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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耆老所조선 시대에,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 기사(耆社)라고도 한다.
2. 연혁
태조 3년(1394)에 설치되었다. 이후 한동안 친목기구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영조 41년(1765)에 독립 관서가 되었고, 이때부터 임금도 참여하였다.초기 명칭은 기영회(耆英會)와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였으나 세종 10년(1428년)에 기로소 대신들이 명칭에 대해 항의하여 치사기로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기로소는 치사기로소를 줄인 명칭이다.
3. 기록
- 최초의 삼세입사(三世入社)는 동래 정씨의 정유길, 정창연, 정광성(鄭廣成) 3대이다. 또한 정광성의 장남 정태화도 기사에 들음으로써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사세입사(四世入社)도 이루었다. 정유길의 조부 정광필도 기사에 들었는데, 만약 정유길의 부친 정복겸(鄭福謙)도 기사에 들었다면 육세입사(六世入社)도 이룰 수 있었다. 정태화의 사촌 정지화(鄭知和)[1]와 그 아들 정재희(鄭載禧)도 기사에 들어 별도로 부자입사(父子入社)를 이루었다. 여담이지만 이 집안은 관록도 대단하여 정광필이 영의정, 정유길이 좌의정, 정창연이 좌의정, 정광성이 형조판서, 정태화가 영의정, 정지화가 좌의정, 정재희가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정승, 판서가 수두룩하다. 69세로 사망하여 아깝게 기사에 들지 못한 정태화의 동생 정치화도 좌의정을 지냈다.
- 강릉 김씨는 비록 삼세입사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촌형제까지 포함하여 4형제입사에 3부자입사라는 기록을 세웠다. 즉 김시환(金始煥), 김시혁(金始㷜), 김시형(金始炯) 3형제에 더해 사촌인 김시영(金始煐)까지 4형제가 기사에 들었고, 이 중 김시환-김상익(金尙翼), 김시혁-김상철, 김시영-김상집(金尙集) 3부자가 기사에 들었다. 형제들 중 김시현(金始炫)은 기사에 들지 못했지만 그 아들 김상중(金尙重)이 기사에 들어 강릉 김씨는 2대에 걸쳐 8명이 기사에 들었다.
4. 여담
- 대전회통에서는 임금도 참여한다는 점을 반영해 관부서열 1위로 명시하기도 했다.
- 극초창기에는 70세 미만인 자나 문관 출신이 아닌 자도 기로소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으나 체계가 잡힌 이후에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문관들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문음(음서의 조선식 명칭) 출신은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70세 이상의 정2품 문관이 없는 경우 예외적으로 70세 이상의 종2품 문관을 1~2명을 기로소에 가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1] 정태화의 부친 정광성의 동생 정광경의 아들이다.[2] 조형의 4남.[3] 조형의 3남 조상개의 아들.[4] 조형의 장남 조상변의 장남 조기수의 아들.[5] 조형의 차남 조상정의 장남 조대수의 아들.[6] 조돈의 동생 조엄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