해서 방해가 된 쪽도 있고, 공유지를 더 선호하는 쪽도 있었고 사유지를 더 선호하는 쪽도 있었고, 강력한 통제력으로 소속 농민들을 옳아매는 쪽도 있었던 반면 사실상 그냥 느슨한 마을 친목 모임이었던 것도 있었다. 러시아가 원체 거대한 국가라 다양하고 무수한 극단적 예들이 나오는데 결국 케바케였다는 것.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조선의 노비제와 조선 말기 농민의 생활수준에 대한 주장조차도 아직까지 논쟁 중이고 오늘날에도 정치적, 이념적 이유로 악용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조선보다 몇 배나 거대한 러시아 농노제나 농민의 생활수준에 대해 확고하게 일치되는 정설이 나오긴 힘들다. 더 나아가자면 러시아의 경우는 체급이 원체 큰체라 "평균치를 내는게 가능한가?", "설령 가능하더라도 이게 의미가 있나?"라는 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애시당초 제정 말기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강조되는 이유는 그 제정 말기의 혁명가들과 초기 소련 학자들이 농민 혁명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1970~80년대부터 이념적 해석이 지양되기 시작하면서 혁명의 원인인 (1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하층민들의 빈곤설이 점점 사그라들던 추세다.

3. 참고 문헌 및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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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보로시야와 캅카스 이북[2] 중농과 부농이라 간주할 만한 집단은 1903년에 전체 농민의 11%, 1910년대에는 16%이다. 개인 영농을 하는 농가는 10 ~ 20%였던 것으로 보인다.[3] 1890년대 말에는 약 350만 명의 농업 노동자가 농촌에서 일했다.[4] 러시아 구력 기준 10월 14일 ~ 4월까지[5] 이러한 현상은 훗날 산업화를 하는 일본이나 대한민국에서도 발생하였는데 일본의 경우 곡물가격의 하락 혹은 안정화를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산미증식계획을 추가로 실시하였고, 대한민국은 통일벼의 보급, 혼분식장려 등의 정책을 폈다.[6] 후발산업화국가에게 있어서 가격경쟁력을 위한 저렴한 노동력은 필수였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저렴한 곡물이 뒤따라야했다. 물론 이는 농촌의 파괴와 농민의 희생이 뒤따라야 가능했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기에 사실상 전쟁에 준하는 수준의 도시의 농촌 착취가 일어나게 된다. 괜히 후발산업화국가치고 농촌사회가 파괴당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 게 아니다. 물론 이게 지나칠경우 국가 입장에서도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표적인 예시로 들 수 있는 새마을운동과 같이 농가의 소득증대를 통해 억제 내지 속도조절을 하고자 했으나, 동시기 도시의 소득증대속도와 폭이 그보다 훨씬 컸기에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7] 1879년생인 트로츠키가 소년~청년기에 겪은 일이므로 대략 니콜라이 2세 재위 초기에 해당한다.[8] 트로츠키의 아버지 역시 부농이었다.[9]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애써 번 돈으로 사치품이나 산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금융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은행이 개개인의 삶에 밀착하지는 못했던 당시 러시아의 상황, 게다가 도시에서 모은 돈을 가지고 시골(고향)로 돌아가야 하는 이주노동자의 입장을 생각하면 대량의 현금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는 휴대성과 환금성, 실용성이 좋은 물건으로 바꿔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유용하게 쓰면서 뽐내기도 좀 하다가, 돈이 필요해지면 다시 시계를 팔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10] 1900년대에 곡물의 평균 수확량이 프랑스의 50%, 독일의 30% 정도였다는 비교도 있다.[11] 20세기 초, 전체 농지의 90%가 곡물을 재배했다. 19세기 후반과 비교해 목화의 파종은 112% 증가했으나, 아마의 파종은 11% 감소했다.[12] 다만, 공동체적 토지 소유, 즉 미르 체제가 생산성의 발달을 가로막았다는 견해는 19세기 후반에도 찬 · 반 양론이 엇갈렸다.[13] 미국산 곡물은 질적으로도 우수했다. 1911년 기준, 미국에서 수출하는 밀의 81.2%가 밀가루였던 반면에, 러시아는 97.9%의 밀이 제분을 하지 않은 낟알이고 2.1%만 밀가루였다.[14] 4포제, 6포제, 8포제 같이 완전 연작 상경을 하지 않더라도 60 ~ 80%를 경작하고 나머지는 목초지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15] 프랑스의 경우 소유지 4.55 데샤티나 미만의 농가가 71.4%, 영국의 경우 7.5 데샤티나 미만 소유 농가가 55.3%였다.[16] 또 다른 이름은 옵시나(о́бщина)[17] 여럿이서 1명에게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할시에는 불이익을 주는 관습인데, 농가 소득이 감소하고 삶이 어려워지다보니 빚을 갚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채권자들까지 경제적 어려움에 몰렸다.[18] 대표적인 것이 농민의 가계 소득 향상, 법적 지위 개선, 개인 영농으로의 변화와 자영농 육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19] 제국 정부가 이런 식으로 나온 이유는 미르 해체가 농민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이어진다는 우려 때문이었다.[20] 국가재산부는 원래 정부 소유의 토지나 삼림, 각종 부동산 등을 관리하는 부서였으나, 1890년대초에 농업부로의 변화를 거쳐 거의 농업부나 다름 없었다. 이 작업은 알렉세이 에르몰로프(1893 ~ 1906)가 해내었다. 에르몰로프는 러시아의 농촌에 윤작을 도입하기 위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고 관련 서적을 집필한 적도 있다. 그리고 에르몰로프는 비테와 함께 수년간 농업 개혁을 준비했다.[21] 10월당은 지주, 우파 지식인, 자본가, 귀족의 연합 정당에 가까워서 지주와 귀족들은 토지 개혁을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자본가 의원들은 토지 개혁과 미르 해체를 찬성했다.[22] 러시아의 전체 농가에서 토지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공동체는 전체 농가의 25%이고 재분할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75%였다.[23] 한국의 농가도 그렇지만, 자기 경작지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다보니 토지 비옥도, 접근성, 하나의 농지에서 각자가 보유한 비율, 토지 보유량 등, 온갖 문제가 겹쳐서 갈등이 심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4] 토지 정리 문제도 있고, 토지가 따로 따로 떨어져 있으면 효율이 낮기 때문에 이렇게 손을 쓴 게 아닐까 합니다.[25] 세부적으로 116만은 자영농, 111만은 공동 임대, 94만 데샤티나는 협동조합이 임대했다.[26] 혁명 직후에는 토지의 국유화와 무상 분배가 이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한동안 농민 은행의 이용률이 매우 저조했다.[27] 토지의 17%는 개인 농민, 18%는 미르, 65%는 공동 구매자들이 구매했다.[28]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은행이 농민들에게 대출해 준 자금은 10억 루블이 넘는데 체납액은 고작 1,800만 루블이었다. 1909 ~ 1913년 동안 은행은 연간 20,000 ~ 35,000데샤티나의 토지를 압류했는데, 이는 은행 대출을 이용해서 구매한 토지의 2%도 안 되는 수치였다.[29] 1906년에 농가에 대한 농업 기술 지원을 위해 소모한 비용은 370만 루블이고 1908년부터 지출이 증가해 1913년에는 1,620만 루블을 소모했다.[30] 유럽 러시아 지역의 곡물 수확량은 1901 ~ 1905년에는 평균 32억 푸트였지만, 1913년에는 42억 6,000만 푸트로 증가했다.[31] 풍년에는 거의 40%까지 차지했다.[32] 같은 기간에 영국은 2.4%, 프랑스는 1.6%, 독일은 4.9% 미국은 3.3%였다.[33] 최신 기술과 설비의 도입도 타국보다 용이해서 러시아의 공장에서 영국보다 더 최신식의 기계를 운용하기도 했다.[34] 경우에 따라서는 심할 정도로 경제에 개입하고 자금을 공급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을 지원했다.[35] 종업원 100명 이하의 중소 기업이 전체 기업에서 20%도 안 되던 반면, 1,000명 이상의 대기업이 전체 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가 넘었다.[36]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설립자가 노벨상 제정자인 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인 임마누엘 노벨이다.[37] 툴라는 러시아의 유서깊은 군수 공장인 툴라 조병창이 있는 도시로 조병창에서는 러시아의 수많은 무기를 개발, 생산했다.[38] 1875 ~ 81년에는 5대 거대 은행이 러시아 전체 은행 자본의 절반을 차지했다. 당시의 러시아 최대 은행은 볼고 - 코마 은행이다.[39] 1893 ~ 1900년에만 주식 회사 수가 648개에서 1,369개로 증가할 정도였다.[40] 1890년대에 간접세는 총 42.7% 인상하고 토지세와 인지세도 인상했다.[41] 1897년의 러시아 1년 예산이 15억 루블인데 주류세와 알콜 전매 이익이 3억 루블을 넘었으니 국가 재정에서 주류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난 것이었다.[42] 이는 당시 러시아에서 유통하던 지폐의 전체 총액(11억 2,100만 루블)에 근접한 가치였으며 프랑스, 영국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1897년, 프랑스는 4억 7,870만 루블(19억 1,500만 프랑), 영국은 2억 260만 루블(3,213만 5,000 파운드)를 보유했다. 언뜻 보기에는 루블의 가치가 프랑보다 높고 파운드보다 낮은 것처럼 보이지만, 당대에는 정부가 개입해서 자국 화폐의 가치를 조절하는 일이 많아서 환율의 변동폭이 매우 크고 시기별로 돈의 가치가 달랐다.[43] 20세기 초의 외국인 투자 총액을 보면, 프랑스가 31%, 영국이 24%, 독일이 20%, 벨기에가 13%였다.[44] 러시아 산업에 투자된 외국자본은 1890년 2억 루블에서 1900년 9억 루블로 증가했다. 20세기 초 기준, 러시아 경제에 투자된 자본 중에서 외국 자본은 30%를 넘었고, 공업 부문에서는 45%가 넘었다. 1913년, 국내 투자는 민간 투자 36억 루블을 포함한 140억 루블이고 외국인 투자는 민간 투자 17억 루블을 포함해 76억 루블이었다.[45] 사치스러우면서도 소박하고 금욕적인, 상극의 성질들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랴부신스키의 저택은 표도르 쉐흐텔이 건축을 맡았다.[46] 젬스트보에는 전통 문화와 공예에 관심이 높은 슬라브주의자들이 많아서 산업화로 지역 문화가 사라져가는 것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47] 대표적인 곳이 세르게예예프 수공업 단지이다. 그리고 지도나 그림을 새긴 목재 그릇을 제작하는 호흘롬의 목공예도 니제고로드 주 젬스트보의 지원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48] 수공업 노동자의 대부분은 20명 이상의 직원이 일하는 ‘공장’으로 분류되지 않는 소기업, 소규모 공방에 고용되어 있었다.[49] 1890년에 200만이었던 수공업 노동자는 1900년, 275만 명으로 37% 증가했고 동 시기 공장 노동자는 170만 명이었다.[50] 로모노소프 도자기는 서유럽에서도 인정받는 명품으로 유명하다.[51] 철도업은 초기에는 외자가 중심이 된 민간 사업이었으나, 점차 관민 합작 사업으로 변화했다. 다만, 철도에 대한 국가의 철도 건설 주문과 대금 지급은 곧잘 철도 기업들에 대한 무상 보조금으로 변해버렸다. 철도업 자체의 수익성은 컸으나, 국가적 필요를 위해 수익성이 크지 않아도 국가가 강제적으로 철도 건설을 요구한 노선이 많았던 것이다. 결국 러시아의 철도업은 국가의 보호와 강력한 개입을 받는 산업이 되었다.[52] 러시아 전체 자본 중에서 14%만 공업에 투입되었던 반면, 철도 운송에는 60% 이상이 투입되었다.[53] 러시아 전통 거리 단위. 통칭 러시아 마일이다. 1.0668km. 1 베르스타 = 500 샤젠[54] 이 중에서 6,000 베르스타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였다.[55] 19세기 말에는 총 화물의 70% 이상을 철도로 운송했다.[56] 이에 대해서는 레닌이 쓴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Развитие капитализма в России)'을 참고할 것[57]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소련 학자들에게 차르 체제는 후진적이고 실패한 구체제였고, 반공주의적 서방 학자들에게 차르 체제는 소련 체제의 모체였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가 같은 주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58] 레닌의 주장은 대부분 지방의회인 젬스트보 통계를 기반으로 한다[59] 주로 슬라브주의 및 인민주의 성향의 인텔리겐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