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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6:18

이해룡

<colbgcolor=#29176e><colcolor=#ffffff> 대한제국 고종의 손자
이해룡 | 李海龍
파일:대한제국 황사손 의친왕 9남 이충길.png
2005년 영친왕의 제사를 지내려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모습
출생 1938년 2월 6일
경기도 경성부 혜화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사망 2014년 12월 13일 (향년 76세)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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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전주 이씨
갑(鉀) → 해룡(海龍)
아명 충길(忠吉)
정강재(正康齋)#
부모 아버지 의친왕
적모 의친왕비 김씨
생모 함씨, 함개봉(咸開鳳)
형제자매 이복형제: 이건, 이우, 이해진[1],
이해직[2], 이수길[3], 이곤[4], 이해청[5],
이경길[6], 이석, 이해선[7], 이해준[8]
이복남매: 이해완[9], 이해원[10], 이해춘[11],
이해숙[12], 이해경[13], 이희자[14],
이해란[15], 이해련[16], 이창희[17]
배우자 이경숙[18]
자녀
2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이원
차남- 이정
장녀- 이은영#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19] (학사)#
종교 천주교(세례명: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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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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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9남. 영친왕의 아들 이구양자로 (명목상) 입적한[20] 이원 황사손의 친아버지이다.[21][22]

이해룡(李海龍)은 호적명이고#, 황실 족보 상 이름은 이갑(李鉀), 아명은 이충길(李忠吉)이다. 대외적으로는 이충길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1938년 2월 6일에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앨범 회사에서 전무이사로 근무했다.# 1980년대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정착했고 이후 무역업에 종사했다.#

2000년대 들어 황실 관련 활동을 많이 하면서 인터뷰 및 방송 출연도 했다.# 2003년에 황실 민간 단체인 ‘우리황실사랑회’ 고문 직을 맡았고, 2005년에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결정에 따라 큰아들 이원을 사촌형 이구의 호적상 양자로 입적하는데에 동의했다.[23] 또한 이구 사망때 아들인 이원, 장조카인 이준, 동생인 이석과 함께 상주를 맡았고 2006년에는 ‘대한제국 의친왕 숭모회’를 만들었다. 매년 8월 15일(의친왕의 기일)에 의친왕제향을 지낼 때 초헌관으로 봉무했고, 다른 가족들을 모아 제향에 오가게 했다. 2010년부터는 여러 시민들과 함께 고모덕혜옹주의 추모제향을 매년 지냈다.[24]# 의친왕 기신제향은 장조카이자 의친왕가 종손 이준이 의친왕기념사업회를 통해서 모시고 있다.

2014년 12월 13일에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76세.

3. 여담



[1] 황실명 이방.[2] 황실명 이창.[3] 황실명 이주.[4] 의친왕 가문을 잇게 되며 그의 아들 이준이 의친왕의 종손이 되어 가문을 잇는다[5] 황실명 이광.[6] 황실명 이현.[7] 황실명 이환.[8] 황실명 이정.[9] 황실명 이영.[10] 황실명 이진.[11] 황실명 이찬.[12] 황실명 이숙.[13] 황실명 이공.[14] 황실명 이장.[15] 황실명 이용.[16] 황실명 이현.[17] 황실명 이민.[18] 1939 ~ 2018 #[19] 현 영어대학 ELLT학과[20] 현행 민법 상 사후 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21] 대한제국 황실이 존속했었다면 ‘대원왕(大院王)’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종황제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손자 순종황제 시기에 대원왕으로 추봉받았다.[22] 다만,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고 이어졌다면, 이해룡이 대원왕이 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순종의 후계자가 영친왕이 아니라 출생 서열대로 영친왕의 형인 의친왕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만약 영친왕이 후계자가 되었더라도 대한제국이 독립을 유지하는 상황이라면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과 결혼할 가능성은 낮다는 점, 그렇게 되면, 이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23] 호적상 양자일 뿐이지 법적(주민등록상)인 양자로 들인 것은 아니다. 또한 양부나 양자 중 한쪽의 사망 후 입양하는 건 불법이기 때문에 호적상으로만 그런 듯.[24] 그 이전에 우리황실사랑회 등 황실 민간 단체에서 전주 이씨 종친회와 남양주시에 제향을 지낼 것을 건의했으나, 전자는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후자 측에서는 관할 밖의 일이란 이유로 이뤄지지 못했다. 덕혜옹주 제향을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이갑 황손과 우리황실사랑회에서 제향을 지내다가 2014년 4월 제향부터 전주 이씨 종친회에 제향 업무를 이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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